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조선족의 중국 동북 이주의 역사적인 배경
중국 동북 삼성은 길림성, 요령성, 흑룡강성을 말하며, 그 옛날 고구려에 속했던 땅으로 한 때 중국을 지배했던 금, 청제국의 만주족(여진족, 오랑캐)이 살던 곳으로 이차 세계 대전 이전에는 만주라고 부르던 곳이다. 1949년 중화 인민 공화국 공산 정권이 들어서면서 만주는 세 개의 성(길림, 요영, 흑룡강)으로 나누어졌다. 역사적으로 함경도, 평안도에 거하던 조선인들이 고조선, 고구려, 고려 시대 때에 끊임없이 이 지역으로 이주하여 살았지만 그 후손들의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대개 그 시대 사람들은 고향으로 돌아갔거나 만족, 한족, 몽고족으로 동화된 것으로 보고 있다. 현재 동북에 있는 조선인들의 조상들은 주로 세 가지 경로를 통해서 들어오게 되었다.
첫째 경로는, 본격적인 이주는 청나라 초인 16-17세기말부터 시작된다. 1860년대 함경도와 그 일대에 계속되는 가뭄으로 살기가 어려워지자 조선인들이 두만강을 건너 용정을 중심으로 하는 연변에 이주하기 시작하였다. 이 지역은 봉금령(封禁令)이라고 해서 청나라 선조의 발상지로 신성시하였고 사람이 살지 못하게 했던 곳이다. 살기 위하여 목숨의 위험을 무릅쓰고 불법으로 정착한 것이 조선족 역사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조선인들의 본격적인 이주는 1881년 200년간이나 계속되어 온 봉금령이 해제되면서부터이다. 불완전한 통계에 의하면 1894년에는 73,000명 정도가 정착하기 시작해서 1910년에 와서는 109,500명에 이르게 되었다고 한다. 동북 삼성의 조선족 선조들의 정착하는 과정은 피 눈물 나는 사연들을 그냥 지나칠 수 없어서 “조선족 백 년 사화 1집”에서 봉금령과 점산호들에 관하여 짧게 소개하고자 한다.
◈롱씽즈디(龙兴之地), 만족(滿族)의 발상지
만주족은 여진족으로서 해서(海西), 건주(建州), 야인(野人)의 세 부족으로 나눈다. 16세기말 건주 부족에서 특출한 한 지도자가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였는데 그 이름은 누르하치이다. 그는 주변의 모든 부족을 통일하고 군사적 힘을 길러 1644년 선양(봉천)에서 산하이관(산해관)을 넘어 북경으로 쳐들어가 명조를 멸망시키고 오랑캐 만주족이 대륙을 다스리는 청 왕조를 세웠다. 여진족은 건주 족이 살았던 지역을 만주족 선조의 발상지라고 부르게 되었다. 청나라 황제 강희제 때부터 선조의 발상지를 보호한다는 이름 밑에 도문강 북쪽에서 압록강 우안(右岸)인 신빈 동쪽으로부터 저 멀리 이통 남쪽에 이르기까지 천리에 이르는 지역을 롱씽즈디(龙兴之地)라 이름하고, 이민족의 거주를 금하는 봉금령을 선포하였다. 이 경계를 넘어와 거하는 자는 단두대에 세워 처형하는 엄한 법을 정했다. 이 지역은 주력 부대를 따라갈 수 없는 병약자, 늙은 군인들이 땅을 가꾸며 짐승을 기르면서 선조의 발상지를 수호하고 있었다. 이 넓은 지역은 땅이 비옥하고 무진장한 자연 자원을 가지고 있었다. 처음으로 이 봉금령을 뚫고 들어온 침입자는 산동지방에 살고 있던 가난한 한족들이었다. 이들은 만족의 눈을 피하여 개간하면서 광석을 캐고 벌목, 사냥 그리고 약초를 캐면서 살기 시작하였다. 청조 관리들이 금지 구역 침입 죄로 단두대에 세우고 집들을 불 질러 쫓아내었으나 물밀듯 밀려오는 침입자들을 막을 도리는 없었다.
