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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선교부

거창 장팔리 교회

거창 장팔리 교회 1965, 11월-1966. 4월

장팔리 교회는 경남 거창군 거창읍 외곽 장팔리 마을에 있다. 마을이 읍내에서 거리가 긴 8리라고 해서 마을 이름을 장팔리라고 지었다고 한다. 안식년으로 미국에 들어가 계신 매카피 선교사님은 이 겨울 나에게 거창에 내려가서 장팔리 교회를 돌보아 달라고 부탁해 왔다. 나는 새로운 지역에서 주님을 섬기는 경험을 하고 싶어서 쾌히 받아드렸다. 장팔리 교회는 1961년 매카피 선교사에 의하여 개척되었다. 그 분이 거창 산골짜기에 오게 된 것은 미국에서 유학을 하던 전영찬 이란 분이 미국의 모임과 여러 독립교회로 부터 후원 줄을 가지고 와서 거창고등학교를 세우고 새 건물을 짓게 되었다. 그때 미국 교회에서는 매카피 선교사가 건축 공사 감리사로 임명하여 1960년 한국에 나오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그분은 한국 선교사로서의 길을 가게 되었다.

 

 

매카피는 거창읍 가지리에 흙벽돌 이층집을 짓고 양과 저지 젖소 몇 마리를 키우고 있었다. 이때 데리고 있던 몇몇 한국형제들을 내세워서 긴 제방 둑이 있는 농촌 마을 장팔리라는 마을에 교회를 개척하였다. 처음에 학교와 관계있는 선교사가 교회를 시작하자 선생님들과 학생들이 많이 나오자 제방 둑이 있는 하천부지를 사서 교회당을 지었다. 외국 사람이 땅을 살 수 없어서 가정부이던 김흥자 이름으로 샀는데, 수십 년이 지난 어느 날 김흥자가 나타나 자기 이름으로 된 땅을 챙기는 일이 생겼다. 교회는 오랫동안 목회자 없이 버려두고 관리하지 않다가 안영수 형제 부부가 살고 있었다. 교회는 그동안 산 땅과 거창읍 부지인 하천부지 얼마를 마당으로 사용해 왔는데 어느날 거창읍에서 하천부지를 정리하는 일로 교회당 터 일부분이 김흥자 이름으로 되어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매카피 선교사는 외국인이어서 그 이름으로 땅을 살 수 없어서 가정부로 데리고 있던 김흥자가 이름을 빌려주어서 하천부지를 사서 교회당을 지었는데 수십년이 지나 이제와서 자기 땅이라고 챙기고 있었다. 김홍자 자매도 미국에서 살 만큼 살 텐데, 시골 외적 진 교회당 터 하천부지가 돈이 몇 푼이나 된다고, 더욱이 자기 돈으로 산 것도 아닌데  차라리 교회에 기증하면 그 고마움과 이름이 그 교회에 길이 남을 텐데.

 

 

매카피는 전영찬 교장과 뜻이 맞지 않아서 거창 목장을 정리하고, 경기도 평택군(시) 진위면 사후동 골짜기로 옮겨 오게 되었다. 매카피가 그곳에 있던 시절에는 학교 교사들과 학생들이 많이 나와서 좋았던 모양이었는데, 후게자 없이 매카피 선교사가 떠나자 장팔리 교회는 서서히 약하여져서 내가 갔을 때는 중고학생들과 청년들이 겨우 10여 명과 주일 학생들이 15여 명이 남아 있었다. 덩그렇게 큰 건물에 비해 식구는 너무 적었다. 그해 겨울은 나에게는 몹시 추웠다. 예배당에 붙은 방은 연탄불이 잘 들지를 않았고 연탄아궁이가 좋지를 않아서 연탄이 자주 꺼져서 너무 힘들었다. 선교부에서 기본 생활비를 보내주기로 해서 처음에는 한 집에 식사를 맡기고, 잠은 교회당에서 자고 밥만 먹으러 다녔다.

