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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여행/경상남도

진주(晉州)

진주 22.6, 2024

진주시는 대한민국 경상남도 중서부에 있는 인구 338,505의 도시이다. 진주는 임진왜란 때 김시민 장군의 영도 아래 3,800여 명의 군관민이 하나가 되어 3만여 명의 왜군의 침략을 격퇴한 진주성이 있는 곳이다. 그러나 10만의 대군의 2차 왜군의 침략에 성이 함락되면서 6만여 명의 군관민이 희생되는 아픈 역사를 간직한 곳이다. 그리고 왜장을 껴안고 남강에 투신하였다는 의기 논개의 설왕설래하는 설화가 있다.

 

진주성

진주시 남성동에서 본성동에 걸쳐 있는 둘레 1.7km의 석성(石城)으로 임진왜란 당시 가장 치열했던 전투 중 하나인 진주대첩의 현장이다. 진주시를 처음 찾는 사람들이 가장 먼저 들리는 곳이다. 진주성은 본래 외성과 내성으로 되어 있었는데 일제 강점기에 도시 개발로 외성을 헐어버려서 지금의 내성만 남았다. 성 남쪽은 남강, 그리고 북쪽은 연못이 있어서 해자(垓子) 역할을 하는 천혜의 요새였으나, 일제 강점기 때부터 도시 개발을 하면서 메워져 연못은 사라졌다. 성이 시내 중심부에 있어서 관광객들과 시민들이 오가기 쉽고 여러 가지 편리한 휴식처를 제공하고 있다. 진주성은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118호로 지정되었다.

 

 

김시민 장군(1554-1592)

김시민은 1578년(선조 11년) 무과에 급제하였다. 1591년 진주목 판관에 임명되어 임진왜란 발발 직후 사천, 고성, 진해에 주둔하는 왜군을 공격하여 무찌른 공로로 진주목사로 임명되었다. 경상도 남부에 출몰하고 있는 왜군을 의병장들과 긴밀히 협동하여 무찌르는데 혁혁한 공로를 세운다. 1592년 9월에는 진해의 왜장 평소태(平小泰)를 사로잡아 선조에게 보내자 그 공로로 경상우도 병마절도사가 되었다. 왜군의 침략을 대비하여 진주성을 수축하고 무기와 군사를 정비하여 방어 태세를 갖추었다.

 

임진왜란의 삼대 대첩

임진왜란은 무방비 상태에 있던 조선민족이 왜군에게 짓밟힌 큰 재앙이었다. 임진왜란 때 왜군을 크게 무찌른 삼대 대첩은 김시민의 진주대첩, 권율의 행주대첩, 이순신의 한산대첩이다.  

 

왜군의 1차 침공(10. 1592)

왜군은 곡창지대인 호남을 손에 넣으려고 그 길목에 있는 진주성으로 진격하였다. 김시민은 성 주위 모든 백성을 성안으로 들어오게 한 뒤 여자들에게 남자 옷을 입게 한다. 이렇게 모아진 군관민 3,800여 명의 병사로 10배에 가까운 3만 대군에 맞섰다. 왜군은 세 곳으로 진주성으로 진격하여 성을 포위하여 공격하였다. 곽재우, 최경회 등의 의병들도 일본군의 배후를 습격하는 협공으로 10월 5일부터 11일까지 엿새 동안 벌어진 치열한 격전 끝에 일본군을 퇴각시켰다. 조선군의 위대한 승리였다. 그러나 전쟁 마지막 날 애석하게도 김시민 장군은 일본군의 탄환을 맞아 쓰러지니 이때 그의 나이 38세였다. 그의 부장인 곤양군수 이광악이 김시민을 대신해 지휘하면서 남은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진주대첩은 왜군으로부터 진주성을 지켜낸 첫 전투였다. 김시민 휘하의 조선 관민의 필사 항전으로 일본의 정예 병력의 패배로 김시민은 조선군의 맹장으로서 그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히데요시는 이듬해 진주성은 꼭 함락시키라고 명령한다.

 

김시민장군의 전사

김시민 장군의 전사로 성안은 울음소리가 하늘에 닿았고 호남과 영남의 인사가 다 조상하고 눈물을 흘리며, 우리는 어찌할꼬?라고 탄식하였다. 1593년 김시민의 묘를 고향으로 이장하여 운구할 때 백성이 앞다투어 수레를 끌고 눈물을 흘리며 "우리 공이시여, 우리 공이시여! 우리 공이 없었으면 우리가 죽은 지 오랠 것이라며, 통곡했다고 한다.

