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조선 국경선 도시 도문
도문은 북한의 남양 시를 마주 보고 있는 곳으로, 일본 제국주의 시절에는 관동 제일의 교통 중심지였다. 지금은 인구 10만의 연변 조선족 자치주의 한 도시로서 조선족이 중국인들보다도 많이 사는 곳이었지만, (이젠 반대로 되어가고 있다) 경제 침체로 폐쇄된 공장들과 국영 상점들로 실업률이 높은 곳이었다. 도문은 내가 어린 시절에 살던 곳이다. 해방 뒤 목단강에 살던 우리는 조국으로 돌아가기 위하여 남으로 오다가 도문에서 1년 반 이상을 살던 곳이다. 여기서 내 아래 여동생이 태어났다.
나는 도문 삼자 교회에서 5일 동안 머물면서 장로님 내외분을 통해 중국의 사정을 들으면서 중국 교회의 과거와 현실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받았다. 그곳에 있는 동안 말씀을 전하면서 매일 주위를 돌아보았다. 도문 교회는 김 장로의 아버님이 되시는 김보은 장로가 1937년 개척한 도문 중앙 장로교회로 그 후 예배당도 짓고 활발한 민족 교회로서 성장하였다. 문화 혁명이 일어나자 교회집회는 중지되고, 어느 날 붉은 완장을 찬 홍위병들이 김 집사(김장로) 내외와 어머니 권사를 예배당으로 내려오라고 해서 이 층 사택에 있다가 내려가 보니 거의 모든 교인이 모여 있었다. 배신한 한 여 집사의 농간으로 모든 교인이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모인 것이다. 홍위병들은 김 집사 내외와 모친 권사를 가운데 세우고 비판하기 시작하더니 모든 성경책과 찬송가를 찢고 불태우기 시작하면서 교회 기물들을 닥치는 대로 부수어 불에 던져 넣는데 독일제 풍금도 부수려고 하자 권사님이 말리면서 이 기계는 찬송을 치면 찬송가가 나오지만, 혁명가를 치면 혁명가가 나오는 것이니, 이 비싼 악기가 무슨 죄가 있느냐 부수지 말고 학교에라도 갔다가 주어서 사용하게 하라고 권하자, 한 사람이 본부에 연락해 보더니 그대로 부수어 불에 던졌다고 한다. 그리고 붉은 벽돌로 된 예배당을 완전히 부수어 버렸다고 한다. 그 뒤 김 집사 가족은 종교분자라는 딱지를 달고 첩첩산중 두메산골인 마패로 가서 문화 혁명이 끝날 때까지 10년 동안 농촌 생활을 하면서 투쟁(자기비판과 사상 재교육)했다고 한다. 문화 혁명 초기에는 거리거리에 홍위병들이 시민들의 생활을 간섭하고 있었기 때문에 얼마나 분위기가 삼엄했는지 가슴을 펴고 다니지 못했다고 한다. 예를 들면 긴 머리를 하고 지나가는 여자를 붙들어서 반동의 머리를 하고 다닌다고 모욕을 주고는 머리카락을 그 자리에서 잘라 버렸다고 한다. 짧은 치마도 단속의 대상이 되어서 그 당시 여성들은 주로 검은색과 진 감색 바지에 짧은 머리로 문화 혁명이 끝나는 10년을 살았다고 한다. 문화 혁명의 전위대인 철부지 홍위병들이 설정한 애매하고 모호한 기준이 그때 사회의 문화 척도가 되었다. 중국 여자들은 추운 원인도 있지만, 이때부터 바지 입는 것이 생활화되었다고 한다. 젊은 세대들은 다양하게 변하고 있으나 아직 청바지가 유행되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으로 생각하였다. 김 집사 가족이 문화 혁명이 끝나고 도문에 다시 돌아온 것은 10년 세월이 지난 후였다. 기도하던 집사님 가정은 80년 8월에 가정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였고, 김 집사는 87년 10월에 장로가 되었다. 그리고 한국 교회의 후원으로 4층 건물은 88년 2월에 기공식을 하여 89년 10월 1일에 입당식을 했다. (몇 년 뒤 도시계획으로 다 헐고 두만강 공원 가까운 곳에 새로 짓게 되었다.)
