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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선교/중국선교답사여행

12 중국 선교 여행을 마치면서,

하얼빈(哈尔滨)                                                

 

하얼빈이란 이름은 “그물 말리는 곳”이란 뜻으로 송화 강가의 조그만 어촌이었다. 1898년 청나라로부터 철도 부설권을 획득한 러시아가 하얼빈에서 대련을 잇는 철도 건설의 기지로 사용하면서 근대 도시로 개발된 곳이다. 인구 200만의 흑룡강성의 서울이며 교육, 상업, 공업 중심도시이다. 하얼빈은 우리 한국 근대사와 여러 가지로 얽혀 있는 곳이다. 하얼빈 역은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조선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가 탄 기차가 하얼빈에 도착하였다. 열차 안에서 러시아 재무대신 코코프체프와 회담을 마친 뒤 9:30 분 경 러시아 군대의 사열을 받기 위해 차에서 내려서, 사열을 마치고 열차로 돌아가는 이토를 향해 대한의 남아 안중근 장군의 쏜 세 발의 총탄에 그는 죽게 된다. 그리고 수행비서관, 하얼빈 왜국 총영사, 만주 철도 이사를 맞추었다. 조국의 장래가 암울하고 한 맺힌  민족의 가슴이 터질 것 같이 답답하던 때에 하얼빈 역에 울려 퍼진 한방의 총성은 이천만 민족과 중국인들의 가슴을 시원하게 하여 주었다. 대한은 살아 있다는, 그리고 대한의 남아도 살아 있다는 기백을 보여준 천추에 남을 위대한 행동이었다. 이토가 쓰러진 것을 본 안중근 장군은 두 손을 들어 소련어로 “코레아 우라. 코레아 우라(한국 만세)”라고 외쳤다. 그는 끝까지 굴하지 않고 당당한 대한의 남아로 살다가 1910년 3월 26일 뤼순(여순) 감옥에서 30세에 순교하셨지만, 그의 나라 사랑하는 마음과 기백은 지금도 여전히 우리 마음을 울리고 있다. 

     

안중근 의사

 뤼순 감옥에 있을 당시의 초라한 모습이지만, 굴하지 않는 기개만큼은 안 장군을 접한 왜국 검사관들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총부리를 들고 이토를 향해 총알을 날리던 그 씩씩한 대한 남아의 모습을 그려 본다. 30여 년간 살다 간 짧은 생애이지만, 장군은 이 나라 이민족과 함께 영원히 남아 계신다.   

 

하나님의 자녀들도 필요한 때에는 나라와 민족 그리고 나아가서 신앙의 자유와 복음을 위하여 한 생명 드려 천추에 길이 남을 위대한 행동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큰 빛을 마음에 얻었다. 내가 탄 열차가 역에 서자 나는 감회 깊은 마음으로 플랫폼을 밝았다. 그리고 이 역사적인 위대한 흔적이 어디에  있는지 찾아보고자 두리번거렸지만 찾을 수 없는 섭섭한 마음을 안고 나가면서 혹시 밖에는 그러한 흔적을 볼 수 있을까 하는 기대로 나가서 기다리고 있는 친구와 조선 형제에게 물으니 아무것도 없다는 말을 들을 때 내 마음은 몹시 허전하였다. 한국 안중근 기념 사업회에서 중국 정부와 접촉하고 있어서 곧 대한 남아의 위대한 모습을 볼 수 있으리라 믿는다. 1997년에 뜻있는 조선족의 헌신으로 민족 호텔 안에 안중근 의사 기념박물관을 꾸렸다니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이제는 걱정 없다.

 

안중근 기념관

2006년 제1 플랫폼에 저격 장소를 표시해 놓아서 누구나 쉽게 그날의 역사적 순간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시진핑 주석의 명에 의하여 하얼빈 역의 귀빈실을 개조하여 안중근 기념관을 만들었다. 박근혜 대통령의 한중관계를 통해 이루어진 쾌거이다.)

 

그동안 중국 정치 지도자들은 일본과의 경제외교 문제를 염두에 두고 자기 나라의 항일 사건까지 소극적으로 다루러 왔는데, 섬나라 왜국이 이제 영토문제와 침략제국주의 근성을 드러냄에 따라서 중국의 지도자 시진핑은 정면 대결로 왜국이 중국에 저지른 만행들을(집단 학살, 강간. 위안부. 약탈 등) 역사적 근거들을 가지고 대응하기 시작하였다. 안중근 장군 기념관의 개관도 중국의 대일 정책 변화에 따른 것인데, 우리에게는 바람직한 일라고 해야 하겠다.     

