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살았던, 도계, 묵호(동해시) 2001
도계 읍
흥정리
1945년 8월 15일 침략 제국주의 섬나라가 망하고 한국은 왜놈들의 압제에서 해방을 하게 되었다. 역시 왜놈들의 발굽에 짓밟히던 만주도 해방이 되었지만, 그곳은 공산주의가 있는 나라가 되자, 부모님은 우리를 데리고 북한을 거쳐 월남하여 외가가 있는 주문진을 거쳐서 지금 도계의 흥전리에 살게 된다. 아직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 살던 그 집을 가보고 싶었다. 그리고 도계 초등학교 2학년 때 6.25 사변이 일어나서 태극기가 휘날리던 우리 학교는 갑자기 인공기가 휘날리는 붉은 인민학교가 되었다. 날마다 전체 학생이 김일성 빨치산 혁명가와 북한 노래를 배우기에 여념이 없었다. 붉은 교육을 받으면서 몇 개월을 힘들게 보냈던 그 학교를 가보고 싶었다. 이 깊은 골짜기까지 도로망이 좋아져서 편하게 다닐 수 있다는 것이 나에게는 기적 같았다. 우리는 먼저 6살 때 살던 도계 흥정 다리 밑에 있는 집으로 갔다. 여전히 그 집은 그대로 있고 주인만 여러 번 바뀌었다. 이 골짜기 저 깊은 곳에 엄청난 매장량을 가진 탄광이 있어서 왜정시대부터 석탄을 퍼내 가기 위하여 선탄 운반을 위한 Cable car가 도계 역까지 놓을 정도였고, 지금도 여전히 파내고 있다니 땅속에 석탄이 얼마나 많은가! 이 엄청난 석탄을 캐내기 위하여 왜인들은 광부들이 살 주택을 많이 지었다. 아랫 관사는 주로 노동자들이 살았고 윗 관사는 산 위에 있는데 집들은 더 좋았고 기간요원들이 살았다. 그때는 집 앞으로 흐르던 깨끗한 개울물은 이제는 검게 변하여 죽은 물이 되어있었다. 건너편 붉은 바위 앞산은 벌거벗은 그대로 있고 그 골짜기 가운데로 석탄을 나르는 케이블 카는 하늘 높이 그대로 다니고, 다리 주위에는 집들이 많이 들어서 있었다. 아버지는 5살 위인 형에게 하늘 천 따 지 검을 현을 가르치시느라 열중했고 어린 나도 가끔 옆에서 한자씩 배웠다. 그때는 물이 맑고 깨끗하고 아름다운 골짜기였다. 다리 옆 언덕에 밑에는 물이 돌아가는 곳이라 좀 깊어서 고기들이 모여 놀고 있었다. 나는 아버지에게 낚시를 만들어 달라고 하여서 아버지는 바늘을 불에 달구어서 낚시를 만들어 주셨는데 그것으로 피라미 등을 잡아 올리는 재미를 즐겼다. 산야를 들러 보노라니 형과 내가 철없이 뛰어놀던 어린 시절의 모습들이 주마등 같이 지나가고 있었다.
도계초등학교
우리는 흥정리에서 살다가 다음 해 도계 읍 시장 통으로 이사를 하여 부모님은 사업을 시작하셨다. 도계 읍에 내려와서 어렸을 때 살던 시장 통을 돌아보면서 대강 여기쯤이 우리 가게와 집터라고 짐작했다. 내가 다니던 도계 초등학교도 들렸다. 2학년 때 6.25가 나서 여기서 본의 아니게 빨치산 혁명가와 북한국가 등 노래를 배우던 생각이 났다. 역사는 때때로 늘 우리에게 기대치 않은 놀라운 현실을 경험하도록 해 준다. 이때 본의 아니게 배운 이 노래들은 거의 다 잊어버렸지만 두 곡의 첫 절은 잊어지지 않고 있었는데, 48년 뒤 중국에서 선교사역을 하던 중 1998년 북한 양식 지원 일로 방문했을 때 이 첫절들은 소통의 기가 막힌 소재로 쓰였다. 읍에서 기차역을 건너서 산비탈 기차 길을 따라 신리 쪽으로 가면 탄광이 나오고 일본 인의 관사들이 있는 언덕에 감리교회가 있었는데, 어린 내가 읍내에서 혼자서 그 외적 진 철 길을 따라 교회에 다녔다. 으슥한 철로 길에서 무서움이 느껴지면 하늘을 쳐다보면서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신다는 믿음으로 무서움을 이기곤 했었다.
