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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여행기/Italy

Italy(이탈리아)

◈ 이탈리아는 어떤 나라? 

    

             

 정치  의원 내각제

면적  301.336㎢
인구  5,983만
말글  이탈리아어
돈 단위 EUR-유로화

 

참전국. 6.25 동란 때 지상군은 보내지 않았지만, 병원선을 보낸 고마운 우반국이다. 3300여 건의 수술과 1604명이 입원하였고, 74,000여 명이 통원 치료를 받았다.

 

지리위치와 역사
남유럽의 이태리 반도와 지중해의 두 섬 시칠리아와 사르데냐로 이루어진 나라. 북쪽은 알프스 산맥을 경계로 프랑스, 스위스와 오스트리아, 슬로베니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고, 그리고 삼면이 바다로 에워싸여 있다. 로마제국의 서울 로마가 지금의 로마이다. 오래 동안 서구 문명의 요람지였고, 또 종교 암흑시대를 이끌던 사악한 교황이 지배하던 로마 가톨릭의 중심지였다. 이 악의 중심지에서 르네상스 혁명이 일어나면서 가톨릭의 억압과 폭정에서 벗어나게 되면서 지긋지긋한 가톨릭 종교 암흑시대가 끝나게 된다. 문화 예술의 복고주의 운동과 인본주의 운동은 유럽 전체를 로마 가톨릭의 그늘에서 벗어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불행한 것은 이 가톨릭 종교 암흑기를 지낸 세대가 로마 가톨릭만 떠난 것이 아니라, 참 하나님으로부터도 떠난 것은 큰 불행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암흑시대에 교황이 다스리던 영지가 있었는데, 나중에 이 나라 안에 있는 산마리노 수도원과 바티칸 시국 두 지역은 각각 독립국으로 존재하게 된다. 로마제국이 망한 뒤에도 이 반도에는 수많은 침략과 나라들이 일어나다가 1946년 통일된 공화국이 되었다. 1957년 EC의 창립 국이었으며, 1993년에 EU의 회원국이 되었다. 화폐는 그동안 써 오던 리라를 치우고 유로화를 쓰게 되었다.

 

Renaissance(르네상스=되돌아가자는) 운동

        

유럽에 있어서 중세, 즉 종교 암흑 시대를 이끌어가고 있던 종교 정치적인 집단은 기독교와 바벨론 종교가 혼합된 그리고 로마의 정치적인 조직을 가진 로마 가톨릭이었다. 이 기간 모든 것은 로마 가톨릭(천주교)의 이데올로기 중심이어서 인간의 욕구나 표현의 자유는 용납되지 않았다. 로마 가톨릭은 이 기간 신의 대리자로서 인간의 존엄성과 창조성을 억압하고 파괴했고, 신의 이름으로 무자비한 폭력으로 헤아릴 수 없는 억울한 생명들을 죽였다. 15세기에 일어난 문화 예술운동은 종교억압 이전의 시대, 즉 표현의 자유가 있었던 그리스, 로마 시대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아울러 함께 이성의 눈이 뜨이면서 일어난 인본주의(Humanism)는 신의 중심에서 인간 중심으로 사상체계의 변화를 가져왔다. 이성의 눈이 뜨여진 인간은 이제 사색을 통해서 만물을 이해해야 하며, 신이 만물을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라면서 모든 세계관이 인간 중심이 되었다. 그리고 인간의 자유와 이성을 통해서 아름다운 세상이 되기를 바랐다. “사단의 영이 지배하는 로마 가톨릭에서 자유를 얻기 위한 사상혁명은 아주 잘한 것이다. 그러나 참된 자유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으로 돌아와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은 슬픈 일이다. 그들이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한 것은 로마 가톨릭(천주교)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저지른 악행이 너무 커서 그런 하나님이 몸서리칠 만큼 저주스러워서였을 것이다. 거짓 것을 버린다는 것이 참된 것까지 버리는 결과를 가져온 것은 가장 큰 불행이었다. 르네상스 운동도 악랄한 로마 가톨릭(천주교)에서는 자유를 얻었을지 모르지만 거기에 인생의 삶과 죽음의 대답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이제라도 모든 사람에게 자유와 평화 그리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예수님께로 돌아와야 한다.