 

하얼빈은 또 1939년 일본 침략군은 세균전을 대비하여 수많은 포로의 생명을 생체 실험을 통하여 희생시킨 야만적 731부대가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지름 713부대를 몇 년 뒤 찾아보게 되는데, 그날에 보고 느낀 것들은 순서가 되면 실리게 될 것이다.) 

 
하얼빈에 있는 동안 한 처소에서 오전 10시에 강습회로 모였고 저녁에는 다른 곳에 있는 처소에 가서 복음 집회를 인도했다. 처소 여자 집사 남편은 은퇴하고 당원증을 반납하니까 이유를 물어서 이젠 몸도 안 좋고 해서 그런다고 했더니 어느 날 당 위원회에서 이 분 집에 찾아왔다가 방에 십자가가 걸린 것을 보고는 종교를 믿기 때문이냐고 해서 그렇다고 했더니 그렇다면 이해를 하겠다고 하면서 그동안의 공산당을 위한 투쟁 경력을 아까워하면서 떠났다는 간증을 들을 때 이곳에서도 주님은 살아계셔서 역사하시고 계셨다. 다음날은 그곳의 형제들과 함께 동북 항일 전의 명장인 조린의 이름을 딴 조린 공원을 거쳐서 동북 항일 혁명 박물관을 방문하였다. 그 많은 열사 가운데는 자랑스러운 조선 남아의 이름들도 빛나고 있었다. 중국 정부는 조선족의 항일 투쟁 경력을 높이 사서 혁명의 동반자로서 여기고 있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송화강, 태양도

다음날 나는 소학교 교사를 하는 박 형제와 함께 구소련 거리를 거닐어 송화 강가 이르렀다. 강변공원이 만들어져서 시민들이 즐기고 있었다. 크고 작은  놀이 배들이 떠가고 있었다. 여기서 러시아 하바롭스크 까지 연락선이 다니고 있었다. 언제인가 이 배로 하바를 가보고 싶은 마음이 일어났다. 건너편 태양 도에 배를 타고 건너갔다. 태양 도는 모래로 된 섬으로 나무숲이 우거져서 좋은 휴양지였다. 송화강은 상류에 내린 비로 흙탕물이 내리고 있었지만 수영하는 사람들 뱃놀이하는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우리는 강변에 앉아서 주님의 일을 오랫동안 이야기하면서 모든 것을 버리고 복음을 위하여 살도록 격려하였다. 주님께서 나를 30여 명이 모이는 한 처소로 인도해 주셨는데, 그날 저녁은 집회를 마치고 오랫동안 개인들을 위한 구령 안내를 하였다.


 

비자 연장

오늘 천진에서 인천으로 가는 배표를 사러 하얼빈 여행사에 가니 나의 중국 비자의 유효한 날짜 안에는 표가 없었다. 다 팔려 버린 것이다. 비자를 좀 더 연장해야 해서 박 형제와 하얼빈 공안국 외사과에 갔다. 담당자는 개인 집에 거주할 때는 24시간 안에 신고해야 하는데 안 했기 때문에 하루에 100원씩 계산해서 벌금을 내야 한단다. 그리고 뭐가 좀 까다로운 것 같았다. 그래서 목단강에 가서 비자를 내고자 열차를 탔다.

 

차창으로 넘어 들어온 불법 자

상지 역에 열차가 서자 젊은 청년들이 차 창문으로 넘어 들어와서 자리를 잡는다. 열차 공안원들이 그들을 붙잡았다. 그리고 사복을 입은 한 사람이 와서 내 옆에 앉은 한 사람에게서 무엇인가를 쓰더니 지장을 받아 가지고 갔다. 얼마 후에 사복 승무원이 와서 내 옆에 앉아서 뭐라고 내게 말하는데 알아들을 리가 만무했다. 나는 겨우 몇 마디 하는 중국어로 ‘부후위 한위(不会汉语)’라고 했다. 한어를 모른다는 말이다. 그는 나에게 종이를 펴서 나를 보여 주는데 ‘증인 조서’라는 한문을 읽을 수 있었다. 창문으로 뛰어넘어 들어온 사람을 처벌하려고 두 사람의 증인 조서가 필요한 모양이다. 자 이제 뜻은 알았는데, 말을 알고 글을 알아야 써 줄 것이 아닌가! 답답한 노릇이다. 이러고 있는데 저쪽에서 남루하게 보이는 한 청년이 다가오더니 한국서 오신 선생님이시지요? 하고 인사를 하고는 열차 승무원에게 왜 그러느냐고 묻는다. 이제야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아까 그 광경을 보고 잠이 들어 있는 노인을 가르치면서 아까 본 사람이라고 하니 깨워서 조서를 꾸미는데 어떤 때는 한문을 쓰지를 못해서 써주어 가면서 조서를 받아갔다.

