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4월 나에게는 생사를 결정짓는 것 같은 심정으로 네 번째 중구 선교여행을 떠났다. 지난 캐나다의 긴 겨울은 주님 앞에 기도하는 인내의 시간이었다. 중국에서 살아야 할 이 사람이 갈 길을 가지 못하고 이렇게 답답한 세월을 보내면서 할 일 없는 캐나다에서 보내고 있음이 안타깝기만 하다. 중국 선교는 한다고 나섰는데 떠나지 못하고 있는 내 형편이 주위에 있는 다른 사람들 보기에도 그렇고 점점 어색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선교 모금을 할 만한 형편도 되지 못한 처지였다. 토론토에 있는 Seminary를 졸업하다 보니 동창 관계도 그렇고, 그렇다고 목회하고 있는 한국 친구들이 많은 것도 아니고, 또 재산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세상 적으로 보면 선교사로 나갈 아무 준비도 없는 사람이 중국으로, 그것도 빈손으로 공산주의 나라에 가려고 하는지 한심한 것 같기도 하다. 겨우내 이런 자신과 싸우면서 현실을 바라보면 절망할 것 같은 괴로움이 밀려왔다. 그럴 때마다 나는 주님 제가 지금 주님의 길을 바로 가고 있습니까? 주님 제가 무엇인가 잘 못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라고? 라고 물으면서 주님께 부르짖었다. 내가 이렇게 흔들리고 답답해 있을 때, 성령은 골로새서 3:1~4절 말씀으로 위로하여 주시고 붙들어 주셨다.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음이라"
나는 이 말씀을 통해서 이스라엘과 함께 광야에 있었던 하나님의 성막을 생각했다. 광야에 세워진 성막 아래 땅을 내려다보면 먼지만 일어나는 검붉은 흙과 모래뿐 그것은 아무 위로도 희망도 될 수 없었다. 그러나 성막 위를 쳐다보면 그 천장에는 아름답게 수놓아진 천사들은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영원하고 참된 평안이 위에 있음을 보여주는 희망의 상징이었다. 내 마음이 먼지 나는 흙바닥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은 고통이었다, 그러나 위를 바라볼 때 거기에 믿음과 소망이 있었고 내 마음의 평안함이 있었다. 세상에는 중국 선교를 위하여 내게 도움이 될만한 것이 없을지라도,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서 나의 도움이심을 믿는 것이 나의 힘이었다. 1995년이 저물고 1966년이 밝아 오는 때 나는 주님께 이렇게 기도했다. 주님 올해는 중국에 정착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셔야 하겠습니다. 이렇게 언제까지 세월을 보내야 하겠습니까, 이번 중국에 나아 갈 때 아버지께서 예비한 곳으로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그리고 중국에 정착할 수 있는 실마리를 풀어 주셔서 이번 여행에서 또다시 빈손으로 돌아오지 않게 해 달라는 간절한 기도를 하면서 중국으로 떠났다.
단동
나는 심양에 있는 두 분과 단동을 방문하였다. 아침 8:58분 단동 행 특급은 4시간을 달려 단동 역에 닿았다. 역 광장에는 엄청나게 큰 모택동의 동상이 북한을 향하여 오른손을 들어 축복이라도 하는 듯 서 있었다.
평양관
북조선에서 와서 운영하는 평양식당에서 김일성 배지를 단 여성 종업원들의 시중을 받았다. 이 종업원들은 한국서 온 사람들과는 사무적인 대화 외에는 일부러 피하는 편이어서 인간미라고는 찾아보기가 어렵다. 나는 캐나다 여권을 보여주면서, 나는 한국서 온 사람이 아니라고 강조하고 고향을 찾아온 사람이라고 소개하자, 태도가 좀 바뀌어서 가깝게 대화할 수 있게 되었다. 여러 가지 대화를 나누면서 금희와 은희의 운명의 영화 주제곡과 최근 북조선에서 유행한다는 ‘휘파람’ 노래들을 적어 달라고 했더니, 한참 뒤에 친절하게 적어 주었다. 나는 마침 캐나다 2불짜리가 있어서 기념으로 주겠다고 하니까 한 번 휘둘러보고는 감사하다고 받는다.
우리 일행 가운데 한 분이 냉면을 나누어 먹고자 한국식으로 가위를 달라고 했더니 다른 아가씨가 와서 가새(가위)는 무엇에 쓰려고 하느냐고 묻기에, 냉면을 자르려고 한다고 하니까, 냉면은 이빨로 끊지 와 가새로 끊으려고 합네까! 하고 퉁명스럽게 쏘아붙이고는 가 버린다. 무뚝뚝하고 냉정함에 우리 모두 질려버리고 말았다.
