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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선교/중국선교답사여행

3. 세 번째 선교여행 9.1995

이번 세 번째 중국 선교여행은 먼저 중국과의 접경지역인 소련의 동아시아지역(연해주)에 가서 그곳에서는 어떻게 선교를 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했다. 그리고 소련 쪽에서 중국을 향한 선교의 가능성도 알아보고자 하는 마음으로 먼저 하바롭스크를 찾았다. 그리고 중국으로 들어가도록 계획했다.

♣ 소련의 극동, 연해주 방문 내용은 ‘소련 단기 선교’ 에서

 

다시 찾은 하남 촌
1년 5개월 만에 다시 찾은 하남 가정교회는 식구들도 좀 늘고 꾸밈새가 있어서 보기가 좋았다. 처음 왔을 때는 고사리 뜯는 철이 되어서 바쁘더니, 이번에는 바쁜 추수철이었다. 그래서 평일 낮에는 모일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주말에는 거의 추수를 마치게 되어서 주일과 월요일은 풍성한 시간을 가졌다. 처음 왔을 때는 처소 주위에서만 맴돌았지만, 이번에는 동리 여기저기를 돌아보고 추수하는 들에도 나가 보았다. 소학교도 들어가서 살펴보았다. 가정 처소는 비록 낡은 초가집이기는 해도 내부 수리를 잘 해서 자신들의 예배당을 가지고 있었다. 터가 넓어서 예배당을 짓기만 하면 좋은 곳이었다. 그동안 하나님은 이 처소를 축복하여 주셔서 아름다운 성도들의 교제를 이루고 있었는데, 이 가정교회를 세운 김금복 자매는 심양 신학교에 가므로 다시 돌아오지 않을 계획이어서, 처소의 식구들이 뱀 장사를 하던 망나니 김 형제를 처소의 인도자로 삼았는데, 제법 잘하고 있어서 처소가 든든하게 서가고 있었다. 처음에 김 형제는 농사꾼으로 고사리 뱀 수집책 일을 하면서 살다가 처소에 나오게 되었는데, 내가 지난해 처음 왔을 때는 그가 나온 지 겨우 2달이 되었을 때였다. 그때 나에게 수집하는 세 종류의 뱀 사진을 보여 주면서 일주에 한 번씩 자전거로 중국 마을로 돌면서 거두어들인다고 했다. 고맙게도 나에게 뱀탕을 대접하겠다는 것을 사양했다. 사실 그 형제는 마작을 너무 좋아해서 살림을 다 털어먹은 사람이기도 했다. 그런 형제가 지난해 일주일간의 성경 공부를 통해서 말씀의 감동을 받아서 구원받은 형제가 되었다. 그리고 변화되어 그리스도를 섬기는 종이 된 것이다. 이제 뱀 장사가 하나님의 진리를 값없이 파는 장사꾼이 된 것이다.  얼마나 주님의 은혜가 놀랍고 감사한가! 4박 5일 성경 학습을 마치고 떠나는 오후에 형제가 동리 경운기를 가져 왔다. 처소 식구들이 모두 나와서 웃는 마음들로 나를 보내주었다. 이번에는 당위 서기로 계셨던 아바이(할아버지)께서 내 손에 10원을 쥐여 주고 내 손을 꼭 잡고 또 와 달라고 부탁했다. 가정이 파산될 뻔하다가 예수님 때문에 가정이 구원받은 이 형제도 읍내까지 따라 나와서 20원을 주면서 성경을 잘 가르쳐 주셔서 고맙다고 하면서, 다음에는 좀 긴 시간 있어 달라고 부탁하였다. 나에게 주는 물질은 저분들이 받은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시였다. 저들의 믿음이 말씀의 은혜 가운데서 자라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부족한 종이 중국에서 이런 큰 은혜를 누리게 해 주시니 사는 보람이 있었다.