 

조선족 형제

마침내 옆에 자리가 비어 있어서 두 형제가 왔다. 두 형제는 밀산에 사는데 심양에 돈벌이 갔다가 돈도 못 벌고 집으로 가는 길이라고 했다. 무슨 일을 했느냐고 물으니, 철도 보수하는 데서 일했는데 하루에 17원씩 받아서 밥값과 방값 주고 나면 남는 것이 없다고 했다. 고생만 하고 간다고 했다. 두 형제의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내가 저녁을 사주면서 예수님을 믿고 살아야 할 것에 대해서 말했다. 어머니가 교회에 다닌다고 말했다. 이러는 동안 열차가 목단강에 도착했다. 가지고 있던 전도 책자를 주면서 예수님을 믿고 열심히 잘 살라고 부탁하고 헤어졌다. 목단강에서 비자 연장을 해 주어서 가벼운 마음으로 하얼빈으로 돌아왔다. 

하얼빈의 몇몇 형제들이 대련을 가보자고 권하여 나는 대련에서 위해로 가서 위해에서 처소사역을 하고 있는 조선족 형제를 만나보고 인천 가는 배를 타기로 했다. 하얼빈 선박 대리점에서 위해에서 인천 가는 표를 샀다.

 

유대인의 유적들

중국 땅에 유대인들이 살기 시작한 것은 주전 이스라엘이 로마에 의해 멸망하고 디아스포라가 시작한 때로부터 시작한다. 1910년 유대인 학교 건물을 조선족 제2중 학교로 사용하고 있으며, 국가 지정 보호 건물로 보호하고 있었다. 1940년대 일본침략제국주의자들이 낸 유대인 인구 통계를 아래 지도에서 볼 수 있으며, 유대박물관에는 중국 유대인에 대한 많은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1940년대  중국에 살던 유대인 인구를  일제가 조사하여 남긴 기록에 보면, 대련에 190명,  봉천(심양)에 80명, 하얼빈에 3000명, 천진에 18,000명, 청도에 120명, 상해에 20,000명으로 모두 41,390명이 살고 있었다. 이통계는 일본이 만주국을 세우고 자기들의 손이 미치는 일부에 대한 조사일 뿐이다.  

 

 

북한 김일성 사망 뉴스

김일성이 세상을 떠나다

이날은 1994년 7월 9일 저녁이었다. 박 형제 댁에서 저녁 식사를 마치고 멀리화 차를 마시며 쉬고 있는데 TV에서 7시 저녁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알아듣지 못하는 중국말이기는 하지만 열심히 보고 있는데 조선의 김일성 주석이 8일 오전 2시에 심장병으로 사망했다는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이제 북한은 앞으로 어떻게 되어 갈 것인가 하는 성급한 의문이 일어나고 있었다. 다음날 서명수 향제가 처소에 몇몇 식구들의 침례식이 있다고 하여 송화강에 나가서 배를 세내어서 강 상류에 있는 한 섬으로 갔다. 침례식을 하는데 거기에 놀러 와 있던 중국 사람들이 신기하게 보고 있었다. 예수님을 모르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침례를 받는 여섯 형제자매의 기뻐하는 모습들은 정말 보기에 아름다웠다.

 

대련에서

대련은 청나라가 19세기 중엽 해군 기지를 건설하였다. 1897년 러시아가 하얼빈을 잇는 철도와 항구를 개발하면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러일 전쟁(1904-5)에서 일본에 지게 되어서 일본은 같은 해 5월 말에 대련을 소련으로부터 접수하므로 대륙 침략의 거점이 되었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므로 써 대련은 중국에 돌아오게 된다. 인구 450만으로 중국의 중요한 무역항 가운데 하나이다. 산을 등지고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대련은 북해의 진주라고 할 정도로 경치가 빼어난 곳이다. 해산물이 풍부하고 과일도 많이 생산되는 곳이다.

