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제 포로수용소 유적공원
6.25 한국 전쟁과 포로수용소
1950년 6월25일 새벽 4시, 북한은 소련제 T-34 240여 대를 앞세우고 남침을 하였다. 서울이 3일 만에 함락되고, 한 달반 만에 낙동강 방어선을 제외한 모든 곳이 북한군에게 점령당하고 말았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1950년 9월 15일, 맥아더 장군이 인천상륙작전을 전개하게 되고, 작전의 성공이 북으로 진격하는 계기가 되었지만 생각지도 못했던 중공군의 개입으로 다시 38도선을 중심으로 전쟁은 국지전이 아닌 국제전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9.15일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엄청나게 증가한 포로들을 전선에서 고립된 섬 지역으로 옮겨 놓는 방안으로 거제도포로수용소가 설치되었다.
◈ 거제 포로수용소 유적공원 돌아보기
넓고 긴 수용소 안은 많은 시설과 체험장들로 가득 차 있어서 무엇부터 어떻게 보아야 할지 어리둥절할 수 있다. 포로수용소 유적공원은 포로수용소 전체를 아우르며 그 안에 포로수용소 유적박물관이 따로 있다. 1999년에 세워진 유적박물관은 포로수용소 공원의 핵심으로 그때 포로들의 생활과 포로 송환 과정과 다양한 자료들은 그때 그들의 생활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한편 유적공원에는 흥남 철수 작전기념비, 포로생활관, 6.25 역사관, 탱크 전시관, 포로 설득관, MㆍP 다리, 포로 사상대립관, 무기 전시장, 야외 막사, 디오라마관, 기념광장, 영상실, 잔존 유적지 등의 시설에서 6.25 동족상잔의 참혹함을 체험할 수 있는 산 교육장이다. 그러므로 먼저 박물관을 자세히 둘러보면서 그때 포로수용소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이해하고 밖으로 나와서 체험 광장을 둘러보는 것이 효과적일 것이다.
거제도 포로수용소
한국전쟁 중 UN군에 포로가 되었던 공산군을 수용하던 장소이다. 1950년 11월부터 전국 7-8곳에 포로수용소를 설치하여, 인민군 15만, 중공군 포로 2만, 여자 포로와 의용군 3천 명 등 최대 17만 3천 명을 수용하였다. 1949년에 제네바에서 체결된 ‘전쟁포로 대우에 관한 협약’ 덕분으로 이곳에 수용된 포로들은 인간적인 대접으로 받으며 생활했다. 수많은 사람이 피난살이로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을 때 비록 포로 신세이기는 해도 군 의무를 할 필요가 없고 날마다 편안한 환경에서 보호를 받으며 충분한 먹거리를 공급받고 거기다가 기술교육등의 복지혜택을 받으면서 편하게 지낼 수 있었다.
그러나 제네바협약에도 불구하고 북한에 포로를 잡힌 한국군과 유엔군들이 받은 비인도적인 고문과 학살은 말해 무엇하겠느냐? 그들의 잔인무도함은 땅이 알고 하늘이 알고 있지 않은가! 전쟁 중에도 적들은 한국군보다는 미군에게 잡혀야 보호를 받는다 했다 한다.
▶제네바협약
전쟁포로는 인간적으로 대우받아야 하고, 존엄성이 손상되어서는 안 되며, 먹을거리와 구호 물품을 제공하고, 정보 수집을 위해 폭력과 고문 등을 가해서는 안 된다’라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6.25 전쟁은 제네바협약이 처음 적용된 전쟁으로, 포로들을 어떻게 대우하는지 국제 적십자의 점검을 받아야 했다.
거제도 포로수용소(Geoje-POW Camp) 유적공원
한국전쟁 포로들인, 조선인민군과 중국 인민지원군을 수용하기 위해 1951년 2월에 거제시 고현동과 수양동을 중심으로 거제도 일대에 설치되어, 1953년 7월 27일까지 운영된 포로수용소이다.
