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종교현상과 발전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가장 기본적 ‘전제’가 있는데 그것은 종교에 대한 중국정부의 기본적 원칙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다. 중국 공산당은 기본적으로 마르크스 레닌주의의 유물론(唯物論, Materialism), 무신론(無神論)을 표방하고 있다. 유신론(有神論)적 세계관을 가진 종교는 공산주의 세계관과 대립되는 것이다. 그들은 종교를 ‘뒤바꾸어진 세계관’ 또는 ‘헛(虛) 그림자’라고 말한다. ”마르크스와 레닌의 말처럼 종교는 마약적인 성격을 가지며, 자산 계급 편에 서 있으며, 인민을 노예화하는 작용을 갖고 있으므로 반드시 소멸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는데, 사회주의 이념이 실천될 때 종교는 소멸된다는 것이다.”
▶유물론 - 물질이 먼저이고 정신은 나중이라고 한다. 즉 만물의 궁극적 실제는 물질이라고 보며, 정신적 현상은 물질의 반영으로 보며 독립적 현상으로 보지 않음. 즉 비물질 세계인 영혼의 세계는 없다는 사상이다.

그러므로 종교는 당과 정부에 의해 관리되고 통제되어야 한다는 기본적 태도를 가지고 있다. 이러면서도 중국이 헌법으로는 개인의 신앙과 모든 종교의 자유를 보장한다고 선언하고 있다. 1982년 개정된 중국 인민 공화국 헌법 제36조에는 종교에 관한 사항을 다음과 같이 법률로 확정했다.
“중화 인민 공화국의 공민은 종교 신앙의 자유를 향유한다. 국가기관, 사회단체, 개인을 막론하고 공민에게 종교를 믿거나 믿지 말도록 강요하지 못한다. 국가는 합당한 종교 행위를 보호한다. ...어떠한 종교 행위도 외국에 의하여 지배되지 못한다.”
헌법이 말하는 자유란 제한적인 것으로 고도의 정치적인 책략이 있음을 알게 된다. 모택동은 종교인들을 압박하면 반동이 일어나게 되며 이는 공화국의 연합에 유해 요소가 된다고 했다. 그러므로 종교인들도 국가 건설에 적극 참여하도록 유도하기 위하여 그들의 종교를 허용해야 한다고 했다. 이것이 중국 종교정책의 이론적 근거이다. 1982년 3월 중국 정부는 “사회주의 시대의 종교문제에 대한 국가 기본 방침과 정책 관계”라는 제호가 붙은 문건 19호를 발표함으로써 종교에 대한 재평가 정책을 공식화했다. 이문건은 종교 정책에 이념적인 기초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그 시행에 있어서도 상세한 방침을 제시해 주고 있다. 문건 19호에 근거하여 구체적으로 명문화된 것이 94년에 발표된 문건 144,145호이다. 19호 문건은 1949년 중국 인민 공화국이 들어선 이래로 종교 자유에 대한 가장 폭넓은 것이라고 말한다. 요점은 헌법에서 법률로 인정하는 것같이 기독교인들의 폭넓은 포교 활동을(상당 부분은 여전히 통제 대상이지만) 허용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중국 종교 정책은 현재로서는 정교분리를 결코 허용하지 않는다. 당과 종교와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우리는 성서의 가르침과 당의 정책 사이에 분명한 구분 점을 두어야 한다. 성서와 당 정책이 충돌하게 될 때 우리는 아무런 흔들림 없이 일사불란하게 당 정책에 따라 업무를 수행해 나가야 한다.” 애국적인 종교단체의 지도자들이 교회의 독립을 힘주어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그들은 ‘인민 단체’의 하나로 취급되고 있으며, 그들은 연합 전선 공작 부의 산하기관인 종교 사무국의 지시에 철저히 따를 책임을 져야한다.“