주일 예배 시간은 9시 30분이다. 예배가 시작되기 바로 직전, 가까운 시골에서 오신 집사님이 나에게 다가와서 처소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되는데 장소가 필요하다면서 재정적인 후원을 부탁하는 말을 했다. 강단에 서니 마음에 충만한 은혜가 넘치고 있음을 느낄 수가 있었다. 나는 나의 부모는 살길을 찾아 만주에 왔지만,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왔다고 힘주어 말하면서 피 흘리신 그리스도 구속의 은혜를 전했다. 말씀이 끝난 후에 집사님 한 분이 예배 참석자 인원을 성인과 소아로 나누어 광고하는 것이 특이하였다. 주일 낮에는 성인 291명 소아 5명이 참석했다고 광고했고, 저녁에는 성인 145명 소아 5명이 참석하였다고 했다. 예배 후 장로님의 사위요 교회의 피아노 반주를 하는 형제와 함께 강변 공원으로 나갔다. 연변대 음악 과를 나와서 사범대학에 음악 선생으로 취직을 했다가 종교인이라는 이유로 해고되었다고 한다. 지금 한국의 신학교에 가려고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중조 변경(국경)인 두만강 기슭에 자리 잡은 강변 공원은 1982년에 도문 시가 만들었는데 길이는 5Km나 되었다.
교두국문(橋頭國門)
강변 공원은 아름답고 깨끗하며 건너편 북조선의 산야를 가까이 볼 수 있는 특별한 곳이다. 조선으로 건너가는 두만강 다리 입구에 있는 교두국문(橋頭國門)은 1990년에 세워진 중조의 관문으로 해관(이민국)과 유람시설물 등이 있다. 국경선 긴 다리 중간 지점에 중국 쪽은 푸른색을 칠했고, 조선 쪽은 붉은색으로 칠하여 국경선을 구분하고 있었다. 두만강 물은 무산의 철광 때문에 검은 물이 흘러내리고 있어서 기분이 유쾌하지 않았다.
교두국문(橋頭國門) 전망대
이곳은 이제 한국에서 백두산으로 관광 오는 분들이 꼭 들려가는 지정코스가 되어버렸다. 국문 옥상에 입장료를 내고 올라가려고, 표를 사는데, 입장권은 5원인데 나는 외국 사람이라고 10원을 받는다. 그 위에는 고성능 망원경이 있어서 다리 건너 북측 경비병들과 남양시를 자세히 살펴보니 아파트 단지와 그 주변을 살펴볼 수가 있었다. 아파트 단지에는 5 –6명의 어린아이와 남자 한 사람이 나무 그늘에서 노는 모습이 보인다. 이상한 것은 일요일인데도 아파트 주변과 거리에 사람의 움직임을 볼 수 없었다. 더욱이 강변 쪽에도 사람이라고는 그림자도 안 보였다. 이쪽은 지금 휴일이라고 조선족들이 장고 등을 가지고 나와서 먹고 마시고 신나게 놀고 있고, 유람선과 보트들이 두만강 물을 가르면서 달리고 있는데, 어째서 저쪽은 저리 조용하기만 한지 북쪽을 바라보는 내 마음은 무겁기만 하다. 이때 남양 시에서 사이렌 소리가 들려 시계를 보니 11시였다. 옆에 형제가 북쪽은 지금 12시로 점심시간이라고 말해 주었다. 한 46년 만에 돌아온 그때 그 땅, 어찌 감회가 없겠는가! 그때 나는 비록 7살 나이이긴 해도 워낙 고생스러운 세월이어서 그런지 많은 기억을 가지고 살아왔다. 그때 두만강을 건너가려는 조선 사람들로 강변 둑에는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중국 경비대에서 건너가는 것을 막고는 있었지만, 경계가 허술하여서 기회를 보아서 건너들 가고 있었다. 