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길시와 룡정시

연길시
중국에서 처음 맞이하는 주일이다. 이 기자 식구들을 데리고 조선족 삼자 교회에 갔다. 같이 간 12살 아들은 교회 안내원이 들어가지 못하게 해서 밖에서 놀고 있으라고 했다. 6살 된 딸은 유아실에 데리고 가니 그곳에서는 주일학교같이 하고 있었다. 중국 종교법에는 18세 이하의 청소년에게 종교 교육을 하지 못하게 되어있기 때문이다. 중국 기독교에는 주일학교와 중. 고등부가 없으므로 교회의 장래가 심각한 것 같다. 또 어떤 곳에는 대담하게 주일학교를 하는 곳도 있다고 한다.
항공우편 봉투
월요일 편지를 쓰고자 큰 백화점 문방구에 가서 편지지를 사고 항공 봉투를 사려고 하는데 일반 봉투는 눈에 보이는데 유독 항공 봉투만은 보이지 않는다. 한참 헤매다가 마침 조선말 하는 점원이 있기에 물어보았더니, 항공 봉투는 우체국에서 판단다. 처음에는 왜 봉투를 우체국에서 파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은 개방 전에 인민들의 모든 필수품이 국가 기관을 통해서 공급되고 있을 때 편지 봉투는 우체국에서 판매되어 와서 지금도 그렇게 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봉투를 사서 우체국에서 나오는데 그 옆에 취미 우표라는 간판이 있어서 우표수집을 하는 나는 흥미가 있어서 들어가 보았다. 우체국 직영 취미 우표 판매소가 있고 그 앞에 몇몇 개인 우표 상들이 앨범을 펴놓고 장사를 하고 있었다. 한 청년이 내가 한국 사람인 것을 알아보고 와서 조선말로 나에게 북한 우표들을 보여 주면서 사라고 권했다. 나는 그 친구와 사귀어서 데리고 용정도 같이 가고, 나의 가정 성경 공부에도 참석하게 했고, 교회에 데리고 갔는데, 그 친구 말이, 자기 인생 26년 만에 처음 교회라는 데를 와 본다고 하면서 좋아했다. 그 뒤에 그는 스스로 교회를 다니고 있어서 하나님께 감사했다. 저녁 가정 성경 모임에는 아나운서 부부와 방송 음악 프로듀서 부부가 와서 복음을 전하는 집회를 가졌다. 마치고 교제의 시간에 아나운서의 남편 되는 분이 상기된 얼굴로 나는 사실 공산 당원인데 신앙을 가지려면 당원증을 반납하고 믿어야 하는데 현실을 생각하면 그렇게도 할 수도 없고 마음으로는 너무 믿고 싶은데 갈등이 많다고 고백했다. 앞으로 이 중국에 어떤 일이 또 일어날는지 모르므로 불안하기도 하고, 그리고 아이들의 교육 문제 직장 문제 등 복합적으로 번민하고 있었다. 나는 우선 이 상태에서 그대로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시고 신앙생활을 하시면서 그다음은 하나님의 감동과 인도하심을 따르고 감정적으로 움직이지 말라고 조언했다. 이제 중국의 역사 수레바퀴는 다른 곳으로 굴러가고 있으니까, 이 역사의 흐름을 빨리 알고 새 흐름에 나아가라고 격려를 했다. 한 주에 한 번 정도로 성경 모임을 하는데, 여러 사람이 더 참여하였다. 찬송 배우기를 좋아해서 찬송을 많이 가르쳐 주었는데, 어떤 때는 밤 10시가 넘으므로 찬송가 부르기를 내가 자제하려고 하면 괜찮다고 더 부르자고 했다. 사실은 내가 외국 사람이기 때문에 조심스러워 그런 것도 있지만, 사실은 이 기자 부인이 다니고 있는 직장의 당위 서기가 옆에 살고 있어서 신경 쓰인다고 말했더니 일 없다고(괜찮다고) 하면서 나를 안심시켜 주었다. 방송 음악가는 가끔 저녁 늦게 자주 와서 찬송을 가르쳐 달라고 하였다. 나는 명상적인 찬송가와 복음 송을 가르쳐 주었다. 두세 번 가르쳐 주면, 악보를 보고 자기 혼자 잘 불렀고 오히려 나의 틀린 음정을 고쳐 주곤 하였다. 그분은 방송이나 TV 드라마 백 음악에 가끔 은은한 찬송가를 경음악으로 넣는다는데, 사람들의 반응이 아주 좋다고 했다. 자기는 공산당 언론 기관의 직원으로 직접 전도는 못 하지만, 음악을 통해서라도 이바지하고 싶다고 말해서 고마웠다.
