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 무섬마을 여행 6. 5-7, 2019
영주 무섬마을이 어떤 마을인지 영주시의 홍보 자료에서 옮겨본다.
태백산에서 흐르는 내성천과 소백산에서 흐르는 서천이 만나 마을을 돌아나가는 물 도리 마을로 물 위에 떠 있는 섬과 같다고 해서 무섬이라 부르게 되었다. 무섬은 내성천의 맑고 잔잔하게 흐르는 믈이 마을을 안고 휘감아 돌아나가는 산수의 경치가 아름다운 곳이다. 무섬마을의 시작은 조선 중기 1666년 반남 박 씨 박수(朴燧)가 처음으로 들어와 삶의 터전을 만들었고, 1757년(영조 33년) 그의 증손녀의 남편인 김대(金臺)는 선성(宣城, 예안) 김 씨로 들어와 처가에 자리를 잡은 이래 두 성씨의 집성촌을 이루면서 수백 년의 역사와 유서 깊은 전통마을이 되었다. 고택들과 정자들이 옛 모습 그대로 보존돼 고풍스러운 옛 향취를 풍기며, 30년 전까지만 해도 마을과 외부를 이어주는 유일한 통로인 외나무다리가 마을의 상징물로 남아 있다.
지금 마을에는 만죽재와 해우당 고택 등을 비롯하여 규모가 크고 격식을 갖춘 口자 형 가옥, 까치구멍 집, 겹집, 남부지방 민가 등 다양한 형태의 구조와 양식을 갖추고 있어 전통 주거 민속 연구의 귀중한 자료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어서 2013년 8월 23일 대한민국 국가 민속 문화재 제278호로 지정되었다. 마을에는 38동의 전통가옥 가운데 16동은 100년이 넘은 조선 시대 후기의 사대부 가옥이다. 전국 7대 민속 마을 가운데 하나이며, 모래 위에 세워진 마을로 환경운동가들이 뽑은 세계 제일의 마을이기도 하다. 도시로부터 멀리 떨어져 휴식하기에 알맞은 곳으로 소문이 나면서, 백 년이나 되는 고택을 가진 후손들이 고택 체험이란 새로운 관광상품으로 생업을 하고 있다.
아도서숙(亞島書塾)
아도서숙은 아세아 반도 내 수도리의 서당이란 뜻으로, 항일투쟁을 하던 애국지사들의 활동 거점이었다. 1928년 10월 해우당 김낙풍의 증손자 김화진 등 마을 청년이 뭉쳐 세운 마을 공회당이자 교육기관이다. 양반 천민 할 것 없이 모여 문맹 퇴치와 농촌 계몽 활동과 민족교육을 한 곳이다. 신간회 영주지회와 영주 청년동맹 등 지역 항일운동의 구심점이자, 농민운동 및 반제국주의 운동 비밀 결사인 적색 농민조합 운동의 거점이었다.
네 차례의 거센 일제의 감시와 탄압에도 불구하고 항일운동을 이어가던 중, 1933년 7월 11일 새벽 일제는 경찰 1개 소대가 마을을 에워싸고 항일독립운동을 하던 사람 모두를 연행하면서 문을 닫게 되었다. 당시 항일운동을 하던 투사 가운데, 김화진, 김종진, 김계진, 김성규, 김영진 다섯 명에게 건국훈장 애족장, 및 건국포장에 추서 되어 전국에서 한 마을에서 가장 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자랑스러운 마을이다.
종씨들이 사는 곳
경상북도 영주시 문수면 수도리 무섬마을에는 우리 종씨, 예안 김씨(宣城)가 집성촌을 이루어 사는 곳이다. 아름다운 고국의 자연에 묻혀 잠시 쉬고 싶기도 하고 종씨들도 만나보고 싶었다. 매제와 함께 청량리에서 무궁화호로 영주로 향했다. 1994년부터 내가 강릉에서 교회를 개척하면서 10년간 사는 동안 중앙선과 영동선은 지겹게 타 본 사람으로 열차에 대한 알레르기가 있다. 그런데 이제 35년 만에 타 보는 중앙선 열차는 35년 전의 고생스러웠던 때를 보상이라도 받는듯한 기분이었다. 영주에 내려서 마트에 가서 모자를 하나 사고 점심으로 무한 리필의 떡 복기로 했다. 우리는 택시로(13900원) 무섬에 들어갔다.
무송헌 종택(撫松軒宗宅
무송헌은 천문학자 김담 할아버지의 호인데, 그 호로 무송헌 종택이라 이름하였다.
이미 연락한 무송헌 고택에 이르자 주인인 김광호 씨 부부의 환영을 받았다. 차와 간식을 가져와서 조상님들에 대한 이야기꽃을 피웠다. 하루 가격은 7만 원이다. 이 집의 계약일정 때문에 내일은 다른 종씨 고택에서 쉬게 된다고 한다. 또 다른 고택을 경험하게 되어서 오히려 잘 된 것 같다. 고택은 깔끔하고 정갈하게 단정되어 있고, 담장을 따라 가꾸어진 꽃들은 고택의 아름다움을 더 해주고 있다.