1982년에 발표한 중국 중앙 문건 제19호에는 종교 활동에 대한 제한 사항이 많은 데 그중에 몇 가지 들어본다. “공산당원은 종교를 가질 수 없다”라고 되어있다. 그러므로 당의 종교 신앙 자유정책은 다만 공민에게만 해당되며 공산당원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현재 당원으로서 당원증을 반납하고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들은 대개가 은퇴한 노인들이나 부녀자들이며, 3-40대는 당과 신앙 사이에서 갈등하는 세대라고 말하고 싶다. 지성인일수록 갈등의 골은 더욱 깊다 하겠다. 또 교회활동에 대한 지도와 10가지 규례 중 7,8번에는, “만 18세 이하의 청소년에게 종교사상을 전하거나, 찬송을 부르게 해서는 안 된다”라고 되어 있다. 그래서 중국 기독교에는 주일학교, 중, 고등 부가 정식으로 없다. 그러나 여러 곳에서 유년 주일학교를 과감하게 운영하고 있기도 하다. 세월이 흘러 마르크스, 레닌, 모택동 사회주의 지도자들이 세상을 떠났다. 사회주의 이념이 실천되기는커녕 몰락해 가고 있고, 소멸된다던 기독교는 점점 더 번성하고 있다. 하나님 중심이 아닌 인간의 이상은 망상이요 패망의 증거이며, 하나님은 영원하시고 참되시며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은 마지막 승리와 영광을 얻게 될 것이다.
◈ 외국인 종교 활동 관리 규정 공포
1994.1.31 중국정부는 국무원 영의 리펑(李棚) 총리 이름으로 발표된 중화 인민 공화국내 외국인 종교 활동 관리 규정 144호(외국인 종교 활동 관리 규정)와 145호(외국인 종교 활동 장소 관리 규정)를 공포함으로써 내. 외국인에 대한 규제와 통제를 강화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종교 법규가 제정된 배경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1987년 제13차 중국 공산당 대회 뒤 당과 정부의 분리, 정부와 기업의 분리, 정부와 사회단체 간의 분리에 대한 결정이 있은 뒤 정부와 종교(교회)를 분리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은 후 법제화의 일환으로 제정되었다.
2) 다양한 종교 활동으로 인해 발생되는 종교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제정되었다.
(1) 정상적인 종교 활동에 대한 보호, 관리를 위하여,
(2) 정부의 관리에서 벗어나 있는 비정상적인 종교 활동에 대한 통제를 위하여,
(3) 종교분쟁을 처리하기 위해서 이다.
3) 해외의 많은 종교 단체들이 중국에 들어와 독자적으로 집회를 하거나 소위 비정상적인 가정교회(지하교회)와 관계를 가지고 있어서, 외국인의 국내 활동을 법적으로 규제할 필요성이 느껴져서 종교법규가 제정된 것이다.
해설; 외국인이 중국에서 합법적으로 종교 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정부의 종교 사무국과 합법적인 종교 단체를 통한 승인을 받음으로 제한된 장소에서만 활동이 가능하나, 그 활동은 중국의 법률과 법규를 준수해야 한다. 독자적인 선교활동은 불법적임을 뜻한다.

앞으로 어떻게 규제와 통제를 강화해 나갈지는 모르지만 이미 중국 내 사정은 이러한 법규가 무의미 하리 만치 기독교와 타 종교의 활동들이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보편화되어 있다. 지방 관리들도 정치에 관계되거나 범법 행위가 (즉, 종교문제로 고소 고발 사건들) 발생하지 않는 이상 어떤 종교 행위에 대해서도 상관하지 않는 경향이다. 그러나 최근 중국정부의 체제 위기의 의식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각 성 종교 정책은 허가를 받지 않고 모이는 가정교회를 폐쇄하거나, 복종하지 않는 지도자를 가택연금, 수감하는 사태도 일어났다. 종교 활동은 그 지방 정부의 지도자들의 문화 수준에 달려 있는데 어떤 곳은 대단히 폐쇄적이며 어떤 곳은 대단히 개방적이기도 하다. 특히 국제관계를 가지고 있는 자유 무역 지구(특구)에는 다른 지구보다는 융통성이 있는 편이다.