그리고 1669년 세종대왕 때 조선 북방 6진(무산, 종성, 회령, 경원, 온성, 경흥)에는 전대미문의 극심한 가뭄이 들어 농민들이 살길을 찾아 단두대의 위험을 무릅쓰고 두만강과 압록강을 건너 연변 지구로 대거 이주하게 되었으며 일부는 연해주로 갔다. 기록에 의하면 처음으로 국경선을 넘은 사람은 방영삼으로 함경북도 돌골에 살던 뼈 빠지게 가난한 농민이었다고 한다. 이들은 봄에 숨어 들어가서 농사를 짓고 가을에는 양식을 가지고 돌아오곤 하다가 정착하기 시작하였다. 이주 초기에는 통화, 집안, 장백, 심빈, 룡정, 화룡 등지에 정착하였다. 이 후로 만주족 발상지는 조선족과 한족이 함께 사는 지역이 되었다. 1881년 봉금령 해제와 함께 기름진 땅의 소문을 들은 조선 사람들이 너도 나도 밥이나 먹고살려고 찾아들게 되었다. 여러 가지 악조건 속에서도 그들은 화전을 개간하였고, 논을 개간하여 벼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 연변에 조선 사람들이 집단으로 정착하게 되었다. 1885년에는 길림 장군 오대징이 조선과 길조 통상 조약을 맺으면서 도문강 700리 좌안에 너비 50 리나 되는 지역을 조선족 개간 구로 정하면서 대대적인 개간이 시작되었다. 기억할만한 사건은 조선 사람들의 노력과 지혜로 벼농사가 성공함으로써 조선인의 지위는 물론 동북 지역의 경제 사정을 일변시키는데 커다란 공헌을 하게 되었다. 따라서 조선 사람들의 인식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은 계기가 되기도 했다.
♣ 동북의 벼농사에 대한 노래

만주 땅 넓은 들에
벼가 자라네 벼가 자라
우리가 가는 곳에 벼가 있고
벼가 자라는 곳에 우리가 있네.
우리가 가진 것 그 무엇이냐
호미와 바가지 밖에 더 있나
호미로 파고 바가지에 담아
만주 벌 거친 땅에 볍씨 뿌리며
우리네 살림을 이룩해 보세.
1920년대에 조선 농민들 사이에 널리 불렸던 이 민요는 동북 변경 넓은 벌에다 벼농사를 처음으로 시작하였고 계속 발전시킨 조선족 농민들의 간고한 생활과 벼농사에 대한 애착심을 아주 소박한 감정으로 진실하게 반영하고 있다. 1870년대에 들어와 동북에서 처음으로 벼농사를 짓기 시작한 곳은 통화 현 하전자라는 마을이다. 함경도에서 온 김씨라는 농민이 이곳으로 이주하여 왔다. 그 당시 연변 지역은 강수량이 적고 기온이 낮아 벼농사가 불가능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여러 해 동안 그 일대의 기후와 수온의 상태를 파악한 후 함경도로 건너가서 볍씨 몇 근을 사 가지고 와서 해 빛이 잘 쪼이는 양지쪽에 논을 풀어 심었더니 가을에 예상 밖으로 벼가 잘 여물었다. 김 씨의 벼농사가 성공했다는 소식은 넓은 만주 벌판을 논으로 바꾸어 놓았으며 쌀 혁명을 가져오게 되었다. 조선족 농민들의 피와 땀은 황무지를 옥토로 바꾸어 놓았고 살림은 제법 틀이 잡히게 되면서 오붓한 마을들이 여기저기서 일어나게 되었다. 피어 가는 조선족들의 생활 정경을 보자 피비린내를 맡은 이리 떼처럼 난데없는 폭력자들이 나타났다.
