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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여행기/Italy

콜로세움(Colosseum)

♣ Colosseum(원형경기장)

       

      

Colosseum, 이탈리아어로는 거대하다(Colosseo)라고 하지만, 한국 사람들은 생긴 모양을 따라서 편하게 원형경기장이라고 부른다. 지금 보는 콜로세움은 원형에 비하면 1/3의 앙상한 뼈대만 남아 있는 편이다. 남겨진 수많은 제국의 유적들과 예술품들로 지금도 1000년 로마 제국의 숨결이 느껴진다.

역사가는 말한다,

"모든 역사는 로마로 흘러들어 갔고, 근대의 모든 역사가 그곳에서 흘러나온다."

 

그때 로마의 시인인 Martialis는 그의 책 "공연에 관한 책"에서 콜로세움에 대한 자부심을 이렇게 읊었다.  

1. 이집트인들아! 피라미드를 자랑하지 말라.

2. 아시리아 인들아! 바벨론을 입에 담지 말라. 

3."... 황제의 새 경기장 앞에서 그것들이 설 자리는 없을 것이다. 모든 명성들은... 이 그림자에 가려질 것이다."  

         

콜로세움의 원래 모습

                                                       

▶ 콜로세움이 지어진 동기

콜로세움을 돌아본 나는 왜 이 거대한 경기장을 만들었을까 하는 마음이 들어서 자료를 찾아보았다. 로마는 네로의 독재와 난폭함으로 신음하고 있었고 특히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심했다. 로마에 큰 화재가 나서 로마 2/3가 타버리자 네로는 그 땅 가운데 도시 중앙의 얼마를 빼앗아(몰수) 바다와 같은 인공호수를 만들고 150개가 넘는 황금 궁전을 지어서 호사를 누렸다. 네로가 죽자 3명의 황제가 바뀌는 내전으로 민심은 흉흉해졌다. 이때 로마 변경 유대 전선 사령관이던 베시파시아누스 로마의 황제로 부름을 받자, 아들 Titus(타이투스)을 사령관으로 남겨두고 로마에 와서 아홉 번째 황제에 오른다. 서기 72년 그는 민심을 수습하고 아울러 평민 출신인 자신의 정치적 위상을 세우기 위하여 네로의 황금 궁을 헐고 그 자리에 이 원형 경기장을 8년에 걸친 공사를 시작한다. 그러나 베시파시아누스 황제는 완공 1년을 남겨두고 숨을 거두게 되었다(재위 기간 69-79).  유대를 완전히 정복한 그의 아들 Titus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원로원으로부터 로마 열 번째 황제로 부름을 받는다. 그는 황제에 오르자마자 아직 완전히 완공되지 않은 경기장을 시민들에게 개방한다. 개막식은 100일 동안이나 계속되면서, 시민들의 호감을 얻으려고 잔인한 놀이들을 공연하게 된다. 하루에 맹수들이 오천이나 죽어나가고, 사형수들과 검투사들이 수백 명이 죽어나가는 쇼를 벌렸다. 경기장은 황제의 정치적인 쇼를 하는 무대가 되면서 시민들과 소통하는 장소가 되었다.

                

              

경기장은 고대 로마 유적지 중 가장 큰 규모로 5만 명 이상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다. 최대지름 188m, 둘레 527m, 높이 57m의 4층으로 된 타원형 건물이다(아파트 15-18층 높이). 아레나(투기장)를 중심으로 관객석은 원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원래 경기장은 가운데 바닥을 드러내면 큰 공터가 되어서 물을 채워 배를 띄워 해전을 벌리기도 하였는데, 배에 탄 군인들은 모두 죄수들로 서로 무차별적으로 죽이고 죽이는 잔인한 쇼를 연출하기도 하였다.

          

원형경기장의 해전

                                                      

그 뒤에 경기장 바닥을 재건축하여서 밑에는 맹수들의 우리와 함께 검투사, 사형수들이 갇혀 있는 시설들로 만들었다. 그 위에 나무로 바닥을 만들어 땅 위와 땅 아래를 나누었다. 이 경기장에서 수천 회에 걸친 검투사의 경기, 맹수와의 싸움이 즐겨 행해졌으며,. 바로 이곳에서 많은 믿음의 성도들이 굶주린 맹수에 의해 순교의 피를 흘린 순교의 장소가 되었다. 콜로세움은 완공된 이래 300여 년 동안 피비린내 나는 사투가 계속 벌어지다가 405년 오노리우스 황제가 격투기를 폐지함에 따라 마침내 무고한 피 흘림의 역사가 끝나게 되었다.