압록강 변 공원
우리는 신의주가 건너다 보이는 압록강으로 나갔다. 신의주 쪽에는 높은 굴뚝들이 많이 보인다. 중국 쪽에는 유람선들도 많고 관광객들도 제법 많은데 신의주 쪽에는 놀러 나온 사람들은 볼 수가 없었다. 그 옛날 일제가 놓았던 다리는 6.266.26 사변 때 중공군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하여 UN군의 폭격으로 끊어졌다. 그때 끊어지지 않은 네 개의 교각은 수리해서 압록강 다리를 조금 걸어보는 경험을 하도록 관광용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동항시 전양 향 양전촌
우리 일행 가운데 한 분의 친척이 있다는 단동시 아래에 있는 양 전 촌으로 갔다. 마을은 조선족과 한족이 섞여 살고 있는데 조선족은 한 30호가 있는데 자녀들은 대부분이 다 한족 화 되어 있었다. 믿는 사람이라고는 5명의 나이가 든 아주머니들이었다. 저녁에 모두 모여서 성경 공부를 하고 늦게까지 교제를 나누었다. 이렇게 외롭게 떨어진 곳에도 하나님의 백성들이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 집 남편은 믿지는 않지만, 부인의 신앙생활에는 협조적인 분이었다. 이 분은 얼마 전 북조선에 사는 조카를 방문하여, 한 달 정도 있다가 오고자 했는데 먹을 것이 너무 없어서 있는 것 다 주고 3일 만에 돌아왔다고 한다. 우리는 그분을 통해서 북쪽 사정을 자세히 들을 수가 있었다. 이분은 신의주 쪽에서 부탁하는 쌀과 밀가루들을 배에 싣고 밤에 압록강 가운데서 북조선 어패류와 바꾸어 가지고 와서 파는 장사를 하고 있었다. 다음 날 아쉬워하는 분들을 뒤로하고 단동으로 돌아와서 필요한 볼일을 보고 조선족이 운영하는 식당에 점심을 먹으러 들어갔더니 마침 북조선 온 화교가 우리 시중을 들고 있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화교들은 중국 방문이 자유롭고 생활 형편은 조선 사람들보다는 낫다고 한다. 그러나 자기 아버지는 노동자로서 어렵게 살고 있어서 여기 친척이 있어서 돈을 벌려고 왔다고 했다. 지난해 평양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군대에 들어가려고 했는데 화교는 안 된다고 해서 이리로 오게 되었다고 했다. 중국 국적을 얻는 데는 중국 만 원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식당에서 세끼 밥 먹고 한 달에 300원을 받는데, 일하다가 그릇이나 컵 등을 깨면 물어내야 하는데 그런 것 제하고 나면 300원을 제대로 받는 달이 없다고 했다. 방세를 내고 살면서 이렇게 벌어서 만원을 모을 수 있다는 것은 자기에게는 불가능하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열심히 벌어서 돌아가 수령 아바이께 충성해야 되지 안캈습네까?했더니, 그는 우리 화교가 뭐 그럴 필요가 있느냐고 했다. 얼마의 전도 책자를 주면서 예수님을 믿고 살도록 부탁하고 떠났다.
목단강
나는 마침 북한서 친척을 방문한 노부부를 만났다. 초등학교 교사로 은퇴한 분인데 한 달에 북한 돈 60원을 받는데 쌀은 500g 한 근에 70원이라고 하면서 쌀밥은 근본 구경도 못 하고 옥수수 가루로 멀건 죽을 쑤어서 먹기도 바쁘다고 하면서 어려운 형편을 들려주었다. 나의 동역자가 그를 자주 불러서 전도하고 있었다. 그분들이 돌아갈 때 우리는 쌀을 좀 사주기로 하였다.
유치원 설립 용지 계약
그동안 두. 세 곳에서 유치원을 유치하겠다는 의견이 들어왔다.여러 가지를 검토하고 기도하고 생각한 끝에 작년에 보고 간 환쟈 향에다 유치원을 짓도록 결정하였다. 한어로 만들어진 협의서를 조선어로 번역하여 향 간부들과 만나서 충분히 의논했다. 그러나 막상 계약을 체결하는 데는 자신이 빨리 서지 않아서, 계약 체결을 한주 미루었다. 그리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주님 이곳이 제가 지난 2년 이상 기도하면서 찾던 곳입니까, 하고 물었다. 그리고 또 주저하는 내 마음에는 유치원 설립을 위한 아무 자금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금 문제에 있어서 나는 약할 수밖에 없다. 일 년 내에 공사를 시작해야 한다는 계약상의 조건이 부담스러웠다. 이틀이 지나서 새벽에 기도하는데 ‘네게 믿음이 있는가?’ 하는 질문이 마음속에 울렸다. 지금까지 주님께서 여기까지 인도하여 주셨는데 이제 땅을 주시는데 돈 문제로 머뭇거리는 것이 어리석은 같기도 했다.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내게 없어서 유치원 대지를 계약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님께서 중국 사역을 이루시기 위해서 유치원을 지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의 확신이 섰다. 그래서 1996년 5월 목단강을 떠나기 하루 전에 내려가서 앞뒤를 볼 필요 없이 계약을 체결했다. 그리고 나의 방문 비자를 상용 비자로 바꾸어 주었고 이사를 오면 거류증을 만들도록 약속했다. 향장은 자기네의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해 주면 최선을 다하여 협조하겠다고 말했다.