 

◎ 이태리 여행  April 22-25 Fri,1980

Berlin에서 탄 날틀은 Munshen을 경유하여 Frankfurt에 내렸다. 공항에서 기차를 타고 Frankfurt 역에 내리니 박용숙 자매와 약혼자 김성문 형제가 기다리고 있어서 반가웠다. 나는 이제 이들과 함께 로마 여행을 떠나고 있었다. 우리는 여행비를 줄이기 위해 열차로 가기로 했다. Frankfurt에서 Munshen을 경유하여 Rome로 가는 표를 샀다. 박자매가 내 표를 사주어서 고마우면서도 미안했다. Munshen에서 오후 18:32 로마행 야간열차를 탔다. 밤 열차는 앉은 의자가 침대같이 펴져서 누워 잠을 잘 수 있게 되어 있었다. 흔들거리는 열차에서 깊은 잠을 잘 수가 없었고, 이제 감기에 시달리던 여독이 아직 풀리지 않아서 몹시 힘든 시간들이었다. 아침이 되니 어느 역에서 학생들이 많이 탄다. 우리 옆 자리에도 몇 학생들이 앉아서 우리는 영어와 독일어로 겨우 통하고 있었다. 내 옆자리 고등학생은 취미가 음료수 깡통을 모으는 일이라고 하여서. 마침 가지고 있던 독일어가 쓰인 Coca-Cola 깡통을 보여주니 반가워하면서, 마시고 달라고 하여서 그냥 주었더니 아주 좋아했다.    

 

Roma  April 23. Wed

열차는 예정보다 한 시간 늦게 로마에 도착하였다. 로마 역은 넓었고 사람들이 너무 많고 복잡해서 어디로 가야할지를 몰라서 어리둥절하였다. 로마에 단 하나 있다는 한국 사람이 하는 한미 식당을 지하철을 타고 찾아가서 한국 음식을 먹으니 간밤의 피곤이 다 사라지는 것 같았다. 이 식당은 유학을 온 분이 차린 한미 식당이다. 식당 주인이 소개해 준 호텔을 가보니 너무 비싸서 몇 곳을 다녔는데 우리 셋이서 한 방에 머물 방이 비싸거나 마땅하지 않았다. 한 곳에 가니 네 사람이 드는 방이 하나 있었다. 흥정하여 한 사람에 5000리라씩 내기로 하고 들었다. 우리는 오전 내내 피곤한 몸들을 쉬었다. 오후 두 사람은 나에게 밖에 나가자고 하여서, 나는 너무 힘들어서 오늘은 그냥 쉬겠다고 여러분들이나 다녀오라고 내 보냈다. 종일 나는 그동안의 지친 몸을 쉬었다. 그런데 오후에 나간 두 사람이 어두워져도 돌아오지를 않아서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혹시 해서 한미 식당으로 전화를 해보니 그분들이 길을 잃고 헤매다가 다시 식당에 들려서 안내를 받아서 떠났다고 한다. 밤 11시나 되어서 돌아왔다. 우리는 함께 한미 식당으로 가서 식사를 하고 내일 폼페이, 소렌토 관광을 예약하고 돌아왔다. 독일과 이태리 환율은 DM 1=455 Lila로 한국 환율과 비슷했다.

 

▶ 오늘의 여정 April 24 Thu

오늘은 나폴리, 폼페이 페허, 그리고 소렌토를 돌아보고 오는 길이다. 

 

나폴리(Napoli)  

 

 

오늘 날씨는 참 좋았다. 남부로 뻗은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이태리의 자연을 즐기는 동안 심신의 피로도 풀리고 기분전환이 되어서 즐거웠다. 나폴리는 이태리 남부 캄파니아 주의 서울로 인구 백만의 큰 도시로 아름다운 바다를 끼고 있는 아름다운 도시이다. 이태리 사람들 가운데 있는 유명한 속담에는 “나폴리를 보고 난 후 죽자”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우리 팀이 나폴리의 한 식당에서 점심을 먹게 되었는데 식사를 기다리는 동안 큰 밀짚모자를 쓴 세 사람이 통기타를 들고 와서 베사메무쵸(Besame Mucho)를 신나게 불러 주어 관광객들의 기분을 돋우었다. 모두가 팁을 주기에 나도 한 잎 넓은 밀 집 모자에 던졌다. 음악과 함께 먹는 나폴리 전통음식은 한 맛을 더 해 주고 있었다. 우리의 여행 목적지는 나폴리는 아니지만 가는 길에 들리게 되어서 자연히 덤으로 즐기는 시간이 되었다.