                     

 

콜로세움에 들어서자 엄청난 크기에 압도당했다. 그 옛날 살인마적인 놀이를 즐기려고 이토록 엄청난 공사를 하였다니 놀랍고 놀라울 뿐이다. 바닥은 허물어져 내려서 맹수들의 우리와 감방들이 드러나 있어서 보기에 흉했다. 4층이나 되는 제일 높은 곳에 올라 경기장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기독교 핍박 시대로 가보았다. 굶주린 맹수들에게 내 던져진 수많은 성도들의 울부짖음의 이 참혹한 광경을 보면서 열광하는 미친 로마 군중들의 함성들이 쟁쟁하게 울려오는 듯 했다. 한목숨 바쳐 믿음을 지킨 위대한 순교자들의 피는 헛되지 않았다. 이렇게 위대한 믿음의 용사들이 있었기에 오늘 내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들을 죽인 살인마 인간 제국은 망하여 사라졌지만 순교자들의 이름은 영원히 빛나고 있었다. 

 

Roma Catholic(천주교) 학살 사

나는 여기서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로마가톨릭이 저지른 죄악이 인간 역사보다 더 악하고 잔인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로마제국은 기독교인들을 잔인하게 학살했다. 바로 이런 잔인하고 폭력적인 로마의 토양에서 생겨난 것이  로마의 가톨릭이며, 인간 역사 가운데 이 가톨릭에 의해 종교 암흑시대가 열린다. 그리고 이 기간에 가톨릭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주님의 형제자매들을 불태우고, 목매달고, 물에 집어넣어 죽이는 만행을 저질렀다. 로마제국 시대에 흘린 피는 기독교를 지키기 위한 죽음이라면, 로마 천주교회에 의해 흘린 피는 성경의 진리를 지키기 위한 순교자들의 것이었다. 가톨릭은 바벨론 종교의 여신 세미라미스와 그 아들 담무스를 마리아와 아기 예수로 둔갑시켜 바벨론 종교와 기독교를 혼합시켜 기독교적인 우상과 미신 종교가 되게 했다. 로마 천주교는 그리스도의 참된 교회를 대적하는 사탄의 집단이 되어버렸다.

 

남미에서의 로마가톨릭의 만행

로마 가톨릭의 만행은 로마로 끝나지 않고 로마 가톨릭교도들이 가는 곳에서는 어디든지 일어나고 있었다. 1492년 콜럼버스가 남미 바하마 군도를 발견하게 되므로 Hispaniola(아이티+도미니카 등) 섬과 남미에서 금을 보고 눈이 어두워진 로마 가톨릭교도들은 점령하는 모든 곳에서 원주민들을 무자비하게 몰살하는 천인 공로할 만행을 저질렀다. 할당된 금을 캐 오지 않을 경우 손을 자르거나 매달아 불에 태워 죽이는 천인 공로할 죄악을 저질렀다. 1493년 살인자 콜럼버스가 도착할 당시 그곳 원주민인 Tyno 은 약 800만이었다. 1542년에 와서는 겨우 200명이 남게 되어 드디어 1942년이 이르러 카리브해 원주민은 거의 멸종이 되었다. 남미 대륙도 로마 가톨릭의 말발굽이 닿는 곳은 예외 없이 인종말살의 참혹한 과정들이 역사에 기록되어 우리 마음을 서글프게 하고 있다. -아이티+도미니카 단기선교 기를 참고-   

                    

                                  

이런 방법으로 바하마 군도의 마리엔 원주민 왕국과 카리비안의 하라과 왕국은 사라졌다. 이 그림들은 그 때 스페인 침략자들과 함께 한 가톨릭 사제가 그린 것이 남아서 오늘날 로마 가톨릭교도들이 저지른 만행을 증명해 주고 있다. 학살당하는 원주민들은 살기 위해서 살인자들의 종교를 받아 드리면서 자기들의 토착종교와 혼합시켜 버려 남미 가톨릭은 또 다른 귀신 종교가 되어버렸다. 원주민의 딸들은 살인자들에게 내어 주어 혼혈이 되어가면서 살아남았다.  캐리비안의 인종말살은 남미 대륙의 인종말살에 대한 한 가지 사례에 불과하다.