중국은 외국인의 국내 종교 활동을 철저히 단속하기 위하여 2005년 3월 1일 새 종교 규정을 만들어 국내에서 활동하고 있는 선교사들을 색출하여 추방하기 시작하였다. 그 가운데 한국 사람들이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는 편이다.
† 기독교 활동의 실상
중국 신앙인들 중에는 신앙 노선이 삼자교회와 함께 할 수 없는 무리들은 종교법과는 상관없이 독자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교회들이 상당히 많이 있다. 또 교파 성격의 특수성 때문에 종교 국으로부터 종교 활동 장소 허가를 받아서 공식 활동들을 하고 있다. 핍박 속에서도 굴하지 않은 Watchman Nee 형제들의 교회와 왕민도의 가정 교회들이 활발하게 모이고 있다. 또 사회 분위기가 옛 것을 찾고자 하는 복고 문화 현상이 일어나고 있어서 대단히 고무적이기도 하다. 이러한 현상들은 모든 종교 단체들로 하여금 옛 건물들을 찾거나 새로운 건축을 하도록 자극했다. 1994년 5월 19일 중국기독교 협의회 해외 관계 위원회에서는 주변 국가의 교회나 단체들과 연계해서 교류하고 또 다양한 층과 각종 방법들을 동원해 한국교회를 본보기로 삼으라는 지침이 마련된 것으로 알려졌다. 서방국가들의 활동에 대해서는 계속적으로 강력하게 막아야 한다는 경계론이 우세한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한국교회를 비롯하여 화교 교회들의 활동 폭은 더욱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한국 기독교는 조선족 중심의 소극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데, 좀 더 한족 선교의 큰길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외국 사람의 종교 활동에는 그 위험이 어디든지 항상 잠재되어 있다. 외국 사람이 전도하거나 설교하다가 발각되어 얼마간 구류하고 벌금을 물고 추방되기도 하였다. 지금도 여기저기서 중국인 목회자와 성도들이 구타 내지 감금당하는 일련의 사태들은 아직도 중국 전체의 분위기는 살벌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도 13억의 인구 가운데서 일어나고 있는 국부적인 사건이라고 보면 좋다. 또 1995년 3월 24-25일에는 서울 아카데미 하우스에서 93년 남경 회의에 뒤이어 두 번째로 열린 이번 협의회에서는 20세기 아시아에서 하나님의 선교를 위한 한. 중 교회 협력이란 주제로 토론하면서 양국이 나눔과 봉사의 협력 관계를 두 나라 차원에서 확대해 아시아 지역 차원으로 넓히자는 데 합의했다. 이러한 일련의 협의들은 중국의 기독교가 국제무대에 나옴으로써 자체 안에 변화를 가져오게 하는데 큰 뜻이 있다 하겠다.
1) 삼자 애국 교회(삼자교회)
중국 삼자 애국 교회의 삼자가 무엇인지 그 뿌리와 배경을 먼저 살펴봄으로써 공산화되기 이전에 있었던 중국 기독교회의 삼자 운동과 공산화된 그 뒤의 삼자 애국 운동과의 관계를 살펴본다.
† 중국의 삼자 운동의 역사적 배경
선교지 신생 교회의 삼자 운동의 시작은 19세기 중반에 영국의 Henry Venn과 미국의 R. Anderson에 의하여 발전했다. 이 원리는 중국 산동에서 선교하던 미국 선교사 Dr. John Nevius에 의하여 19세기말 한국에 적용하여 크게 성공을 거둔 바 있다. 20세기 초에 이 원리는 영국 선교사 Dr. Roland Allen에게 전수되어 중국의 교회를 자립시키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의 원리는 삼자운동(三自运动)이라고 부르고 있다.
* 삼자의 뜻은 다음과 같다.