 

이번 방문으로 놀라운 가정을 만나게 되었는데 30대 중반을 넘은 이 형제와 채 자매 부부였다. 이 형제는 그때 농촌에서 조선족 학생들이 가기 어려웠던 한족(중국) 고등학교에 다녀서 부모님과 동리 사람들의 관심을 모았던 학생이었다. 조선족 학생들은 주로 조선족 중 학교에 가는 편이며, 그 가운데 지극히 적은 학생들이 중국학교에 가는데 좀 뛰어난 학생이라고 보던 때였다. 졸업 뒤 농사 질(지으면서)을 하면서 채 자매와 결혼을 했다. 결혼한 지 얼마 안 되어 그는 밤낮 술에 젖어 사는 인생이 되어버렸다. 큰아들이 10살이 넘도록 살림을 돌아보지 않고 술독에 빠져 사는 남편과 더 살 수 없다고 판단한 그녀는 헤어지기 위하여 두 아들과 남편을 놔둔 채  본가(친정)가 있는 훈춘으로 가버렸다. 채 자매는 지치고 연약해진 몸과 마음을 어머니에게 우선 맡긴 채 희색 빛 인생을 눈물짓고 있던 그에게 예수님께서 구원의 손길을 베풀어 주셨다. 예수님의 사랑과 구원의 은혜를 통하여 그는 영의 눈이 뜨였다. 삶의 변화와 새 힘을 얻은 자매는 두고 온 자식들과 남편을 위하여 기도하게 되었다. 다시 보고 싶지 않은 남편의 얼굴이었지만, 예수님이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해 주신 그 은혜 때문에, 버리고 온 술망나니 남편도 구원을 받아야 한다는 믿음으로 일 년 여간 떠났던 집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남편에게 예수님을 믿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것을 간절히 권했다. 그동안 절망 가운데 빠져 있던 남편은 떠나간 부인이 돌아오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다가 돌아와서 간절히 권하는 아내의 말을 듣고 어색한 마음으로 처소에 몇 주째 참석하고 있을 때 나를 만나게 된 것이다. 그 뒤 나는 그를 자주 불러서 가르치고 훈련을 하였더니 영적으로 커가면서 하남촌 처소의 좋은 일꾼이 되어가고 있었다.

 

돈의 유혹

우리가 중국에 정착하게 되면서 가 보고 싶은 하남 촌을 가기가 어렵게 되었다. 그것은 사역하는 김 형제에게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단순히 말씀을 기뻐하던 그가 한국서 오는 목사들의 학습에 다니면서 경제 문제에 눈이 떠지면서 경제적으로 별 기대가 없는 나를 멀리하기 시작하였다. 그곳의 식구들이 방문하여 달라는 소식들이 와서 방문하고자 했지만 김 형제는 정치적인 이유를 들어서 못 오도록 방해를 했다. 그리고 한국의 모 교회로부터 후원을 받아서 아담한 벽돌 기와집을 사서 예배당을 꾸리고, 또 다른 한국교회로부터도 같은 명목으로 돈을 받아서 자기 주머니에 넣은 일이 드러나면서 사람들이 줄어들더니, 지난겨울에는 놀음 방에 드나들면서 마작을 하는 등 경건치 않은 그의 생활을 보면서 30여 명이 나오던 처소가 4~5명으로 줄어 버렸다. 그래서 처소 식구들이 책임집사 자리에서 물러나라고 해도 집사 자리를 내놓으려고 하지 않는다. 책임 집사라는 자리에서 물러나지 않으려는 데는 중국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생겨난 문제들이다. 외국에서 드나드는 목사들이 하는 학습이나 조직에 끼어들려면 처소의 인도자(집사)가 아니면, 그런 조직을 만드는 조선족 중간책이 불러주지 않기 때문이다. 또 외국서 온 사람들에게서 일꾼으로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그러한 직분을 억지로라도 가지고 있어야만 했다. 여기서 생겨나는 문제가 분열이다. 불과 50호 또 200여 호 되는 마을에 2~3곳으로 분열되는 곳도 있다니 마음 아픈 일이다. 세상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아도 싸다. 주님의 일보다는 돈과 명예의 유혹으로 빚어지는 불미스러운 일들로 지역 복음화의 길을 막고 있으니 이 어찌 슬픈 일이 아닌가!!