동녕에서
동녕은 소련과 국경선을 하는 동쪽 제일 끝이다. 지난해 전화로만 서로 알고 있던 분들을 이번에야 찾아보게 되었다. 이곳을 방문하여 영광 촌에서 5일간 있으면서 사경회를 하는 동안 한 3㎞ 떨어진 곳에 있는 장정 촌에도 소개되어 1박 2일간의 집회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주일 예배에는 영광과 장정 촌이 합동으로 성찬 예배를 드리기로 했다. 영광 40여 명과 장성의 30여 명의 식구가 모이니 마치 잔치라도 하는 것 같았다. 나는 성찬 예배의 중요성과 그리고 어떻게 예배를 드리는지에 대하여 지도자들에게 미리 예습을 시켰다. 주일 주의 만찬 예배를 드릴 때, 회중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 감격과 환희 그리고 기쁨의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생전 처음 드려 보는 만찬 예배에서 느끼는 그리스도 구속의 은혜와 부활 그리고 다시 오심에 대한 소망의 기쁨을 맛보고들 있었다. 나는 처소 집사들에게 만찬 예배를 매월 한 번씩이라도 드리도록 부탁했다. 두 처소는 종교 활동 장소 허가를 받아 가지고 있어서 모양새가 좋았다. 다음날은 장정에서 오전 말씀 공부를 하고 오후는 강 건너편 산에 가서 교제하기로 하였다. 오후에 20여 명이 음료수를 준비하여 강을 건너가자 온 산에 개살구 꽃이 만발하여 아름다운 동산을 이루고 있었다. 우리는 그 꽃동산 속에서 또 한 시간의 성경 공부를 하면서 재미있는 교재를 나누었다.
이곳 두 처소의 문제는 일꾼들은 여자분 들인데 남편들은 한결같이 믿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장정에서 아침은 사역하는 김 자매님 댁에서 준비하여 주었다. 자기 남편이 목사님 음식 대접을 하도록 허락한 것이 이번이 처음이어서 신기하다고 했다. 남편 되는 분은 소련에서 장사하는데 사람이 우락부락하게 생겼고, 인근 중국 사람들을 하도 때려서 모두 무서워한다고 한다. 식탁에는 남편 친구인 처소 형제가 함께했다. 나는 남편과 인사를 나누고 가지고 간 작은 성경전서에 그분의 이름을 쓰고 파카 만년필과 함께 만나 뵙게 되어서 반갑다고 선물로 주었더니 이런 것은 난 필요 없다고 손을 흔들면서 자기 아내를 가리키면서 저 사람에게나 주라고 한다. 그래서 나는 선생님을 만난 기념의 정표로 드리는 것이니 받으시라고 했더니 마지못해서 받는다. 식사하면서 나는 그분의 마음이 편안해지도록 대화를 이끌어 갔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을 것을 권하니, 쓸데없는 일이라고 막무가내였다. 부인에게 가끔 있는 성경 강습회를 자유롭게 갈 수 있도록 협조해 달라고 부탁을 하니까, 거기에 가서 뭘 배울 것이 있습니까? 저 여자가 말하는 그런 것을 배우는 것이 아닙니까? 하고 얼굴이 좀 상기되기 시작하였다. 자매님이 성경학습하러 갈 때 허락하지 않아서 그냥 가는 일로 이 집은 이혼 전까지 가곤 했단다. 남편은 열을 내면서 도대체 저렇게 모자라는 여자한테 뭐가 배울 것이 있다고 모두 모이는지 모르겠다고 하면서 옆에 앉은 친구를 핀잔하고 있었다. 그 말을 받아서 나는 선생님 말씀이 옳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한번 생각해 보세요. 가정에서 남편 되시는 홍 선생님이 보는 아내는 모자라는 여자같이 보일지 모르나 밖에서 다른 사람들이 보는 홍 선생의 아내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홍 선생님 보세요, 이 마을이 한 200호 주민 가운데 조선족 한 50여 명이 예수님을 믿고 교회를 이루고 있습니다. 홍 선생의 부인은 현 종교 국에서 장성 촌의 종교 단체 지도자로 인정하여 그 이름으로 종교 활동 장소 허가를 주었습니다. 국가 기관에서 종교 단체의 지도자로 인정하고 있는데 선생이 말하는 것 같이 그렇게 모자란다면 크든 작든 간에 어떻게 지도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보세요. 교회 안에는 현직 학교 교사도 있고 과거 여러분에게 사회주의를 가르치던 이촌의 공산당 지도원 그리고 여성 동맹 위원장도 있습니다. 한 가정을 이끌어 가는 가장들이 20여 명이나 있습니다. 홍 선생의 부인이 이분들을 가르치고 영도(지도)하고 있습니다. 홍 선생은 비록 지금 예수님은 안 믿더라도 내 아내가 남들에게는 인정받고 있는 한 단체의 영도자라는 사실을 인정하실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홍 선생이 다른 사람들로부터 오히려 모자란다는 소리를 듣게 될 것입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고 묻자, 머리를 숙인 채 말이 없었다.
