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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중국알아보기

중국의 기독교 역사(1)

   반세기 만에 죽의 장막이 열리면서 숨겨져 있던 실체가 드러나게 되었다. 유토피아를 건설한다던 사회주의 모습은 헐벗고 병든 나약한 모습으로 세계를 향해 동정의 손짓을 하게 되었다. 반세기 동안 붉은 사상의 교육은 중국 모든 사람들을 붉게 물들이지 못한 체 울긋불긋한 미완성의 작품으로 끝나고 말았다. 이제는 각자가 원하는 데로 자기를 완성해 가야 하는, 즉 자기가 있는 시대가 되었다. 중국 속담에 “한 목표를 향한 세 갈래 길이 있다”는 말이 있다. 지금 중국은 오천 년 역사의 유산인 전통문화와 반세기 동안에 만들어진 사회주의 문화 그리고 밖에서 밀려오는 외세 문화의 영향을 받으면서 중국 특유의 종합된 문화를 형성해 가고 있다. 이제 우리는 지난 13세기 동안에 중국 복음화에 전력을 다한 선구자들(경교, 천주교, 기독교)이 어떻게 중국인들에게 접근하여 복음을 전하였는가를 되돌아보면서 오늘의 중국을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1. 경교(景教,Nestorian)의 선교

  네스토리안은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인 네스토리우스(Nestorious)에 의해서 생겨난 기독교의 한 분파로 시리안(페르샤)계 기독교, 동방교라고도 부른다.(그리스 동방정교회와는 다름) 네스토리우스는 촉망받는 신학자였다. 로마 가톨릭이 이교화 된 뒤에 소 아세아의 종교의 아데미 여신 같이 마리아의 위격을 높여 신성화하는 과정에서 신학적인 큰 다툼이 있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로 부르는 것이 옳으냐 아니냐 하는 호칭 문제의 토론 중심에 네스토리우스가 있었다. 이교화 된 가톨릭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낳은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로 부르는 것이 옳다는 주장이 대세였다. 네스토리우스는 “그리스도의 위격은 하나가 아니며, 신격과 인격이라는 두 개의 성격으로 구별해야 한다고 보았다(이성설, 二性說). 이 경우 인성으로써 예수를 낳은 마리아에게 ”하나님의 어머니(테오토코스, Θεοτοκος)“라는 호칭을 사용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마리아의 호칭 문제에 대한 네스토리우스의 주장이 옳다. 그러나 그리스도의(단성론) 신성을 반대하고, 마리아가 잉태하여 낳은 인간의 아들, 예수의 인성 만을 강조하는 주장을 굽히지 않아서, 결국 413년 에베소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정죄되어 리비아로 추방당했다. 그러나 추방 뒤에도 네스토리우스는 많은 추종자들을 얻었으며, 여러 세기 동안 번성하였고 특히 선교에 열성적이었다. 지금도 그들은 이라크 북부와 시리아에서 활동하고 있다.

 

경교의 당나라 선교

  578년 동방으로 퍼져 나가던 경교는 서방과의 활발한 교역으로 인하여 경교 상인들이 Silk Road(비단길)를 따라 상품과 함께 복음을 가지고 당나라 서울 장안(지금 서안)에 들어오게 된다. 경교 상인들에 의하여 복음이 전해지자 635년 경교 수도사 Alophen(阿羅本) 이 국제적 색채가 짙은 장안에 오게 된다. 그리고 이듬해 경교의 선교사 알로펜은 당 태종의 환영을 받는다. 황제 자신이 성경을 연구하면서 포교 활동을 하도록 허락한다. 그들은 주요 도시에 약 50개의 교회당을 세우면서 선교의 지역을 넓혀가게 된다. 네스토리안 교는 중국에서 경교(景敎)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불렸고, 또 페르시아 교회라는 뜻인 파사사(波斯寺)라고도 불렀다. 경교라는 이름은 중국어로 “빛의 신앙”이라는 뜻이 있으며, 당나라 현종(玄宗) 때에는 경교가 대진사(大秦寺)라고 이름을 고쳐 부르게 되었다. 그들은 중국 종교와 문화에 접근하여 복음을 전하려고 그것들을 수용하는 태도를 취했다. 교회당도 도교와 불교 사원 비슷하게 건축했으며, 예술적 표현도 모방했다.의복과 머리 모양 등 여러 가지 관습들을 모방했다. 그리고 도교와 불교 승들과 자주 어울렸다. 할 수 있는 대로 복음을 중국 종교와 문화를 통해서 나타내고 표현하려고 노력했다. 또한 중국인들에게 외래 종교라는 이질감을 주지 않으려고 애썼다. 당시 경교는 중국 사람들에게는 불교의 한 파 같은 인상을 주었다. 황제의 허락으로 주요 도시에 약 50개의 교회당이 세워졌다. 당대 말엽에 와서 도교의 영향을 받은 황제들이 도교를 숭상하면서 외래 종교들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었다. 그동안 중국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불교계가 탄압을 받으면서 경교도 아울러 심하게 박해를 했다. 주후 845년 황제의 칙령에 의해 외래 종교의 교회당, 사원 등 모든 재산들이 몰수되었고 포교 활동도 금지되었다. 이러한 박해 속에서도 불교는 살아남을 수 있었지만 경교는 그렇지 못하였다. 경교는 황제의 후원에 의존하면서 안주하는 동안 중국 사회에 깊숙이 파고들지 못했다. 그리고 장차 중국인들에 의하여 교회가 자립하고 발전하도록 중국인 지도자들을 키우는 토착적인 선교를 하지 않았다.

