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 여행 10. 21, 2024
이번에 여수를 찾아가는 데는 그곳에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실천한 순교자 손양원 목사님의 삶이 배어 있는 곳이며, 또 임진왜란 때 나라를 구한 이순신 장군의 좌수영이 있기 때문이다. 이번 몽골 선교지에 가는 길에 휴가를 낸 심은영 조카 차로 김영희, 정희 두 여동생과 함께 여수를 찾아보게 되어서 여간 기쁘지 않다. 경기도 양주에서 여수까지 340Km의 고속도로의 여행은 즐거운 나들이였다. 내려가는 길에 아름답게 꾸며진 순천만의 정원 공원도 잠깐 들러보았다. 한국 고속도로 휴게소에는 기대할만한 음식들과 볼거리들이 많아서 여행은 한결 가볍다. 여수의 한려해상국립공원을 돌아보는 것은 더 없는 즐거움이겠지만, 우리는 1박 2일 일정으로 손양원 기념교회와 이순신광장에 머물면서 임진왜란 때 나라를 구한 이순신 장군의 나라 사랑하는 마음을 새겨 보고 아름다운 오동도를 돌아보는 것으로 일정을 마무리했다.
여수시(麗水市)
여수는 전남 동남부 여수반도에 있는 시로 365개의 부속 섬이 있다. 인구는 2024년 현재 269,593명으로 전남에서는 순천 다음으로 두 번째 도시이다. 여수는 전남의 대표적인 공업 도시로, 중화학 공업을 통해 성장하여 2012년 세계 박람회를 개최한 곳이다. 이름난 곳으로는 이순신 장군의 전라좌수영 본영인 진남관(국보 제304호)과 한려해상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오동도 등이 있다.

손양원 목사(孫良源, 1902-1950) 호는 산돌

손양원 목사는 애국자, 순교자이며 일명 ‘사랑의 원자탄’으로 세계적으로 성자로 추앙받는 기독교 목사이다. 손 목사는 1902년 7월 7일 신앙심 깊은 손종일(孫宗一) 장로님과 어머니 김은수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성장하였다. 손 목사는 1924년 정양순과 결혼하여 슬하에 4남 3녀를 두었다. 1915년 칠원공립보통학교 3학년(15세) 때 조회 시간에 일본 천황이 사는 궁성을 향해 절하는 궁성요배(宮城遥拝 규조요하이)를 거절하여 퇴학을 당했으나, 선교사 맥레이(Macrae)의 도움으로 복교되어 1917년 졸업하고 서울의 중동학교에 다이다가 1921년 일본으로 건너가 스가모 중학교(巢鴨中學校) 야간부 속성과를 졸업하고 귀국하였다. 일본에 있는 동안 일본교회의 감독이며 신학 교수인 나카다 쥬지(中田重治)와 일본의 무교회주의자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에게서도 영향을 받았다. 귀국하여 1926년 경남 성경학원에서 공부하는 동안 부산 나 병원 상대원 교회에서 전도사로 섬기면서, 경남 성경학원에서 초량교회의 목사 주기철(朱基徹)과 스승과 제자의 연을 맺었다. 경남 성서학원을 졸업하고 여러 교회의 순회전도사로 활동하였다. 김교신을 비롯한 한국의 무교회주의자들이 간행하던 잡지‘성서 조선’을 구독하였으며 이 잡지의 내용을 가지고 사경회를 인도한 것이 문제가 되어 상애원 교회를 사임하였다. 1938년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한 이후 줄곧 여수의 한센병 환자 요양원인 애양원(愛養院) 교회에서 시무하는 동안 일본의 신사참배를 거부하다가 1940년 갇혀있다가 1945년 8월 15일 광복 때에야 풀려난다.
아버지 손종일 장로님은 아들 손양원 목사가 신사참배 거부로 일본 경찰에 끌려갈 때, 아들의 귀에 대고 들려준 말씀.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리라"(누가복음 9장 62절)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마태복음 10장 37절)
그가 수감 되어 있는 동안 일제는 그의 신앙을 바꿔 보려고 여러 가지로 시도하였는데, 불교 서적을 읽고 감상문을 쓰게 하다가 일본 스님을 붙여서 노력하였으나 먹히지 않자 스님이 화를 내며 소리를 지르면 손 목사의 뺨을 후려치자, 목사님은 태연하게 "제가 믿는 하나님께서는 원수가 네 오른쪽 뺨을 치거든 왼쪽 뺨도 내어주라고 하셨습니다. 자, 그러니 이쪽 뺨도 치십시오." 하며 뺨을 내밀자 그 스님은 이성을 잃고 발광하는 바람에 간수가 스님을 끌고 나갔다고 한다. 손양원 목사는 해방과 함께 출옥하여 한센변 환자들이 중심인 애양원 교회에 돌이 와서 사역하다가 1946년에 목사 안수를 받았다.
한센병 자료관
1926년 광주로부터 옮겨 온 Wilson 원장은 이 언덕에 한센병을 위한 병원을 세우고 "명심 대"라고 하였다. 병은 마음에서 오는 것이므로 병을 고치려면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우선이라는 전통적인 생각을 나타낸 것이다. 그 후 2000년 6월에 발전과 선교사들의 사역을 기념하는 역사관으로 개축하였으며, 2014년 국회 보건 복지위원회 의원들의 도움으로 한센병의 역사와 변천을 알 수 있는 자료관을 신축하였다. 이 새 기념관을 통하여 우리나라 한센병의 추이와, 하나님이 이 병원과 한센병 환자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알 수 있다.

