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동현 계림조선족 자치향 전진 촌
6월 11일 오후 2시 30분 전진 소학교 교감이신 권종수 집사님이 나를 데리러 오셨다. 나를 놀라게 한 일은 타고 오던 노선 소형 버스를 전세해서 나를 데리러 왔다. 중국에서는 이런 일도 가능하다니 놀랍기만 하다. 떠날 때 김 형제도 같이 가겠다고 따라나섰다. 정든 성도들의 흔드는 손길을 받으며 마을을 벗어나 다시 들어올 때 검문소에 서서 검문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속으로 이 순간을 피하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마침 근무를 마치고 퇴근하는 경찰관이 기사와 아는 사람이었다. 그 경찰관이 타고 함께 가게 되어서 검문은 필요가 없었다. 놀라운 주님의 은혜였다. 한 20 Km을 달려서 전진에 도착하였다. 이곳의 행정구역은 계동현 계림조선족 자치향 전진 촌이었다. 조선족들이 집단으로 사는 행정 자치 지역이었다. 전진 촌은 180여 호의 농촌이지만, 이 부근 일대의 조선족 마을의 중심지였다. 그래서 소학교와 중학교가 있는데, 중학교는 학생 수가 줄어서 몇 해 전에 문을 닫았다고 한다. 권 선생은 허물어진 교실 한쪽을 살림 집으로 꾸며서 살고 있었다. 그동안 나는 과로했는지 목이 잠겨서 도착하는 저녁 집회에는 목소리가 거의 나오지 않아서 사람들을 앞으로 가까이 앉게 하여 겨우 성경 공부를 하였다. 나는 이곳에서 5일 동안 그리스도 구속의 진리를 가르쳤다.
내일 새벽 기도는 3시라고 알려 주었다. 나는 깜짝 놀랐다. 어떻게 3시에 하도록 했느냐고 물었더니 노인들이 그렇게 하자고 하여 그렇게 하기로 정했단다. 나의 전자시계 건전지가 다해서 시간이 나오지를 않는다. 권 선생댁의 벽시계는 추는 움직이는데 시간이 맞지를 않는다. 방에는 다섯 사람이 있었는데 시계는 한 사람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중국식으로 된 방은 칸막이가 없는 방이라 그저 방이 하나인 셈이다. 들어오는 곳은 얕지만 불을 때는 온돌방은 높게 되어 있었다. 시간이 되니까 집사 부인이 잠자리를 배치하는데 나는 제일 윗목 쪽에 자리를 펴 주고 좀 사이를 띄어서 멀리서 집회에 오신 70이 넘은 할머니, 그다음 어떤 자매 그리고 집사부인, 권 선생은 코를 심하게 골아서 같이 자면 모두 잠을 못 잔다고 학교 기숙사로 자러 간다고 나갔다. 낮은 곳에는 두 자매가 자리를 잡는다. 여기는 주로 방 구조가 이렇게 생겨서 방문하는 곳마다 합숙하는 일은 보통이다. 얼마나 잤을까 잠이 깨었다. 모두가 아직도 깊은 잠에 취해 있는 듯하다. 한참을 조용히 기다려도 인기척이 나지 않는다. 그래서 새벽 기도 갑시다, 하고 말하니 몇 분들은 벌써 잠이 깨어 있었는데 내가 잠이 깰까 봐 조심하고 있었다고 말한다.
