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작스런 백두산 방문과 1박 2일의 기자 생활
한 달 남짓 연길 지방의 생활을 끝내고 곧 떠나려고 짐을 챙기고 있는데, 이 형제에게서 전화가 왔다. 오후 한 시에 장백산으로 가게 되었으니 12시 반에 만나자고 했다. 중국에서는 백두산을 장백산이라고 부른다. 만나서 간 곳은 동북아 호텔이었다. 잠시 후 그곳에는 연길에 있는 언론 기관 기자들이 몇 명 왔고 한국에서 온 양복쟁이들이 모였다. 영문을 모르고 온 내가 알게 된 것은 내일 노태우 전 대통령의 조카가 되는 노은호 회장이 길림성 정부와 합작으로 장백산에 Four Star 호텔과 온천장, 그리고 스키장 개발을 위한 기공식을 한단다. 인사들을 시키는데 내 차례가 되니까 캐나다에서 온 기자라고 소개하는 것이 아닌가! 처음에는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노 회장이 기자단을 초청할 때 나와 함께 성경 모임에 함께 하던 방송국 친구들이 나를 장백산 구경을 시켜주려고 기자단의 일원으로 끼워 넣어 준 것이다. 본의 아니게 나는 중국 사람들과 조선 사람들에게 1박 2일 동안 기자라는 신분으로 어색하게 살아야만 했다. 장백산 가는 비포장도로는 길이 좋은 편이다. 가는 동안 뇌성 번개와 간간이 소나기가 내렸다.

우리를 태우고 가는 차는 장백산에 있는 천지 호텔 차로 기사는 조선 사람으로 호텔 차량 담당자라고 했는데, 전직 공안원(경찰)이었는데, 마약 밀수에 연관되어서 해고된 뒤 여기에서 일하게 되었단다. 이 분이 자주 한국관관 객들을 태우고 다니는 모양인데 한국 사람들에 대해서 불만이 많았다. 그는 좀 상기된 얼굴로 한국서 온 사람들은 다 사장이라고 하여 처음에는 모두 대단하게 보았는데, 이제는 회장님이라고 해야 중국의 사장 정도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함께 가면서 무엇을 먹으면 좀 먹어 보라고 권하지도 않고 자기들끼리만 먹는다고 불평을 하면서, 자기한테 반말을 해서 몹시 불쾌해서 때때로 막 싸웠다고 한다. 그리고 내킨 김에 한국 사람들의 추태에 대해서 많은 말을 하였다. 나는 들으면서 우리 백성들이 여기 동족들에게까지 와서 왜 이렇게 무례하게 행동하는지 걱정스러웠다. 중국을 방문하는 한국 사람들에게도 문제가 있고 아직 관광 서비스에 익숙되어 있지 않은 중국 사람들에게는 더 문제가 많은 것 같았다.

갈수록 산은 높아지고 골은 깊어지며 깊은 골짜기들에서 개울물들이 세차게 흐르고 있었다. 처음에는 개울들이 우리가 가는 방향과 반대편으로 흘러가고 있어서 물어보니 토문강(土门江)이라며, 두만강(图们江) 으로 흘러 들어간다고 한다. 우리가 이도백화 ‘소사하’ 라는 마을을 지날 때 김일성 주석의 부모님이 여기에 살았다고 하는데 청년 김일성이가 나라를 구해야 한다고 빨치산 혁명을 하고자 떠난 곳이라고 하면서 개나리 보따리 하나를 매고 떠나는 아들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보고 서 있었던 어머니 강반석 권사의 모습을 한 기자가 마치 본 듯이 설명했다. 얼마를 달리다 보니 이제는 개울물이 우리와 같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 새로운 강을 만났는데 천지에서 흘러나오는 송화강이라 했다. 천지 물은 장백 폭포를 거쳐서 한 줄기는 서쪽으로 흘러 압록강이 되었고, 다른 줄기는 북쪽으로 흘러 송화강이 되어 하얼빈 쪽으로 흘러 소련과 국경선을 이루며 소련 연해주에서 아무르 강을 만나 동해로 흘러간다고 한다. 6시간이나 달려 어두워져서야 천지 호텔에 이르렀다.