 

계서(鸡西) 시
내가 하남 촌에 있을 때 계서 시에서 선교하시는 한국 김기수 목사님이 방문하였다. 이 분은 기계자수로 성화 놓아 생산하는 사업을 하고 있으며, 또 신학교도 운영하고 있었다. 내가 캐나다에서 왔다는 소식을 듣고 생산되는 자수품을 캐나다에 팔 수 있도록 소개를 해줄 수 있는지를 의논하러 왔다. 그리고 돌아가는 길에 자기네 공장에 들려주기를 청하였다. 하남에서 4박 5일의 성경 모임을 마치고 김 형제와 함께 계서에 있는 그분의 성화 공장과 신학교를 방문하였다. 공장에는 20여 명의 훈련된 조선족 직공들이 겟세마네의 예수님, 문 두드리는 예수님, 그리고 마지막 만찬 등을 열심히 수 놓고 있었다. 한 25명 정도의 신학교 학생들을 합숙시켜가면서 가르치고 있었다. 계서 종교 국으로부터 신학교 허가장은 매년 40,000원(U$5000)을 세금 같이 바치고 있었다. 그리고도 연중 돈이 필요하면 이 사람 저 사람이 와서 손을 벌린다고 한다. 신학교 하나를 운영하기 위하여 대략 일 년에 공식, 비공식적으로 주는 돈이 약 6-7천 불은 되는 것 같았다. 신학교는 너무 비싼 값을 치르고 운영되고 있었다. 김 목사님에게서 성화 판매에 따른 안내를 받고, 한쪽 벽을 가릴 만큼 큰 “문 두드리는 예수님” 자수 성화 하나를 받았다. 다음에 올 때는 신학교에서 가르쳐 달라는 부탁도 받았다. 자수공장 이름으로 투자허가를 받은 것이지만, 신학교는 중국 법으로도 불가능한 일을 지방관리들이 돈을 받고 비공식적으로 허가를 해 주고 있었다. 이 분은 돈으로 주님의 일을 하는 것이다, 그분의 일하는 방법이 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오늘 저녁 메뉴는 오이 냉국 냉면으로 종업원들과 신학생들 그리고 우리 모두 함께 어울렸다. 예수님이 문 두드리는 성화는 캐나다에서 $99에 팔아서 가져다주었다.

 

그런데 이년 뒤 우리가 목단강에 살 때 이분들의 일이 파탄 났다. 누군가 상부에 고발함에 따라 신학교와 성화 공장이 폐쇄되었다. 그곳에 더 있을 수 없어서 목단강 옆 해림에 건물 하나를 얻어서 다시 성화 공장을 차렸는데, 몇 달이 되지 않아서 밤에 불이 났다. 그분들의 추측으로는 누군가 불을 지른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건물 주인의 고발로 한국 목사 두 분이 공안에 연행되어 유치장에 갇혔다. 건물주와 공안이 잘 타협이 되어서 한 목사는 여기에서 요구하는 배상금을 가지러 한국에 내보내고, 다른 한 목사는 여권을 빼앗긴 채 일단 석방되었다. 이분들도 주님의 마음으로 중국에서 선교하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방법에 문제가 있었음은 그 결과가 말해 주고 있다. 선교가 돈을 앞세워 세상 권력과 손을 잡는 방법은 옳지 않았다.   