 

폼페이(Pompeii) 폐허

나폴리에서 폼페이까지는 32Km이었다. 폼페이 도시는 Vesuvius(베수비어스) 산의 서남쪽 6Km 지점에 있었으며 농업, 상업의 중심지였을 뿐만 아니라 로마 귀족들의 휴양도시로 환락의 도시였다고 한다. 폼페이가 멸망하던 그날은 서기 79년 8월 중 순경부터 규모가 작은 지진이 계속하여 일어나고 있었는데, 이와 같은 작은 지진이 그전에도 가끔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고 한다. 그해 8월 24일 6km 떨어진 곳에 있는 베수비오스 산에서 갑자기 화산이 터지면서 불같은 화산재가 엄청나게 하늘 높이 솟아올라 해를 가리더니 그대로 쏟아져 내려 폼페이 시를 한 순간에 묻어 버리고 말았다고 한다. 빨리 도망가지 못한 사람들과 짐승들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은 움직이던 상태 그대로 뜨거운 화산재에 묻혀 버리고 말았다. 그때 인구가 기록에 보면 2-5만 정도라고 하는데 그 가운데 2000여 명이 재에 묻혀 죽었다고 한다.(website 자료)

도시는 바둑판처럼 질서 정연하게 꾸며져 있었다. 공동광장, 스테비아네 목욕장, 원형극장, 약국, 호화로운 집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당시 문화 수준은 높았던 것 같다. 그러나 도덕적으로는 아주 타락한 사회로 알려지고 있다. 허물어진 한 호화로운 주택에 사람들이 일렬로 서서 들어가고 나오고 있었다. 우리는 무엇인지도 알지도 못하고 긴 줄에 서서 한 걸음 한걸음 가까이 가니 고함 소리가 들리고 나오는 사람들이 시시닥 거리면서 나온다. 궁금한 마음으로 차례가 되어 들어가 보니 넓은 벽에는 여러 종류의 능동적인 포르노 그림들이 색깔이 변화되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바로 이 벽화가 이 도시의 타락상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때 화산재에 덮여 죽은 사람과 짐승의 굳어진 석고들을 전시한 곳은 나를 많이 놀라게 했다. 어떤 석고들은 사람들에게 보여주려고 일부분 깨어 놓았는데 석고 안에는 썩지 않은 깨끗한 뼈들을 볼 수가 있었다. 사람이나 말, 등 모든 석고들은 다 움직이는 모습을 하고 있어서 갑작스러운 화산으로 우왕좌왕하는 도시의 모습을 그려 볼 수가 있었다. 마치 석고로 만든 작품 전시장 같이 보였다. 인간이 건설한 고대 문명의 번영은 그 죄악으로 인하여 한 순간에 역사의 저 뒤쪽으로 사라져 버린 것이다. 이 죄악 된 도시는 화산의 저주로 긴 세월 동안 묻혀 있다가 이제 빛을 보게 된 것으로 이 세대도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타락하면 이렇게 멸망한다는 역사적 교훈을 주고 있었다. “폼페이의 최후”라는 영화가 터무니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 멸망의 도시는 거의 1700년 가까이 조용히 묻혀 있다가 이 세상 끝에 그 모습을 드러내면서 인류에게 종말의 심판을 경고하고 있는 것 같았다.        

 

폼페이 발굴


Pompeii는 역사의 베일에 가려진 채 1900년 동안 7~8미터 화산 잿더미 속에 말없이 파묻혀 있었다. 문헌에는 로마 귀족들의 휴양도시이자 환락의 도시였다는 기록이 있으나 실제 그곳이 어디인지 모르다가 1709년 4월 어느 날 수도원 뜰, 우물 작업을 하던  인부의 곡괭이에 걸린 쇠붙이가 계기가 되어 마침내 세상에 그 정체를 드러내기 시작하다가 1748년 도로건설에 종사하던 건축가 몬태나에 의해 시작된 발굴로 현재 도시의 약 3/5 이상이 드러나 있을 뿐이며(1981), 지금도 계속 발굴하고 있으며 귀중한 자료들을 찾아내고 있는 중이다. 