▶ 토문강(土门江)은 두만강(图们江)과 같은 발음임을 이용하여 중조 국경선의 역사 왜곡의 수단으로 쓰고 있다.

1712년 조약에는 투먼쟝(土门江)이 중조의 경계이어서 백두산과 연변은 조선 땅이다, 그러나 중국은 글자는 다르나 발음이 같은 두만강 (图们江)이 경계라고 우겨 연변이 원래 중국 땅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호텔 식당으로 안내를 받아 들어가니 성 정부 고위 관리들과 한국서 온 사람들과 축하객들 그리고 내일 기공식을 위하여 서울에서 MBC 촬영 팀도 와 있었다. 기자단은 몇몇 고위층이 앉아 있는 둥근 식탁으로 안내되어 어울렸다. 진귀한 많은 요리가 끊임없이 나왔다. 얼마나 나왔는지 15여 명이 둘러앉은 식탁 가운데 요리를 놓고 돌려가면서 먹는 곳에는 요리들이 3층으로 쌓였다. 대개 3층 정도가 되면 요리는 다 나온 것이 된다. 잠시 뒤 마지막을 장식하는 요리라는 탕이 한 가지가 나왔다. 흰 색깔의 둥근 접시 모양의 그릇에는 뽀얀 색깔의 국물에 둥글게 생긴 흰 고기 토막들이 보였다. 중국 사람들이 이 탕을 두고 농담을 하고 있었다. 내가 뱀탕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식탁은 돌아서 내 앞으로 왔고 우리 쪽 사람들이 조그만 그릇에 국물과 함께 세 토막이나 담아서 나를 주면서 먹으라고 권하고 권하여서 마지못하여 국물을 떠먹으니 고소했다. 고기 맛을 보라고 또 권해서 젓가락으로 고기 살을 뜨니 가늘고 긴 뼈들이 앙상하게 드러난다. 장백산 구렁이 탕이라고 옆 사람이 소개해 주었다. 좀 꺼림칙한 기분으로 입에 넣고 먹어 보니 고기 맛이 괜찮았다. 평생 처음 먹어 보는 백두산 황금 구렁이 탕이었다. 이곳에서는 아주 비싼 것이라고 한다. 식후 호텔 매점을 둘러보았는데 북조선 상품들도 제법 있었다. 구 기자분이 나에게 장백산 기념 티셔츠를 하나 사 주었다.
한국에서도 관광객들이 적지 않게 와 있었다. 물건을 사는 한국 분들을 보았는데 불과 20~30불짜리 물건 하나를 사는 데 미화 100불짜리가 가득히 든 누런 돈 봉투를 꺼내어 보이면서 100불짜리 한 장을 꺼내서 물건을 사는 비슷한 경우를 여러 번 보았다. 개방 뒤 돈에 눈이 어두워 있는 사람들이 많은 중국에서 돈이 이렇게 있다는 것을 보이는 그 자체가 위험을 자초하는 것이었다. 가끔 한국 관광객이 납치를 당하고 테러를 당하는 것은 돈이 있다는 것을 보이는 이런 과시욕이 문제가 된다고 기자들이 말했다. 걱정스러운 일들이었다. 식탁을 떠나 우리는 장백산 골짜기 안으로 들어가서 한 산장에 머물게 되었는데 오래전 모택동 주석과 강청이 머물렀고, 그리고 덩샤오핑 주석도 머물고 간 곳이라고 했다. 밤새도록 소나기가 내렸다. 밤늦게 공안 두 명이 우리가 머무는 산장에 왔다. 기자들과 뭔가를 이야기하더니 떠났다. 나는 직감이 나에 대해서 말하는 것 같이 느껴졌다. 그래서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느냐고 이 형제에게 물었더니. 내일 기공식에서 나에게 아무 취재 활동을 하지 말고 그저 참석만 하도록 하라고 전해왔다는 것이다.