◈점산호(占山戶,지주)

이 폭력 자들은 점산호라고 부르는 데, 청조 통치자들의 비호를 받으면서 나타난 신흥 지주 계급들이었다. 이들의 출신 성분들은 관리나, 토비 출신이거나 치발역복(薙發易服, 만족 같이 앞머리를 깎고 만족 옷을 입는 것)에 순종한 망나니들이었다. 이들은 뇌물로 청조 관청과 결탁하여 토지 관리권과 소유권을 얻어내어 한없이 넓은 황무지를 절반 값으로 얻었거나 무상으로 차지하여 버렸다. 지금까지 아무도 관리하지 않던 황무지에 이때부터 점산호라는 지주 계급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점산호들이 토지를 차지하는 방식 또한 아주 가관이었는데, 강과 산을 얼추 경계로 삼아 온종일 말을 타고 한 바퀴 달린 뒤 그 안을 자기 땅이라고 선포하였다. 이런 식으로 그어 놓은 금(선) 속에는 피와 땀으로 일구어 놓은 조선족의 땅들이 있었다. 통치자들의 등을 업은 점산호들은 하루아침에 벼락부자가 되었다. 조선인들이 피와 땀으로 개간하여 알뜰하게 가꾸어 놓은 기름진 땅을 하루아침에 빼앗기고 그들의 소작인이 되거나 그들의 머슴 신세가 되었다. 이때부터는 황무지를 개간하려면 점산호들과 계약을 맺어야만 했다. 소작료는 점산호가 6 활을 차지하는 4.6 제로 하다가 3.7제 그리고 2.8제까지 올라갔다. 현물에 대한 이자는 60%로 봄에 옥수수 한말을 빌리면 가을에는 일곱 말 다섯 되로 갚아야만 했다. 점산호들의 착취를 받으면서 살아가는 그들의 생활 처지는 소나 말보다도 못하였다. 더욱이 점산호들은 청조의 통치자들의 명령에 따라 조선족과 한족들에게 치발역복을 요구하여 앞머리를 깎고 만족 옷을 입는 사람에게는 소작권을 주었고 응하지 않는 자에게는 소작권을 빼앗고 추방하였다. 조선족 농민들은 이러한 치욕적인 민족적 억압과 민족 동화 정책에 반대하여 목숨을 내 걸고 싸우며 견디어 내야만 했다.
둘째 경로는,1910년 8월 29일 간악한 일본 군국주의자들은 매국노 이완용 등을 앞세워 무력으로 한일 합병 조약을 체결하고 탄압 통치를 실시하기 시작했다. 나라 잃은 애국지사들과 뜻있는 사람들이 왜놈들에게서 나라를 되찾겠다는 일념으로 외국으로 흩어지게 될 때 주류는 중국으로 오게 되었다. 침략자들은 동양척식 회사라는 것을 만들어 조선의 농토를 몰수하여 가난한 일본인 이주자들에게 분배하여 주면서 땅의 주인인 조선 사람들은 왜놈의 소작농이 되고 말았다. 땅을 빼앗기고 파산한 농민들이 새 삶의 길을 찾아 대량으로 동북 지구와 연해주로 이주하게 되었다. 이들 대부분이 연변 4개현에 거주하게 되었다. 불완전한 통계에 의하면 1931년까지 조선인은 409,402명으로 불어나게 되었다.
세 번째 경로는, 1931년 일본 침략 제국주의자들이 9.18 만주사변을 일으켜 무력으로 동북(만주) 지역을 점령한 후 만주 제국을 세우고 퇴위당한 청조 마지막 황제 부위를 만주국의 허수아비 황제로 앉히면서 중국 본토 침략을 위한 전초 기지를 만들게 된다. 또 현지에서 식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쌀농사를 지을 농민이 필요로 했다. 나이 어린 순진한 조선의 처녀들을 취직시켜준다고 속여서 정신대로 끌고 갔듯이, 침략자들은 땅과 집을 준다는 ‘개척 이민’이란 허울 좋은 이름으로 우리 농민들을 속여서 전라도, 경상도에서 강제 집단 이민을 시켰다. 이들은 길림성 안도, 설안 그리고 흑룡강성 오상, 상지, 하얼빈, 아성, 야부리 밀산 등지에 배치되었다. 개척 농민들은 왜군의 비호 아래 중국인들의 적대 감정을 극복하면서, 굶주린 배를 움켜 안고 북방의 혹독한 추위를 견디어 내면서 개간하여 정착하기 시작하였다. 3년 동안 이주시킨 조선 농민은 48,839명에 달했다고 한다. 1945년 8월 15일 침략 군국주의자들이 망하고 해방이 되자 약 50만 정도가 조국으로 돌아가고 약 150만 명의 동포들이 동북에 남게 되었다. 조선족의 인구는 1990년 7월 1일 인구 통계에 의하면 중국에 1,925,970명으로 나타나고 있다.(2010년이 지나면서도 중국의 조선족 인구는 많이 줄어있고 조선족 자치 전, 향(읍면)이 하나 둘 사라져 가고 있는 현실이 되었다. 조선족은 전 중국에 퍼져 살고 있지만 거의 대부분이 동북 삼성에 살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 이유들이 우리 민족이 동북(만주)에 정착하게 된 원인이다. 흑룡강성에는 주로 경상도, 전라도 후손이 많이 산다. 그래서 개방 후에 친척이 많은 이곳 조선족이 제일 많이 한국에 나갔다 왔고 많이 나가 있다. 길림성 연변 지구는 함경도 자손이 많고, 요령성은 평안도 후손이 많은 편이다.