 

 

돌 밥

매끼 먹는 밥에는 놀랍게도 자잘한 모래알 같은 돌이 있어서 절대로 꼭꼭 씹어서 먹으면 안 되었다. 가능한 물이나 국에 말아서 슬렁슬렁 씹어 먹어야만 했다. 처음 며칠은 밥을 먹는 것이 두려웠다. 그래서 주인아주머니에게 쌀에 웬 돌이 이렇게 많으냐고 물었더니 여기는 돌이 많은 바닥에서 타작하므로 그렇다고 한다. 밥을 국이나 물에 말아 먹으라고 권해 준다. 돌이 전혀 없는 마당이 없다고 했다. 그 당시는 아직 자동 탈곡기가 나오지 않던 때라 이 동리 쌀에는 정말 돌이 많았다. 밥을 물이나 국에 말아서 저어가면서 건져 먹으면 바닥에 영락없이 잔잔한 돌들이 가라앉곤 하였다. 나는 한 달이 안 되어서 하숙을 걷어치우고 예배당 안에서 자치를 하기 시작했다. 날씨가 영하로 떨어지면서 겉 바람은 세고 연탄부엌은 불이 들지 않아서 지내기가 어려웠다. 잠은 새우잠을 자야만 하는데 새벽에는 오금이 턱에 닿곤 하였다.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앉는 방구들은 얼음장같이 찬데 방석은 몇 개 되지 않아서 자매들에게 주고 나와 청년 형제들은 늘 얼음장 구들에 앉아야만 했다. 시내에서 오는 자매들은 내려 부는 바람을 안고 올라오느라 추울 텐데 몸을 녹일 곳도 없이 예배를 드리곤 해야만 했다. 그래도 열심히 나와 주었던 그 씩씩한 얼굴들이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지 모두 보고 싶은 마음이다. 

 

 

12월에 들어서면서 나는 매카피 선교사에게 우리 사정을 알리고 연탄난로와 방석을 살 수 있도록 기도하여 주기를 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져 오는 데 미국에서 수표가 왔다. 거창에서 방석과 마음에 드는 난로를 살 수가 없어서 대구로 나가서 사 왔다. 이제 포근하고 넉넉한 방석과 난로의 훈훈함은 우리의 모임을 더 활발하게 해주었고, 그리고 따뜻한 성탄과 새해를 맞이할 수 있었다. 추웠던 그 겨울 주님은 우리를 그렇게 견디게 하시며 축복하여 주셨다. 장팔리 본 동리에는 믿는 어른은 한 사람도 없고 중고학생들이 5~6명이 나올 뿐이었다. 장팔리에서 살았던 한겨울은 몹시 추웠다는 기억을 가지고 있다. 해가 바뀌어 1966년이 되자 박 자매로부터 아버지께서 우리들의 결혼을 허락하셨다는 기쁜 소식을 보내왔다. 4월이 되면서 나는 장팔리 교회를 돌볼 일꾼을 찾고 있었다. 마침 선산 황산에서 수고하고 있는 박태수 형과 최경희 부부를 오시도록 청해서 사역하시도록 해놓고, 나는 결혼을 하고 주님이 인도하시는 새로운 길을 가려고 사후동으로 돌아갔다.

 

안영배 형제

1964년 여름 선산에서 온 박영자 자매와 함께 장팔리 교회 여름 성경 학교를 하느라 잠시 머물고 있었다. 그때는 박옥수 형제가 사역하고 있었다. 어느 하루 시내 전도를 나갔다가 길에서 만난 중학생에게 전도지를 주면서 예수님을 믿도록 전도를 하였는데, 그는 거창중학교 2학년 학생이었다. 그 주일에 그 학생이 장팔리 교회로 나왔는데, 그 이름이 안영배이다. 크리스마스가 지나는 12월 27일 그는 예수님을 자기의 구주로 영접하였다. 그 뒤 삼 사관학교를 나와 대위로 예편한 뒤 노량진 모임에 적을 두기도 했다. 한국기독교 선교부 남사중학교 교장의 따님인 정양숙 자매와 결혼하여 서울에서 예비군 중대장을 하면서 성결교 신학교를 마친다.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다. 침례신학교 대학원을 나온 뒤 침례교 목사가 되었고, 구로 침례교회를 목회하면서 롯데호텔 경비과장 겸 예비군 중대장을 하였다. 여러 해 구로에서 목회하다가 미국으로 와서 지금까지 미 남침례교 목회자의 길을 걷고 있다. 그는 미국에서 험난한 목회자의 길을 걸어왔지만, 하나님은 그 자녀들을 축복하여 주셔서 믿는 자녀들로 훌륭하게 자라게 하셨다. 큰아들은 증권금융전문가, 둘째는 응급전문의, 셋째 딸은 치과의사가 되었는데, 모두 해외 선교에 열심을 내는 아름다운 가족이다. 내가 거창에서 잠시 머물고 있었던 그때 주님은 당신이 앞으로 쓰실 귀한 종을 불러내셨다. 그가 주님을 섬기는 일생을 지켜보는 것은, 나그네로 사는 내 인생의 보람이요 즐거움이다. 이것이 주님이 내게 주신 사명이요 은혜였다.

 

 

김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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