 

류처(游車, 유차)
목단강으로 돌아오려고 계셔(鸡西) 역에 나왔다. 마침 계서에서 하얼빈으로 떠나는 류처라는 밤 기차가 있어서 표를 사는데 완행보다 세배나 비쌌다. 이 열차는 새로 생긴 열차로 10월 1일부터 계서-하얼빈 간을 운행하는 류처라고 부르는 특급열차로 환경이 놀랍게 개선된 열차였다. 모르기는 해도 중국에서 이렇게 뒤떨어진((落後) 북방에서는 처음 나타난 열차라는데 역사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다. 놀라운 것은 영어 안내 방송도 나와서 신기했다. 그리고 안내에는 가래침을 뺏거나 쓰레기를 버리면 50원 벌금을 물게 된다면서 공중도덕을 지킬 것을 강조하고 있었다. 올 때 완행에서 7시간 동안 가래침과 짙은 담배 연기에 시달린 생각을 하면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다. 운행 시간도 세 시간이나 빨라져서 신선놀음 같았다. 10월 하순 밤 열차는 제법 쌀쌀한데도 아직 스팀이 나오지 않았다. 아직 겨울 준비가 안 되어 있는 나는 바지를 접어서 양말 속으로 넣고 몸을 움츠린 채 4시간 이상이나 견디어야만 했다. 내 앞자리에는 시골 아저씨로 보이는 분이 기차가 떠나자 검은 가방에서 보자기로 싼 조그마한 그릇을 꺼내는데 집에서 해온 통 닭찜이었다. 얼마나 맛있게 뜯어먹는지 나도 침이 넘어가고 있었다. 닭 발가락을 먹을 때에는 앞니로 똑똑 끊어 뼈까지 오도독오도독 씹어 먹는 것이 신기하게 보였다. 다 먹고 나더니 뜨거운 찻물이 든 큰 병을 열어 차를 마시면서, 이제 정신이 드는지 나를 힐끗 보고는 싱긋 웃는다.   

 

좋아지는 중국
중국이 개방되면서 중국을 방문하는 많은 외국 사람들이 늘어나자 중국 정부도 외국 사람들의 불편을 덜어 주고자 노력해 오고 있었다. 중국 정부는 중국 사회를 세계를 향하여 개방하면서 외국인들이 쓸 수 있는 화폐를 따로 만들어 사용하게 했다. 그리고 외국인에게는 호텔, 열차 그리고 관광지 입장요금 등은 이중 가격 제도를 적용했다. 중국을 찾는 외국인들의 불평이 커지자 1983년 말로 외국인 화폐 제도를 없애 버리고, 1994년 1월 1일부터는 단일 화폐를 사용하게 했다. 그리고 초청장 없이 관광 등 비자 신청을 할 수 있게 하였다. 한국 사람들은 중국에 도착해서 입국 비자를 받을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었다.

 

외국인이 주로 많이 이용하는 노선에서는 1994 하반기부터 담배를 피우거나 가래침을 뱉거나 쓰레기를 차에 버리면 50원 벌금을 물게 하면서 단속을 하고 있어서 공중위생 환경이 많이 개선되었다. 이러한 개선은 주로 발전된 남방에서 시행되다가 이제야 이 미개한 북방으로 올라오는 중이다. 여기저기 장거리 노선에 특급열차를 신설하면서 여행이 편해지고 있었고, 공중환경도 많이 개선되고 있었다. 하얼빈과 계서 그리고 수분하 노선에도 특급열차가 1995년 10월 1일부터 운행하고 있어서 그런대로 내지 여행이 편리해졌다. 외국인에게 열차 요금도 2배로 적용하던 것을 폐지하고 10월 1일부터 내국인과 동일하게 했다. 그러나 아직도 변두리 노선에는 환경이 개선되지 못하고 있는데 단계적으로 실시한다고 하니까 점점 좋아지리라 믿는다. 흑룡강성에 이만한 변화가 온 것도 나로서는 얼마나 기쁜 일인지 모른다. 중국이 개방되면서 사회 구석구석에 많은 변화가 오고 있는데 외국인 선교 활동의 자유도 어서 왔으면 하는 것이 나의 바람이다.