1. 자치(自治)- Self-Governing (자치)
2. 자양(自養)- Self-Supporting (자립)
3. 자전(自傳)- Self-Propagating(자립 전도)
◈ 삼자운동의 동기와 각성
Rice Christian-쌀을 위한 그리스도인-서구 제국 식민주의가 중국을 짓밟게 된 1942년 이후 서구 열강들의 선교 부에서는 경쟁적으로 중국 선교에 나아가고 있었다. 선교 확장에 열을 올리고 있던 선교 기관들은 전도할 중국 사람들을 고용하기 시작했다. 이 일은 중국 교회사에 커다란 실수로 평가되고 있다. 고용인 중에는 진실하고 사명감이 있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또 쌀을 위하여 취직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게 되면서 전도 인으로 취직이 못 되는 사람들로부터 원성과 불평이 높아지는 불미스러운 일들이 일어났다. 전도 인으로 취직되어 일하다가 그만 둘 때는 신앙도 버리는 사람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이 일로 인하여 중국에서 일하는 선교 부는 쌀을 위한 신앙자(Rice Christian)를 생산해 낸다는 본국 교회의 비난의 소리를 듣는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이런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중국 기독교 선교가 1세기가 지난 1920-30년대는 중국 교회가 서양적 색채에서 탈피하고 경제적으로 서양 선교회의 의존도에서 벗어나 자립하고자 하는 운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 시기에 서양 선교 부에 의지하지 않고 중국 선교는 우리 힘으로 해야 한다는 토착적 운동을 일으킨 단체들이 많은데 그 가운데 Watchman Nee(兒祈聲)나 왕민도(王民道)의 그룹들은 중국 토착화 선교에 커다란 영향력을 미쳤다. 바로 이 시기에 성공회 선교사 Dr.Roland Allen은 신약 성경에 바탕을 둔 자주(自主), 자립(自立), 자체(自體) 선교의 토착화 교회를 제청하여 중국 교계로부터 크게 호응을 받았다.
이러한 삼자 운동의 원리를 후일 공산정부는 이데올로기 화 하여 기독교뿐만 아니라 모든 종교에 적용하는 중국 삼자(三自) 애국 운동의 종교 정책이 되게 했다.
* 이데올로기 화 한 삼자의 의미
-자치(自治, Self-Governing)
각 교회가 제국주의와의 관계를 철저히 단절하고 중국 기독교신자들 스스로 교회를 다스려야 한다
-자양(自養, Self-Supporting)
제국주의와 경제적 연관성을 철저히 제거하여 중국 기독교 신자들 스스로 교회를 책임지고 양성해야 한다.
-자전(自傳, Self-Propagating)
외국 사람의 힘을 빌리지 말고 스스로 전도한다.
제국주의의 남은 사상들을 철저히 말살하여 각 교회에서의 설교는 오직 성경에 의거한 순수한 복음을 전달해야 한다. 1900년대에 일어난 삼자 운동은 공산화되기까지 반세기 동안 중국 교회는 자치, 자양, 자체 전도를 실천하면서 중국의 토양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공산정부는 1950년 모든 외국 선교사들을 추방한 뒤 종교법을 만들어 모든 종교를 정부의 관리 밑에 두면서 삼자 애국 운동의 원리를 모든 종교에 확대 적용시키면서 반 제국 운동과 교회 내의 사상 개조를 강화하면서 모든 종교가 국가와 당을 위하여 충성하도록 유도했다.