2. 연변의 역사
연변은 구석기 시대부터 안도인 이라는 원시인들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역사 시대에 들어서면서 맥(貊) 또는 예(穢)라고 불리는 선주민이 수렵과 농경을 하면서 살았다. 그 백인으로부터 주전 2세기에는 송화강 유역을 중심으로 부여가 세워졌다. 주전 1세기에는 압록강 유역에 고구려가 일어나 5세기까지 동북 지방은 고구려의 지배 밑에 있었다. 고구려가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에 의하여 무너진 후 698년에 고구려 장군인 대조영은 고구려 유민과 맥인 계통인 말갈(靺鞨)족을 거느리고 길림성 돈화현 동모산에서 나라를 세워 진(震)이라고 하였다. 713년에 도읍을 오동(지금의 돈화) 성으로 정하면서 나라 이름을 발해(渤海)라 하고 훈춘과 화룡을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발해는 고구려의 옛 영토를 회복하여 만주, 연해주, 한반도 북부를 지배하는 큰 나라로 발전하였고 지배층은 고구려 유민이 대부분을 차지하였고 일반 백성들은 말갈족이 다수를 이루었다. 당의 발달된 문물을 수입하여 발해의 문화는 해동성국이라고 부를 정도로 크게 발달하였으나 926년에 몽고 계통인 거란족에 의해 멸망한 뒤 만주 지역은 우리 역사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그로부터 200년 뒤 연변 산지에 뿌리를 둔 퉁구스 계통의 여진족이 금나라를 세워 소련의 연해주와 화북에 이르는 땅을 지배하게 되어 남송과 중국 전 토를 양분했다. 금나라는 칭기즈칸에게 망하고 몽고족이 지배하는 원나라가 세워졌다. 원나라는 명나라에게 망하고, 금나라의 부흥을 노리는 여진족의 걸출한 지도자 누르하치에 의하여 명나라는 멸망당하고 만주족이 중국 전국을 지배하는 마지막 왕조인 청조가 들어서게 되었다. 역사적으로 보면 발해 뒤에도 원, 명, 청나라는 모두 연변에 부(府)를 설치했다. 연변이란 지방의 이름은 1920년경 전후해서 생겨났는데, 세 나라 국경 변두리에 위치한 이 지방을 관할하는 관청의 이름인 “연길 변무공서”의 첫 자를 따서 연변이라고 지은 것이다. 중화 인민공화국 수립 뒤 모택동 정부는 소수 민족 집단 거주지에 대하여 소수 민족 자치권을 부여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러한 중국 인민공화국 헌법에 근거하여 1952년 9월 3일에 연변 조선족 자치구를 설치하였다가, 1955년 12월에는 자치주로 격하되었다. 길림성에는 연변 조선족 자치주가(인구 2백만 중 조선족 인구는 약 821479명) 있으며, 수도는 연길(延吉) 시이다. 연변 자치주는 연길, 도문, 돈화, 룡정, 훈춘 다섯 개의 시와 안도, 화룡, 왕청 세 개의 현을 관할하고 있다. 연변에는 조선족, 한족, 만주족, 회족, 몽골족, 장족, 묘족 등 19개의 민족들이 살고 있다. 90년 인구 통계는 208만 중 한족이 57%, 조선족이 40%, 소수 민족이 3%를 차지하고 있다. 