 

 

대련으로 가는 일행은 네 사람으로 나의 친구 서명수형제와 두 조선족 형제들이었다. 우리는 11시 35분에 떠나는 대련 기차를 탔다. 하얼빈에서 대련까지는 15시간이 걸렸다. 산들은 그리 많지 않고 광활한 들만 보였다. 그 넓은 들에 보이는 것은 옥수수뿐이었다. 우리 일행 가운데 한 형제는 상해에서 생산되는 중국에서 이름난 도기 회사 대련 지사에서 일하고 있는데 우리가 간다고 어떻게 소개를 했는지는 모르지만, 중국인 지사장이 이른 아침 차를 가지고 우리를 마중 나와 주었다. 그분은 우리를 자기네 직원들이 사용하는 하숙집으로 안내해 주고 우선 쉬라고 하고는 갔는데, 무더운 열기와 철 침대에서 나는 냄새 때문에 잠시라도 편히 쉬기가 어려웠다. 우리는 택시로 회사에 가서 여러 가지 아름다운 도자기류(찻잔들과 물 주전자 등)들을 구경하고 회사 차로 발해 호텔까지 데려다주어서 거기에서 2박 3일을 있게 되었다.

 

박물관

오후에 나는 박 형제와 함께 기대를 가지고 자연 박물관을 보러 갔다. 그러나 많은 자료를 가지고 있었지만, 전시장의 조명 시설과 전시물들은 입체적인 효과를 주지 못하고 있어서 모두가 초라하게 보였다. 중국의 박물관들을 가보면 대개 입체적인 조명 기술이 발달하지 못하여 너무 조명이 흐려서 귀중한 전시물을 보는데 좀 짜증스러울 정도였다. 조명을 좀 밝게 하고 필요한 곳에는 Spot Light을 사용해서 시각적인 효과를 주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호탄낙원(虎湍乐园)

오후에 우리는 함께 호탄낙원이라고 부르는 공원으로 갔다. 대련 항구가 내려다보이는 공원은 아름다웠다. 천연으로 빼어난 곳에 인공 조경을 곁들여 산과 바다의 만남이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해양박물관에는 아름다운 해양동식물들이 살아 있는 대로 볼 수 있었다. 입구에는 장수의 상징인 살아있는 거북이에 돈을 던지면서 복 얻기를 바라고 있었다.

 

바다 위로 건너는 케이블카도 있어서 운치를 더해 주고 있었다. 우리는 케이블카를 타고 건너 전가압 경구(傳家壓 景區)에 있는 해수욕장에 갔다. 해수욕장 입구 길거리에는 포장으로 된 간이 식당들은 바다 해산물로 음식을 해서 팔고 있었다. 중국식 해산물 점심을 먹고 해수욕을 하러 바다에 나갔다. 파도에 해태(다시마)가 밀려오는데 그것을 건지려고 사람들이 파도와 함께 즐기고 있었다. 우리도 2시간 이상 해태를 건지면서 즐겼는데 제법 많이 건졌다. 해태를 건지려고 애쓰는 두 중국인 아주머니들에게 반반씩 나누어 가지라고 했더니 고맙다고 좋아했다. 호텔에 돌아와 우리는 경건의 시간을 가지면서 중국의 복음화를 위해서 조선족 형제들의 헌신적인 노력이 필요함을 깊이 나누었다. 개방 뒤 물질을 추구하고 돈이 인생의 최고 목표요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중국에서 초연하게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 받을 종들을 주님이 찾고 계신다는 말씀으로 형제들을 격려했다. (...하나님의 능력을 쫓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딤후 1:8) 여기서 위해로 건너가는 배표를 사기가 쉽지 않았다. 이른 새벽 이 형제가 선창 매표소에 가서 겨우 표를 샀다. 점심에는 이 형제가 일하고 있는 지사장 집으로 초대되어 갔다. 지사장 부인도 중국인인데 한국에 중국 친척이 있어서 한국에 가서 일 년 정도 있으면서 돈을 벌어 왔다고 했다. 한국말을 어느 정도 하는 편이어서 중국말을 모르는 우리가 지내기가 편했다. 우리를 위하여 해산물로만 된 음식을 준비했다. 해산물 점심을 즐기고 있는데 주인 아주머니가 한 젊은 여자의 사진을 가지고 와서 이 여자분이 한국 사람과 결혼을 하고 싶어 한다고 누구에게 소개해 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그리고 식후에는 그 여자를 데리고 와서 소개를 했다. 나이는 28살이었는데 한국 사람에게 시집을 가려고 하는 것은 팔자를 한번 펴보자는 의도가 있는 듯하였다. 날씨도 무덥고 집안은 몹시 후덥지근해서 집에 그대로 머물기에는 무리였다. 우리는 그 집을 나와서 다시 바다로 갔다. 잠시나마 중국에서 만난 형제들과 함께 있으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즐거운 교제와 휴식하도록 축복하여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했다. 내일이면 저들이 어디에서 어떤 형편으로 살게 될지 모르지만, 주님께서 저들을 지켜주셔서 승리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되도록 해 달라는 간절한 기도를 드렸다. 이 층 버스를 타고 시내에 들어왔다.

