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길은 조선족이 많아서 한국이란 느낌도 들었다. 여기 어디서 정착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다. 그러나 연길에는 사명을 가진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나 같은 사람까지 더 보탤 일이 없는 것 같다. 나는 나의 동심의 세계가 있는 흑룡강성 목단강에서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기를 기대했다. 목단강으로 가는 열차는 도문에서 떠나기 때문에 연길에서 아침에 기차나 버스를 타고 도문으로 가야만 했다. 그래서 초행길이므로 전날 이 기자에게 미리 부탁했다. 처음 가는 길이니 충분한 시간 전에 도착해야 하니까 빨리 가는 차를 일찍 타도록 해 달라고 부탁을 했다. 다음날 나를 태워 준 버스는 완행 중의 완행이었다. 9시 45분 기차를 타기 위해서 무거운 가방과 함께 얼마나 마음이 바빴는지 모른다. 도문 시내에 들어와서 장꾼들이 내리는 곳에서 오토바이 삼륜차를 타고 훠쳐쟌(기차역)이라고 소리쳤다. 역에 닿으니 막 개찰 전이었다. 기차표를 사서 기다리고 있는 데 도문교회 전형제를 만났다. 열차에 올라 몸에 흐르는 땀을 식히고 있는데 전 형제가 도문교회 성가대원 중년 자매를 데리고 왔다. 자매의 일행 세 사람은 시장에서 옷 장사를 하는 분들로 하얼빈으로 옷을 사러 가는 길이라고 해서 함께 앉아 가게 되었다.
주님께서 처음 가는 길에 이렇게 많은 동행자를 보내 주셨으니 얼마나 감사한가! 중국 열차는 칸마다 승무원이 있는데 옆 차의 승무원은 조선 여자이고 우리 칸은 중국 여자였다. 열차가 떠나면서 두 승무원은 우리에게 와 앉아서 놀았다. 나는 그들에게 전도하고픈 생각이 들어서 마침 가지고 있던 문 두드리는 예수님의 사진을 하나씩 주면서 누구인지 아느냐고 물었다. 두 사람 다 모른다고 했다. 나는 이 사진을 설명하면서 복음을 전했다. 그리고 그들의 사진도 찍었다. 식사 시간이 되었는데 모두 푸짐하게 싸 가지고 왔다. 상추쌈과 대파 찰떡 여러 가지를 내놓았는데 마치 소풍 가는 음식 수준이었다. 나도 이 형제 장모님이 싸 주신 김밥을 내놓았다. 오늘 뜻하지 않게 푸짐한 식사와 풍성한 교제를 할 수 있도록 축복하여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 식후에 한 자매는 나에게 자기 개인 문제를 상담해 와서 긴 시간 교제를 했고, 아직 믿지 않는 두 분에게도 전도하였다. 기차가 석탄 차여서 굴을 지날 때는 석탄 연기가 들어와서 공기도 탁하고 여러 굴을 지나는 동안 모두의 얼굴에 그을림이 끼고 있었다. 이러는 동안 기차는 6시간이나 달려서 목적지인 목단강 역에 닿았다. 즐거운 여행을 함께한 분들을 떠나보낸 역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밖에는 내 이름을 쓴 쪽지를 든 김금복이와 왕리화 자매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어서 반가웠다. 새로운 안내자를 따라서 목단강 교회에 다니며 시 정부에 근무하는 리화자매 아파트로 가서 처음 보는새로운 식구들을 만나게 되어서 반가웠다. 이때부터 이 집은 중국에서 내가 활동하는 중심지가 되었다. 저녁은 모친 주 자매님이 북조선에서 온 명탯국을 끓이고 김치도 있고 해서 중국 온 이래로 처음 한국 음식 같은 것을 먹어 볼 수가 있었다. 이 모친은 북한에서 살다가 한국 전쟁에 참전한 중공 의용군과 재혼하여 중국에 와서 살게 되었다고 한다. 고난 많은 생애를 살다가 이제는 예수님을 믿고 인생의 위로를 받고 사는 그의 간증을 들으면서 하나님께 감사했다. 연길에서 미리 연락한 대로 김 금복은 자매가 나를 자기네 마을로 데리러 가려고 먼 곳에서 왔다. 리화와 금복은 교회 관계로 서로 잘 아는 사이었다. 아는 이 없는 목단강에서 주님은 믿는 조선족 자매들을 만나게 하여 주셔서 이 나그네의 갈길을 열어 주시고 풍성한 교제 가운데 있게 하여 주셔서 큰 위로가 되었다. 12시가 넘어 우리는 밀산가는 열차를 타려고 목단강시역으로 나왔다.