다른 촌에서 학습하고 있는데, 장정의 김 자매가 찾아와서, 목사님, 우리 남편에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어저께 저녁에는 잠자리에서 내가 준 성경책을 들고는 이 책을 안 받기보다는 못하네, 이 책을 받고 나서부터 마음이 이상해진다고 하면서 앞으로는 어디든지 강습회가 있으면 자유롭게 갔다 오도록 하라고 허락을 했다면서 그렇게 기뻐할 수가 없었다. 주님께서 그 자매님을 축복하시는 것을 보면서 감사했다.
오늘은 읍내에 있는 처소를 방문하여 오전 오후 집회를 가지면서 새로운 분들과 교제하는 즐거움을 누렸다. 마침 토요일 처소에서 소풍을 간다고 하여 함께 하였다. 두 대의 소형 버스로 한 12㎞ 가서 개울이 흐르는 골짜기로 들어가서 자리를 잡고 야외 예배를 드렸다. 큰 가마를 걸고 민물 잡고기들로 된 탕을 끓였는데 별미였다. 풀밭에 둥그렇게 앉아 음식을 나누는 모습은 정말 평화스럽고 아름다웠다. 율동과 오락을 즐기고 난 뒤, 교회 지도자에게 갈 때 쓰레기를 다 치우고 깨끗하게 하고 떠나라고 부탁을 했더니 중국은 그렇게 안 한다고 했다. 내 설명을 다 듣고 난 사람들이 이해가 되는지 어른과 아이들이 다 함께 주위의 쓰레기들을 주워서 한 곳에 묻고, 모두가 깨끗하고 보기 좋다고 하였다. 다음부터는 어디서든지 내 주위를 이렇게 치우고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되라고 부탁했다. 뜻밖에 새로 만난 성도들과 더불어 아름다운 중국의 자연에 나와서 찬송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게 되니 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 그 지역의 다섯 분의 처소 지도자들이 나와 함께 모여서 교제하는 가운데 앞으로 흑룡강성 복음화를 위하여 우리 함께 힘쓰자는 결의를 하였다.
하얼빈에서
새로 알게 된 하얼빈 처소를 방문하게 되었다. 가는 곳마다 남자들은 다 무엇을 하는지 처소 지도자는 여자들만 하고 있었다. 이번에 새로 알게 된 여 집사는 나름대로 열심히 하고 있었다. 그의 수하에 있는 여섯 명의 집사를 위한 성경 공부를 했다. 그는 나에게 말하기를 배운 것도 없고 처음에는 너무 몰라서 꿈꾸는 것을 해석하는 일을 많이 하여 가르쳐서 주의에는 자기가 꿈으로 계시를 받는다고 하면서 이단이라고 한단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말씀이 깨달아지기 시작하면서 꿈같은 것은 사라지고 이제는 말씀을 공부하면서 설교한다고 하였다. 말씀에서 그의 신앙이 뿌리를 내리고 있음을 들으면서 하나님께 감사했다. 앞으로 계속 가르쳐 주고 말씀으로 도와 달라는 부탁을 나에게 했다. 앞으로 하얼빈 사역에도 주님께서 은혜를 주시리라 믿는다. 어둑어둑한 방에서 그리고 후덥지근한 방에서 며칠씩 앉아 학습만 하다가 송화강 강변에 나와서 새 바람을 마시니 살 것 같았다. 오늘은 단옷날이어서 송화강에는 불 밝힌 놀잇배들이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이로써 한 달 반 정도의 선교여행을 마치게 되었다.
김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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