 

목단강에서
이번이 목단강은 세 번째 오는 길이며 올수록 정이 들고 있었다. 세상 적으로는 정이 들 만한 매력은 아무것도 없지만, 주님의 일 자체에 매력이 있는 것이다. 선교 사역을 위해서는 확고한 믿음과 계획이 있지만, 중국의 특수한 상황 속에서 어떻게 정착하느냐 하는 문제를 놓고 계속 연구하며 기도하고 있다. 이번 방문에서도 쉽게 합법적으로 정착하는 길과 방법을 찾느라 여러 사람을 만나 보았다.  길도 많고 방법도 많지만, 문제는 나에게 조그마한 일이라도 시작할 수 있는 자금이 없어서 선교 사역을 활발하게 발전시키지 못하고 있음이 안타까울 뿐이다. 기본 생활비만 있어도 선교를 할 수 있는 나라들이 얼마든지 있는데, 왜 하필이면 투자를 요구하는 이런 곳을 일터로 삼은 것이 옳은가 하는 생각이 문득문득 떠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나의  기도 속에서 역사 하시는 주님을 바라보면 그분의 뜻이기 때문이라는 이유 외에는 다른 이유가 없다. 그리고 그분이 하실 것이라고 믿는 믿음만이 나의 이 지루하고 피곤한 여정을 견디어 나가게 하고 있었다. 목단강 주변에서 유치원을 위한 땅을 구하기가 어려웠다. 땅이 없어서가 아니라, 내가 가진 것이 너무 없어서 공짜 땅만 얻으려고 하는 데서 오는 나의 문제였다. 6월 8일 답답한 마음으로 아침 일찍 주님께 이 문제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그날 오후 4시 30분경에 미화로부터 시 정부에서 연락이 왔다. 20㎞ 남쪽 영안 시 환자 향(면)에서 초청하는 연락이 왔다고 함께 가 보자는 한다. 영안 시에서 가까운 환자 향에서는 개발구를 만들어 산업체를 유치하고자 애를 쓰고 있었다. 우리 일행은 내려가서 향 간부들과 앉아서 외자 유치를 위한 10가지 우대 조건을 설명해 주었다. 땅세는 1㎡ 당 년 1.5원(U$ 0.15)씩 50년간 임대였다. 이 정도의 조건은 나에게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 보고 연락해 주겠다는 여운을 남기고 돌아왔다.

 

동녕(东宁) 동방홍 촌에서

 

소련 국경선과 접해 있는 동녕현(군)에는 삼차구 조선족 자치 진(읍)이 있다. 나는 목단강에서 알게 된 홍 형제의 소개로 그분의 집과 처소가 있는 삼차구진 동방홍 촌을 방문하게 되었다. 목단강에서 수분하까지 건설한 산업 도로는 시멘트 길이었다. 가다가 차가 고장이 나서 수분하로 돌아가는 길은 멀었다. 동녕시에서 내려 홍 형제가 자주 다닌다는 중국사람 식당에서 훈둔탕(混吨 아주 작은 만두)을 먹고 어두워서야 차를 타고 삼차구 진에 내리니 아무것도 안 보이는 캄캄한 밤이다. 형제가 어느 모퉁이에 가니까, 삼륜차들이 있었다. 이 지방 사람들만이 알 수 있는 곳이다. 사람 사는 곳에 살기 마련이라더니, 이 캄캄한 밤에도 사람을 기다리는 삼륜차들이 있어서 재미있었다. 한 대를 흥정하여 타고 산골길을 돌고 돌아 동방홍 촌으로 왔다. 돌아온 남편과 아버지를 맞이하는 식구들이 반가워하고 있었다. 이 집도 방은 따로 없었다. 그저 일자형 방이 하나뿐이었다.