 

960년에 일어난 송(宋) 나라에 의하여 경교는 심한 탄압으로 사라져 갔고 환난을 피해 경교의 그리스도인들은 북쪽 지방에 살고 있는 몽고인들에게로 들어가 살면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몽고의 공주를 비롯해서 많은 개종자를 얻게 된다. 이때 천주교도 로마의 감독이 순교를 당하면서 핍박을 받으며 사라지게 된다. 이로 인하여 중국은 약 300년 동안 복음을 듣지 못하는 선교의 공백 기간이 생겼다. 1280년 몽고의 위대한 장수 칭기즈칸이 일어나 중국을 통일하고 원 제국을 세우면서 그 세력이 유럽까지 뻗히게 되었다. 이 시기에 몽고인의 호의를 받던 경교 수도사들이 원제국의 황궁에서 중요한 직위에 올랐다. 이때부터 경교가 다시 한번 중국에서 선교의 꽃을 피우게 되었다. 경교가 번성해 가고 있던 13세기말에 천주교의 프란체스코의 수도사들이 원 제국에 들어와 황제의 허락을 받아 선교를 시작하게 된다. 경교와 천주교는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일에 있어서 중국에서 그들은 하나 될 수가 없었다. 신학적인 차이로 마찰을 물러 일으키면서 중국인들에게는 좋은 간증을 주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선교에 대한 장애물을 스스로 만들었다.

 

대진경교유행 중국 비(大秦景教流行中國碑) 

중국 서안(당나라 서울 장안)에 가면 비만 모아 놓은 비림(碑林)이라는 박물관이 있다. 그곳에 이 경교의 기념비가 있다. 이 비는 중국 당(唐)나라 황제 건중(建中) 2년(781)에 장안 서녕방(西寧坊)의 대진사(大秦寺)에 세워진 경교(景敎)의 중국 전래를 전하는 비석으로 경교(景敎)가 중국에 들어와 635년부터 150년간 있었던 선교활동 및 교세의 역사가 새겨져 있다.  이 비가 땅에 묻혀서 버려져 있다가 대(明代)에 발견되어 시안 비림박물관(西安碑林博物館)으로 옮겨져 보관되고 있다.         

                                                                                            

431년에 에베소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몰려 금지당한 네스토리우스 파는 이후 서아시아・중앙아시아로 전파되었다. 그 무렵 당 왕조는 서방으로 국위를 떨치고 있었고, 정관(貞觀) 9년(635)에 아라본(阿羅本)이라는 이름의 선교사가 처음 경교를 중국에 전했다. 이후 악 150년간 당 왕조의 보호를 받으며 경교는 융성했고 당 건중 2년(781)에 중앙아시아의 투카라 국발흐 출신으로 당 왕조에 중용되어 광록대부(光祿大夫)・삭방절도부사(朔方節度副使)・시전중감(試殿中監)이 된 이사(伊斯, 이드즈두브지드Izadbuzid?)라는 자가 자금을 대어 이 기념비를 장안 서녕방의 대진사에 세우게 되었다. 비석에는 경교의 교의와 중국으로의 전래사가 담겨져 있다. 그러나 9세기 무렵 즉위한 무종(武宗)은 도교(道教)를 숭상하면서 불교 등 외래 종교를 탄압했고(회창폐불) 경교도 함께 탄압을 받아 많은 대진사가 파괴되었다. 그 무렵에 비석도 땅 속에 파묻히게 된 것으로 보인다.

