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산 기독교 병원
병원 사업은 선교부로서는 아주 가치 있는 사업이었다. 선교부 수입과 아울러 지역사회봉사와 복음 선교에 좋은 영향이 되었다. 매카피 선교사에게 오산 기독교 병원은 계획적이 아니라 우연에서이다. 1966년 오산에 나이 많은 의사가 오랫동안 의원을 운영했는데 나이가 많아지면서 손도 떨리고 하여 의원을 계속 운영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그래서 오산지역의 의료발전을 위하여 매카피 선교사에게 그분 이름으로 병원을 설립하여 달라고 청하였다. 그래서 매카피 선교사가 오산 기독병원 허가를 받아서 병원 사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때는 오산지역에는 종합병원 성격을 가진 병원이 없었다. 선교부 병원은 그저 기본만 갖춘 종합병원이지만 지역사회 주민들은 크게 환영하고 있었다. 매카피 선교사의 노력으로 미국에서 의료 장비와 약품들이 많이 들어왔다. 자체 의료사업에 경험이 있는 경영자도 자체 의료진도 없는데 자본만 투자하고 시작한 의료사업이었다. 병원을 시작하면서 준비된 자체 의료인력도 없이 거기다가 경영자도 의료사업 경험이 전혀 없는 분들로 문을 연 병원은 여러 가지 시행착오를 겪는 어려움도 있었다. 먼저는 기독교 병원이면서 오산지역의 기성기독교를 끌어안지 못하여 지지와 호응을 끌어내지 못하였다. 사업경영의 미숙과 배타적인 신앙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때 오산지역의 기성교회는 병원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이 있었는데 이런 점들은 병원운영에 도움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대개 기독교 병원에는 병원 목회자(Chaplain)가 있어서 종교계와 지역사회의 복지사업 등의 문제들을 풀어나가는데 그러지 못했다.
한 번은 입원환자가 죽는 의료사고가 생겼다. 유족은 병원과 적당한 타협이 이루어지지 않자, 시체를 병원 문 앞에 놓고 시위를 벌였다. 이 사건이 방송과 신문에 나고 오산지역에 큰 화제가 되었다. 병원은 보건사회부로부터 응급실 운영 외에는 한 달 영업정지를 당하게 되어서 경제적 손실과 크게 망신을 당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에 문제가 있었던 것 같다. 사람은 죽었고, 유족이 원하는 것은 돈이었다. 처음부터 돈이 들더라도 변호사에게 위임하여 처리하게 했더라면 병원의 체면은 지키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남사중학교가 시작되면서 매카피 선교사는 나에게 학교 교목(Chaplin)을 하라고 궈한 적이 있다. 학교 성경 교사의 초청을 거절하고 율북리 교회를 개척하고 있었는데, 오산에 병원을 시작하면서 이번엔 병원 Chaplain(병원목회자)을 해 달라고 청했다. 나는 또 사양했다. 매카피는 필요한 곳에 쓸 사람을 교육기관에 보내 키우는 것을 모르는 분이었다. 아무 일이나 시키면 일을 되는 줄 아는 분이었다. 그래서 그분이 하는 일에는 프로는 없고 아마추어들만 있어서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리고 그분은 제값을 주고 고급인력을 쓰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학교, 병원, 등은 하나의 조직체인데. 그분에게는 조직체는 없다. 그저 주먹구구식으로 그때그때 즉흥적으로 일하는 분이었다. 내가 그분이 부탁하는 일에 거절하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나 자신이 자격자가 아니라는 것과 그리고 그분과 나와의 관계이다. 다른 직원은 삯을 주고 쓰면서, 나는 삯을 주지 않고 그냥 일을 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분이 하는 세속 일에 거리를 두었다.
그러나 선교 차원에서 우리 선교부의 기독교 병원이 오산에 있다는 것이 전도하는 우리에게는 좋은 영향이 되었다. 환자들을 병원에 데리고 가서 무료로 진료를 받게 해 주고 처방을 받아서 주사 같은 것은 사서 내가 직접 놔주곤 했다. 오산지역에 종합병원이 없었던 그때 우리 기독교 병원은 간접전도에 큰 힘이 되었다. 형제교회가 잘 알려지지 않아서 이단시 취급을 받고 있던 그 시대에 병원 운영자들이 기독교계와 좀 긍정적인 관계를 맺었더라면 병원 사업도 교회 확장에도 더 좋은 환경이 되었을 것이다. 결국, 그 병원은 선교 목적의 큰 뜻을 펴보지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로 넘어가게 되었다. 이 병원을 위해서 헌금한 수많은 미국, 캐나다 성도들의 귀한 헌금은 한국 모임의 발전과 복지에 그리 큰 도움을 주지 못한 채 사라지고 말았다.