거꾸로 ‘福(복)’ 자
다음 날 시내를 돌아보려고 아파트 계단을 내려가는데 중국 사람이 사는 아파트 문 앞에 ‘ 福 ’ 자를 거꾸로 붙여 놓아서 궁금

했다. 왜 거꾸로 붙였을까? 저녁에 식구들이 모였을 때 물어보았더니 복이 위에서 내려올 때는 거꾸로 내려오니까 복이 거꾸로 굴러 들어오라고 그렇게 붙인다는 해학적인 표현도 재미있었다. 또 ‘ 福 ’ 자를 거꾸로 붙이는 일에 관하여 일반에게 널리 알려진 이야기는, “청나라 왕가의 공왕 부(府, 저택)가 설을 맞이하게 되었다. 공친왕 부의 총 집사는 주인의 환심을 사기 위해 몇 개 큰 ‘복’ 자를 써서 일군들에게 앞문과 창고 문에 붙이라고 했다. 그중의 한 머슴이 글자를 모르는지라 앞문에다 ‘복’ 자를 거꾸로 붙였다. 이것을 본 공친왕 부의 복진은 매우 불쾌해하면서 채찍 벌을 주려고 했다. 다행히도 말 잘하는 총집사가 자기에게도 연루될까 봐 급히 무릎을 꿇고 이르기를, 소인이 듣는 말에 공친왕 부에 복이 온다고 하더니, 지금 정말 ‘큰 복’이 왔습니다. ‘복’ 자를 거꾸로 붙인 것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복과 땅에서 올라오는 복이 모두 이리로 들어오도록 하는 경사로운 징조라고 봅니다!라고 간신처럼 말하자, 복진은 이 말을 들으면서, 조금 전 집에 들어오면서 사람들이 공친왕 부에 복이 왔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집사의 말을 들으면서, 기분이 좋아져서 집사와 머슴에게 은돈 50량 상금을 주었다고 한다. 이 일이 있은 뒤부터 민간에서는 ‘ 福 ’ 자를 거꾸로 붙이는 것이 유행되었다고 한다. 사람이 위기에 처했을 때, 딱 맞는 집사의 임기응변은 얼마나 멋있는가!!
오늘은 먼지 바람이 심하게 불고 쌀쌀해서 몸이 움츠러드는 스산한 날이다. 시내에 나가니 먼지바람이 시가지를 온통 먼지투성이로 만들었다. 교통 신호등은 시내 중심 신화서점이 있는 사거리 한 곳에만 있었다. 자전거를 타고 가는 여성 남성 할 것 없이 모두 실눈들을 하고 있었고 머리카락들은 제멋대로 휘날리고 있었다. 어떤 여성들은 스카프로 얼굴을 가리고 타고 가고 있었다. 이런 먼지 속에 머리를 감고 모양을 내는 것은 헛된 일이었다. 가는 모래 먼지가 내 얼굴을 때리기도 하였는데 따가움을 느낄 정도였다. 이곳은 3월부터 5월 늦게까지 시베리아 계절풍이 불어와서 매년 이렇게 시달린다고 한다. 저녁에는 더운물이 나오는 날이라고 목욕을 하라고 했다. 여기는 일 년 내내 매주 화요일에 더운물이 저녁 7시부터 9시 30분까지 나오기 때문에 목욕하는 날이라고 한다. 더운물은 불그스레한 녹물이 되어 나오고 있었다. 연길은 물은 좋은데 수도관 시설이 워낙 낡아서 언제나 녹물이 섞여 나와 그대로 마시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식수는 시청 물차가 아침저녁으로 다니면서 파는데 어떤 때는 이 집 아들이 제때 물을 사 오지 못한 날은 수돗물을 끓여서 먹어야 했다. 연길시의 중심은 국자가(局子街)와 광명가(光明街)를 가로지르는 인민로와 해방로이다. 연길에는 저녁만 되면 야(밤) 시장이 성황을 누리고 있는데, 야시장은 연길 우체국 뒷길에서 연길 시청 앞쪽으로 길게 서고 있었다. 해가 지는 저녁이면 우체국 뒤쪽은 온갖 음식을 파는 포장으로 된 간이음식점이 성황을 이루며, 시청 앞쪽은 가라오케 틀을 여기저기 갔다 놓고 몇 곡의 노래에 2원씩을 받고 있었다. 중국 노래 한국 노래가 여기저기서 섞여 나오고 있었다. 조선 사람의 가라오케 노래는 대부분 한국의 흘러간 노래가 많았고, 젊은이들의 노래도 대부분 지난 것들인데 배우느라고 애들을 쓰고 있었다. 여러 가지 게임들 그리고 약 장사 등은 우리나라 시골 장터를 연상케 했다. 구경하고 들어오는데 아파트 계단에 전기 불이 없어서 캄캄하여 더듬거리며 올라가야 했다. 왜 등이 없느냐고 물었더니 전구를 끼우면 중국 사람들이 훔쳐 가므로 아예 끼우지 않는다고 한다.