 

비석은 검은색 석회석으로 높이는 거북이 받침돌(龜趺)를 제외하고 약 270cm, 폭 평균 약 100cm, 두께 약 28cm이다. 맨 위에 십자가가 새겨져 있고 그 아래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教流行中國碑)」라 쓰여 있다. 비문은 32줄로 각 줄은 62자씩 약 1900자가 새겨져 있다. 경교의 승려 아담(경정 景淨) 이 글을 짓고 글씨는 여수암(呂秀巖)이라는 사람이 쓴 것으로 격조가 높다. 비석 아래에는 한자 외에 시리아 문자로 경교 승려 70인의 이름을 새겨져 있다. 

 

첫 번째 선교사 추방
모양과 내용이 다른 두 파는 황제의 보호 아래 원나라 멸망 때까지 선교를 하였다. 1368년 원나라가 한족에게 멸망하면서 경교의 선교도 종말을 가져온다. 1380년 명나라 황제 티무르는 몽고족에 대한 반감으로 몽고인의 보호를 받으며 번성한 외래 종교인 경교를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드디어 황제는 경교의 수도사들을 추방하는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경교 그리스도인들은 황제의 치명적인 탄압에 견디지 못하여 중국 사회에서 사라져 갔고, 몽고족 또한 이슬람 화 되어 가는 과정을 통하여 경교는 몽고족 사회에서도 사라졌다. 황제의 보호 속에 시작된 경교, 중국에 정착하고자, 불교, 도교 그리고 유교의 개념과 중국의 전통적인 문화를 수용하면서 경교 특유의 방법으로 복음을 전하면서 박해도 있었지만 세 개의 제국(당, 송, 원)을 거치는 8세기 동안 부흥을 누렸음에도 불구하고 정착하지 못했다. 

 

2. 로마 가톨릭 선교

 1266년 원나라 초에 마르코 폴로가 중국 여행에서 돌아와 교황에게 황제 쿠빌라이 칸의 친서를 전달하였는데, 그 서신의 내용은 100명 이상의 수도사들을 중국으로 보내 달라는 황제의 청원서였다. 만일 로마가 이 요청에 신속하게 대응 했더라면 중국의 역사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20년이 지나서야 프란시스칸 수도사 John 일행을 보냈다. 황제의 환영을 받은 그들은 열심히 포교 활동을 했다. 그러나 1369 원제국의 멸망과 함께 천주교도 중국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16세기에는 유럽의 팽창주의에 따른 식민 제국주의가 나타나 발전하고 있었다. 이 시기에 서양 사람들이 중국과 통상을 하고자 문을 두드리고 있었지만, 명나라 정부는 마카오 섬에서만 교역을 하도록 허락하고 외국인들도 그곳에서 머무를 수 있도록 했다. 로마 가톨릭 수도사들이 여기에서 중국어를 배우면서 중국 선교를 준비하고 있었다. 드디어 1538년 예수회(Jesuit) 수도사 Matteo Ricci(리찌)와 그 일행이 허가를 얻어 광주 땅에 발을 디딤으로 중국 선교는 시작되었다. Ricci의 문학, 수학, 시계수리, 지도제작 기술이 황제로부터 인정을 받아 1601년에는 황제의 허가로 북경에 머물게 된다. 그들은 중국 적응을 위하여 중국 문화를 먼저 받아 드리면서 북경에서 지식층들에게 선교하기 시작하였다. RICCI의 선교 전략은 전적으로 중국 문화의 수용이었다. 그들은 하나님 공경과 함께 공자 공경, 조상 공경을 했고, 하나님을 중국 전례 이름인 상제(上帝) 또는 천(天)이라고 불렀다. 20년의 수고와 노력 끝에 영향력 있는 학자 관리들을 개종자로 얻었다. 그들로 인하여 복음이 왕궁에까지 들어가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가톨릭 선교의 기틀을 마련한 Ricci는 610년 북경에서 사망했다. 1644년 만주족이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청조가 들어선다. 제국은 바뀌었어도 천주교는 계속 번성하고 있었다. 청의 황제 강희제는 천주교의 법적인 지위를 보장하는 칙령을 내리기까지 했다.                
                                        

천주교의 의식 논쟁

가톨릭 선교는 원, 청조의 지지아래 예수회 프란시스칸에 의해 전성기를 누리던 1634년 가톨릭의 일파인 도미니칸 수도사들이 중국에 들어오므로 서 천주교 선교는 비운을 맞이하게 된다. 도미니칸 수도사들은 예수회 수도사들이 선교한 중국 천주교회가 공자와 조상을 하나님과 함께 공경하는 것을 보고 중국 천주교회는 이교 화 되었다고 판단했다. 그들은 즉시 이러한 일들을 폐지하고 하나님의 이름도 상제(上帝)나 천(天)이라고 쓰지 말고 천주(天主)라고 써야 한다고 항의했다. 이로 인해서 양파 간에는 거의 일세기 (1845- 1742)에 이르는 기나긴 의식(儀式) 논쟁이 시작되었다. 의식 논쟁은 로마 교황에게 보고되고 로마 종교 법정에서 문제가 되고 있었다. 예수회 수도사들을 아끼는 황제 강희제는 궁지에 몰려 있는 그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편지를 교황에게 보냈다. 