이곳에는 유치원서부터 고등학교까지 조선어로만 교육하는 민족 학교가 많다. 연변 조선족 대학에서는 조문(潮文, 조선어)과는 조선어로만 가르치고 있다. 연변 조선족 대학은 소수민족 가운데서 제일 먼저 세워진 자랑스러운 학교이다. 1955년 9월 15일에는 조선족 5만이 살고 있는 요녕성 장백은 조선족 자치현이 되었다. -자료 : 조선족 역사와 조선족 개척사 등에서-

3.조선족의 역사적인 유산
한국 사람을 중국에서는 예로부터 조선 사람이라고 부르고 소련에서는 고려인이라고 부른다. 조선족은 2-300년에 달하는 긴 역사를 통하여 조국과의 긴밀한 유대 관계를 가져왔다. 조선족은 중국 공민으로서 모든 권리를 누리며, 동시에 조국(북한)이 외적의 침입을 받을 때에는 조선의 공민으로 돌아가 참전할 수 있었다. 건국 전에는 조선인에게는 이중 국적을 허용하다가 1946년 중. 조 합의에 의하여 조선족은 중국 국적을 소유하게 되었다. 그리고 1965-66년 사이에 중. 조 국경선이 조정될 때 조선 영토에 속해 있던 백두산 천지 절반이 중국 령에 속하게 되었다. 중국의 55개의 소수 민족 가운데 오직 조선족만이 이러한 특혜를 누리는 데는 크게 두 가지 이유를 들 수 있다.
첫째는 정치적으로는 조선족은 중국인과 함께 항일 투쟁에 참전한 동반자로서 높이 평가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는 전국의 소수 민족은 55개인데 서남 서북 동부 지방에 흩어져 살고 있다. 소수 민족의 전체 인구는 중국 인구 13억의 7%로서 9,100만에 불과하지만, 신기한 사실은 이들 소수 민족이 중국 전체 국토 면적의 60%를 차지하고 있으며 이들은 예외 없이 국경 지역에 자리하여 살고 있다. 이러한 지정학적인 면이 중국이 소수 민족을 우대하는 실제적인 이유 중하나이다. 특히 몽고와 조선족은 각각 모국에 접한 국경 지대에 널리 퍼져 살고 있다는 특성이 있다. 중국 공산 정부는 소련 같이 인구 분산 정책 같은 것을 실시하지 않아서 모든 소수 민족은 한 곳에서 집단으로 거주하면서 번성할 수가 있었다. 조선족은 긴 역사 과정에서 집단적 공동체를 이루어 살아오면서 민족 교육에 힘썼다. 이러한 자연적 특성들이 민족의 고유한 언어와 문자 그리고 풍속과 습관을 보존할 수 있었으며 특히 연변 조선족의 정치 경제 문화 교육의 중심 지구로 형성할 수 있게 되었는데 이것이 뒷날 민족 자치주가 되는 기본 조건이 되었다.
4. 무너지는 조선족 공동체
개방 이후 조선족 사회가 크게 변하고 있다. 최근 들어 조선족의 이농 현상, 도시 진출이 가속화함에 따라 민족 문화의 근거지였던 조선족 거주 농촌 사회가 해체되어 가고 있다. 개방과 함께 조선족 가정은 걷잡을 수 없이 부서져 가는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연변에서 발행되는 한 조선족 잡지의 기사는 조선족 사회의 단면을 말해 주는 듯하다.
가정을 떠나는 여성들...

