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 다산 정약용의 흔적을 찾아서 10.14, 2024
다산이 강진에서 18년간 귀양살이하면서 남긴 업적과 삶의 흔적은 강진에 첫발을 내디딘 동문주막 · 보은산방 · 제자 이학래 집 · 다산초당으로 이어지는 4곳을 다산의 4대 성지라 한다. 박물관은 다산초당으로 가는 길목인 율동마을에 세워서 다산을 기리고 있다. 다산의 깊은 사상과 지식의 세계를 이해하려면 많은 시간을 들여야 한다. 또 그의 유적지에 와서 몇 시간 여기저기 많은 것을 돌아보면서 다산의 겉모습은 느낄 수 있다. 그래도 비록 지나는 길이지만 마음에 조금이라도 무엇을 담았다면 금은보다 더 귀한 보물일 게다. 두 번째 방문하는 길은 처음보다는 그동안 공부한 지식을 바탕으로 살펴보는 마음이 남달랐다. 다산의 성지라 부르는 4곳 가운데 [사의제]와 [다산초당] 두 곳에 더 시간을 들여서 돌아보았다. 먼저 다산 기념 박물관, 다산 정약용, 다산의 귀양지 순서로 올려본다. ※ 사이트에서 제공받은 자료들을 편집해 보았음.
다산박물관
박물관은 전도 강진군 도암면 다산로 766-20에 있다. 다산박물관은 유네스코 세계문화 인물로 선정된 다산 정약용의 강진 18년 유배시절에 남긴 삶의 흔적과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2014년 7월 26일 건립되었다. 유네스코에서는 한국의 정약용을 근대화에 기여한 실학자로 사회문제에 적극적으로 개혁안을 제시했던 학자이자 약자의 편에 서서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 온 인물로 평가하였다. 그리하여 프랑스혁명에 영향을 준 철학가 [루소], 휴머니즘을 지향했던 작가 [헤르멘 헤세]와 함께 2012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인물"로 선정했다.
▶ 유네스코(Unesco)-유엔의 교육 과학 문화를 전문으로 취급하는 국제기구.
다산 생전에 남긴 시집 친필 편지와 저술 주변 인물들의 자료를 수집하여 전시하고 있으며 다양한 디지털 자료들을 통해 다산이 가족을 사랑하는 가장과 제자를 아끼는 스승인 다산의 모습을 조명하는 데에 그 주안점을 두고 있다. 우리가 다산을 기억하는 것은 백성을 위한 정치를 펼치고자 했던 그의 진심이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박물관 홍보팀에서는 다산의 가르침을 통한 체험행사로 어린이 청장년 교육 프로그램과 아울러 공직자의 청렴 의식과 애민정신을 정립하는 한편 공직자의 자아 성찰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다산과 만남의 자리
다산박물관에서 가장 처음 만나게 되는 상설전시관에는 누구든지 시공간을 넘어 다산의 제자가 되어 강연에 참석할 수 있는 자리이다. 시대를 앞서간 대학자 다산과 마주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한 박물관의 돋보이는 기획에 찬사를 보낸다. 다산은 유배 생활을 통해서 풀뿌리 인생들의 삶을 가장 가까이 살펴보면서 이런 백성을 돌보아야 할 관리들이 갖추어야 할 덕목(행동과 태도)에 대해 길이 본받아야 할 가르침을 남겼다. 이 과객도 한 수 배우고자 선비의 자리에 함께 해 보는 광영을 누려 보았다.
박물관에는 자원봉사 안내원이 계셔서 자세하게 친절하게 안내해 주셔서 큰 도움이 되었고 궁금한 점들을 나눌 수 있어서 좋았다.
그곳에 진열된 수많은 자료들은 일일이 소개한다는 것은 무리인 것 같다. 그래서 몇 점만 나누어 보려고 한다.
특별히 부인이 어린 자식들과 사느라 힘든 생활 속에서 다시 볼 수 없을지도 모르는 기약 없는 귀양살이의 막막함 앞에 남편에 대한 그리움과 애절한 마음을 보내는 편지를 옮겨 본다. 그때는 사람이 편지를 가지고 머나먼 길을 가고 오면서 전해야 하는 기다림과 그리움이 가득한 세월이었다. 이렇게 전해지는 한통의 소식들은 목마른 자에게 시원한 냉수와 같았을 것이다. 전시된 원본은 한 장이지만 읽기 편하도록 편집해 보았다.