새벽기도
몹시 피곤한 몸을 일으켜서 예배당에 가서 시계를 보니 3시 5분이다. 6~7명이 나왔다. 인도자인 집사는 나오지 않았다. 아침 식사 시간에 집사님은 새벽 기도에 왜 안 나왔느냐고 물으니 자기는 도저히 3시에 못 일어난다고 말한다. 나는 지도자가 할 수 없는 일은 처음부터 하지를 말고, 한다고 정했으면 죽어도 해야 한다고 조언을 했다. 다음날 주일 아침에는 원근 3~4곳의 처소에서 모여 와서 이곳 식구들과 합하여 80여 명이나 되었다. 예배 뒤 원근에서 온 분들끼리 모여서 무엇인가 의논하더니, 나를 찾는다. 가까운 데서 오산 한 형제분이 나에게 전진촌 교회에서 오는 주일날 오라는 연락을 받고 여러 곳에서 이렇게 와 보니 목사님이 와 계시는데 이곳은 목사님들이 잘 오지 않는 곳인데 모처럼 목사님이 오셨는데 하루씩이라도 방문해 주셔야지 어떻게 한 곳에서 5일씩이나 머무시느냐고 사정반, 항의 반이었다. 나는 목사님을 하루라도 모시고 싶어 하는 그분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가 있었다. 나는 여러분들이 이 부근에 이렇게 사시는 줄을 몰랐는데, 여러분들을 만나 보니 대단히 반갑습니다. 지금은 내가 이렇게 건강이 안 좋아서 교통도 불편한 이곳에서 움직이기도 어려우니 다음에 올 때는 미리 의논하여 여러분이 계신 곳을 먼저 꼭 방문하도록 하겠다고 설명하므로 모두가 진정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성경 말씀을 열어 30분 정도 교제를 나누어 준 뒤 모두가 평안한 마음으로 돌아갔다.
권 집사는 화요일 신명이란 곳에서 하루 강습회를 하도록 계획했다고 알려 주었다. 집으로 오면서 권 집사는 나에게 목사님이 오신다고 미리 연락하지 않는 것은 신병 안전 때문에 미리 소문이 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설명해 주었다. 저녁 집회를 마치고 권 선생 댁으로 돌아오는 길은 가로등 하나 없는 캄캄한 길이어서 더듬거리면서 조심스럽게 와야만 했다. 여기 있는 동안 화장실이 큰 문제이다. 이 큰 마을에 소학교 화장실을 같이 쓰고 있는데 집에서 한 참 가야 하는 거리이다. 밤에 큰일을 위해서는 정말 불편한 일이었다. 그래서 여기 사람들은 하나 같이 손전등을 가지고 있어서 나도 준비해야 겠다고 생각했다. 여기 사람들은 습관이 되어서 그러려니 하고 살고 있었다. 낯에도 그쪽을 향하여 바쁘게 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왜 좀 편하게 해 놓고 살지 못하는지 궁금했다.
다음날 오후 권 집사와 한 가정을 심방하고 돌아오는데 길에서 한 청년을 만났는데 나를 심양 신학교 교수님이 신데 우리에게 학습해 주러 왔다고 그 청년에게 나를 소개한다. 오면서 어떻게 나를 그렇게 소개하느냐고 물었더니 이 동리 공안국 연락 담당자란다. 중국은 교통 통신 시설이 취약해서 촌마다 공안 부분을 담당하는 촌 직원이 있어서 공안국과 연락을 하고 있다고 한다. 교회에서 무슨 행사가 있을 때는 알려는 준다고 한다. 자기 제자여서 협조적이라고 한다. 전진에서 8Km 떨어진 곳에 영광이란 조선족 마을이 있는데 하남서 함께 간 김순복 자매의 삼촌이 살고 계신다고 자기는 인사차 나는 전도차 가자고 해서 갔다. 모두 반가워했다. 전도도 하고 사는 생활 이야기도 듣고 하는데 점심상이 들어왔다. 주인아주머니가 추석 때 한 쭝쯔가 아직도 있어서 맛을 좀 보라고 가져왔단다. 나는 말만 듣던 쭝쯔를 이곳에서 처음 먹어 보았다. 그저 뭉쳐진 찹쌀밥에 박힌 대추 하나가 들척지근한 맛을 내주었다. 조선 사람들은 별로 해 먹지 않는 데 자기네는 매년 해 먹는다고 했다. 하남 촌에서 단오에 쭝즈를 맛보지 못하였는데, 이제 보니 그곳 조선 사람들이 해 먹지 않아서였다.