여수반란 사건
1948년 10월 여순사건 때 당시 두 아들 손동인·손동신은 우익 학생 단체인 전국학생연맹에서 활동하고 있었는데, 이를 안 좋게 보던 좌익학생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가족들과 애양원 사람들이 크게 슬퍼하고 있는데 손양원 목사는 두 아들의 장례 예배 때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기도를 올린다. 그것은 아들을 살해한 안재선을 양아들로 삼겠다는 것이다. 손 목사는 즉결처분에 처해 있는 안재선을 구명하기 위해 이승만 대통령에게도 사면을 청하는 노력으로 결국 그를 살려내어 양아들로 삼는다. 이 일로 그의 사후에 “사랑의 원자탄”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손양원 목사는 신앙과 사랑으로 일본 제국주의를 이겼고 공산주의를 이긴 십자군의 용사였다. 그는 극적인 사랑과 화해, 용서를 실천한 성자로 세계기독교계에서 널리 존경받고 있다. “사랑의 원자탄”이라는 일대기가 출판되어 영어와 독일어 등으로 번역되었고 영화화되기도 하였다.
손양원 목사님이 아들의 장례식에서 올린 기도 10가지
제가 이 시간에 무슨 답사를 하고 무슨 인사를 하겠습니까마는 그래도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마음이 있어서 몇 말씀드립니다.
첫째, 나 같은 죄인의 혈통에서 순교의 자식들이 나오게 하셨으니 하나님 감사합니다.
둘째, 허다한 많은 성도 중에 어찌 이런 보배들을 주께서 하필 내게 맡겨주셨는지 그 점 또한 주님 감사합니다.
셋째, 3남 3녀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두 아들 장자와 차자를 바치게 된 나의 축복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넷째, 한 아들의 순교도 귀하다 하거늘 하물며 두 아들의 순교이리오, 하나님, 감사합니다.
다섯째, 예수 믿다가 누워 죽는 것도 큰 복이라 하거늘 하물며 전도하다 총살 순교 당함 이리오, 하나님 감사합니다.
여섯째, 미국 유학 가려고 준비하던 내 아들, 미국보다 더 좋은 천국에 갔으니 내 마음이 안심되어 하나님 감사합니다.
일곱째, 나의 사랑하는 두 아들을 총살한 원수를 회개시켜 내 아들 삼고자 하는 사랑의 마음을 주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여덟째, 내 두 아들의 순교로 말미암아 무수한 천국의 아들들이 생길 것이 믿어지니 우리 하나님 감사합니다.
아홉째, 이 같은 역경 중에서도 이상 여덟 가지 진리와 하나님 사랑을 찾는 기쁜 마음, 여유 있는 믿음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합니다.
열 번째, 이렇듯 과분한 축복 누리게 되는 것을 감사합니다.
6·25 전쟁(1950)
6.25 전쟁이 터지고 북한군이 호남 지역으로 진격해 오자 모두 피난을 준비하는 동안에도 손양원 목사는 환자들을 내버려 두고 갈 수는 없다며 끝까지 애양원에 남았다. 당시 환자들은 한센병 환자인 자신들을 북한군이 해치지는 않을 테니 손 목사에게 떠나라고 종용했으나 이를 듣지 않았다. 결국, 여수로 쳐들어온 인민군에게 체포되어 다른 사람들과 함께 9월 28일 밤 순천으로 끌려가던 중 미평에서 총살되었다. 향년 48세로 한국 기독교 역사에 길이 남을 순교자가 되셨다. 손양원 목사 장례식 때 상주를 맡은 양자 안재선 씨가 가장 슬퍼했다고 한다. 손양원의 묘지는 그가 봉사했던 애양원 근처에 있으며, 두 아들이 묻힌 곳에 함께 묻혔다. 손양원이 총살당한 곳인 여수시 둔덕동에는 그를 추모하는 작은 공원이 만들어져 있다.
양자 안재선 씨의 삶
그렇게 목숨을 건진 안재선 씨는 자신이 저질은 일을 참회하고, 진심으로 손양원 목사를 자신의 아버지로 모셨다. 손 목사는 안재선 씨가 자신을 따라 목사가 되기를 희망했지만, 그는 목사가 되지 않고 평신도로 평생을 살았다. 서울 노원구 상계동에 정착해 1978년 12월 16일 후두암으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평범한 급여생활자로 살면서 마지막까지 손 목사의 아들들을 살해한 것을 참회했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양 동생 손동희에게 한 말은‘천국에 가서 너네 두 오빠에게 무릎 꿇고 사죄하겠다’였다. 안재선 씨의 아들 안경선 목사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아버지가 신학교에 입학하여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으나 사람을 죽였다는 죄책감과 그런 사람의 설교를 누가 들으려 하겠느냐는 자격지심에 목사가 되길 포기한 것으로 안다고 했다. 그의 아들인 안경선 씨는 신학교에 가 못 이룬 꿈을 대신 이뤄달라 는 아버지의 뜻을 따라 목사가 되었고, 지금도 손 목사의 유복자 막내아들인 손동길 씨를 작은아버지로 모시면서 가까이 지내고 있다. 안경선 목사는 서울기독대학교를 졸업하고 원주에서 목회하다가 아프리카 부룬디의 한센인 마을 선교사로 사역하므로 할아버지 손양원 목사의 한센인 목회를 이어가고 있다.
손양원 목사순교기념관
사단법인 산돌 손양원 기념사업회, 사단법인 민족지도 자손 양원 목사기념사업회 등 복수의 기념사업회가 조직되어 있다. 1993년 여수 애양원 인근에 손양원 목사순교기념관이 건립되었고, 2015년에는 경남 함안군에 있는 생가터에 손양원 기념관이 건립되었다.