 

대륙을 달리는 열차

좀 더 머물고 싶었지만 시간이 나를 재촉하고 있었다. 베니스 광장에 있는 독립 기념관을 잠시 둘러보고 나는 기차역으로 나왔다. 나는 Hanover로 돌아가야 하므로 두 사람을 남겨 놓은 채 떠나야만 했다. 16:30 침대차를 타고 Frankfurt로 달리고 달렸다. 시간이 너무 짧아서 정말 아쉬웠다. 이번 여행에 귀한 동행자들을 부쳐 주시고 빈손으로 이 귀한 여행을 하게 해 주셨다. 형제자매의 사랑과 주님의 은혜였다. 침대차는 네 명이 잘 수 있도록 이층으로 되어 있었는데 좋은 침대차는 아니었다. 스프링으로 된 침대는 얇은 매트리스로 덮는 이불도 없었다. 불편했고 흔들리는 열차에서 깊은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얼마를 가다가 한 역에서 얼굴이 검은 여성이 한 사람이 들어와 옆 이층 자리에 오른다. 나는 열차에 몸을 맡긴 체 긴 밤을 달리고 있었다.


Hannover  April  26-28 Mon 

밤을 달려 온 열차는 15:00에 하노버에 왔다. 그리고  Lons park 수양 관에 돌아와 긴 여행에 지친 몸이 좀 회복되도록 푹 쉴 수 있었다. 다음 날 아침 나는 이제 Hannover를 떠나기 전에 자매들과 Steinberg 장로님을 방문하여, 그동안 베풀어 주신 사랑과 보살핌에 대해서 고맙다는 인사를 드렸다. 장로님은 내가 한국으로 돌아가면, 자기가 한국을 방문하여 한국교회와 교제해 보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독일서 귀국한 자매들도 만나보겠다고 하였다. 나는 한국에 오시면 내가 계획을 만들어 전국 교회를 방문하도록 하겠다고 걱정하지 말고 오시라고 말씀드렸다. 이제는 부부가 된 최영과 김복림의 초청으로 저녁 식사를 하고 김학열 자매 병원 기숙사에서 성경 모임을 가졌다. 그리고 나는 밤차로 친구가 기다리고 있는 Berlin으로 가야 하는데 바로 가는 기차가 없어서 Hamburg으로 돌아가는 차를 탔다.

 

▶ Itary를 떠나면서

나의 이태리 여행은 3 4일이다. 이 짧은 기간 그 나라의 중심 로마와 남부를 보았다. 밀라노, 제노바, 피렌체, 베네치아를 돌아보아야 가히 이탈리아를 보았다고 말 할 수 있지 않을지, 나는 나에게 주어진 시간 속에 로마, 폼페이, 나폴리, 소렌토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저 산 위에 자리 잡고 있는 독립국 산마리노 수도원이 올려다 보이는 산 아래 마을에서 저녁을 먹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Berlin  4.29-5.8 Thu.

이 기간은 내가 마지막 Berlin에 머문 시간들이었다. 어둠 속을 달리는 열차에서 나는 하루도 쉬지 않고 길을 가는 자신을 생각하면서 이 나그네 길이 언제쯤 끝날 것인지를 생각했다. 이른 아침 Berlin에 도착하니 친구가 기다리고 있어서 위안이 되었다. 따뜻한 아침 식사와 함께 나그네의 안식을 누릴 수가 있었다. 울창한 숲 속에서 모든 것을 내려놓고 다른 세상에서의 삶을 누리는 꿈결 같은 세월들이 바람같이 날아가고 있었다. 친구와 마지막 즐긴 시간들, 그리고 이 한 밤으로 서독에서의 나그네 생활은 다해가고 있었다. 

 

New Milton  May 8, Thu

Berlin서 18:30 날틀로 나는 런던으로 그리고 열차로 New Milton Johns 노형 댁으로 돌아왔다. 노부부는 집나간 자식이 돌아온 것 같이 포옹하여 주면서 반가워해 주셔서 내 마음을 행복하게 해 주셨다. 

독일에서 로마로 다시 독일 베를린으로 그리고 영국 New Milton으로 돌아오는 국제 여행을 마쳤다. 

 

김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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