사후동 요양소
사후동 골짜기에는 세 개의 건물이 지어져서 학생들 기숙사도 해결되었다. 밑으로 있는 한 채는 매카피 선교사는 병들어 고생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무료 요양소를 차렸다. 가깝고 먼 곳으로부터 환자들이 오게 되었다. 그 당시 모두 험한 음식을 먹고 사는 때라 위장병 환자들이 많았다. 특히 그 가운데는 위궤양 환자들이 많았는데 그때 미국에서 겔루실(Gelucill)이라는 파란 병에든 흰색의 위궤양약이 많이 들어와서 효과가 좋았다. 이 약 소문이 나서 이것을 한 병 얻으려고 나에게도 여러 사람이 부탁하기도 했다. 그 가운데는 폐병 환자도 있고 여러 가지 환자들이 몰려왔었다. 먼저 오산 기독교 병원에 데려가서 진료를 받고 의사 처방에 따라 요양을 시켰다. 요양소의 생활 가운데는 재미있는 일들이 많이 있었다. 매카피 선교사는 가끔 자기 나름대로 처방하기도 하는데, 예를 들면 한 위궤양 환자에게 밥을 먹지 못하게 하고 우유에 시리얼을 타서 먹게 하니 평생 우유나 시리얼을 먹어 본 적이 없고, 더욱이 짜지도 맵지도 않은 아무 맛이 없는 옥수수로 된 시리얼을 먹고살라니 기가 차서 생 배를 곯는 사람들이 있었다. 견디지 못하여 떠나기도 했지만, 그 가운데는 그런 생활을 통해서 좋아진 사람들도 있었고, 몰래 과일이나 술을 사다 먹고 썩어지게 욕먹은 사람들도 있었다. 한 번은 수용된 사람들에게 내가 전도를 하니, 나보고 하소연을 한다. 평생 김치, 된장만 먹던 사람에게 흰 물에 밀기울 같은 것을 타서 먹으라니 이걸 먹고 어떻게 사느냐고 죽이라도 먹을 수 있도록 말을 좀 해달라고 사정을 하기도 했다. 이것이 바로 매카피 선교사가 한국 사람의 음식문화를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었다. 차라리 죽을 먹게 했더라면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누군가 조언을 했겠지만, 매카피가 듣지 않았으리라고 생각한다.
죽음을 기다리는 위암 말기 한자
내가 강릉에서 개척하고 있을 때 어느 초여름에 사후동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때 매카피 선교사는 나에게 며칠 전에 들어온 어린 여자 환자가 있는데 전도를 해 주도록 부탁을 했다. 그는 대학 병원에서 위암 말기 환자로 입원해 있다가 가망이 없다고 내보낸 환자라고 했다. 그 방에 들어가 보니 예쁘게 생긴 처녀가 죽음을 앞에 높고 비통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 어머니가 슬픔에 찬 얼굴로 딸을 돌보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한순희였다. 나는 그에게 죽음은 우리 인생에 있어서 마지막이 아니라, 영원하고 참 평화와 행복이 있는 천국으로 건너가는 다리라고 위로해 주면서 전도를 시작했다. 두 시간 가까이 나는 죄에서부터 십자가의 구속까지를 전도한 뒤 그 처녀는 예수님을 자기 마음에 구주로 모셔드리겠다고 했고, 내 등 뒤에서 딸에게 하는 전도를 듣고 있던 그녀의 어머니가 갑자기, 예수님이 그처럼 우리를 사랑해 주시고 우리 죄를 십자가에서 다 용서해 주셨다니 제가 이제 예수님을 믿겠습니다.라고 말하지 않는가! 그날 성령님께서 두 모녀를 축복해 주셨다. 나는 한순희에게 병이 낫는 것이 큰 문제가 아니라 구원을 받고 영생을 얻는 것이 더 급한 문제라고 했더니, 그녀는 이제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다고 말하여서, 모녀에게 구원의 은혜를 주신 주님께 감사 기도를 하게 했다. 그리고 나는 주님께서 한 자매에게 건강을 회복시켜 주시기를 구하는 간절한 기도를 드리고 헤어졌다.
일 년이 지나 사후동수양회가 있어서 가게 되었다. 예쁘게 생긴 자매가 길에서 나를 보더니 반가운 인사를 한다. 나는 처음 보는 자매라 기억이 잘 나지 않아서 어느 교회에서 오셨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웃으면서 작년에 제가 위암 말기 환자로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을 때 나에게 전도해 주셔서 구원도 받고 이렇게 병도 나아서 요양소에서 봉사하는 일을 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그때야, 기억이 나서 나는 깜짝 놀랐다. 지금쯤은 천국에 가 있어야 할 그 자매가 이렇게 멀쩡할 수가 있는지 나 자신도 믿어지지 않았다. 그날 나 자신이 그의 건강회복을 위하여 기도하고도 그렇게 믿지 못한 잘못을 깊이 뉘우쳤다. 이것은 놀라운 기적이었다. 일생에 처음 경험하는 주님의 놀라운 역사였다.