부인의 애틋한 편지
《매화쌍조도》
아버지 정약용이 강진 유배시절에 시집가는 딸에게 그려준 매화 그림과 글이다. <매화병제도> 이야기에서 가족에 대한 아버지의 따뜻한 정을 느끼실 수 있다. 유배를 떠난 지 13년이 되던 해 부인은 시집올 때 입고 온 치마를 보냈다. 정약용은 치마를 몇 조각으로 잘라 두 아들에게 유훈의 글을 써서 보내고 12년째 보지 못한 채 시집가는 딸을 그리워하며 행복하게 잘 살기를 바라면서 <매화쌍조도>를 그려 보낸다. 그림 속 한 쌍의 새는 금슬 좋은 딸의 부부를 상징하며 탐스러운 열매는 손자를 바라는 마음이 담긴 듯하다
강진 다원(차밭)
강진은 차 재배에 적합한 토양과 기후를 갖고 있다. 다산은 차나무가 풍성한 이곳에서 차를 마음껏 즐기며 지냈다. 그래서 자신의 호를 다산(茶山)이라고 하였다.
이 일로 강진은 차 생산과 상품화에 한 걸음 더 나아가게 되었다. 특히 남쪽의 금강산이라고 불리는 「월출산」부근은 그 옛날부터 백운옥판차(白雲玉板茶)를 생산하던 차 생산지였다. 지금은 한 대기업에서 차밭(茶園)을 운영하면서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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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정조)~1836(헌종)
1762년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서 태어난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실학자 저술가 시인이다. 본관은 나주, 호는 다산(茶山). 그의 인생을 돌아보면 그의 귀양살이는 태어나면서 예정된 운명같이 보인다. 그때 조선은 정치적으로 당쟁의 소용돌이로 몹시 어지러운 때였다. 그의 아버지가 벼슬살이하던 때는 정조 치세로 조정은 서인과 남인으로 나뉘어 긴장 관계에 있었고 정치적으로 정조의 지지를 받는 남인이 조정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지만, 반대파 서인도 만만치 않았다. 그가 태어난 가문은 정치성향이 남인 계열로 정조 다음에 일어난 순조 치세에는 서인의 정쟁에 휘말려 남인은 큰 어려움을 당하게 된다. 게다가 그의 외가는 천주교 집안으로 자연스럽게 그의 형제들이 천주교에 연루되는 일로 뒷날 화의 근원이 된다. 게다가 또 하나의 재앙은 암행어사 시절 비리로 파직시킨 경기 관찰사 서용보란 자와 얽힌 악연으로 기나긴 귀양살이가 쉽게 풀리지 못한 어려움을 겪는다. 이렇게 보면 그의 인생은 3중으로 얽힌 굴레에 갇혀서 고단한 인생을 살았다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고난과 시련이 오히려 그를 길이 기억할 주옥같은 보물들을 남긴다.
정조와 정약용
1783년(정조 7) 22세에 진사에 합격하여 성균관에서 공부하는 동안 성적이 출중하여 정조의 마음에 들어서 자주 불러 시상을 나누는 교감 지기(soulmate)로 왕의 총애를 받는다. 1789년 28세에 문과에 합격하여 벼슬에 오른 후 요직을 거쳐 37세에 형조 참의(법무차관)가 되었고 정조의 신임을 받으며 관직 생활을 이어간다. 다산은 새로운 문물을 다양하게 수용하고 조선을 실질적으로 개혁하고자 했던 진보적인 지도자였다. 벼슬을 하는 동안 한강에 배다리(부교)를 설치하여 왕래를 편하게 한 일과 기중기를 만들어 화성 축성에 이바지한 일들은 문신이지만, 기술 관료의 면모도 보여주었다. 다산이 벼슬이 오를 때마다 천주교에 연루된 일로 사사건건 시비하고 탄핵하는 일로 귀양과 좌천을 겪으면서도 정조의 배려로 근근이 벼슬은 유지한다.
천주교와 정약용
조선 천주교를 처음 시작한 분은 이승훈이다. 이승훈은 1784년 청나라로 가는 조선 사신단의 일원인 아버지를 따라 북경에 가서 천주교 선교사 그라몽 신부로부터 교리를 배우고 영세(세례)를 받고 베드로란 영세명을 받는다. 그리고 성서와 성물을 갖고 돌아와 믿는 여러 사람과 함께 조선의 첫 천주교회를 설립한다. 바로 이승훈은 다산의 매부이며, 다산에게 처음 천주학을 소개한 이벽은 다산의 처남이다. 정약용 형제들은 자연스럽게 남인 소장파 학인들과 교류하면서 천주학과 서양 학문 연구에 함께 하다가 1784년 처남 이벽에게서 영세를 받고 요한이라는 영세명을 받는다. 그리고 1785년(정조 9) 비밀 신앙모임인 「명례방 공동체」에 참석하다가 이 비밀 모임이 발각되는 순교하는 일이 벌어지자 정약용과 둘째 형 정약전은 안 믿겠다고(배교) 발을 빼지만, 셋째 형 정약종은 박해에도 불구하고 꿋꿋한 신도가 된다. 정약용이 벼슬길에 나아가면서 그에게 운명같이 닦아온 천주교가 그의 발목을 잡는 화근덩어리가 되며, 결국은 다산의 집안을 풍비박산 내는 원흉이 된다.
