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사후동 전국 수양 회 1965. 7. 30-8.2
사후동선교부와 사후동 교회 개척 2년 만에 전국 수양 회를 할 만큼 빠르게 발전하였다. 그 당시 전국에 형제교회의 숫자는 열 손가락 안에 있을 때였다. 이때 나는 매카피 선교사에게 전국 수양 회를 사후동에서 하자고 제안하여 모두가 좋게 생각하여 여름 수양회를 하도록 하였다. 이때로부터 사후동을 중심으로 해마다 전국 수양 회를 하기 시작했다. 나는 수양 회를 조직하고 운영해 본 경험은 없었지만 연구하면서 준비하였다. 그리고 사후동 교회의 발전을 위하여 설교하는 일과 전도하는 일로 마음을 많이 쓰게 되었다. 이러한 활동들은 나의 영적 성장에 큰 활력소가 되었으며 나 자신을 주님께 드려 섬긴다는 보람과 큰 기쁨이었다. 사후동 교회를 중심으로 모인 첫 전국 수양회였다. 아직 함께 모여 교제하고 활동하는 일에 익숙하지 않았던 모임 식구들이 한자리에서 듣기만 하던 얼굴들을 만나서 기뻐하는 모습들은 아름답기만 했다. 저녁에는 동리 분들을 초청하여 복음 집회로 모이니 자리가 모자랐다. 전기가 아직 들어오지 않았던 그때 몇 개의 남포등불을 밝힌 저녁 집회는 모기와 나방들의 번거로움도 있었지만 모임에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선풍기도 없는 낯은 덥기는 해도 넓은 마당에 큰 천막을 치고 모여서 그런대로 지낼만했다. 그러나 예배당 안은 한증막 같아서 처음부터 끝까지 부채질이 쉬지 않고 있었다. 수양회는 사진에서 보는 것 같이 120여 명이지만 모임 초창기의 선교사들과 사역자들이 거의 다 모인 역사적인 사진이다. 나는 이 한 장의 기념사진을 보면서 달려갈 길을 다 마치시고 주의 품에서 쉬고 계시는 여러 형제자매를 기억하며, 아직도 주님의 부르심을 받지 못하고 남아 있는 몇몇 형제들이 노을 지는 석양을 향해 여전히 자기 길을 달려가고 있는 분들의 모습들을 보면서 지난 60여 년간을 되돌아보기도 한다.
첫 수양회에는 매카피 선교사는 안식년으로 미국에 들어가 계시었고, 부평 강태훈 형님도 미국에 엠마오 성경학교에 공부하러 가시어서 함께 하지 못했다.
두 번째 사후동 수양 회 1967. 7. 28-8.2
이때 나는 결혼하여 율북리(수부)에서 교회를 개척한 지 일 년 두 달이 지나고 있었고, 구원받은 형제자매들이 생겨서 만찬 예배도 드리고 있을 때였다. 올해도 우리는 준비하여 사후동수양회를 시작하였는데 첫해보다는 더 많은 식구가 왔다. 시설들은 크게 달라진 것은 없지만 그래도 조금은 나아졌다. 특히 이번에는 율북리 교회에서 구원받은 형제자매들이 참석하게 되어서 그들의 영적 성장에 큰 도움이 되었다. 특히 나의 모 교회인 부평교회에서 오신 식구들은 나의 사역을 통해서 생겨난 사후동 주위의 형제자매들을 만나 교제하면서 주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쓰시고 계시는 것에 대해서 자랑스럽다고 하시면서 우리를 격려하여 주셨다. 첫 수양회 때 함께 하지 못했던 매카피 선교사도 함께하게 되어서 반가웠다. 매카피 선교사는 내년에 수양관을 지을 계획을 하고 있다면서 기도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이제 이 산골에 우리들의 수양관이 지어지기를 바라는 마음들로 기도하면서 수양회를 마쳤다.
나일론 바지와 상한 소고기
이때 우리는 생활이 몹시 어려웠는데 더운 여름임에도 시원한 여름 바지 하나가 없어서 두꺼운 겨울 모직 바지를 입고 수양 회를 인도하느라 몹시 힘들었다. 그때는 아직 반바지나 슬리퍼 등을 입고 신는 때가 아니어서 더위는 몸으로 때워야만 했다. 수양회를 마치고 나에게 수고했다고 봉투 하나를 주었다. 그 속에는 600원이 들어 있었는데 우리가 가진 전부였다. 주님께서 돌아갈 차비도 없는 우리의 빈 주머니를 이렇게 채워주시고 계셨다. 율북리 식구들 차비 걱정이 되어서 물어보았더니 모두 걱정하지 말라고 하면서, 오히려 나보고 차비는 있느냐고 물어본다. 모두 내년에 다시 만나기로 하고 우리는 서정리로 왔는데 마침 장날이었다. 나는 가장 싼 나일론 바지 하나를 사서 갈아입었다. 우선 촉감이라도 가볍고 시원하여서 살 것 같았다. 이때는 한국이 석유산업이 발전하면서 나일론 제품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였는데 땀이 배지 않고 좀 미끈거리기는 해도 나일론 양말, 티셔츠, 바지 등이 갖가지 모양과 색상으로 나오고 있어서 인기가 있었다. 자매는 오랜만에 소고기 한 근과 먹을거리를 좀 샀다. 버스 정류장에 가니 청북면 우리 쪽으로 가는 버스가 오늘은 안 다닌단다. 장날에 그것도 이 무더운 날씨에 차가 안 다닌다니까 한숨이 나왔다. 택시 같은 것은 비싸서 엄두도 못 내고 우리는 걸어가기로 했다. 무더운 오후 3시 12Km가 넘는 길을 더위와 싸우며 걸어서 집에 왔을 때는 옷은 땀으로 젖고 얼굴은 검붉게 변하였다. 그리고 놀라운 일은 사 온 소고기 한 근이 아주 엷게 푸른색을 띠면서 변해 가고 있었고 냄새도 나고 있었다. 자매는 너무 아까워서 얼른 삶았는데 먹을 만해서 다행이었다. 우리 생애에 있어서 가장 무덥고 힘든 하루였다.
1976년 사후동 수양 회
1968년부터 우리는 영동지방 사천진리와 강릉시 두 곳에 교회를 개척하고 있었다. 이제 진리와 강릉에서도 수양 회에 참석할만한 식구들이 생겨서 주님께 감사하는 마음이었다. 동해안에서 홀로 있던 우리 형제자매들이 모처럼 수양회에서 새로운 여러 형제자매와 어울리면서 교제의 세계가 넓어지고 있어서 모두 기뻐했다.
영양탕의 추억(1978 여름 수양 회)
수양 회가 끝나고 떠날 사람들은 어지간히 떠나고 얼마의 사람들이 남아 있었다. 그때 성남 김수철 형이 보신탕이라도 끓여서 수고한 사람들과 먹자고 하여서 부탁하여 큰 솥에 끓였다. 그리고 거기에 미처 떠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을 다 불러서 자리를 함께했는데, 농촌에서 온 자매들이 달라붙어 허겁지겁 먹는 모습을 보면서 시간이 있었으면 한두 마리 더 해서 먹였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였다.
김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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