건국훈장 애족장
손양원 목사는 기독교 장로회 목사로 일본 제국의 신사참배 강요에 끝까지 맞서 투쟁한 항일 독립운동가이다. 애양원(愛養園)에서 나병 환자들에 대한 구호사업과 전도 활동에 전력하였으며 6.25 전쟁 중 인민군에 의해 순교를 당하였다. 돌봐줄 사람이 없는 애양원 환자들을 버리고 갈 수 없었기 때문에 피난을 포기했으며, 아들을 죽인 원수마저도 사랑으로 품은 그의 삶은 오늘날 우리에게 본보기가 되고 있으며 그 공로를 인정받아 1995년 8월 15일 국가독립유공자로 선정되었고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유복자 손동길 목사
우리가 손목사 기념 박물관에 도착하자 손양원목사님의 유복자이며 막내인 손동길 목사가 친히 우리를 맞이하여 안내하면서 하나하나 친절하게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그런데 우리기 그분을 통해서 알게 된 사실은 유족인 이분들은 손양원 목사의 기념 유적지에 얼씬도 못하였다고 한다. 그것은 손양원 목사의 순교 기념관을 세운다고 만들어진 단체가 유족을 배제하면서 여수시와 손 잡고 공공자금의 지원으로 지역경제 발전의 일환인 관광자원 사업 목적으로 기념관 시설들이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순교자 기념 시설들은 관리는 이 단체들이 하고 있어서 실상 유족들은 아무 상관이 없게 되었다고 한다. 유족은 이 기념교회에 다니지 못하고 손양원목사님 사모님이 세운 교회로 나간다고 한다. 막내아들 손동길 목사는 애양원 교회와 기념관이 손양원 목사의 역사를 왜곡했으며, 손양원의 행적을 장사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억울한 그동안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예를 들면, 손목사가 나병환자의 고름을 입으로 빨아 냈다는 것도 사실이 아니고, 손목사의 두 아들을 죽인 양아들이 신학교를 나와 목사가 되어서 손목사의 순교자 기념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있다는 것도 사실이 아니었다. 그동안 내가 알고 있던 이런 사실들이 꾸며진 이야기라는 것을 오늘 처음 알게 되었다. 그동안 이곳에는 얼씬도 못하게 하고 있다가 손양원 박물관에는 와서 활동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어서 이렇게 비공식 안내원으로 활동하고 있다고 하였다.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기념교회당의 헌금함에 적으나마 헌금을 하는 편이다. 또 박물관에도 관리 측의 헌금함이 안에 있고 안내를 하고 있는 손동길목사의 헌금함은 밖에 따로 있어서 방문자들이 헷갈리게 하고 있었다. 사연을 듣고 보니 안타까운 마음이다.