정조의 금교령(1788)
1791년 신해박해(명례방 공동체 사건)로 서인들은 서학인 천주학이 조선의 근간을 해치고 있다고 선동하여 왕에게 서학을 금지할 것을 청하였다. 이에 그동안 소극적으로 관망하던 정조는 천주교를 금하고 관계 서적을 모두 불태우며, 천주교를 믿거나 전하는 자들을 극형으로 다스리도록 명했다.
신유박해(순조 1년. 1.10, 1801)와 정약용의 형제들
정조가 사망하고(6.1800) 그의 어린 아들(순조)이 보위에 오르자 왕대비 정순왕후가 섭정하면서 정적 제거를 위해 천주교 탄압령을 내려 남인에 대한 숙청 작업을 시행하는 신유박해를 일으킨다. 시간을 조금 거슬러 올라가면, 정순왕후는 사도세자를 제거하려고 앞장서다가 남인의 반격으로 집안이 몰락한 원한을 품고 살아왔는데, 이제 그 한을 풀 때가 온 것이다. 마침 남인 가운데는 천주교와 관계있는 자들이 있는 것을 알고 천주교 박해를 정쟁으로 몰고 간다. 정약용 삼 형제도 체포되어 옥에 갇힌다. 그의 숙청 목적은 한풀이며 정치보복으로 특히 정조의 총애를 받던 이가환, 권철신, 정약용을 제거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이가환과 권철신은 모진 고문 끝에 옥사하였다.
그리고 정약용의 형제들도 제거하려 했으나 셋째 형인 정약종(아우구스티노)만 참수하고 정약전과 정약용은 배교했다는 것을 인정받아서 사형에서 유배로 감형된다. 그들은 먼저 경상도 포항 장기로 보내졌다가 둘째 형 정약전은 흑산도로 정약용은 강진으로 보내져 모두 18년간의 유배 생활을 하게 된다. 두 형제는 기약없는 내일을 바라보며 귀양지로 떠나며 헤어는 마음이야 오죽했겠는가!
정약종 (丁若種) 은 주문모 신부 아래서 조직된 명도회의 초대 회장이 되어서 신도들을 가르치고 전도하는 일에 힘썼다. 그리고 순 한글로 된 교리 서를 만들어 평민들이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하였다. 그는 주문모 신부의 소재를 끝까지 밝히지 않은 채 심한 고문으로 일어나지도 못한체 누워서 칼날을 받고 순교하였다. 그러나 다른 두 형제는 그리스도의 진리를 맛은 보았으나 거룩한 순교자의 반열에 오르지 못한 아쉬움을 남겼다. 정약종과 그의 가족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순교함으로 그 이름이 한국 천주교 사에 빛나는 별들이 되었다.
‡주문모(야고보) 신부의 순교- 중국인인 그는 6년간 숨어서 포교활동 하다가 체포되어 49세로 새남터에서 참수(5.31,18010)
‡‡ 김대건 (안드레이) 신부 순교- 첫 한인으로 1년간 포교활동 하다 체포되어 25세 아까운 나이로 새남터에서 참수(9.16, 1846)
◈ 정약종 가정은 한국 천주교회의 가장 대표적인 순교자 가문 순교자이다. 이들 모두는 모진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꿋꿋한 신앙으로 순교자의 영광스러운 면류관을 얻었다.
아버지 정약종( (아우구스티노 1760-1801) 순교 어머니 유조이(체칠리아 1761-1839) 순교 |
첫째 아들 정철상(가롤로 ~1801) 순교 둘째 아들 정하상(바오로 1795~1839) 순교 세째 딸 정정혜(엘리사벳, 1797~1839) 순교 |
귀양살이 끝(1818, 8)
드디어 18년 동안의 귀양살이가 풀려서 돌아왔다. 순조는 그에게 벼슬을 내렸으나 사양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저술 활동으로 여생을 보내다가 1836년 2월 22일에 향년 74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2년 후 15세에 결혼한 부인 홍 씨도 세상을 떠났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 1910년 순종은 그에게 문도(文度)라는 시호가 내렸다.
병인박해와 신앙의 자유
천주교 박해는 1785년(정조 9)-1873년(고종 13)까지 5왕조에 이르며, 대원군이 정계에서 물러날 때까지 거의 한 세기 동안 계속되었다. 박해는 간헐적으로 이루어지다가 흥선대원군의 주도 아래 일어난 병인박해(1866~1872) 6년 동안 8,000여 명의 신도와 프랑스 신부 9명이 순교 당하였다. 역설적인 것은 대원군의 부인도 천주교인이었고 나중에 대원군도 부인의 신앙을 허락했다.
종교 자유
‡1886년(고종 26년) 조선과 프랑스가 통상조약을 맺음으로 비로써 이 땅에 드디어 신앙의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
김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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