“... 개방하기 전 우리 농촌에서 녀성들이 아니면 농사를 못 짓는다는 말이 있었다. 논으로 가나 탈곡장으로 가나 여인들이 주체였다. 개혁 개방이 시작되어 십여 년이 지난 오늘 우리 농촌에서는 또 녀성들이 이를 악물고 돈벌이에 발 벗고 나섰다. 적지 않은 녀성들이 눈물을 뿌리면서 집을 떠난다. 뼈를 깎는 듯한 아픔을 느끼면서도 같이 살던 남편을 뿌리치고 치마 자락을 잡고 우는 어린것을 버리고 떠난다. 흑룡강성의 한 중학교 200여 명 기숙생 중 3분의 1의 학생들이 어머니를 잃었다. 가정의 여인들은 집을 떠나고 있다. 그녀들은 타향에서 울고 있다. 울면서도 다시 돌아가려고 하지 않는다. 술 냄새 풍기는 찌그러져 가는 초가집에서 희망의 횃불이 꺼져 감을 느꼈기 때문이고, 한 번밖에 없는 인생을 낙후(落後, 뒤떨어짐)의 사슬에 매워 썩게 하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연변 여성에서-
“임시 부부”(1997년 흑룡강 신문의 기사)

극동 소련으로 돈 벌러 간 사람들도 제법 많다. 남성 또는 여성이 혼자서 위험 부담이 많은 소련에서 여러 가지 장사들을 하고 있다. 여기서 생기는 문제는 여성이 혼자서 장사해 봐야 힘도 들고 돈도 빨리 벌어지지 않고 하니 남성과 동업을 하게 된다. 사업을 확장하게 되면서 가정을 두고 온 남녀들이 임시 부부 관계를 맺어 살림을 차린다. 대개의 경우 각각 고향에 있는 배우자들의 동의를 얻는다. 이 관계는 목적한 만큼의 돈을 벌어서 헤어질 때까지이다. 그때가 언제인지 아무런 보장도 없다. 그들은 고향에 두고 온 가족에게 매월 이익금을 나누어 착실하게 보내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관계로 생명을 잃는 여성들, 가정 해체, 그리고 남성 쪽의 도벽으로 인한 파산 등 마음 아픈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거기에다가 Korea Dream은 많은 가정을 마사(부서) 트리는 직. 간접의 원인이기도 했다. 한 번 잘 살아 보기 위하여 진짜, 가짜 결혼의 길로 남편과 눈물짓는 자식들을 두고 떠나는 모진 여성들로 인하여 조선족 가정은 역사 이래 최대의 위기를 겪고 있다. 다행한 것은 97년 하반기부터 I. M. F. 파동으로 한국행이 좀 주춤해지고 있는 좋은 현상이 일어나기도 하였다.(그러나 곧 더 많은 조선족(특히 여성들)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한국으로 떠나면서 가정 해체는 걷잡을 수 없게 되었다.)
흑룡강 성의 한 조선족 마을의 경우 주민 11,000여명 가운데 최근 1-2년 사이에 3,000여 명이 도시 지역으로 옮겨간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조선족 주 분포 지역인 동북 삼성의 공통된 현상이다. 이로 인해 동북 삼성의 조선족 마을의 규모가 작아지고 있는 실정이다. 농촌 지역 인구 감소로 우리말과 글, 그리고 문화 보존의 원인이 되는 소학교와 중학교가 문을 닫고 있다. 인구 감소는 두 가지 원인에 기인한다. 첫째는 자연적인 감소로서 생활 근거지인 농촌을 떠나 도시로 이동하기 때문이며, 둘째는 부모들은 자기 자녀들이 중국에서 뻗어 나가기를 바라므로 중국 학교에 보내는 현상도 감소 원인 가운데 하나이다. 이러한 현상은 문화 쇠퇴 내지 단절 현상이 올 것으로 보고 우려하고 있다. 조선인들은 일자리가 많은 북경이나 산업이 발전하는 해안 도시로 떠나가고 있다. 북경 중앙 민족 학원 김 병호 교수는, 주로 20-40대 청, 장년층이 새로운 경쟁 사회로 뛰어들면서 자녀들의 민족 교육을 희생시키고 있으며 최고 수준을 자랑하던 조선족의 교육열이 위기를 맞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여성들은 생활수준이 높은 도시로 진출하여 한족과의 통혼 율이 많아지면서 동족끼리의 결혼 관습이 무너지고 있다. 조선족의 도시 진출은 한마디로 한족과의 동화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그러나 다른 현상은 한국 기업들이 중국에 많이 진출함에 따라 소학교 경우 중국 학교를 보내던 아이들을 다시 조선족 학교로 돌아오는 바람에 어떤 학교에서는 교실이 모자라는 실정이기도 하지만 이러한 현상은 도시 근교의 일부 현상일 뿐이다.