거제도는 넓고 물이 풍부하고 사면이 바다로 탈출이 쉽지 않고 육지와 가깝고 교통은 선박밖에 없어서 포로를 수용하기에 적합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남아 있는 일부 건물에 그때 포로들의 생활상이나 모습, 의복, 무기 등을 전시해 놓고 있으며, 최근 기존의 시설을 확장하여 거제 포로수용소를 유적공원으로 탈바꿈하여 전쟁의 역사와 산 교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디오라마관에는 그때 어머어마한 크기의 수용소의 모습을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생생한 모형으로 재현해 놓고 있다. 포로 생활관에서는 그때 포로들의 일상생활의 모습들을 사진과 모형 동영상으로 생생하게 볼 수 있다. 1983년 12월 20일에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99호로 지정되었다.
▶디오라마(diorama}-배경을 그린 막 앞에 여러 가지 물건을 배치하고 그것을 잘 조명하여 입체적인 실물감(實物感)이 나게 하는 장치. 투시화(透視畵).
거제 포로수용소 내부 구조(1951년)
포로수용소는 60, 70, 80, 90 단위의 숫자가 붙은 구역으로 나뉘었고, 1개의 단위구역(enclose)에는 6,000명을 수용하였다. 각 구역의 하부 구조로 수용 동(compound)이 있었고, 전체 수용소는 4개의 구역과 28개의 수용 동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중앙 계곡에는 제6 구역, 동부 계곡에는 제7, 8, 9 구역이 설치되었다. 또한, 이러한 시설과 규모를 자체 지원할 수 있는 비행장, 항구, 보급창, 발전 선박, 병원, 도로, 탐조 등을 설치하여 운영하였다.
포로 수용소장 납치사건과 분리 수용
포로들 가운데는 이념이 다른 두 부류의 포로들이 있었다. 열렬한 공산주의자들과 억지로 끌려온 반공주의자들이 함께 수용되었다. 처음 얼마간은 조용히 수용 생활을 잘하였다. 그러다가 반공(反共) 포로와 친공산 포로가 서로 대립하면서 일어난 불상사의 원인은 1949년 제네바 협정에 따른 포로 자동송환이 아닌 자유 송환을 국제연합군 측이 주장하면서부터였다. 포로수용소에서는 반공포로와 친공산 포로 간의 유혈사태가 자주 발생하였으며, 1952년 5월 7일에는 수용소 소장인 프란시스 돗드(Francis Dodd) 준장이 포로들의 면담 요청 유인에 걸려 납치되는 불미스러운 사건까지 일어났다. 소장 구출 작전으로 수십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두 진영 간의 충돌로 사상자가 늘어나자 드디어 포로들을 분리 수용하게 되었다. 포로 교환이 의견 차이로 시간을 끄는 동안 이승만 대통령은 1953년 6월 18일~19일 거제를 제외한 여덟 곳의 포로수용소에서 35,000명가량의 반공포로를 전격적으로 탈출시켜서 세상을 놀라게 했다. 포로교환에 합의한 유엔과 공산군은 포로들의 선택에 따라 친공산주의 포로들은 판문점을 통하여 북으로 보내졌지만, 많은 한국군과 미군이 돌이 오지 못하였다.
탱크 전시관
6.25 한국전쟁 때 북한군이 타고 남침한 소련 탱크 모양으로 만든 탱크전시관에 들어서면 6.25 전쟁 주역들이 맞는다. 오른쪽으로 이승만 대통령을 이어 미국 등 유엔 측 인물들과 왼쪽에는 김일성과 소련·중국 쪽 인물들이다.
제도 포로수용소 유적공원 옆에는 평화파크가 나란히 붙어 있다. 이곳은 전쟁의 비극과 평화의 가치를 알려주는 공간이다. 어린이 평화정원에서 평화의 상징물들을 살펴보고 평화수호대가 되어 세계 곳곳의 전쟁 무기를 없애는 게임도 할 수 있다. 전쟁의 현장을 본 사람이라면 평화가 얼마나 소중한지 확실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거제도 포로수용소 유적 박물관
김제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