삼자 운동에 대하여 우리가 참고해야 할 일은 중국 기독교는 그들의 토양에서 자라온 그들의 역사의 과정이 있다. 그리고 중국 나름대로의 특이한 현재 상황이라는 것이 있다. 그러므로 중국 선교는 이러한 맥락(Context)에서 중국 선교를 먼저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중국 조선족 동포들에 대한 선교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남한 사람도 아니고, 북미와 세계에 흩어져 있는 이민 동포와도 다르다. 그들은 역사적으로 중국 화 되어 있는 우리 동포들이다. 그래서 그들의 기독교의 뿌리는 중국의 기독교도 아니며, 오히려 한국 기독교의 뿌리에서 파생된 한 가지이다. 조선족 동포들을 물질적으로 후원하는 일에 있어서 대단히 신중해야 한다. 선교에서 경제적 자립의 원리는 하나님의 일과 돈을 연계시키는 잘못을 사전에 방지할 수 있어야 한다. 돈과 물질에는 늘 시험과 분쟁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선교지 교회에 물질을 잘못 제공하는 데서 생기는 문제는 정신적 그리고 경제적 자립을 저해할 뿐만 아니라 의존적 신앙을 키우는 잘못을 범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혹독한 탄압 밑에서도 중국 기독교인들이 듣고 몸에 밴 것은 삼자이다. 이런 중국 사람들과 조선 사람들에게서 쉽게 삼자의 옷을 벗기고 의존의 옷을 입도록 해서는 안 된다. 그들을 여기 기준과 가치관으로 볼 때에는 가난하고 어렵지만 그쪽의 기준에서는 평범하게 사는 것이다. 지금이라도 Allen선교사가 주창했던 삼자운동의 정신으로 돌아가 실천되도록 격려하고 가르치면서 도울 것을 돕는 것이 중국교회의 장래를 위하는 길이라고 믿는다. 선교를 해야 한다는 바쁜 마음과 실적을 올려야 하는 부담 등이 본의 아니게 Rice Christian을 생산할 위험성이 지금도 잠재되어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본인이 나름대로 중국 선교에 임하면서 중국 조선족 교회의 자립에 대한 생각을 해 보게 되었다. 현재 발생하고 있는 처소 교회 문제는 외부에서 후원하는 분들이 회중과 더불어 교회적인 차원에서 의논하지 않고 처소(가정교회)를 인도하고 있는 지도자(대개 집사) 개인과만 의논하면서 거래하는데 원인이 있다. 최근 중국을 드나드는 한국 기독교인들로 인하여 조선족 교회나 처소들이 한국 교회를 크게 의지하고 있다. 가난하고 어려운 동포들을 돕자는 동정심의 발로는 도움이라는 것을 모르고 살던 어떤 사람들에게는 마치 살길을 열어주는 구세주 같은 존재로 나타나게 되었다.
그들의 처소는 비록 낡고 초라하고 불편하지만 그런대로 그들의 가정에서 모여 오고 있었다. 자립을 향한 목표가 없이 돕는다면 오히려 그 도움은 장래에 그들의 자립을 불구자적으로 만드는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 할 수만 있으면 중국 현장은 원형 그대로 보존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만일 도와주지 않더라도 그들은 이전과 똑같이 그들의 모습 그대로 신앙생활을 해 갈 것이다. 이들에게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인가? 영적으로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그리고 자립하는 교회가 되도록 돕는 일에 최선을 다 해야 할 것이다. 믿음의 확신을 가지고 말씀을 순종하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 그들도 엎드려 기도하면서 주님을 배우는 경건의 훈련이 반듯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들의 설교가 그들의 기도 속에서 흘러나오도록 해야 하고 그들의 필요도 그들의 기도를 통해서 응답받는 역사를 경험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또 그들을 위하여 일하는 자는 사랑과 나눔의 생활이 있어야 한다. 동고동락할 줄 알아야 한다. 그들을 자립시키기 위해서 가르치는 자는 네비우스나 알렌 같은 분들의 원리를 깊이 연구하여 현지 상황에 맞게 적용하는데 노력해할 것이다. 그리고 현지에 있는 중국인 교회든지 조선인 교회든지 이미 그곳에 있었던 기독교의 맥락에서 동떨어지게 하지 말고 그 맥락 안으로 그들을 데리고 들어가서 역사적 교훈을 배우게 하는 데 무관심해서는 안 될 것이다. 조선족과 한족 교회의 장래를 위하여 지금부터라도 삼자 원리를 적용하여 가르치는 일에 힘써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2000년이 지나면서 조선족의 공동체가 무너지면서 조선족 교회들도 사라져 가고 있는 현상은 선교의 장래가 밝지 않다.)