 

“공자는 신이 아니라 스승으로서 공경을 받을 따름이며, 조상 공경 또한 추모의 행위 일 뿐 종교적인 예배가 아니라”고 공식적으로 해명해 주었다.

 

1704년 강희제의 해명에 대하여 교황 Clement II세는 공자, 조상 공경을 즉각 중지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천주라고 쓰지 않는 한 중국 천주교인들을 파문하겠다고 경고를 내렸다.

 

두 번째 선교사 추방 

이러한 교항의 태도에 강 황제는 내정 간섭으로 간주하고 노하여 리찌가 세운 강령들을 따르는 수도사들만 중국에 머무를 수 있다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다가 강희제의 후계자인 건륭 황제는 1717년 천주교를 불법화하는 칙령을 내리면서 뒤따라 가톨릭 선교사들을 추방했다. 그리고 성당을 파괴하고 예배를 금지했다. 모진 박해로 순교자들이 늘어나게 흩어지면서 천주교는 약해졌다. 의식 논쟁은 중국인들에게 천주교에 대한 호의를 잃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정권의 비호를 받으며 번성했던 천주교, 문화 수용을 통한 훌륭한 선교 전략을 가지고 있었지만, 가톨릭도 중국에 정착하지 못했다. 같은 가톨릭 형제들이 선교지에서 현지 사람들 앞에서 의식 논쟁을 일으킨 것은 심히 어리석은 일이었으며 선교의 자멸을 가져왔을 뿐이었다.

 

3. 기독교의 선교

 19세기는 서양의 식민 제국주의가 아프리카, 남미, 아시아 지역으로 뻗어나가고 있었던 때로, 과학과 기술이 발달한 식민제국주의는 강한 군사력으로 힘없는 민족들을 위협하며 식민지화하고 있었다. 잔인하고 무자비한 식민 제국주의자들은 기독교라는 종교와 그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특히 중국 선교는 식민주의자들의 총칼의 비호를 받으면서 이루어졌다는 사실로 역사적인 비판을 받고 있다. 개방되어 가는 중국이 여전히 서양 기독교를 양교라고 하여 경계하는 원인은 여기에 있는 것이다. 교회사가인 Kenneth S. Latourette는 19세기 중국에서 기독교 선교는 경제적, 정치적, 지정학적 요소들이 작용함으로써 가능했던 것으로 그 역사는 서양의 중국 침략 사와 맥락을 같이 한다고 말했다. 19세기의 중국은 서양과 일본 식민 제국주의자들의 침략으로 봉건주의 왕조가 무너지면서 국민들이 근대화에 눈을 뜨게 된다. 이 격동의 시기에 기독교 선교의 물결이 밀려오기 시작하였다. 기독교 선교사들이 싱가포르에서 중국어와 문화를 배우면서 성경 번역과 전도지, 서적 등을 인쇄하면서 중국 선교의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1807년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Robert Morrison 목사가 영국 성서 공회 선교사로서 그 신분을 감추고 영국이 인도를 착취하기 위하여 만든 동인도 회사의 고용인 자격으로 중국 땅을 밟으므로 서 기독교 선교가 시작되었다. 그는 성경을 중국어로 번역하는 사명을 가지고 왔는데 12년간의 각고 끝에 영국 킹 제임스 성경을 중국어로 번역하여 중국 성경전서를 내놓았다. 그래서 지금도 중국 성경은 본문은 King James 성경이다. 그리고 반세기 후인 1853년에 가서야 Hudson Taylor 선교사가 도착한다.                              