건너기 어려운 부녀자들과 노약자들을 위하여 돈을 받고 건네주는 사람들도 있었다. 어느 봄날 우리 가족도 건너게 되었는데, 나는 아버님은 외할머니와 어머니를 건네어 놓고 형과 나를 목에 태워 건네주셨다. 그때는 강 건너편에 지금 있는 수양버들 숲이 없었고 그저 돌바닥 강변이 저 끝까지 뻗혀 있었는데, 46년 만에 와보는 두만강은 너무 많이 달라져 있었다. 장로님이 점심은 냉면으로 하자고 하여 냉면 집으로 가는데, 전통적인 중국 옷을 입은 외국 사람이 냉면 집에서 나오고 있었다. 장로님은 나에게 저 외국인은 독일인 신부라고 말해 주었다. 나는 외국 사람을 만나서 반가워서 영어로 인사를 하고 어느 나라 사람이냐고 물으니 독일 사람이라고 했다. 나는 캐나다에서 온 사람이라고 소개하고 여기에 사느냐고 물으니 그는 여행자라고만 대답하면서 나를 경계하는 눈치였다. 주일이라 미사를 집전하러 온 모양이다. 몇몇 조선족 여자들이 뒤따르고 있었다. 이 냉면 집은 장로님의 조카가 하는 데 천주교인이 되었다고 한다. 냉면 맛은 최고의 수준이었다.
국제 아동절 6월 1일
오늘은 국제 아동 절로 사회주의 국가에서 어린이날로 정하여 기념하는 날이다. 이날은 소학교에서 운동회가 열리고 놀이터와 강변 유원지에는 놀이 나온 조선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점심시간에는 온 가족이 둘러앉아 음식을 먹는 모습이 행복하게 보였다. 여성들은 예쁜 색깔의 한복을 입고 나와서 장구 소리에 덩실덩실 흥겹게 춤을 추고 있었다. 북한 쪽에도 이날을 기념할 텐데 어떻게 이런 날 강가에 어린이와 부모들이 놀러 나온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는지 궁금하기만 하였다. 마치 죽은 도시 같이 느껴졌다. 정치가 무엇이며 이데올로기가 무엇이기에 강하나 사이를 두고, 그것도 같은 사회주의 나라인데, 세상이 이렇게 다를 수가 있는가 하는 착잡한 마음 때문에, 들려오는 흥겨운 풍악 소리가 즐겁지 않았다. 도문에 있는 동안 나는 시간만 나면 두만강변에 나와서 무엇인가 보고 듣고 새로운 것을 얻으려고 시간을 보냈다.
옥수수를 실은 대형 트럭들이 북조선 쪽으로 많이 건너가고 있었다. 강변에서 만난 조선 사람은 저 옥수수는 사료용인데 북조선에는 저것도 모자라서 못 먹는다고 했다. 북조선을 다녀온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식량난을 겪고 있는 북조선의 사정이 얼마나 심각한지 빨리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어느 날 북조선 쪽에서 한사람이 중국 쪽 친척을 방문하러 오는 모양인데 남루한 옷차림에 엷은 국방색으로 된 가벼운 배낭을 메고 건너오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날에는 중국 쪽에서 북조선 친척 집을 방문하러 가는 분을 보니 짊어지고 두 손에 무거운 짐들을 들고 건너가고 있었다. 서로 친척을 방문하는 두 방문자의 비교되는 모습들이다. 그곳에서 우표와 북조선 돈을 파는 아주머니에게 이 두 방문자의 모습을 이야기하니까. 저쪽에는 먹을 것이 없고 가난해서 가져올 것 없다고 말하면서, 여기서는 북에서 친척이 온다고 연락을 받으면 비상이 걸린다고 한다. 갈 때는 많은 것을 보내야 하므로 여기 있는 사람들은 뽕 빠진다고 했다.
