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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여행/전라남도

2.정약용-강진(3)

                                                              다산 정약용의 귀양지 돌아보기

 

1801년(신유년) 11월 23일 겨울 물설고 낯선 땅 강진으로 귀양은 왔지만, 죄가 가벼워서인지, 강진 관아에서도 거처 지를 정해주지 않고 그냥 알아서 살도록 한 것 같다. 다산은 처음에는 아들과 함께 왔던 모양인데 강진 땅에서 거처를 구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죄인의 신세라 누가 쉽게 그를 도우려고 나서지 않았다.  다산은 강진으로 유배 와서 처음부터 제자 가르치는 일은 시작하였다. 그것은 자신이 원했다기보다는 요구에 의해서였다. 특히 그 옛날에는 귀양 온 분들은 벼슬을 하던 지식인들이어서 배우기를 바라는 지방민들에게는 최고의 인기였다. 중한 죄인이 아닌 이상은 지역주민들과 어울려 사는 것이 가능하여서 지방의 문화와 지식발전에 크게 이바지하는 계기가 되었다. 다산의 초기 유배 생활은 서인의 강경파인 강진 현감의 핍박으로 어려움이 많았다. 정조의 총애를 받으며 잘 나가던 관료로서 참기 힘든 온갖 수모를 겪어야만 했다. 이런 환경 속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창조적으로 최선의 삶을 산 다산의 선비다운 기개에 찬사를 드리는 바이다. 오늘날 저 먼 남녘 강진 땅에 있는 「사의제와 다산초당」에 발길이 끊이지 않는 것은 열악한 환경 속에 살면서 다산이 남긴 열매들과 삶의 흔적들 때문일 것이다. 역사에 길이 남을 그의 열매들과 흔적들은 귀양살이가 아니었으면, 결코 남겨질 수 없었을 것이다. 그 한 인생의 고난과 시련으로 많은 사람이 덕을 보고 복을 누리는 것이 역설적일 수도 있지만, 그것이 그의 숙명이라면 어찌하겠는가! 오늘날 그가 남긴 저서들과 삶의 흔적들은 국보급으로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의 자산이 되었다.

이 나그네도 다산의 삶을 돌아보면서, 내 삶도 다해갈 때 남겨질 가치 있는 것은 무엇일지 생각해 보았다. 

 

다산의 4대 성지

강진에서 처음에는 3곳을 옮겨 다니면서 8년을 보내고, 한 곳에서 10년을 살다가 귀양에서 풀린다. 강진은 정약용이 귀양살이 하면서 살던 4곳을 다산의 성지로 개발하여 문화 관광지로 만들어 지역 경제에 보탬이 되게 하고 있다.

사대 성지은 동문 주막(1801-4년) · 보은산방(1806-2년) · 제자 이학래 집(1808-2년) · 다산초당(1808-10년)이다. 주막 골방에서 시작하여 8년동안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며 정착을 못 하다가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긴 뒤 해제될 때까지 10년 동안 이곳에서 제대로 제자양성과 한문연구 저술에 매진하게 된다.

 

《사의제 四宜齋》

신유년 초겨울 강진에 온 다산은 머물 곳이 없어 막막했으나 사람은 어디에 가든지 인연이 있기 마련. 마음씨 곱고 인정 많은 주막 주인 할머니의 배려로 뒷방에 머물도록 허락해 주었다. 두 사람이 눕기도 힘든 좁은 골방이지만 피곤한 몸을 쉴 수 있게 되었다.

                            주막 마당 한편에 있는 동상은 다산을 지극정성으로 돌봐준 주모와 딸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이 주막은 예전과 다름 없이 지금도 [동막주막]으로 성업 중이므로 다산이 좋아했던 아욱국과 이 지방 특유의 곡차와 바지락 부침 등으로 한 상을 차려놓고 지난 세월 이곳에서 살았던 다산을 떠 올려 보면 어떨지···.  