명신 촌
오늘은 명신 촌에서 하루 학습하는 날이다. 권 선생이 지프 차를 데리고 왔다. 알고 보니 이 지프 차는 이 원근 마을에서 유일한 차로서 택시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 차 주인은 개방 초에 부부가 한약재 등을 가지고 한국에 가서 팔고 또 부부가 2년 일해서 번 돈으로 집도 사고 차를 사서 영업을 하고 있었다. 부인은 지금도 안 들어오고 한국에서 돈을 벌고 있단다. 우리를 태운 차는 비로 험하게 패인 길을 곡예를 하면서 갔다. 이 부근에서는 4WD가 아니면 도저히 다닐 수 없는 길이었다. 6Km 정도를 가니 길을 중심으로 양쪽에 마을이 나타났다. 왼쪽 마을은 한족 마을이었고, 오른쪽 마을은 조선족 마을이었다. 식구들이 반갑게 맞이하여 주었다. 권 집사는 오후에 다시 오기로 하고 지프 차로 돌아갔다. 명신 촌은 70여 호의 마을이었다. 처소는 곧 쓰러질 것 같은 조그마한 초가였다. 지난해 한국서 온 어떤 권사가 처소를 사라고 미화 200불을 준 것으로 샀단다. 처소는 30대 초반의 여 집사가 인도하고 있었고 남편은 최근 믿기 시작했다고 한다.
가까운 학모 촌에서 경운기로 10여 명의 젊은이가 와서 좁은 처소는 35여 명이 앉으니 꽉 차고 더 앉을 데가 없었다. 오전 2시간 오후 2시간의 연속 강습은 찜통같이 무더위 속에서 이루어졌다. 말씀을 사모하는 노인들, 젊은이들이 열심히 들으므로 나는 더위도 잊은 채 가르치는 일에 몰두하였다. 점심은 이 동리 식구들이 만든 정성스러운 음식들로 풍성했다. 오후 3번째 시간에는 멀리서 자동차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자 분위기가 조금 긴장이 감도는데 뒤에 있던 자매님 한 분이 밖으로 나간다. 나도 약간 긴장된 기분을 가지고 말씀을 계속하는데 몇 분 뒤 나갔던 자매가 돌아와서 손으로 괜찮다고 신호를 해 준다. 휴식 시간에 집사가 이 동리에 차가 오면 거의 관에서 온다고 하면서 아까도 혹시나 했다고 한다. 그러자 한 자매님이 공안원이 와도 황 자매님 신랑이 촌장이니까 걱정 없습니다. 하여 모두를 웃겼다. 네 번째 시간을 마치고 인도자인 여 집사는 나에게 자기는 여러 가지 시험에 들어 처소 인도하는 일을 그만두려고 하고 있었는데 오늘 말씀으로 큰 힘을 얻었다고 하면서 안수 기도하여 주기를 청하였다. 맡은 일에 끝까지 충성하라고 권면하고 기도하여 주었다. 마침 권 선생이 차를 가지고 와서 정다운 얼굴들과 헤어져야만 했다. 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고 있는 따뜻한 마음들을 잊을 수가 없다.
오늘 저녁에는 믿음의 확신에 관하여 공부를 했는데 모두의 얼굴들에서 밝은 기쁨이 솟아나고 있음을 볼 수가 있었다. 오늘로 쉰 목이 열리고, 감기몸살 기운도 사라져서 기분이 좋아졌다. 나는 저녁 식사 전 잠시 석양을 보려고 들녘 논 가운데로 나갔다. 유난히도 짙은 보라 색을 띤 붓꽃들이 아름답게 피어 있어서 내 마음을 즐겁게 하여 주었다. 수요일 저녁 마지막 집회에는 소학교 여선생님 두 분이 참석하여서 그분들을 향하여 복음을 강하게 전했다.