중국의 목욕 문화
내가 중국을 여행하면서 여러 번 경험한 중국 목욕 문화를 소개한다. 아침에 장로님에게 목욕탕이 어디 있는지 알려 달라고 하니까 거기서는 목욕을 못 하실 텐데 하면서 좀 꺼리는 눈치였다. 삼륜 오토바이를 타고 목욕탕을 갔다. 장로님은 중국말도 못하는 나를 내려놓으면서 독탕을 사용하라고 부탁하고는 가 버렸다. 중국 사람이 하는 탕인데 말을 잘 모르니까 바로 돈을 못 내고 우선 정황부터 살펴보고 가격표가 있어서 보니 독탕은 10원이었다. 10원을 내고 표와 옷장 열쇠를 받았다. 나를 보고 기다리라는 서툰 조선말을 하는 것을 보니까 영업상 몇 마디 조선말은 할 줄 아는 것 같았다. 20분 정도를 기다려도 들어가라는 소식이 없어서 말은 모르고 표를 들고 가서 보이니 또 기다리라고만 한다. 독탕에서 목욕하는 사람이 나와야 내가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이해했다. 나는 사실 샤워만 하면 되는데 독탕이 필요 없었다. 요금표를 보니까 린위(淋欲)란 단어가 샤워란 것으로 생각되어서 어떻게 독탕을 임욕으로 바꾸어 달라고 해야 하는지 연구하고 있는데, 어떤 부부가 들어와서 표를 사고는 내 옆에 앉아서 조선말로 서로 말하고 있었다. 반가워서 내 사정을 이야기하고 독탕 표를 샀는데 벌써 반 시간이 된다고 하니 독탕은 두 사람씩 하는데 혼자이면 두 사람이 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단다. 그리고 안에 사람이 있으면 나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데 지금 몇 개 안 되는 독탕들이 다 차서 우리도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저기 임욕이라는 것이 샤워를 뜻하는 것이냐고 물었더니 그렇단다. 나는 샤워만 하면 되니까 이 표를 샤워 표로 바꾸어 달라고 부탁해서 3원짜리 표로 바꾸었다. 탕에서 주는 슬립 퍼를 신고 들어가니 한쪽에 문이 없는 화장실 두 칸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탕 안에는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탕 안에를 들어가고자 했는데 이게 웬일인가! 탕 물은 떼 국물이 되어있지 않은가! 도저히 들어갈 수가 없었다. 중국에서는 한국 같은 깨끗한 탕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중국의 목욕 문화는 물 안에 들어가서 때를 불려서 탕 밖에 나와서 때를 미는 것이 아니라 탕 안에서 그대로 미는 것이 그들의 목욕 문화였다. 탕 안에서 때를 다 밀면 나와서 마지막으로 몸에 비누칠하고 물로 씻으면 목욕이 끝나는 것이 순서였다. 여자 탕에는 더운물 탕이 없고 샤워만 하게 되어있다고 한다. 전에는 있었는데, 부인병이 돌아서 법으로 없앴다고 한다. 나는 샤워를 하려고 하는데 물이 시원하게 나오지 않고 쫄쫄 간질 나게 나오고 있어서 그런대로 겨우 씻고 나왔다. (나의 경험은 그때 그 이야기이고, 지금은 한국식 목욕탕으로 많이 변화발전하였고, 아직도 서민층들을 위한 목욕탕은 여전하다.)
도문 역 사진 사건
오후에 시장 구경을 하고 도문 역으로 가서 필름을 사서 새로 넣고 보니 역 대합실 벽에 모자이크로 만들어진 백두산 천지가 너무 아름다워서 카메라 셔터를 눌렀는데 누가 어깨를 두드려서 돌아보니 중국 공안원이었다. 뭐라고 하는데 말을 알아듣지 못하니까 손으로 따라오라고 해서 사무실에 들어가니 조선 사람 공안이 있었다. 왜 사진을 찍었느냐고 묻는다. 필름을 금방 사 넣고 보니 천지 그림이 너무 아름다워서 찍었는데, 뭐가 잘못되었느냐고 물으니, 역 안에서는 사진을 못 찍게 되어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내가 한국 사람인 것을 알고 중국에 온 목적을 묻고 어디에 머무느냐 등을 물어보고는 내보내 주었다. 중국은 공개된 장소의 역 대합실 벽에 걸린 그림도 마음대로 못 찍는 숨막히는 나라였다.
김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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