종씨는 2년 전 영주시 문화축제의 하나로 천문학자인 김담 할아버지의 600주년 탄신 기념 축제를 담은 책 한 권과 안평대군이 그린 몽유도원도에 찬시(讚詩)를 쓴 김담 할아버지의 찬시 복사본 한 장도 주어서 고마웠다. 한 번도 뵌 적이 없는 조상의 글을 대하니 감개가 무량하다. 무릉도원도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본다.
◈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
몽유도원도가 그려진 동기는 세종대왕의 셋째 아들 안평대군이 꿈속에서 거닐었던 복사꽃 마을(도원)을 평소 친분이 있었던 안견에게 화폭에 담아달라고 요청하여 비단에 수묵담채로 그려졌다. 세종 29년(1447) 음력 4월 20일에 그리기 시작하여 삼일만 인 23일에 완성하였다고 한다. 몽유도원도가 담은 뜻은 건국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조선이 원대한 이상을 가진 국가로 발전하기를 바라는 안평대군의 마음을 담아낸 그림이다. 이 그림은 크기가 세로 38.7cm, 가로 106.5cm이다.
⊙ 안견-조선 시대 산수화의 대가
⊙ 수묵담채(水墨淡彩)-엷은 먹물로 그린 뒤 색을 엷게 입히는 기법.
⊙ 도원(桃源)-중국 도연명이 말한 무릉도원의 준말로 이상 세계(낙원)
꿈의 내용은 안평대군(이용 李瑢, 1418~53)이 29세 되던 해 꿈속에서 박팽년과 함께 환상적인 도원(桃源)을 찾아다니다가 대나무 숲에 쌓인 초가집을 발견하였는데 이 집 주위에는 닭, 개, 소, 말이 보이지 않고 앞 시내에 조각배만이 있는데, 거기에서 최항과 신숙주를 만나 함께 실컷 구경하다 잠을 깨었다는 것이 대강의 줄거리이다. 이 표현은 그림의 오른쪽에 복사꽃이 만발한 복숭아나무와 대나무 숲 사이로 초가집이 보이고 물가에 작은 빈 배가 보인다.
몽유도원도에는 안평대군의 첫 시 한 수에 이어 평소 교류하고 있던 당대의 문사 21명이 칭송하는 시와 글들이 이어져 그림의 길이는 20m에 이르게 돼었다고 한다.
무송헌 김담 할아버지 찬시(칭송의 시)의 일부를 옮겨 본다
파란 숲 사이로 백옥같이 맑은 물 흐르는데(碧玉叢間白玉流)
꽃빛은 물 위에 길게 비치어 떠 있네(花光長帶水光浮)
맑고 그윽한 자연은 인간의 세계가 아니니(淸冥風露非人間)
뼛속 시원하고 정신 향기로운 꿈속에서 노닐었네(骨冷魂香夢裏遊)
한 조각 도원을 한 폭에 그려놓으니(一片桃源一幅圖)
산중의 선경이 비단 위에 사뿐히 실렸네(山中上較銖)
무릉에서 길 잃은 자에게 묻노니(試問武陵迷路者)
눈앞에 보았던 게 꿈만 같지 않았던가(眼中還似夢中無)
불행하게도 이 몽유도원도에 찬시를 읊었던 문사들 가운데 8명은 계유정난과 사육신 사건으로 세조에 의하여 죽임을 당한다. 김종서(金宗瑞)와 이현로(李賢老), 만우(卍雨), 최수(崔脩)는 단종 1년(1453) 계유정난 때, 박팽년(朴彭年), 성삼문(成三問). 이개(李塏)는 세조 2년(1456)의 사육신 사건 때 유명을 달리했고, 박연(朴堧)은 계유정난의 간당으로 몰려 유배 중 세조 4년(1458)에 별세하였다. 그리고 신숙주(申叔舟), 하연(河演), 송처관(宋處寬), 김담(金淡), 고득종(高得宗), 강석덕(姜碩德), 정인지(鄭麟趾), 이적(李迹), 최항(崔恒), 윤자운(尹子雲), 이예(李芮), 서거정(徐居正), 김수온(金守溫) 13명은 살아남았다.