          

                                                                             

 

1) 의화단(義和團,Boxer Rebellion) 운동

19세기 후반부터 중국 각지에서 일어난 반기독교 운동을 가리킨다. 중국에서는 구교(仇敎) 운동이라고 하는데 ‘구 仇’자는 원수라는 뜻이다. 사실 구교 운동은 기독교보다는 천주교에 대한 원한에 더 원인을 두고 있다 하겠다. 1860년에 체결된 북경 조약 중 제 6조는 프랑스 선교사의 포교 활동을 방해하는 자는 처벌하고 과거 중국이 몰수했던 교회, 토지, 가옥 등의 재산을 반환하며, 선교사에게는 각성에서 토지의 임대나 구매 그리고 교회의 건설이 허용된다는 점 등이 규정되어 있었다. 조약 중에 이러한 내용들은 천주교 선교가 무력 정책에 의해 실현되었으며 또 포교에 수반된 분규가 군사적, 정치적, 경제적 침략에 이용되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중국에서의 포교는 제국주의적 세속 권력을 배경으로 그것과 밀착되어 진행되게 되었고 그에 따라 구교 운동은 점차 반 제국주의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이 운동은 중국 정부가 뒤에서 후원하여 중국 관리들과 빈곤한 농민들이 봉기하여 제국주의자들과 개종한 중국 기독교인들을 제거하기 위해서 일어난 폭동이었다.

 

기독교에 대한 좋지 못한 유언비어들도 퍼져 있었는데 예를 들면,“교회가 버려진 어린이들을 납치하여 잡아서 그 고기를 먹는다. “시체에서 눈동자를 뺀다”는 등의 유언비어도 폭동의 계기로 작용하기도 했다. 이 사건으로 독일 공사 Klemes Von Ketteler 을 위시한 많은 외교관과 선교사들과 가족들 약 250명이 살해되었다. 그리고 양귀자(洋鬼者, 서양 귀신들린 자)라고 낙인이 찍힌 중국인 기독교 개종자 약 1900명과 천주교 개종자 약 30,000명 이상과 47명의 성직자들과 수녀들이 의화단의 손에 의하여 살해되었다. 이런 엄청난 재난들을 통하여 중국 선교 사역 자체가 한 때 주춤할 정도였다. 1898년 사천성 동부의 룡수진에서는 6,000여명의 민중을 동원한 지도자 쉬둥씬은 양인(洋人)들이 통상 무역과 예수(耶蘇)의 선교를 이용하여 일반 백성들의 삶의 수단(농상의식,農桑衣食)을 빼앗고, 아편으로 우리 땅을 더럽히고,리 조정을 모욕하고,우리 도시를 점령하고...복주를 개항 시켜 국토를 분할하려하고 있다. 우리들 의민은 이에 의병을 일으켜 국치를 씻으려 한다고 부르짖으며 외세에 대항하여 일어섰다. 

 

             

 

 

2) 태평천국 운동(太平天國之亂, Taiping Rebellion,1851년~1864년)

이 난은 청국 정부가 진압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외세의 도움을 요청하여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일본, 러시아 등의 18,000명의 8개국 연합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1901년 9월 청국과 열강(11개국) 사이에 “북경 의정서”가 체결되었는데 그 내용을 보면, 배외파(排外,외국의 문물이나 사상을 싫어하는) 고관의 처벌과 앞으로 배외 운동이나 구(仇)교 운동에 대한 철저한 진압의무 강요. 대길에 있는 청군 포대 철거, 북경의 공사관 구역 및 그 곳과 항구를 연결하는 교통 요지에서의 군사 주둔 권 승인, 총액 4억 5천 만 량의 배상금(청조 당시 세입의 4년 6개월분)을 년 1리  4부로 39년간 분할 지불할 것을 규정. 이 의정서에 의해 청조는 “양인의 조정”으로서만이 생명을 유지할 수 있게 되어 중국의 반식민지화가 완성되었다. 완전한 식민지화를 면한 것은 열강 사이의 이해 대립과 세력 균형에 의한 것이기도 했으나 의화단의 강렬한 투쟁을 보고 그들이 중국을 직접 지배한다는 것은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중국은 열강의 나라에 나라를 송두리 채 빼앗길 수 있는 빚, 즉 한번에 갚을 수 없는 엄청난 빚을 진 처량한 나라가 되었다.

 

이런 와중에서도 주님은 중국 선교를 축복하여 주셔서 1890년경에는 중국인 개종자의 수는 112,808명으로 늘어났고 2,000명의 선교사와 1,600여명의 중국 사역자들이 중국 복음 사역에 동참하게 되었다. 한편 허약해진 청국 정부는 내적인 힘을 기르기 위하여 서구의 과학과 기술 그리고 학문을 중국 지식인들에게 장려하고 있었다. 선교사들이 운영하고 있는 교육 기관들은 이러한 욕구들을 채워 주는데 일익을 담당하고 있었다. 선교사들은 교회와 학교 그리고 병원에서 서양 문명과 문화로서 중국을 지배하고 있었다. 봉건주의 사회가 낙후 되어가든 중국은 선교사들로 말미암아 근로자와 농민의 복지, 여성들의 인권 신장, 공공의 보건 분야, 학문과 그리고 기술 분야에서 큰 혜택을 받게 되었다. 선교사들은 학교에서, 병원에서, 고아원에서, 교회에서 그들의 삶이 다하도록 헌신적으로 봉사했다. 1922년대에는 약 8000명에 달하는 선교사들이 중국에서 활동하였다. 1930년대의 중국 엘리트의 35%가 기독교 교육을 받았고, 간호사의 90%가 그리스도인이 이었으며, 병원의 70%가 기독교계 병원이었다.