계서시 계동현 하남 촌으로,
역에는 밀산가는 밤 열차를 타려는 사람들로 몹시 붐비고 있었다. 잠시 뒤 핸드폰을 든 역원이 미리 나갈 사람은 5원씩 내는 대기실로 오라고 안내를 하고 있었다. 우리는 5원씩을 내고 특별 대기실에 들어가니 모양새 갖춘 소파와 TV도 있어서 잠시나마 편히 쉬면서 마음을 가다듬을 수가 있었다. 개찰을 시키면서 역원이 뭐라고 같은 말을 반복하여 뭐라고 하느냐고 물으니까 뛰라고 한단다. 사람들은 정신없이 뛰고 있었다. 나는 영문도 모르고 사람도 없는데 왜 뛰어가야 하느냐고 묻는데, 곧이어 다른 문에서 일반 개찰이 시작되면서 사람들이 물밀 듯이 달려 나오는 것이 아닌가! 그때야 왜 뛰라고 하는지 알게 되어서 있는 힘을 다하여 뛰었지만, 그 사람들이 우리보다 더 빨리 뛰어서 플랫폼으로 내려갔다. 이미 열차가 들어와 있었다. 열차에 오르니 자리를 잡으려는 사람들로 객차 통로는 통과하기도 어려웠다. 무거운 가방을 들고 사람들을 해치고 나아가 얼마를 헤매다가 겨우 우리 자리를 찾아서 앉으니 피로가 일시에 밀려와 참기가 어려웠다. 자리에는 앉았지만, 사람이 워낙 많아서 숨쉬기도 힘들었다. 이 열차는 천진서 밀산으로 가는 장거리 열차인데 거의 장거리 손님들이라 세 사람이 앉는 의자는 한 사람씩 차지하고 누워 자는 사람들 그리고 좌석 밑에 길게 누워 자는 사람 등으로 무질서 그대로였다.
우리는 이 밤에 6시간이나 가야 해서 침대가 빈 것이 있으면 두 개만 사도록 하라고 부탁을 했다. 마침 우리가 탄 칸은 열 차장실이 있어서, 동행자가 가서 물어보니 없다고 한단다. 이런 차인 줄 알았다면 내일 떠날 것을 하는 마음으로 선반에 얹힌 무거운 가방을 보면서 다음부터는 짐을 가지고 다니지 말아야지 하고 생각했다. 팔이 떨어져 나갈 만큼 아팠다. 가방 속에는 성경과 책들 그리고 옷가지 선물들이었다. (그러나 그 뒤로도 갈 때마다 무거워서 후회하면서도 여전히 무거운 짐을 들고 다녔다.) 주고 싶은 마음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얼마 뒤 동행자가 다시 열차 장에게 갔다가 오더니 침대 표가 한 장 있단다. 20분 전에 없다던 것이 지금은 있다는 것이 이상했다. 두 개를 사라고 하니까 하나밖에 없단다. 50원짜리를 주었더니 표를 가지고 왔는데 거스름돈이 없다. 침대 표 값이 16원인데 열차 장이 34원을 챙기고 안 준단다. 너무 많이 받지 않느냐고 항의하니까 싫으면 그만두라고 하기에 그냥 왔다고 했다. 기가 막힌 세상이다! 이것이 바로 중국이었다. 결국, 16원짜리 표를 50원에 산 것이다. 3층 침대에서 눈을 뜨니 아침이 되었다. 어저께 종일 기차를 타느라고 피곤해진 몸이 조금 회복된 것 같았다. 아침 7시 50분경에 계동 역에서 내렸다. 여기서도 12Km 가서 다시 3Km를 더 가야 자기네 마을이 나온다고 했다. 역에서 지프 차처럼 생긴 개인 차를 40원에 타고 하남 촌으로 향했다. 계동은 현(군) 소재지로 조선족 중. 고등학교가 있었다. 주변에서 소학교를 마치고는 이 학교로 모두 오는데 기숙사 시설이 되어 있어서 시골서 오는 학생들에게는 편리하지만 비싼 기숙사 비용 때문에 많은 가정이 진학을 시키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란다. 시가지를 벗어나서 얼마를 오니 검문소가 나타난다. 경찰이 기사와 동행자의 증명서를 조사하고는 나에게 뭐라고 하는데 알아듣지 못하니 옆에 동행자와 대화를 하는데 한 5~6분 실랑이를 하다가 건너편 쪽에 버스가 오니까 우리를 세워 둔 채 버스에 올라가서 검문하고 있었다. 나는 왜 그러느냐고 물었다. 여기는 변경 지대라 가끔 검문검색을 하는데, 그동안 안 하다가 갑자기 왜 또 그러는지 모르겠다고 하면서 나 보고는 그냥 가만히 있으란다. 경찰이 다시 와서 한참 동행자와 실랑이를 벌인 뒤 통과시켰다. 검문소를 통과한 뒤 뭐라고 했기에 통과를 시켜 주었느냐고 물으니, 내가 계서 교육대학원 교수인데 지금 하남에 있는 모친이 위독하여 모시고 가는 길이라고 했단다. 경찰은 그런데 왜 아무 신분증이 없느냐고 묻기에 바빠서 사무실에 지갑을 놔두고 왔다고 하는데 경찰이 자꾸 말이 많아서 화를 좀 냈다고 했다. 경찰은 다음부터는 신분증을 꼭 가지고 다니라고 하면서 보내 주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경찰이 나에게 중국말을 모르느냐? 하고 묻지 않고 왜 삼자 하고 만, 이야기하느냐고 물으니, 중국에서는 이런 경우 대개 높은 사람은 목에 힘주고 가만히 있고 아랫사람들이 말 상대를 한다고 하여, 그러면 잘 됐다, 앞으로 나는 목에 힘주고 앉아만 있을 테니까 여러분이 알아서 하라고 하면서 한바탕 웃었다. 차는 평양 진(읍)에 들어왔다. 조그마한 시골 시장은 신작로 양쪽에 서고 있었다. 차가 읍내를 벗어나니 울퉁불퉁한 길을 달려 하남 촌이라는 조선족 마을이 나타났다. 처소에 닿으니 기다리고 있던 식구들이 반갑게 환영하여 주었다. 이날은 1994년 6월 4일이다.
김제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