◈ 몽유도원도의 국보급 문화재
조선의 높은 문화재적 가치를 지닌 작품이지만 어인 일인지 일본 덴리대학교[天理大學] 중앙도서관이 1955년 경부터 소장하면서 일본의 중요문화재 1152호로 지정되어 일본의 문화재 노릇을 하고 있다니 기가 막힐 일이다. 왜 그것이 거기에 가 있는지 반출 경로를 아직까지 찾아내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1949년 재일교포 미술상이 몽유도원도를 국내에 들여와 팔려고 노력하였으나 실패하자 덴리대학에 판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때 재일교포가 내놓은 판매가는 60만 원이었는데, 지금 가치로 환산하면 약 200억 원에 달하는 값으로 그때 종로의 기와집 한 채 값과 맞먹었다고 한다. 그동안 민간인 중심으로 몇 차례 환송이 추진되었지만, 안되었다. 문제는 그것이 왜 거기에 가 있는지에 대한 증거를 찾지 못하는 것이 더 어려운 일이라고 한다. 국내에서는 1996년과 2009년 두 차례 전시되었다.
◈ 조선의 첫 달력 칠정산
대청마루에는 천문학자 이순지와 김담 할아버지가 만든 칠정산 천문도가 걸려 있어서 반가웠다. 그동안 조선은 북경을 기준으로 하는 중국의 달력을 사용하여 오다가, 세종 26년(1444)에 이르러 두 분의 수고로 한양을 중심으로 하는 역법을 계산하여 우리 시간대에 맞는 달력을 만들었는데, 이를 칠정산이라 불렀다.
오후에 자연스럽게 난 골목길을 따라 초가와 기와로 된 고택들을 살펴보는 동안 우리는 한 세기 이전 시대로 옮겨가는 느낌을 받았다. 고즈넉한 전통마을은 평화롭기만 하다.
저녁이 되어서 이 마을에 단 하나 있는 무섬 식당에 갔다. 이곳의 전통적인 음식은 무엇인지 알아보니, 청국장 비빔밥이라고 한다. 이것 말고는 먹을 만한 것도 없는 것 같다. 알고 보니 이 식당의 주인도 종씨로 우리를 반겨주었다. 무섬 식당은 1999년 경상북도의 지원으로 독립운동가 김성규의 복원된 집이다. 일제 강점기 이후에 활동한 청록파 시인이자 국학자인 조지훈의 처가이기도 하다.
섬계 고택 6월 6일 목요일 맑음
날이 밝자 가까이에 있는 종씨의 섬계 고택으로 옮겼다. 이 고택은 크기가 좀 더 크고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92호로 지정되어 있다.
여기는 아침을 사 먹을 수 있는 곳은 없다. 11시가 되어야 식당이 문을 연단다. 미리 컵라면 등 먹을 것을 준비할 수 있지만, 그리 하지 않았다.
아침은 금식하기로 했다.
무섬 사료전시관
전시관에는 마을 형성에 관한 역사적 배경, 생활과 문화, 자연환경, 배출한 주요 인물이 남긴 글, 국가로부터 받은 교지, 집에 걸었던 현판 원본 등 다양한 자료를 한 자리에 모아둔 것은 지역 내 으뜸 집성촌이라 할 만하다. 내 마음을 끈 것은 이 작은 마을에서 그것도 예안 김 씨 가문에서만 다섯 명의 독립유공자들을 낸 것이다.
김성규 유공자 - 출판법 위반으로 안동지청에서 1928년 9월 29일 금고 8월을 받았다. 1993년 건국포장 추서
김명진 유공자 -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1934년 7월 2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 6월을 받았다. 2008년 건국포장 추서
외나무다리
외나무다리는 30년까지만 해도 무섬과 바깥으로 이어주는 단 하나밖에 없는 길이었다. 꽃가마 타고 시집오는 새색시, 황천길 가는 상여도 이 외나무다리를 건너야만 했다. 이 다리는 지난 350년간 애환 어린 사연들을 가지고 있다. 다리의 길이는 약 150m, 넓이 20 ~25cm, 높이 60cm로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수 있는 다리이다. 다리 중간에 비켜 다리를 만들어 마주 오던 사람이 비껴갈 수 있게 만들었다. 1979년 마을로 들어오는 “수도교” 다리가 놓이면서 사라졌던 외나무다리를 다시 옛 모습 그대로 만들어 무섬마을을 더욱 운치 있게 해 주고 있다. 그리고 10월에는 외나무다리 축제행사를 열어 외나무다리 건너기 체험과 사또 행차, 전통혼례, 민속 행렬 등 여러 행사가 마련되어 있다고 한다.
나는 몸 중심이 좀 흔들린다는 느낌이 들어서 어떨까 하여 건너보기로 하였다. 보통 걸음으로 조심스럽게 걸어서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왕복하였다. 그리고 냇물에 들어가서 모래 바닥을 걸어 보았다. 지금은 가물어서 물이 가운데로만 흐르지만, 물이 좀 더 많이 넓게 흐른다면 외나무다리가 더 돋보일 것 같다. 속세에 시달린 마음들이 재충전을 위하여 모든 것을 잊고 자연에 묻혀 잠시 지나기에는 알맞은 곳이다.
김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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