 

 

다산은 비록 좁은 골방이기는 하나 몸과 마음을 새롭게 다잡아 교육과 학문 연구에 헌신키로 다짐하면서 이 집을《사의제, 四宜齋》라 이름하였다. 즉, 「네 가지를 올바로 하는 이가 사는 집」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사의제, 四宜齋》: 선비가 마땅히 지녀야 할 네 가지 덕목

                 담백한 생각 (사의담, 思宜澹) -생각은 맑게

                신중한 행동 (동의중, 動宜重) -행동은 무겁게

               장엄한 용모 (모의장, 貌宜莊) -용모는 다정하게

              과묵한 언어 (언의인, 言宜認) -말은 적게

 

저잣 거리(시장통)

사의제가 있는 구역은 그때 그 시절 읍내와 같은 상가와 먹거리를 팔고 사는 그리고 주막이 있는 저잣거리었다. 지금도 여전히 카페 각종 상점 식당 먹거리와 토산 기념품 가게들이 늘어서 있는 거리에 그 옛날 그 모습을 갖춘 유적들이 여기저기 그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한옥체험관도 있고 저자 거리에서는 옛 모습을 한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도 나누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다. 또 저자에서는 다산의 꿈이라는 한마당 극이 매일 연출되므로 때를 맞추어 즐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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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초당 

다산초당은 전남 강진군 도암면 귤동 마을 만덕산 중턱에 자리하고 있다. 이 초당은 원래 다산의 외가 쪽 친척 해남 윤 씨의 산속 정자인 데, 다산이 머문 뒤로 「다산초당」이라는 명소가 되었다. 다산이 47세이던 1808년 봄에 이곳으로 옮겨와서 1818년까지 유배 18년 가운데 10년을 이곳에서 살면서 제자를 가르치면서 많은 책을 쓴 곳이다. 1963년 1월 21일에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다산초당으로 오르는 길

박물관에서 초당까지는 1km, 초당 주차장에서는 800m 거리이다. 오르는 오솔길 바닥은 뿌리 길로 이어지며 양옆으로 늘어선 동백나무 차나무 등의 푸른 숲을 지나 언덕에 오르면 강진만이 펼쳐지는 왼쪽 산자락에 고즈넉한 다산초당이 나그네들을 맞이한다.

 

초당 꾸미기

다산은 이곳으로 옮겨온 뒤 어느 정도 안정이 되자 비록 유배 생활하는 죄인의 처지이기는 하지만 자기가 사는 주위를 꾸미기 시작한다. 다산은 학자이면서 잔재주를 많이 가진 재간 꾼이었다. 산정에 차나무가 많아서 늘 차를 즐겨 마시면서 마음을 달랬고 그리고 호를 다산(茶山)이라 지었다. 그리고 주위에 자연스럽게 자라고 피는 나무들과 꽃들, 매화 복숭아 모란 차 작약 수국 석류 치자, 등으로 아름다운 정원을 만들었고 텃밭도 만들어 거두어 먹으면서 그 속에서 나름대로 낭만적인 생활을 즐기면서 마음의 한을 달랜 것 같다. 쉼 없이 제자들과 학문을 논하고 더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만사를 잊고 글 쓰는 일에 전념하였다. 그가 많은 책을 쓸 수 있었던 비결은 그의 외가가 가지고 있던 수많은 책 덕분이었다. 초당에 사전 지식이 없이 오면 놓치기 쉬운 부분이 있다. 다산이 귀양살이하면서 꾸며놓은 초당사경이 있는데 그분이 살다 간 흔적으로 둘러보면 그분 삶의 모습을 느낄 수 있다. 

 

《草堂 四景 초당사경》

「다조, 茶竈」-초당 앞마당에 놓인 넓적한 바위. 이 바위 위에 솔방울로 불을 지펴 차를 끓여 마셨다 하여 부뚜막 바윗돌로 불린다.

「약천, 藥泉」-초당 뒤에 있는 샘이다.

「정석, 丁石」-초당의 주인이 다산임을 인증하는 자신의 성인 「丁」자를 초당 서편 바위에 새겼다.

「연지 석가산, 蓮池石假山」-초당 아래 작은 물웅덩이를 넓혀 바다에서 주어온 돌들로 만든 작은 돌섬.

 

다산이 18년을 강진에 살면서 500여 권의 책을 썼다는 데 그 가운데 대표적인 목민심서와 경세유표 두 권을 소개한다

김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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