 

 

태평천국의 난은 한마디로 홍수전(洪秀全)이 세운 기독교적인 이념의 신정(神政) 국가라 할 수 있다.

태평천국운동이 일어나게 된 배경은 열강에 진 빚을 갚기 위하여 백성들을 수탈하는 일들을 통해서 백성들의 생활은 곤궁해지고 관리들의 횡포와 부정부패로 백성들의 원성은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이때 홍수전이라는 인물이 시대의 영웅으로 나타나게 된다.  홍수전이라는 인물은 기독교전도를 받은 뒤 자기가 꾼 꿈과 기독교의 신앙을 결합함으로써 기독교적 이상 국가를 세우려고 하지만 가면서 무력화되면서 혁명정치 집단이 된다. 그가 병석에 꾼 꿈의 내용을 간추리면, “상제(上帝), 야훼라 생각되는 금색 머리에 검은 도포를 입은 기품이 넘치는 노인에게서 "이 검으로 사악함을 물리치라"는 계시와 함께 파사검(破邪劍,사악함을 물리치는 검)을 선물 받고, 또 중년 남자로부터 요사스러움을 없애는 도끼를 받았다는 것이었다. 그는 병이 낫자 광저우에서 시험을 보기 위해 갔을 때, 침례교 선교사로부터 권세양언(勸世良言)이라는 전도지를 받고 자기가 꾼 꿈을 노인은 야훼이고, 중년 남자는 예수이며, 자신은 예수의 동생이라고 자신이 꾼 꿈을 기독교적인 논리로 이해하게 된다. 또 모리슨이 성서를 번역할 때 하나님(God)을 중국의 토착종교의 신인 '상제'란 말로 번역하였는데, 그는 바로 상제가 바로 성경의 야훼(하나님)라고 믿으면서 야훼, 즉 천부상주황상제(天父上主皇上帝)만이 유일신이라는 교리를 강하게 의식하여 우상파괴를 열심히 했다. 처음부터 이들은 혁명적인 집단은 아니었다. 신앙공동체로서 공산공존하는 사회와 나라를 이루고자 했다. 그러나 관군이 그들을 치므로서 이들은 악의 세상을 뒤집어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자 했다. 이상적인 국가건설을 위한 그의 포교에 사람들이 구름 떼같이 모여들자 무기를 만들면서 군대조직으로 편성되었다. 순수한 종교집단이 아니라 이제는 혁명정치집단이 되었다. 무력한 청국을 뒤엎고 태평천국을 이루기 위하여 14년 동안 벌인 대규모 내전이다. 그들의 무서운 세력은 중국의 남부 전역을 장악하면서, 북경 가까이에 진격하여 위협하였지만 뜻을 이루지 못한 채 태평천국운동은 엄청난 살상과 피해를 남긴 채 끝나게 된다. 홍수전이 기독교적 이상 국가를 만들려고 했을 때 올바른 기독교의 가르침을 받아 건전한 신앙운동으로 승화되었더라면 중국은 크게 변화하였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3. 국민 혁명(1911-12)

만주 족이 이끄는 청국 정부에 대한 한족의 불신과 불만이 고조되고 있었다. 허약해 질대로 허약해진 청국 정부로부터 중국을 구할 수 있는 길은 혁명 밖에는 다른 길이 없다고 중국 지식인들은 생각하게 되었다. 이 혁명의 지도자들은 서양의 과학과 민주주의에 심취되어 있었다. 혁명을 이끈 국민당의 지도자 손문과 그의 후계자 장개석은 명분상 기독교인이었다. 혁명의 결과로 허약한 청 왕조가 쓰러지면서 4천년에 이르는 황제 지배의 체제가 사라지고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손문은 외세로부터 나라를 구하기 위하여 민족주의를 발전시켰다. 민족주의를 결속시키는 방편으로 유교를 내 세우게 된다. 그리고 1924년에는 비기독교 학생들이 기독교계 학교에서 종교 교육을 강요받는 일이 없도록 금했다. 민족주의가 중국에 팽배해 지자 선교기관도 이러한 영향력에 대응하기 위하여 중국인들이 스스로 중국 교회를 치리하며 자립해 나가도록 격려하게 되였다. 1930년대에 와서는 외국 선교사들은 중국 교회 지도자들의 지도력 밑에 들어가 일하면서 중국인들과 일체감을 가질 수 있도록 노력했다.