멀리화(茉莉花, Jasmine) 차
나는 중국을 방문하여 여행하면서 시골에서는 커피를 대접받아 본 적이 없다. 대 도시 일부를 제외하고는 커피가 무엇인지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런 곳에 내가 커피를 가지고 다니면서 커피 문화를 퍼트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여 나도 안 마시기로 했다. 그 대신 중국 사람들이 많이 마시는 멀리 화차(Jasmine)를 좋아해서 항상 더운물을 끓여 놓고 마셨다. ‘멀리화’는 가정에서도 키우는 화초로 꼬 향내음이 아주 좋다고 한다. 꽃과 잎으로 만들어서 꽃차(花茶 , 화차)라고도 부르며 전 국민이 마시는 국민차이다.
멀리 화에는 재미있는 꽃 전설이 있어서 소개해 본다.
“옛날 멀리화(末利花)는 신기한 꽃으로 어느 굴속에 은밀하게 있는데, 그때 세상에는 정의의 사도 같은 두 여자가 불의한 세상에서 고통을 받는 억울한 사람들을 도와주곤 했단다. 이 두 여자가 위기에 몰려 위급할 때면 멀리화, 멀리화, 하고 두 번 부르면 은밀한 굴속에 있던 멀리화가 날아와서 이 여인들의 손에 쥐어지면 신비한 능력이 나타나서 악한 사람들을 물리친다는 재밌는 전설이 있는 꽃이다.”
▶ 영어로는 Jasmine이라고 한다. 꽃향기가 독특해서 우울증이나, 신경과민 증세에 신경을 안정시키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특히 추운 지방인 북방에서 이 차를 많이 마신다. 멀리화는 집 화단에도 심는데, 향기가 좋고, 중국 사람들에게는 친하고 가까운 꽃이다.
♣ Jasmine은 튀니지 나라 꽃(국화, 國花)이다. 그래서 그들의 민주혁명을 Jasmine 혁명이라고 부른 것이다.
오늘은 전진을 떠나는 아침이다. 아침에 자매들이 와서 아침 식사를 만들면서 찰떡을 만드는데, 너무 쉽게 만들어서 그 과정을 옮겨 본다. 찹쌀을 져서 쌀레 박에 부어 주걱으로 쌀레박 톱니에 으깨니 찰떡이 만들어진다. 만들어진 찰떡에 콩가루와 팥고물을 무쳐서 접시에 담으니 입맛이 당긴다. 여러 접시의 요리들과 나물 김치들로 한 상 가득 차렸다. 그동안 함께한 식구들과 함께 기억에 남을 아침 식사를 즐겼다. 신작로로 차를 타러 나오면서 교회당을 지키며 홀로 사시는 중풍 든 할머니에게 인사를 드리려고 들어갔더니 마당에 나와계셨다. 인사를 드리니 불편한 손을 주머니에 넣으시더니 똘똘 말은 돈을 꺼내어 주신다. 내가 안 받으려고 애쓰니 한사코 받으라고 애원이셨다. 사양할 수가 없어서 고맙게 받아서 차에서 펴보니 5원짜리 두 장이다. 아마 멀리 사는 딸이 용돈을 쓰라고 준 것일 텐데, 돈이 귀한 노인이 주신 이 10원은 지금도 내 마음을 훈훈하게 하여 주고 있다. 받은 바 은혜에 대한 반응은 바로 향유를 부은 마리아의 신앙이 아니겠는가. 나 자신이 배우는 바가 컸다. 어떤 도시에서는 교인이 300명이 되는 교회에서 5일간이나 머물면서 설교를 했는데도 교인 중에 물 한 잔 주는 사람이 없었는데, 이 가난하고 병든 할머니의 믿음이야말로 얼마나 크고 아름다운가!