 

저녁은 대련 역전에서 조선사람의 식당에 가서 해결하고 하얼빈으로 기차로 먼저 떠나게 되는 두 분을 전송하고자 역에 가니, 북쪽에 폭우가 내려서 철교가 물에 잠기어 하얼빈 가는 열차가 못 가게 되었다. 나는 두 분과 헤어져서 이 형제와 함께 배를 타려고 선창에 왔다. 이 형제와 내년에 다시 만나기로 하고 위해로 가는 배에 올랐다. 배 갑판에 자리를 깔고 자는 제일 싼 자리에는 이미 사람들이 가지고 온 담요들을 깔고 잠자리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 갑판에 철 침대들이 놓여 있는데 가격이 바닥보다는 조금 비쌌다. 내 방은 계단을 두 번이나 내려가서 있는 방이다. 좁은 방에는 두 사람이 잘 수 있는 이층 침대가 있었고 세면대가 달려 있었다. 바람이 통할 수 있는 곳이 없어서 공기가 탁하고 무더웠다. 같은 방에 든 조선 분은 나에게 중국에서 어떤 사업을 하면 좋은지에 대하여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잠에서 깨어나니 배는 위해 항구 앞바다에 와 있었고, 비가 내리고 있었다. 

 

위해에서

위해 항에서 인천행 대기실은 시간이 되어서야 문을 열어서 많은 사람이 앉을 곳도 없는 밖에서 서서 기다리느라 몹시 불편했다. 거기에다가 빗살도 가끔 뿌렸고, 햇볕은 따가웠다. 북조선 우표책이나 북조선 돈을 사라는 조선사람들의 치근거림도 끈질겨서 보통 귀찮은 일이 아니었다. 배에 오르니 한국 승무원들이 양쪽으로 서서 어서 오십시오, 하고 맞이하는데 천진 갈 때 하고는 분위기가 달랐다. 이 배는 한국 사람이 운영하는 배여서 그런지 구석구석 깨끗하고 분위기가 좋았다. 선실 특 B는 이층 침대가 두 개가 있는 곳으로 청결함이 최상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래서 그런지 기분이 아주 상쾌했다. 위층에는 젊은 화교 청년이 함께하게 되었다. 개방 뒤 부모님의 고향인 위해로 오가면서 보따리 장사를 하고 있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가까워졌다. 침대에 앉아 성경을 열어서 읽는 가운데 다음과 같은 말씀이 중국 선교에 대한 내 마음의 의지를 굳게 해 주고 있었다.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너희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시편 37:4-5

 

갑판에 나가서 항만과 도시들을 돌아보는데 3시 30분에 배는 천천히 선창을 벗어나기 시작하였다. 나는 이번 방문 때는 미국에서 만나 잠시 함께했던 조선족 이희승 형제 밖에는 아무도 몰랐었는데, 이제 많은 사람을 알게 되었고, 일할 수 있는 곳도 알게 되었고, 다시 올 때는 갈 곳도 있게 되었고, 기다리는 사람도 있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주님께서 내게 주신 축복이 넘치고 있었다. 그리고 더 소중한 것은 주님께서 내 마음에 중국에서 헌신할 수 있는 큰 확신을 주신 것이었다. 아직 중국 선교를 위하여 준비된 것은 아무것도 없는 빈손이지만, 인도하시는 주님께서 길을 열어 주시리라는 믿음이 나를 기쁘게 해 주었다. 

 

김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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