 

4. 사회주의 혁명(1945-1949)
세계 2차 대전 중에는 국민당과 공산당은 그 동안의 이념 투쟁을 중단하고 영토 회복을 위한 이름아래 합작하여 항일전에 참전하였다. 그러나 2차 대전이 끝나자마자 국민당과 공산당은 영토의 주도권을 놓고 내전에 휘말리게 된다. 사년 동안의 내전은 중국 전역을 황폐케 했다. 국민당은 미국에 기대고 있었지만 공산당은 외세를 타파하는 철저한 민족주의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내전동안 국민당의 부정, 부패와 비리는 국민들의 불신을 산 반면, 공산당은 국민에게 쌀 한 톨 바늘 한 개라도 폐를 끼치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키므로 서 국민의 신뢰를 얻었다.

 

공산당이 승리할 수밖에 없었던 다음과 같은 실화가 있다.

“한 마을에 쫓기는 공산당 군인들이 한 밤을 묶게 되었다. 그들은 주민들의 쌀 한 톨도 축 내지 아니하고 다음날 조용히 떠났다. 그 뒤를 이어 국민당의 군인들이 들어왔다. 이들은 마을 촌장을 불러 군인들을 위한 음식과 고기 그리고 술을 가져오도록 명령했다. 그리고 그 밤에 국민당 군인들은 마을의 한 처녀를 겁탈했다. 다음날 이들도 떠났다. 마을 사람들은 누가 더 인민을 위하는 당인가를 판단하게 되었고, 국민당 군인들에게 유린당한 소녀는  공산당을 열렬하게 지지하는 공산주의자가 되어 혁명을 완수하는데 크게 기여했다고 한다.”

 

“또 한 실례는 해방이 되자 장개석 정부는 치안질서를 유지한다는 이름으로 친일 앞잡이 관리들을 공안 행정 책임자를 삼았다. 나의 고향 목단강 지역의 예를 들면; 목단강 지구(하얼빈과 가목사를 포함하는 넓은 지역) 행정 책임자로 친일 앞잡이로 일제 밑에서 목단강 경찰 서장으로 있던 [허몽둥]이를 세웠다. 그는 악질 지주로 있을 때에도 일제 밑에서 많은 동족을 죽인 살인마였고, 경찰 서장 시절에는 어떠했겠는가? 이런 자가 다시 권력을 잡게 되니 세상이 어떻게 되겠는가? 인민 해방군이 들어오자 그들은 산골로 들어가 악질 토비가 되어 토벌 될 때 까지 백성을 살상했다. 국민당 정부는 인민을 위한 바른 정치를 하지 않고 권력 유지를 위한 정치를 했으므로 망할 수밖에 없었다. 목단강 일대는 바로 토비들의 활동 무대였다. 토비들의 이야기는 임해 설원(林海雪原)이라는 소설과 영화로 중국 전역에 유명하게 알려 졌다. 그 책을 사고자 했지만 조선어는 전에 한 번 나오고 다시 나오지 않아서 구할 길이 없었다. 누가 목단강 조선족 도서관에서 빌려다 주어서 읽어 보았다. 내가 중국 남방이나 다른 성에 가면 거기 사람들이 나에게 왜 토비들이 사는 곳에 사느냐고 하면서 흑룡강 성을 나쁘게 말들을 하여 놀랐는데, 이제는 그들이 왜 그렇게 말하는 지 잘 알게 되었다.

 

4년간에 걸친 국공 내전의 이념 투쟁에서 모택동이 이끄는 공산당이 승리함으로서 장개석은 대만으로 물러가고 중국은 공산화되었다.1949년 10월 1일 통일된 중국에는 중국 공산당이 영도하는 중국 인민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중국이 반 서구, 반제국주의 그리고 무신론의 이데올로기를 가진 공산당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자 약 50만 명이 넘는 중국인들이 자유를 찾아 세계에 흩어지게 되었다. 이때부터 공산 중국은 죽의 장막을 치고 외부 세계와 단절하고 쇄국의 길을 가면서 사회주의 이상 국가를 이루려고 노력하게 되었다. 그리고 공산정부는 기독교를 누르는 곰의 큰 세력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시베리아와 만주의 중국 선교
한국 침례교회는 열성적인 전도 활동으로 1940에 이르기까지 국내 100개 교회, 만주에 100개 교회, 시베리아에 40개 교회 그리고 몽고에 몇 개의 교회를 개척하면서 선교를 확장해 나갔다.
          