다음날 오전 기공식은 억수같이 쏟아지는 빗속에서 이루어졌다. 오후에 빗줄기는 가늘어졌지만,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우리 식탁에 서울 신라호텔 창업 때부터 20년간 월급 사장을 하던 분이 와서 자기가 호텔 사장으로 왔다고 소개하면서 한국 사람들이 영산이라고 하는 이곳에서 인생의 마지막 정열을 쏟고자 한다고 협조를 당부하는 말을 했다. 비는 내리고 천지로 오르는 길은 안개가 끼어서 4~5m 앞을 보기가 어려워지자 장백산 관리국에서 입산을 금지하므로 한국서 온 관광객들과 기공식에 온 사람들 백여 명이 발이 묶였다. 나도 우리 민족의 위대한 백두산 바로 밑에까지 와서 천지를 못 보고 간다는 것이 섭섭하기만 했다. 모두 그냥 연길로 가자고 하는데 몇 기자가 멀리 캐나다에서 오셨는데 천지는 못 보더라도 장백 폭포는 보고 가도록 하자고 우겨서 차로 얼마큼 올라가 내려서 한참 걸어 올라가자 천지에서 흘러내리는 장백 폭포의 웅장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비를 맞으면서 걸어서 온천이 솟아나는 데까지 가서 구경했다. 온천물이 흘러나오는 곳은 제법 넓었다. 물의 온도는 70~80℃ 정도로 중국 사람이 뜨거운 온천물에 달걀을 삶아서 팔고 있었다. 구 기자가 기념으로 먹고 가라고 하나 사 주었다. 기자들이 빗속에서 폭포를 배경으로 사진을 함께 찍으면서 추억을 만들어 주었다. 이렇게 마음 써준 기자들이 고마웠다. 일생에 처음 백두산을 갔지만 천지에 올라가 보지도 못한 채 산 중턱을 내려오면서 비는 그치고 엷은 햇빛이 비치고 있었는데 뒤를 돌아 천지를 보니 그곳은 여전히 검은 구름이 산정을 뒤덮고 있었다.
연길로 돌아오는 긴 시간은 이제 나의 시간이 되었다. 내 옆에 앉은 인민일보 문 기자에게 한문 풀이를 통하여 복음을 전하느라 연길 도착할 때까지 성경 말씀의 교제가 끊이지 않게 되었다. 비록 천지는 보지 못하였으나, 하나님이 주신 큰 축복의 하루였다. 차에 탄 5명 모두가 오늘 많은 것을 배웠다고 감사의 인사를 했다. 차 기자가 이제 헤어지면 언제 만날는지 모르는데 내가 양고기 뀀(羊串)을 맛보고 떠나야 한다면서 자기의 단골집 식당으로 데리고 갔다. 양 뀀은 양고기를 잘게 썰어서 20개 정도를 가는 철사에 꿰여서 숯불에 구워서 먹는 남방 요리로서 중국에서는 흔하게 볼 수 있다. 자기들은 가끔 친구들끼리 누가 꿰미를 더 많이 먹는지를 경쟁도 한다고 한다. 나는 한 30꼬치를 먹으면서 인정 많은 친구와 즐거운 식사를 나누었다. 어두워진 길에서 훗날 다시 볼 날을 약속하면서 헤어졌다.
※ 이번 백두산 방문은 계획에 없었던 갑작스런 일로 또 일기불순으로 백두산 입산이 금지되는 바람에 천지에 올라가 보지도 못하는 아쉬운 일이었다. 앞으로 중국에 살면서 다시 찾아보면서 더 많은 소식을 나누게 되리라 믿습니다.
김제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