4. 삼자회 성립
1954년 7월 28일 244명의 교회 대표자들은 북경에서 열린 제1차 ‘중국 기독교 전국 회의에 출석하여 ‘중국 기독교 삼자 애국 운동 위원회’(약칭 삼자회)를 만들어 반 제국 운동과 교회의 혁신과 개조를 강조하면서 교회 내의 사상개조를 강화하기 시작했다. 삼자회의 중요 취지는 중국 공산당과 인민정부의 영도아래 전국의 기독교 신도들은 단결하여 조국을 사랑하며 국가의 법령을 준수하고 자치, 자양, 자전의 삼자를 지지해 나가자는 것이다.
애국애교(爱国爱教)
삼자 회는 실천요강으로 애국애교(愛國愛敎)의 표어를 내 걸었다. 삼자 회가 말하는 애국애교의 요점은 먼저 중국 공산당의 지도를 받아들이고 그들에게 복종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삼자회의 존재 목적은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키고 교회로 하여금 ‘전도와 가르침’의 사명을 다하도록 하는 데 있지 않고, 국가건설을 대전제로 삼아 전국의 교회로 하여금 당에 부합시키려는 정책이었다.
중국 기독교 협회 설립
1980년 10월 남경에서 있었던 제3차 전국 대회에서 교회의 교무를 전담하는 중국 기독교 협회(기협)를 설립하였다. 삼자회의 기본 임무는 신도에게 애국을 교육하는 것으로, 그 범위는 이데올로기와 정책 방면에 속하고, 기협은 교육, 성직자 임명 등 교무 일을 담당한다. 지금은 삼자 애국 위원회와 기독교 협회가 통합되어 양회라고 부른다.
처소( (處所, 가정교회)
중국에서는 예배당에 십자가를 달고 교회 간판을 붙이려면 종교 국에서 허가를 받아야 한다. 허가를 받지 않고 가정에서 모이는 곳을 처소라고 부르며, 처소의 발전은 중국 공산 정부가 기독교를 정부의 통제아래 두고 억압하기 하면서 부터였다. 비밀리에 가정에서 숨어서 모였기 때문에 그동안 지하교회라고 불렀다. 혹독한 핍박 속에서 살아남은 지하교회도 이제는 조심스럽게 빛 가운데 그 모습들을 드러내고 있다. 여기서 오해하지 않아야 하는 점은 처소라고 모두 다 핍박을 경험한 지하교회들이 아니라, 대개가 개방 이후에 생겨난 처소들이 많다. 특히 조선족들의 처소들은 거의가 다 개방 후에 생겨 난 것들이다. 지금은 처소로 모이는 곳을 지하교회라고 부르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젠 어디서든지 그리스도인들이 모이는 곳은 그 동리 사람들에게나, 심지어 공안국도 알려져 있으며, 시내 주택 촌에서도, 층집(아파트)에서도, 큰소리로 찬송을 부르며, 설교도 밖에서 들릴 정도로 할 수 있다. 그러나 허가받지 않은 경우여서 단속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족 속에는 지금도 그 정체를 노출시키지 않고 조용히 조심스럽게 모이며 반정부 태도를 가지면서 외부 세계의 변화를 관망하고 있는 무리들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중국에서 선교한다는 어떤 분들은 지하교회 사역을 한다고 말하므로 대단히 위험한 곳에서 일하고 있다는 분위기를 풍기기도 한다.