1.시베리아 선교
1918년 9월 박노기, 최응선, 김영태, 김희선 4분의 선교사가 시베리아 선교의 사명을 가지고 처자를 버려둔 체 다시 오지 못할 험한 길을 떠나게 되었다. 보시엘 해에서 배를 타고 가던 중 1921년 10월 20일 모카우라는 곳에서 돌연히 풍랑을 만나 배가 전복됨으로 선교의 꿈을 이루어 보지도 못한 채 장렬히 순교했다. 그러나 그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아 이 순교의 소식을 들은 불신자들이 그분들이 우리들을 예수 믿게 하려고 오다가 돌아 가셨으니, 그분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면서 예수님을 믿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다.

 

2. 만주 선교의 순교자들
1921년 손상렬 선교사가 만주 임강현 연안에 개척교회 활동 중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어 조선 독립당의 첩자라는 누명을 쓰고 총살형으로 순교하다. 1925년 4월 만주 길림성 화전 현에서 개척 선교 활동을 하던 김상순, 안성찬, 이창희, 박문기, 김이주, 윤학영, 6분은 같은 동족인 조선 독립당원들에게 일본군의 첩자라고 오인을 받아 총살형으로 순교하다.

 

김영진 목사와 형 김영국 장로의 순교

1932년 10월 14일 만주 연길현 화첨자 종성동 침레교회에서 김영진(45)목사와 그 형 김영국(48) 장로가 30명의 무장 공산당에게 배교를 강요 당했으나, 오히려 회개하고 예수를 믿으라고 전도하다가 피부가 벗겨지는 고문을 받다가 저들의 총탄에 피살되었다. 아래 신문은 김 순교자 형제의 비보를 실은 그때의 기독신보이다.  목사 형제의 순교로 그 뒤 교회는 크게 부흥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리고 그들의 후손들은 오늘날 연길 시의 신풍교회를 이루면서 삼자교회와는 상관없이 종교 국의 허가 아래서 복음의 기치를 들고 혁혁하게 여러 지역으로 뻗어나가고  있다.

 

             

연변 주의 종교정책은 국가의 기본정책과 또 다른 성 과도 좀 다른 점이 있다. 연변주는 일본제국주의 시절부터 있던 교파를 인정하여 그 나름대로 교리와 전통을 유지하도록 허가를 해 주고 있었다. 즉 장로, 감리, 성결교회는 비슷하니까 하나로 묶어서 삼자교회로  그리고 침례교회와 제칠 일 안식교를 인정하여 따로 허가해 주고 있다.  

 

 

England Plymouth Brethern Assembly의 중국 선교

영국 형제교회도 중국 남부에 선교사들이 활동하였다. 옛날 지도여서 광동어로 지명이 표기 되었있다. 주로 Zhejiang, Jiangxi, Fujiang 성 중심으로 주변 성으로 선교를 하였다. 1885년  Brandford and Molland 형제가 영국으로부터 Jiangxi(Kiangsi)에 도착하여 1951년에 중국 공산당 정부에 의하여 외국인 추방령으로 선교를 마감하게 되었다.

 

자료는 영국 Echoes Service에서 발행한 "Turning the World Upside Down"에서

 

 

† 미국 남침례교의 중국 선교(Southern Baptist Mission in China)
  나는 여기서 미국 남 침례교회도 1845년부터 중국 선교를 시작하여 1856-1912년 사이에는 전도자, 교사, 저술가, 성경 번역가, 의사 등 전문인들이 상주하면서 복음이 서쪽으로 그리고 북쪽으로 퍼져 나가고 있었다. 1866년 Dr. Graves에 의하여 ‘Graves Theological Seminary가 개교되어 중국 일꾼들을 양성하기 시작했다. 많은 선교사들이 삶을 바쳐 중국을 섬겼는데, 그 가운데서도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서 중국 사람들을 사랑하고 복음을 전하다가 영양실조로 희생한 Miss. Lottie Moon이라는 여성 선교사를 소개하여 본다. Miss. Lottie Moon의 이야기는 나눔의 한 마당에서 볼 수 있다. 

 

 

3. 몽고 선교
1928년 이현태 선교사는 몽고로 가서 3개의 개척 교회를 세우고 전도 활동을 하던 중 몽고 토족의 습격을 받아 무참히 순교하였다. 그의 부인이 실망치 않고 몽고 선교 사역을 계속하였다. 얼마나 믿음과 용기 있는 자매인가!

김제화/ jewhakim@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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