강릉에서 흑사병을 앓은 20대 중반 청년을 요양소에 보냈더니 그가 거기서 건강도 좋아졌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도 믿고 내려와 엄마와 동생이 함께 예수님을 믿게 되었으니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또 사천 진리에 사시며 위장병으로 고생하는 50대 후반 남자분을 보냈더니 요양소에서 봉사하는 분들의 친절과 사랑에 너무 감동되어서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또 위장병이 아니라 위암 말기라고 밝혀지고 치료에 크게 효과가 없다는 것을 알고는 고향에 내려와서 사시다가 돌아가셨다. 그분은 돌아가시기 전에 부인에게 예수님을 믿으라는 유언과 자기가 죽으면 장례를 교회에서 해 주도록 부탁하였는데, 얼마나 아름다운 간증인가! 그 모친은 25년 동안이나 믿음으로 진리교회에서 성실하게 신앙생활 하다가 주님께로 가셨다.
요양소는 아무 구체적인 것이 없이 그저 매카피 선교사 한 사람의 생각에서 나와 운영하는 것이다 보니, 근무하는 똑똑한 간호사 하나 없이 그저 아마추어도 안 되는 몇몇 자매들에 의해서 관리가 되긴 했어도, 요양소 그 자체는 한국 사람들을 사랑하는 주님의 표현이었다. 좀 더 체계적이고 조직적이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은 있지만, 그분은 그 이상은 할 줄 모르는 분이었고, 자기 좋은 대로 편하게 했다. 주님은 그곳에서 수고하는 여러 형제자매의 손길들을 통하여 주님의 아름다운 사랑을 나타내 주셨다. 이 요양소를 통해서 천하보다 더 귀한 영혼들이 구원을 받았으니 매카피 선교사와 함께한 봉사자들의 사역은 한국 형제교회 역사의 한 장에 남을 귀하고 귀한 사역이었다.
그때 한국에 와서 선교한다고 한 동안을 살던 외국 선교사들 가운데 한국 사람들의 복지와 영혼 구원에 관심을 가지고 직접 투자한 분은 매카피 선교사 한 분 외에 누가 또 있는지 잘 모르겠다. 오산 기독교 병원과 사후동 요양소 그리고 무의촌 진료 등 의료선교의 필요성이 있었지만, 의사나 간호사는 한 사람도 온 적이 없었다. 나중에 매카피의 딸 린다가 간호 보조사 훈련을 받고 와서 요양소 일을 한동안 돕다가 캐나다에서 온 미첼 형제와 결혼하면서 떠났다. 여기서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이런 의료 사역을 하면서도 병원 경영자나 병원 목회자, 의사 그리고 간호사, 등 현지 사람을 전문인으로 키우는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분들이었다. 그저 저절로 된 사람만 기대하는 것 같았다. 이런 면에서 다른 교파 선교사들과 크게 비교되는 일이다. 초기 감리교와 장로교 한국 선교사들은 한국의 지도자와 인재를 키우는 일에 많은 것을 투자한 데 비하면, 형제교회는 그러한 일에는 근본적으로 무관심하며, 그저 영적인 일에만 치중하는 편이다. 그분들은 한국의 교육과 사회의 개혁을 위하여 많은 투자와 희생을 치렀다.
김장환목사의 초청
내가 선교 학생들을 데리고 수원 기독교 병원에 전도하러 다녔고, 수원에서 개척할 때에는 화요일에 혼자서 병원 전도를 다녔다. 그때 김장환 목사가 나를 불러서 장학금을 대어 줄 테니 신학교를 가도록 권한 적이 있다. 나는 ㄴ목사님이 그때 주님이 2000년 안에 다시 오실 것이라는 종말론적 믿음 때문에, 그리고 신학교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 때문에 사양한 적이 있다. 그분은 여러 한국의 젊은이들을 교육기관에 보내 인재들로 키워내신 훌륭한 분이시다. 세월이 많이 흐른뒤 나는 김장환 목사님이 교장으로 있는 수도침례 신학교를 졸업하게 된다.
무의촌 진료
그때 한국은 가난하기도 하였고, 의사도 부족하여 모든 국민이 의료혜택을 고루 받지 못하고 있을 때여서 무의촌이 많았다. 이때 매카피 선교사는 쑥 고개(송탄)에 있는 미 공군 부대에 근무하는 의사들을 불러와서 남사면 일대에 무의촌 진료를 몇 번 한 적이 있다. 매카피는 자신이 가진 것은 없지만, 주변에 있는 자원들을 들어서 한국 사람들에게 혜택을 주고자 했다. 그것은 곧 한국 사람들을 위한 복지, 그리고 나아가서는 간접선교였다. 그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선교사였다. 진료를 기다리는 분들에게 형제자매들이 개인전도 하는 일을 하였다. 남사면 일대에 복음이 전해지면서 이러한 무의촌 진료는 많은 사람에게 기독교에 대한 좋은 영향을 끼쳤다.
김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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