아직 중국을 잘 모르는 분들은 지하교회라고 하면 좀 삼엄하고 긴장된 분위기를 느낀다. 중국을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은 가정교회를 지하교회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가 세운 중국인 교회 4곳의 교회 가운데도 두 곳은 허가가 없지만 예배당을 짓고 허가 없이도 십자가도 세우고 당당하게 예배를 드리고 있다. 이런 경우가 아무 데서나 통하는 것은 아니다. 믿는 자들이 지역 간부들과 정치적으로 무난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지역이라고 볼 수 있다. 한 곳은 촌 간부들이 신청하여서 허가를 내준 곳도 있고, 또 한 곳은 모친 자매님의 아들이 그전(읍) 정부의 공산당 서기여서 아무 문제가 없다. 다른 곳은 여러 해에 걸쳐서 벌금 등으로 시달리다가 허가를 얻은 경우도 있다. 중국의 일은 지역에 따라 그 지역의 정치 지도자의 종교에 대한 인식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난다. 어떤 곳의 처소 인도자는 지역정부 간부들과 인간적인 관계를 잘 가지지 못 함으로써 자신 개인뿐 아니라 처소에 나쁜 영향을 받게 하는 지혜롭지 못한 일도 있다. 허가를 받았다고 해서 꼭 정부의 허수아비 노릇을 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경우는 중국 신학교를 나오고 중국 정부와 관계를 가지고 주로 도시의 교회에서 목회를 하는 사람들에게 어느 정도 적용된다고 보면 좋고, 우리같이 구원받은 형제자매들을 영적으로 키워서 스스로 가정교회를 영적으로 사역하게 하는 경우는 단속을 받을 수는 있으나 자유로운 편이다.
† 삼자교회와 처소와의 관계
중국교회에 신앙의 환난이 닥쳐왔을 때 지하에 숨었던 신앙인들은 공산정부의 권력에 의하여 세워진 삼자교회를 성경적 교회라고 인정하지 않았으며 정부의 꼭두각시로서 변절자들이라고 여겼다. 삼자교회의 한 지도자의 말을 빌리면, 그런 변절자들이 신앙을 박해하는 자들의 정치적 도구 노릇을 한자들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신앙인 들은 환난을 슬기롭게 피해 가기 위하여 삼자교회 등록을 하여 그 속에서 진리를 전하고 성도를 보호하는 분들도 있다. 그래서 공산정부에 정면으로 도전하여 고난을 받은 성도들은 전자는 가룟 유다와 같은 배신자요, 후자는 세상과 타협한 비겁자라고 비난하고 있다. 개방과 자유를 맞이하면서 서로의 감정이 진리의 정통성 시비 문제로까지 발전할 수 있는 잠재성을 중국교회는 가지고 있다. 이와 같은 일들은 왜정시대에 신사참배를 국민의례로 받아들인 천주교와 감리교 그리고 장로교는 일부 현세적 안전을 추구하는 측과 우상숭배라 하여 적극적으로 반대하여 고난 받은 측이 있었고, 소련공산시절에 정부 측에서 섰던 측과 고난을 받은 측, 나치독일 편에 선 측과 반대 측들이 세월이 흘러서 믿음의 자유 세상을 맞이하여 한 하늘아래서 살게 되었는데, 그 감정의 골이 어떠하겠는가!! 누가 더 지혜롭게 살았고, 누가 더 바보같이 살았는가?
