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목사(牧使) 고을 나주 6.23, 2023
지난날 나주는 나에게 그저 지나는 역에 불과했다. 1970-80년대 한국 기독교 선교부 간사로 있을 때는 진도, 비금도로 가려면 목포에서 배를 타야해서 호남선을 여러 번 탄 적이 있다. 지금도 잊히지 않는 일은 열차가 나주역에 닿으면, 배를 담은 광주리를 든 장사꾼들이 열차에 올라와서 “물이 찔끔찔끔 나는 내 배 사시오”하는 소리가 지금도 쟁쟁하다. 그때는 나주가 이렇게 천년 목사의 유서 깊은 고을인 줄을 미처 몰랐었다. 후 삼국시대 왕건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가 서려 있는 곳이며, 왕건을 도와 후삼국을 통일하여 고려의 창업을 도운 해양 세력의 본거지인 나주는 역사의 많은 사연들을 담고 있는 흥미진진한 고장이다. 뒷날 고려 현종(2년)은 거란의 2차 침략 때(1011년) 왕가의 외척인 이곳으로 피난 온 곳이기도 하다. 두 번의 나주 방문은 영암으로 가는 길에 이루어졌다(2024. 6.23-2025. 10.10). 경기도 광명에서 KTX로 나주에서 내려 영암으로 가는 길이 가깝기 때문이다. 영암에서 우리를 맞이하러 온 장태영 형제의 안내로 마한 발굴지를 포함하여 유서 깊은 나주를 마음에 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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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羅州)
나주시(羅州市)는 대한민국 전라남도 중서부에 있으며, 영산강이 도시 가운데로 흐르며, 비옥한 나주평야가 펼쳐지는 대한민국 제일의 배 생산지이다. 호남선이 지나며 가까이에 무안 광주고속도로도 지난다. 나주시 행정구역은 1읍 12면 7동으로 인구는 약 117,179명이다. 나주가 삼한 시대에는 마한의 중심이었고, 삼국시대에 백제 땅으로, 통일 신라 땅으로 금성 군(錦城郡)으로 불렸다. 후삼국 시대에는 후백제 땅이었다. 그러나 903년 왕건이 견훤으로부터 금성 군을 중심으로 하는 서호남을 정복하여 나주(羅州)라는 새 이름으로 고려 땅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나주는 예로부터 영산강을 따라 영산포로 해서 서해로 나가는 길목으로 해상 무역활동이 활발한 해양도시였다.
▶왕건은 금성 군을 그 지역의 수장이었던 나총례(羅聰禮)의 성을 따서 나주(羅州)로 새 이름을 지어서 나주는 왕건의 도시라고 부른다.
남고문(南顧門)
나주는 동서남북의 네 개의 성문으로 이어지는 성벽으로 둘러 쌓여 요새화하였다. 남고문은 성의 남문으로 성안의 중요한 관청들이 있으며 관광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나주는 개혁의 산업도시로 발돋움하면서 한편으로는 관광 사업을 장려하였다. 역사적으로 나주는 왕건과 함께 시작되었다고 해서 나주를 왕건의 도시로 브랜드화하였다. 나주에 들어서면 왕건이란 이름이 자주 눈에 띄어서 왕건의 도시임을 느끼게 된다. 예를 들면, 우선 나주의 중심인 시청 앞 큰길이 [왕건 길]이며, 왕건 모텔, 왕건식당, 등등이다. 그리고 지방 특산물도 [왕건이 탐낸 쌀], [왕건이 탐낸 배], 등으로 브랜드화하였다. 그리고 영산강 유람선은 고증을 거쳐 고려 시대의 나주 배를 복원하여 [왕건호]로 영산강을 따라 운항하고 있다. 나주는 온통 왕건의 이름으로 도시를 꾸미고 있다.
나주 왕건의 쌀과 배
나주는 품질 좋은 배 생산으로 이름이 나 있다. 나주 배는 그 맛과 향이 우수하여 임금께 올리는 진상품이었다(세종실록지리지 1454). 영산강 유역의 비옥한 토양과 연평균 기온 14도 내외의 기후조건과 첨단 기술로 생산되는 배는 향이 좋고 당도가 높아서 한국을 대표하는 특산품이다. 또 살이 부드럽고 물이 많고 황금색으로 색깔이 고운 게 특징이다. 배 수확이 빨라서 추석 때에는 전국에 유통되고 있으며 외국에도 수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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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호남의 맹주 나주
‘전라도’라는 이름은 전주와 나(라)주의 머리글을 따서 만들었다. 조선시대 때는 호남의 도청으로 나주목이 설치되어 있었다. 나주는 '천년 목사(牧使) 고을'로 일컫는다. 목(牧)은 행정구역의 이름이며, 목사(牧使)는 그 행정구역을 다스리는 관장의 이름이다. 나주목(羅州牧)은 전라도 서남부의 넓은 지역을 지배하는 행정 중심지가 되었다. 1896년 행정개편으로 전국이 13도로 나누이고 전라도 도청이 광주로 설치될 때까지 천년 가까운 913년 동안 나주는 전라도 서남부의 맹주로 정치 경제 중심지였다. 그때 나주는 전국에서 다섯 손가락에 들 만큼 커서 남쪽의 한양으로 불렀다고 한다. 영산강을 끼고 있는 나주는 기름진 농토와 해상무역으로 대체로 부유한 지방이었다.