5. 조선족의 정체성
방문자들이 때때로 중국에 있는 조선족들의 정체성에 대해서 착각하는 데서 많은 실수를 하고 있다. 조선족은 다른 해외 동포들 같이 생각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 그들은 조선말을 쓰며 쌀을 주식으로 하는 조선 문화를 가지고 집단으로 3-4대를 한 곳에 모여 살지만 중국이 자기네 나라라고 생각한다. 또 한국이나 북한은 자기네 나라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그저 조상의 나라 정도로 여기고 있다. 그들이 우리나라라고 말할 때 그것은 언제나 중국을 말하는 것이다. 조선 사람들이 자신들이 중국 국민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을 나는 많이 보아왔다. 방문자들이 이런 동포들 앞에서 만주는 옛날 우리 땅이었으니 다시 찾아야 된다는 민족 감정에 호소해 봤자 그들에게는 반동적인 발언으로 들릴 뿐이다. 또 장백산(백두산)에 올라가서 마치 북한 쪽 백두산에라도 오른 양 착각하여 대한민국 만세 삼창을 부르짖는 것도 그들의 눈에는 괴이하게 보일 뿐이다. 왜 한국 사람들은 남의 나라 산에 올라와서 대한민국 만세를 부르는지를 달통(이해) 못하겠다고 들 한다. 오죽하면 중국 당국이 천지에서는 종교 활동이나 민족적 행사를 금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인들은 그곳에서 예배를 드려야 하고 천지 물에서 세례나 침례 식을 해야만 식성이 풀리는 분들로 인해서 천지에서 충돌을 일으키며 중국 당국을 긴장시키고 있다.
6. 소수 민족 우대 정책이 조선족을 중국 사회와 국가에 통합시키는 역할을 했다.
중국이 북한과 동맹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동안 조선족은 북한과 친밀하게 지내 왔다. 1981년 개방과 함께 한국과 중국이 경제 교류와 친척 방문이 시작되고, 1986년 아시안 게임과 1988년 서울 올림픽 이후 미 제국주의 식민지로 서울 거리에는 거지새끼들만 득실거린다던 한국이 잘 산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상황은 바꾸어지기 시작하였다. 1992년 한. 중 국교 이후 빠른 속도로 조선족은 코리아 드림을 가지게 되었다. 코리아 드림은 중국 조선족 삶의 리듬과 위상을 바꾸어 주는 역사적 계기가 되었다. 그것은 억눌려 살아온 한과 찌든 가난은 그들로 하여금 한번 어깨를 펴고 살아 보고 죽었으면 하는 바람이 이제는 꿈이 아니라 현실이 된 것이다. 그것은 가까운 곳에 잘 사는 고국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한국으로 가는 문턱은 그리 얕지만은 않았다. 한국에 가서 돈을 벌어 와서 잘 살아 보아야겠다는 열화 같은 마음들은 한국으로 가기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되었다. 남자들을 위해서는 위장 취업, 그리고 여자들을 위해서는 결혼 또는 위장 결혼이 주종을 이루고 있는 편이다. 결혼 또는 위장 결혼은 기혼녀가 처녀로, 남편과 아이가 있는 여자가 이혼 독신녀로, 30대가 20대로 둔갑하며, 그들을 위하여 새로운 호적과 증명서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코리아 드림은 조선족의 정체성에 대한 혼란을 가져오는 원인이 되고 있다. 조선족 마을에는 여자들은 적어지면서 장가를 가지 못하는 30대 노 총각들과 부인을 잃은 홀아비들이 심각한 사회 문제가 되고 있는 형편이다. 공화국의 소수 민족의 혜택 때문에 민족 교육은 잘해 왔고 문화유산은 잘 지켜 올 수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개방된 중국 사회로 뻗어 나가려는 2세들의 앞길에는 많은 장애가 놓여 있다. 우선 언어가 서툴고 한족과 함께 어깨를 겨룰 만큼 사회, 문화적으로 동화되어 있지 못한 편이고 실력 면에서도 문제가 있다 하겠다. 중국에서의 조선족의 장래는 해결해야 할 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 것 같다. 조선족이 잠시 중국 사회에서 돋보이는 것 같이 보인 것은 한국 때문이었다. 갑자기 돈이 많아진 조선인들은 목에 힘을 주게 되었고 시시한 일은 하지 않는 귀족 풍이 되었다. 한족들의 부러움을 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조선 사람들의 가정 해체, 사치스러운 생활들을 보면서 한족들은 머리를 흔들고 있다.
김제화/ jewhakim@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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