 

아침 밖에 나와서야 동리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약 150여 호의 농가들이 길가에 길게 늘어서 있는 동리였다. 안정된 농가이며 선진(先进, 모범)농촌으로 알려져 있다고 한다. 오늘 주일예배를 드리려고 예배당에 갔다. 이곳은 집을 사서 교회당으로 만들었다. 십자가가 높이 달려 있고 밤에는 빨간색을 빛을 비추고 있었다. 아침 예배에는 20여 명이 나왔다. 예배 뒤 나이 많으신 자매님이 오셔서 아침 말씀이 우리 교회의 문제를 잘 지적하여 주었다고 기뻐하면서 교회의 어려운 사정을 들려주었다. 사람들이 안 나오고 사실은 교회가 시험에 들어 있다고 걱정이 태산 같았다. 오후에도 1시간 말씀 공부를 하고 교제의 시간을 나누었다. 오후 홍 집사와 아이들과 함께 뒷산에 있는 사과 배 과수원에 올라갔다. 여기서도 사과 배를 재배하는데 산 한쪽이 완전히 사과배로 덮여 있었다. 올라가는 길에는 붉게 물든 꽈리들이 잡풀 사이에 제법 많이 야생하고 있어서 보기에 좋았다. 수확한 사과 배는 상자에 담겨서 트럭에 실리고 있었다. 과수원 등성이에 오르니 저 건너편으로 소련의 국경선 전망대가 보이고 서쪽으로는 4Km 8Km 거리를 두고 여러 조선족 마을들이 보였다. 추수를 기다리는 골짜기들은 황금 물결을 이루고 있었다. 마을 여기저기에서 탄광이 있어서 땔감을 싸게 그리고 쉽게 해결하고 있었다. 홍 형제와 나는 사과 배를 따 먹으면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즐겼다. 그리고 우리는 주님의 일을 의논하면서 좋은 시간을 보냈다.

 

산에서 내려오니 최 자매라 분이 저녁 식사초청을 했다고 알려준다. 바로 이 최 자매란 분이 고집이 세고 교회에 문제를일으키는 장본인이라고 외숙모가 되는 노 자매님이 걱정스럽게 말해 주셨다. 여기 160여 호 되는 동리에서 조금 모이는 이 무리가 빛이 되어야 할 터인데, 자기가 죽지 못해서 인간의 못된 성격들로 말미암아 복음의 빛을 가리고 있었다. 마음 아픈 일이었다. 저녁 집회 뒤, 내가 바로 가지 말고 좀 더 교제하고 가라고 했더니 모두 고맙다고들 했다. 나는 왜 고맙다고 하는지 몰랐는데 나중에 안 것은 이곳에 가끔 한국 목사들이 오시는데, 예배만 끝나면 방에 가서 쉰다고 하여 성도들이 말 한마디 자유롭게 해 보지를 못해 보는데, 목사님은 이렇게 우리를 위하여 시간을 많이 만들어 주셔서 고맙다는 것이다. 나는 사실 먼 길을 온 사람으로서 짧은 시간 동안 더 많은 사람과 사귀고 대화하기 위한 나 자신의 욕심 때문이었는데, 사실은 그분들은 그동안 모처럼 방문하는 목사들과 좀 자유롭게 대화의 시간을 가지지 못하여 아쉬워하는 마음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다음 날 저녁에도 집회 뒤에 자리에 둘러앉아서 질문을 받으며 교제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모두 기뻐하는 모습들이었다. 그곳에서 네 곳의 처소를 더 알게 되어 다음에 오면 고루고루 방문하기로 약속하고, 장소가 허락되면 한 주간 처소 지도자들을 위한 강습회를 가지도록 계획했다. 돌아오는 버스가 고장이 나서 길에서 2간이나 기다려야 했다.