 

                       

발굴 작업에 참여했던 고고학자들의 기록에서 그때의 상황을 살펴보고자 한다. 고고학자들이 발굴하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을 텐데 사람의 뼈나 흔적을 볼 수가 없었다. 의아해하던 학자가 관심을 가진 것은 텅 빈 구멍들이었다. 고고학자들이 구멍 속에 액 장 석고를 부었더니 사람의 모양이 재현되었다.  이것은 순간적 위기를 미처 피하지 못한 많은 희생자 중에서 없어졌던 시신의 모습이 재현되는 기적이 일어나기도 한다. 그것은 화산에서 흘러 내려온 뜨거운 화산재에 묻히면서 그 열기로 사람 자체가 부식되면서 인체모양의 구멍이 생긴 것이다. 공포의 죽음의 순간 손으로 얼굴을 가리 우고 죽은 사람, 딸을 꼭 끌어안은 채 죽어 서 있는 여인, 동전이 든 주머니를 쥔 채로 죽은 거지도 있다. 집 앞에서 철사에 목매 인 채로 발버둥 치다 죽은 개도 있었다. 여신 이시스를 모시는 신전에서 보물을 가지고 황급히 피하려던 신관 한 사람이 황금 포대를 들고 신전 밖 약 100미터 지점에 쓰러져 있기도 했다.

 

저택 앞에 커다란 열쇠 하나와 금화 10개 은화 88개를 쥔 채로 죽은 사람은 집주인으로 추정된다. 주택구조로 보아 폼페이의 상류층 시민들은 대체로 안일한 생활을 즐기고 있었음이 보여주고 있다. 이는 실내 벽화와 모자이크로도 확인할 수 있다. 가장 유명한 미술작품 중 하나는 세로 3,4미터 가로 5,9미터로 된 마룻바닥에 새겨진 모자이크로 페르샤군을 무찌르는 알렉산더 대왕이 그려져 있다. 채색된 유리와 150만 개의 대리석 조각으로 만들어진 이 작품은 돈 많은 사람의 저택을 장식하기 위해 이집트에서 수입된 것이다. 당시 의료업도 잘해놓고 번성했을 것으로 보이는데, 치장 잘해놓은 외과의의 저택에 외과용 의술 기구가 진열된 것이 발견되기도 했다. 술집에서 사용했을 것으로 보이는 L자형 대리석 카운터도 발견됐고, 술값 명세를 벽에 적어놓은 것도 있었다. 오락시설로는 2개의 야외 원형극장이 발견됐다. 하나는 연극용으로, 또 하나는 시 낭독 무언극과 연주를 위한 극장으로 짐작된다. 이곳에서 투구와 칼이 출토되기도 했는데 검투사의 투기장으로도 사용된 듯 우승자의 이름이 벽에 기록되어 있었다. 이 외에 폼페이 시민의 편의시설로 공동수도의 수조 설치를 일정한 구역마다 설치해 놓았고, 공동 목욕탕이 4 군데서나 발견됐다."

       

 

소렌토(Sorrento)


나폴리에서 소렌토로 가는 길은 지중해의 맑고 아름다운 해안을 끼고 있어서 즐거운 여행이 되었다. 이곳은 가구로 유명한 곳이라고 했다. 가구점들을 돌아보는 것도 재미있었다. 나는 자명종을 열면 “돌아오라 소렌토야”라는 노래가 울리는 보석함 두 개를 샀다. 돌아오는 길에 가이드는 우리에게 높은 산 위에 자리 잡고 있는 Casino Monastery를 소개하여 주었다. 저 수도원도 바티칸 시 같이 국가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오늘 하루 여정을 마치기 전에 우리 팀은 산성이 잘 올려다 보이는 아름다운 숲 속에 있는 식당에서 이태리에서 소문난 포도주를 곁들인 저녁 식사를 하도록 해 주었다. 즐겁고 아름다운 여행이었다.

김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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