▶1604년(선조 37년) 선무공신(宣武功臣) 2등을 내리고 상락군(上洛君)에 더해졌다. 1702년(숙종 35년)에는 명예 영의정에 임명되었고, 상락부원군에 더해지고, 충무공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왜군의 2차 침공(7.19-27, 1593(선조 26)

다음해 일본군은 10만의 대군으로 다시 진주성을 침공하여 왔다. 진주성은 일주일 동안 일본군을 상대로 버텨왔으나 끝끝내 함락되면서, 군관민 6만여 명이 희생당하였다. 상대적으로 일본군의 희생도 많아서 전력 소모가 컸다. 진주성이 함락되자 호남은 왜군의 발굽에 짓밟히게 된다. 

 

진주냉면과 진주비빔밥

예로부터 진주는 전국적으로 음식문화가 발달한 곳으로 이름나 있다. 아울러 진주는 풍류와 기생문화도 발달한 곳이기도 하다. 진주비빔밥은 전주비빔밥 못지않게 알려져 있으며, 조선 시대에 제일의 냉면은 진주냉면과 평양냉면으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우리 나그네들은 진주 냉면을 맛보고자 80년 전통을 이어오는 하연옥 냉면집을 찾아갔다. 재미있는 것은 하연옥 냉면집 위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진주냉면과 겨루기라도 하듯 평양냉면집이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이 주위에는 냉면집이 많은 동네다. 물냉면은 11,000원, 비빔냉면은 12,000원 그리고 육전은 24,000이다. 

 

하연옥 냉면의 맛

진주냉면을 대표하는 하연옥은 1년에 100만 명이 다녀가는 곳이다. ‘하연옥’의 육수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소 사골, 사태와 함께 홍합, 멸치, 밴댕이, 다시마, 바지락 등의 해물을 더해 2박 3일 동안 끓여 낸 육수에 400℃로 달군 무쇠를 넣어 멸치의 비린내를 없애고 보름 동안 저온 숙성 과정을 거쳐 맛을 북돋운다. 순 메밀과 고구마 전분을 물에 개어 뽑아 낸 면발 위에 무김치, 배, 외, 육전, 달걀, 실고추까지 고명으로 올라가고 육수를 부어 주면 물냉면 한 그릇이 완성된다. 매콤 달콤한 양념에 고명을 섞어 소고기 육전과 함께 먹으면 미묘한 맛에 중독을 일으키게 된다. 식사를 주문하면 뜨끈한 선짓국이 빈속을 달래 주는데 냉면집에서 먹는 별미 중의 별미이다. 

 

진주냉면의 참 맛

진주 냉면의 참 맛의 원형은 한양대학교 고(故) 이성우 교수가 쓴 『한국의 조리문화사』에서 자세히 볼 수 있다.  옛날부터 찡하다는 표현의 평양냉면이 유명했지만 이 평양냉면에 견줄 만한 진주냉면은 남국의 맛으로 유명했다며, 진주냉면의 명성을 전한다. 1800년 말에 진주목의 숙수(熟手,요리사) 한 분이 관영(官營)에서 나와 옥봉동 개울가에서 진주냉면을 뽑기 시작했다고 한다. 평양냉면이 메밀가루에 녹말을 섞어 만드는 반면에 진주냉면은 순전히 메밀만으로 만들고 돼지고기를 쓰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평양냉면은 육수를 소 사골과 양지육을 주재료로 하지만 진주냉면은 멸치, 바지락, 건홍합, 마른명태 등의 해산물에다 표고버섯을 넣어 만드는 것에 차이가 있다. 진주냉면은 쇠고기 장조림을 할 때 생기는 국물을 물과 섞어 메밀국수를 말아 넣고 밤과 배를 채로 썰어 넣은 뒤에 갓 구운 낸 두부 전을 얹어 먹는다. 진주냉면은 돼지고기나 쇠고기 그리고 얼음을 넣지 않은 점이 평양냉면과는 다르며, 반드시 해를 묵힌 간장으로 국물의 간을 맞추어야 그 맛이 담백하고 시원하다고 한다.

 김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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