특히 이번 방문한 몇 곳의 처소들이 가난하고 어렵기는 하지만 그들대로 하나님을 믿는 순수하게 믿고 있었는데 외국에서 방문한 한국 사람들로 인하여 서로 시기하고 분열하는 일들이 생기고 있는데 문제의 근원은 돈 때문이었다. 또 한국 사람들이 드나들면서 교회의 주도권을 차지하려는 일로 서로 다투고 분열하는 일들이 복음 전도의 문을 막는 걸림돌들이 되고 있었다. 이곳의 예배당은 호주 한인교회에서 사준 것으로 인도자인 권 선생은 소학교 교사로서 한 2년 전에 믿은 분으로 신앙을 포기하으려고 교도(교무) 주임 자리까지 내놓은 헌신적이었다. 중국 교육법에는 국가 공무원, 군인, 교사는 종교를 가질 수 없다. 권서생도 종교문제로 교무주임인 자리를 내놓고 평교사로 되었다. 앞으로 학교의 지도자라 될 수 있는 교감, 교장으로 가는 길을 포기한 셈이다. 평 교사라도 할 수 있는 것은 그의 종교를 개인 일로 공론화하지 않기로 했기 때문이란다. 한 직업인이 승진할 수 있는 장래를 포기한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믿는 자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그의 결단은 얼마나 위대한가!!
묻혀있는 보화들
또 하나의 경험은 중국에 숨겨진 보화(그리스도인)들이 많다는 것이다. 내가 만난 교수 부부는 지금까지 만난을 무릅쓰고 살아왔는데 이제 곧 은퇴하게 되는데 그때부터 목회하려고 기도하고 있다는 말을 들으면서 하나님께 감사했다. 남편은 당원인데 은퇴하고 나서 자유의 몸으로 헌신하기를 기대하고 있었고, 부인은 어머니의 신앙을 본받아 지금까지 공산당 당원이 되지 않고 버티어 왔다고 하면서 공산주의 나라에서 최고 학부의 교수로서 당원이 되지 않으려고 하는 것 때문에 얼마나 위기가 많았는지 모른다고 술회하였다. 이제 은퇴하면 못다 한 삶을 주님께 드리고자 한다고 했다. 또 내가 만났던 소학교 교장 선생님을 잊을 수가 없다. 나는 그분과 식사 자리를 함께한 적이 있는데, 나는 그분에게 예수님을 믿을 것을 권해 보았는데 놀랍게도 그분은 예수님을 믿고 있다고 대답하였다. 그리고는 당신의 아버지가 장로님이셨단다. 지금도 자기는 집에서 성경을 보고 있고 하루에 한 번씩 기도도 한단다. 한 2년 있으면 퇴직하게 되는데 그때 자유롭게 믿는 생활을 하겠다고 했다. 지금 자기가 처소에 출석하고 믿는 활동을 하면 지금까지 쌓아온 자기 사회생활이 무너진다고 했다. 당원이 종교를 가지면 당직과 그 신분에서 물러나야 하고, 당원이 아니더라도 지도급에 있는 자는 물러나야 할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오는 불이익을 감수해야 하는 어려움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분은 방탕하던 조카(하남촌 뱀 장사 김 형제)가 예수님을 믿고 변화가 되어 교회의 일꾼이 되어 있는 것을 대견스러워했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하게 되는 일은 중국에는 이처럼 갈등하는 지성인들이 많다는 것이다.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박해하던 말년에 로마 귀족층들 사이에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들이 카타콤에 숨어서 거의 150년간이나 살아오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양식을 대주고 있었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모른다. 지금 중국도 표면에는 나타나지 않는 상류층 신앙인들이 실제로는 많이 있다는 것이다. 그들이 지금 공적으로 교회에 출석하지 않고 있어서 교회에는 마치 배운 지식인이나, 부자가 없는 것같이 보인다. 그래서 사람들은 교회는 무식하고 가난한 사람들만 다니는 곳이라고 비난을 받는 것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중국 정치 상황이 만들어 낸 기형적인 현상일 뿐이다.
김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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