행정 중심지의 삼자교회는 법적 권위를 가지고 있으며, 주변에 널려 있는 적고 큰 처소에 대하여 모 교회 같이 행세를 한다. 그 교회 목사는 마치 당 위원장 같은 힘을 가지고 행세하기도 한다. 전에는 종교 국 요원들이 삼자교회의 모든 활동을 감시하는 일도 하였지만 최근에는 그러한 일들이 거의 사라졌다. 삼자교회는 주로 도시에 자리 잡고 있으므로 문화의 혜택을 많이 받고 있으며, 외국에서 오는 사람들과의 교류도 빈번하여 여러 가지로 누리는 특혜가 많다. 특별히 집회나 강습회 같은 행사들이 도시 중심의 삼자교회에서 하기 때문에 주변의 처소들은 가까운 삼자교회에 의지하고 있다. 처소들은 대개 두 부류로 구분할 수 있는데 환난을 견디어 나온 순교자적 성도들의 모임과, 개방 뒤에 자연 발생적으로 생겨난 처소들이다. 삼자교회가 있는 곳에서 독자적인 처소의 활동은 조심스러운 일이며, 삼자교회의 지도자의 역량에 따라 심각해질 수도 있다. 외국인들의 독자적인 활동에 대해서는 민감한 반응을 가지고 있음을 조심해야 한다. 내가 방문한 한 도시에는 중국인 삼자교회가 있고 조선인 전도사가 조선인 교회로 모이는데 중국 목사가 방해하고 있어서 심각해 있는 것을 보았다. 삼자교회의 영역에서 벗어나 있는 처소들은 퍽 자유롭다. 그러나 외부와의 교류가 없어 교육과 교제의 기회가 없고, 정보와 자료의 부족으로 영적 낙후성을 가지고 있으며, 신학의 빈곤으로 무속적 신앙으로 발전하는 경향도 있다. 소외된 처소들을 찾아 그들에게 진리를 올바로 가르쳐 주어 영생 얻은 확신과 말씀 안에서 자라도록 도와주는 일들이 가장 필요하다. 그리고 처소 지도자들을 가르치고 훈련하는 일이 10년 뒤의 중국선교를 준비하는 가장 필수적인 일이라고 믿는다. 지금 선교의 사명이 있는 여러분들이 이일을 열심히 하고 있어서 중국선교의 장래는 밝다 하겠다. 그리고 이런 일들은 복음 적이고 보수적인 그리스도인들에 의하여 이루어졌으면 하는 것이 나의 희망이다.
† 중국교회의 현황
1. 성경과 찬송가의 보급은 원활하며 중국 삼자교회에서 자유롭게 살 수 있다.
조선족 성경도 발행되고 있으나, 주로 한국에서 가져오는 성경 찬송 합본의 가죽성경을 좋아하고 있다. 조선족 어떤 교회에 기보면 조선 찬송, 한국찬송 몇 장하고 이중으로 하고 있는 보기도 했다. 클린톤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할 즈음에는(1998, 6.25) Chines and English(汉英) 성경을 인쇄하고 발행하는 모습을 국영영어방송에서 보여주면서 중국에 종교 자유가 있다는 것을 은근히 선전하고 있었다.

기독교인의 수
중국 기독교인의 수는 누가 조사하더라도 정확하지 않다. 그것은 중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발표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저 추정에 불과하다. 2015년이 지나면서 대략 일억이 넘는다고 추정하여 말들을 하고 있다.
2. 중국 신학교 수
1981년 남경 신학교가 문을 열면서 현재까지 여러 지역에 신학교를 세웠는데 지금 정규신학교는 22곳 정도 있고, 그 밖의 지방에 따라 1-2년제 성경학교를 운영하며, 졸업하면 전도인의 자격증을 주어 일하게 하고 있다. 주로 정부의 간섭과 핍박에서 자유로워지고자 가정교회 지도자들이 많이 다닌다. 이러한 애국 종교 지도자 양성에 따른 중국 정부의 정책은 다음과 같다. “신학교의 과업은 정치적으로는 조국을 사랑하고 당의 지도력과 사회주의 제도를 지지하며 종교적인 가르침을 훌륭히 완수해 나가는 젊은 전문 종교인 노동자 계급을 양성시키는 데 있다. 게다가 모든 젊은 전문인으로서의 종교인 노동자들과 그들의 애국적이고 사회주의적인 의식을 고양시키며, 그들의 문화적 수준과 종교에 대한 지식의 성장을 위해 노력해야 하며, 당의 종교 정책을 충성스럽게 지지하기 위해 분투해야 한다.”
김제화/ jewhakim@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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