그때 도계역은 아이들의 놀이터이기도 했다. 기관차 급수 탑 옆에는 기관차를 돌리는 곳도 있어서 터가 넓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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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호(동해시)
묵호 초등학교 17회 졸업
우리는 6.25가 끝나고 묵호(동해시)로 이사를 하여 시장 통에 살면서 사업을 시작하였다. 탄광이 있는 두메산골에 살던 우리는 이제 바다가 있고 교통이 활발한 묵호에서 나의 초등학교 시절을 보내게 된다. 우리는 여기서 1.4후퇴를 맞이한다. 미국 해군의 LST의 큰 배에 수많은 함경도 피난민들이 몰려들었다. 그리고 시장에는 미군 물건들이 거래되고 있어서 우리는 이때 미군들의 전시용 휴대 음식인 C-Ration을 맛보게 되면서 미국 음식 의복 일용품 등에 눈을 뜨게 되었다. 피난민들이 육로로도 밀려 내려오면서, 1.4 후퇴가 시작되자, 우리는 친척 고모님이 살고 계시는 삼척 근덕으로 피난을 갔다. 그곳에는 한국군 일개 연대가 주둔하게 되어서 우리는 군인 아저씨들과 가까이 사는 군대 문화에 젖기도 했다. 다음 해 일월 우리는 눈보라를 뚫고 삼척까지 걸어와서 기차를 타고 묵호 집으로 돌아왔다. (이 인연으로 우리가 강릉에서 개척할 때 형제가 근덕 맹방에서 개척을 한다고 하여서 여러 차레 오토바이로 방문하면서 복음을 전하기도 하였다.) 1.4 후퇴에서 돌아오자 학교가 시작되면서 나는 묵호초등학교 17회 졸업생이 되었다.
묵호초등학교를 찾았다. 지금은 현대식 이층 건물이지만 그 때는 목조 건물로 세 동이 길게 있었는데, 지금도 그 자리에 세 건물이 길게 들어서 있었다. 그 넓은 운동장을 누비며 장난치며 뒹굴든 장난꾸러기 내 모습이 선하게 떠올랐다. 육국 병원을 오래 하던 자리여서 개구쟁이 친구들은 교실 마룻바닥 밑으로 들어가서 여러 가지 병원 부스러기들을 주워 오는데 어떨 때는 사람 뼈 같은 것들을 찾아와서 우리를 놀라게도 했다. 그 개그쟁이 친구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지, 17회 동창생들을 찾아보고 싶은 마음이다. 시장 통으로 가서 우리가 살면서 사업을 하던 그 자리를 찾아보았다. 그때는 59 육군 병원이 학교를 차지하고 있어서 우리는 각반이 농촌 집들에 흩어져서 공부를 하였다.
묵호 여 광장
월요일 한 번은 지금 역 광장(그때는 묵호역이 없었다)에서 조회를 하고는 교실이 있는 지역으로 4열 종대로 행진하면서 군가를 불렀다. 우리 반은 발한 3리로 지금 학교 뒤편으로 제법 멀어서 더울 때에는 피곤들 했다. 그러다가 역 광장 건너편 해군 사령부 옆 빈 관사에서 공부하기 시작하였고 역 광장은 우리의 운동장이 되었다. 그러다가 5학년이 되면서 육군병원이 옮겨 가게 되어서, 우리는 본교에 들어가서 공부를 하게 되었다.
강릉으로 돌아오는 길에 우리는 어렸을 때 친구들이 살던 안 묵호(항구가 있는)로 돌아 어달리로 오다가 바닷가 솔밭에 있는 막국수 집에서 잠시 쉬면서 어렸을 때 더위를 머금고 이 망상(지금 해수욕장)으로 째복(조개)을 건지러 다니던 옛일들이 떠올랐다.
묵호 기차역이 있는 향로봉은 어렸을 때 해수욕을 많이 하던 곳이다. 또 쌀쌀한 봄에 오징어 낚시를 매어 축항으로 몰려드는 학꽁치를 낚아채는 낚시를 하던 곳이다. 해안선 어느 한 곳도 내 어렸을 때 발자국이 안 간 곳은 없다.
김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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