이순신 광장
여수는 전라 좌수영의 본영이 있던 곳이다. 1592년(선조 25) 4월 14일을 기하여 일본의 대군이 침략으로 경상도의 좌수영·우수영의 수군은 저항도 제대로 해 보지 못한 채 무너졌다. 그러나 전라 좌수사 이순신은 이미 여수 지방에서 거북선을 건조하여 일본의 침략에 대비하였다. 이순신은 본영과 휘하 각 진의 전선을 동원하여 경상도 남해안으로 진출하여 옥포·합포·당항포·율포·노량·한산도 등에서 왜군을 격파하면서 연전연승하였다. 임진왜란의 조선 수군의 주력은 전라도 주민들도 바다를 지켜내므로 나라를 구한 주체였다.



여수 딸기 찹쌀떡
이순신 광장 길 건너편에는 무엇인가를 사려고 사람들이 모여 있다. 그곳은 3대째 이어오는 여수의 명물 딸기 찹쌀떡 집이다. 여수에 오면 한 번은 먹어 보고 간다는 떡이다. 한참만에 조카가 맛보라고 사 왔다. 그저 찹쌀떡에 잘 익은 딸기 하나 넣은 것이다.

오동도
여수시 한라 동에 있는 섬으로 한려해상국립공원의 시작점이다. 섬의 이름이 오동도인 것은 오동나무에서 유래했는데, 원래 이 섬에는 울창한 오동나무 숲을 이루고 있었다고 한다. 고려 말 신돈이 오동나무 숲은 왕조에 불길하다고 주장하여 오동나무들을 모두 베어버렸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여수는 국내에서 손꼽히는 동백꽃 자생지이며 해식애(海蝕崖)가 발달해 여러 기암절벽이 우리의 눈길을 끌고 있다. 섬 정상의 오동도 등대 안의 전망대에서 여수항과 남해가 환히 잘 보인다.
▶해식애(海蝕崖)-파도의 침식 작용과 풍화 작용으로 인하여 해안에 이루어진 낭떠러지, 해안침식 절벽(海蝕絕壁)이다.

돌산 공원
돌산공원은 여수시 돌산읍 우두리에 있는 공원으로 저 멀리 한려해상국립공원이 펼쳐지는 곳으로 돌산대교를 마주 보고 있다. 육지와 돌산공원을 잇는 450m의 아름다운 사장교인 돌산대교가 웅장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볼거리 많은 곳으로 바다 건너 맞은편 오동도를 오가는 케이블카가 운행되고 있어서 흥미롭다. 섬 주변으로 바다의 아름다운 경관을 즐기려는 찻집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다. 우리는 스타벅스에 들러서 사방이 탁 트인 곳에서 잠시 쉬면서 한려해상국립공원 일부와 돌산대교의 아름다운 모습들을 즐겨보았다. 이곳에서 기대되는 한 장면은 돌산대교 위로 기울어지는 석양이 장관이라는데, 우리는 시간이 안 되었다.



김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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