▶목(牧)-고려와 조선 시대 행정구역의 이름으로 오늘날 군, 시 같은 큰 행정구역.
▶목사(牧使)-고려 조선 시대 정 3품의 높은 관직(당상관)으로 군수, 시장 같은 직책.
나주 정수루(正綏樓)
나주 관청(관아 官衙)의 정문(아문 衙門)이다. 이 문으로 들어가면 나주목의 관청이요 목사의 집무실인 동헌과 목사의 살림집인 내아가 있다. 나주 동헌은 불탄 뒤로 아직 새로 짓지 못하고 있고 내아만 남아 있다.
나주 금성관(羅州 錦城館)
금성 관은 나주목의 관청(관아)이며 객사로 조정에서 내려온 사신들이 묵어가던 곳이다. 일제강점기 땐 나주군 청사로 쓰면서 많이 변형되어서 1976년 다 헐고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지었다. 금성관 넓은 마당에는 넓고 납작한 돌(박석)이 울퉁불퉁하게 깔려있는데, 이는 옷매무시를 가다듬고 걸음걸음마다 조심하라는 뜻이 담겨 있다고 한다. 이곳은 또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 김천일은 이곳에서 의병 300명을 모아 북쪽으로 출병한 항일정신이 깃든 곳이어서 남달랐다.
목사 내아 금학헌(琴鶴軒)
목사 내아는 금학헌으로 부르며 목사의 관저로 살림집이다. 지은 지 200년이 넘는 디그자 형의 옛집(고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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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 목사 내아 숙박체험
나주 목사 내아 금학헌은 2009년부터 전통한옥 숙박체험 공간으로 여섯 개의 방을 개방하였다. 이 가운데 두 방은 나주 목사 가운데서 존경을 받았던 유석중 목사와 김성일 목사의 이름을 딴 방으로 지정되어 있다. 이 방들은 각각 2개의 방과 거실을 갖춘 다인실로 각 15만 원이며, 나머지 네 개의 방은 인, 의, 예, 지, 단칸방으로 5만 원 정도이다. 그런데 재밌는 일은 나주 목사의 방에서 자고 "목사의 기"를 받아간 뒤로 좋은 일들이 생겼다는 소문이 나자, 찾는 사람들이 줄을 잇고 있어서 한 달 정도 전에 예약해야만 차례가 온다고 한다.
나주 목사 유석중
유석중 목사는 나주 목사 가운데 두 번이나 목사를 지낸 인물로 그 이름이 알려져 있다. 그는 광해군 2년 (1610년) 8월 나주 목사로 부임하여 두 달 뒤인 10월에 나주를 떠난다. 9년 뒤인 광해군 11년(1619) 6월 그는 다시 나주 목사로 부임하게 되는데, 여기에 다음과 같은 훈훈한 사연이 광해군 12년 5월의 일기에 실리려 있는 데 그 가운데 한 대목을 옮겨본다.(위키백과)
《유석중 목사가 단 두 달 동안 나주를 다스렸는데, 그를 사모하는 마음이 9년 동안이나 그를 다시 나주 목사로 보내달라고 청하였다.》
그래서 광해군이 그를 다시 나주 목사로 보내자, 나주 백성이 쌀 삼백 석을 왕에게 바쳐 그 은혜에 감사를 표했다고 한다. 그 짧은 기간 백성들에게 얼마나 잘했으면, 이토록 애절하게 그리워했을까! 참으로 감동적이며 본받을 일이다. 그리고 2년 뒤(1622) 나주 사람 염공일, 진사 김종해 등이 다시 왕에게 쌀을 바치며 다시 유석중의 유임을 청하였다고 하는데, 참으로 심금을 울리는 장면이다. 오늘날 이런 관리나 지도자를 어디서 찾아볼 수 있을까!
나주 목사 김성일
김성일 목사는 나주에서 1583년 부임하여 처음 대곡서원을 세웠고, 3년간 재임하면서 민원을 잘 처리하면서 선정을 베푼 목사로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김성일은 1590년 통신사로 일본에 갔다가 돌아와 정사 황윤길과는 반대로 "왜는 조선을 침공하지 않을 것"이라고 보고하여 정쟁을 일으킨 인물이지만, 1592년 5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집하여 진주대첩에 참여하여 왜군을 물리쳤으며, 1593년 4월 진중에서 병사하자, 선조는 [문충(文忠)]이란 시호를 내렸다(1676).
벼락 맞은 팽나무
목사 내아에 있는 팽나무는 나이가 600년 정도로 추정하며, 1980년대 태풍이 불던 날 벼락을 맞아 두 쪽으로 갈라졌다. 갈라진 틈을 황토로 메우고 사슬로 묶어 되살리는데 정성을 다했는데, 다행히 나무가 다시 살아났다. 사람들은 벼락 맞은 나무가 다시 살아나자 나주가 잘되도록 행운을 가져 다 준다고 믿어서 [소원 나무]로 불리고 있다. 예로부터 벼락 맞은 나무는 행운을 가져다준다는 미신으로 사람들이 팽나무 앞에서 소원을 빌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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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자료 등은 사이트 제공
김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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