 

하얼빈에서
돌아가는 길에 하얼빈에 있는 처소 한곳 들려서 교제하도록 연락이 되었다. 이 처소는 처음 방문하는 곳으로 그곳 형편도 잘 모르고 하여 하루만 머물도록 계획했다. 목단강에서 하얼빈까지 6시간 걸리는 유처(游車) 열차는 공중위생이 개선되어 쾌적한 여행을 할 수가 있었다. (지금 고속철 화 되어 1시간 50분 정도) 비가 내리는 역에는 연세가 많으신 궁 할머니가 맞이하여 주셨다. 궁 할머니의 3층 아파트에 도착하니 여러분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15명 정도가 모였는데 모두가 고령자들이시고 4~5분은 30~40대였다. 집회 뒤 내가 가지고 간 사탕을 나누어 먹으면서 사귐의 시간을 가졌다. 저녁에는 6분이 오셨는데 나에게 많은 것을 물어보았는데, 그 질문들이 그분들이 그동안 그릇된 성경 관을 가진 사람들로부터 배운 것들에 대한 의문을 풀고자 함이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노아 홍수 때 노아 여덟 식구만 구원을 받았지만, 물에 빠져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택하신 자는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쳤다고 한다. 가목사에서는 어떤 목사가 와서 주님이 오실 때는 성도들이 흰옷을 입고 흰 모자를 쓰고 주님을 맞이해야 한다고 가르치면서 한국에서 미리 준비하여 가지고 온 흰옷과 흰 모자를 입고 쓰게 하는 일로 조선족 교회가 갈라져 일 년 동안 고통을 받다가 다시 합해진 적도 있었다고 한다. 이름 없이 흩어져 있는 많은처소가 이런 이단적인 가르침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 중국 현실이었다. 원인은 건전한 성경 교육을 받은 지도자들이 적고, 기독교 서적들이 출판되지 않아서 오는 지식의 결핍이라고 말할 수 있다. 교육의 혜택을 골고루 받을 수 없는 처소 지도자들을 잘 교육하는 일이 가장 시급한 일이다. 저녁 늦게까지 교제하면서 며칠 더 이분들과 함께 머물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었지만, 다음에는 시간을 많이 내서 도와드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궁 할머니의 조카 되는 분이 아침에 단위(직장)의 차를 가지고 와서 나를 하얼빈 비행장으로 데려다주었다. 궁 할머니와 다른 노 자매님이 생전 처음 하얼빈 비행장 구경도 할 겸 나를 전송하겠다고 비행장까지 함께 나와 주셨다. Check in을 하고 기다리는데 나를 찾는 영어 방송이 나와서 안내에 가 보았더니 내 이름이 컴퓨터에 없다고 탑승권을 회수하고서는 기다리라고 한다. 나는 어이가 없었다. 분명히 나는 72시간 전에 목단강에서 항공사로부터 확인을 받았다고 하니까 자리가 나면 주겠다고 기다리란다. 마침 공항 공안원 김 씨가 조선 사람이어서 통역을 도와주었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저것 이야기를 나누면서 조금 가까워졌다. 그의 부인은 지금 한국에 나가서 돈을 벌고 있는데 한 일 년 벌어서 오면 생활이 좀 나아질 것이라고 했다. 다행히 자리를 하나 주어서 탈 수 있었다. 북경 국제공항은 많아지는 여행객에 비해 시설이 너무 좁아서 복잡하기만 했다. 공항에서 거의 세 시간 기다렸다가 서울로 오는 비행기에 올랐다. 세 번째 여행을 마치고 중국을 떠나면서 주님을 섬기는 사역은 갈수록 넓어져 가고 있는데 이번에도 정착을 위한 근본적인 실마리를 풀지 못한 채 돌아가는 내 마음은 허전하고 답답하였다. 세상에는 쓰지 않고 녹 쓰는 돈들도 엄청나게 많을 텐데, 이 돈의 일부를 왜 주님은 중국을 위하여 주시지 않는지 야속한 마음이다. 그러나 기도하는 내 마음은 주님의 때가 이르면 주시리라 믿고 위로를 받았다.

김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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