연길은 개방 뒤 무역 개방 자유 도시가 되면서 활기를 띠고 있었다. 한국 사업가들이 와서 투자함으로써 경제적인 성장도 가져왔고 도시도 갑자기 개발되기 시작했다. 한국을 다녀온 사람들이 이제는 제법 많아서 한국식 생활이 유행되고 있는데, 그중에 두드러진 것은 아파트를 한국식으로 알루미늄 창틀을 써서 창문들과 내부를 개조하는 일들이 한창이었다. 연변 방송국 아나운서들이 한국 KBS에 가서 서울 말씨 연수를 받고 와서 방송 언어가 한중 국교 전에 쓰던 평양 말씨가 사라지고 서울 표준어를 쓰고 있었다. 또 젊은 여성들은 서울 말씨를 배우는 노력이 유행하고 있었다. 오늘 나는 시장에 가서 여기저기 다니다가 옥수수로 만든 국수를 파는 곳이 있어서 국수 한 그릇을 청했다. 국수를 말던 아주머니가 나를 보고 한국 분이지요 하고 묻기에, 나는 일부러 아임메, 내래 자강도서 왔습네다, 고 대답하고, 국수를 먹는데 아주머니가 또 묻는다. 에이 선생님 거짓 말으마오 한국 분이 틀림없소, 라고 한다. 하도 신기해서 아니 아주마이 내래 니북서 왔다고 하지 않았음매 어째 그럼메, 하고 물었더니, 아주머니가 웃는다. 그래서 나는 아주머니 내가 한국 사람이라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고 물었더니 얼굴을 보면 안 단다, 한국 사람들은 얼굴에 기름기가 있고 북에서 온 사람들은 바싹 마르고 여위어서 기름기도 없고 색깔이 다르단다. 이런 말은 내가 여기서 처음 들어보는 말이었다.
룡정(龍井) 시
룡정은 조선 사람들의 피땀으로 개척 되어진 곳으로 조선 민족의 애환이 많이 서려 있는 곳이다. 1819~1870년 사이에 조선에서 연변에 들어온 조선인들은 먹을 것이 없어서 아내나 자식을 만족 지주들에게 넘겨주고 좁쌀 몇 됫박 혹은 몇 말씩을 얻어서 겨우 연명해 갔으며, 어떤 가난한 농민은 자식을 팔아서 이듬해 농사지을 씨앗을 마련하기도 했다는 마음 아픈 역사 기록들이 남아 있다. 이렇게 하여 조선 사람들은 몇 해 안 가서 해란 강 남쪽의 골짜기를 차지하고 오두막을 지어 살면서 산비탈의 나무를 베여 내고 밭을 일구어 농사를 지었다. 1883년 함경도 회령서 들어온 장인석, 박윤언 두 농민이 처음으로 륙도구에 들어왔다가 해란 강 양쪽이 비록 가시덤불로 덮이었으나 벌이 넓고 토지가 비옥한 것을 보자 개척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밭을 일구다가 옛 우물 자리를 발견하였다. 물맛이 좋아서 그 우물을 치고 우물 벽을 수리하였다. 그들은 우물 옆에 초가 3칸을 지어 놓고 살았다. 날이 가면서 여섯 호가되는 조그마한 마을이 되면서 이곳은 조선에서 오는 사람들이 쉬고 가는 쉼터가 되었다. 이웃에 사는 한족 농민 홍 서방은 길손들이 물을 편하게 퍼올리도록 우물에 ‘용두레’를 만들어 걸어 놓았다. 이때로부터 오가는 길손들은 이곳을 ‘용두레 촌’이라고 부르다가 훗날 룡정(龍井)이란 이름이 되었다.


▶용두레( a scoop bucket)-고인 물을 다른 곳으로 퍼 옮기는 데 쓰는 조선의 농기구. 통나무를 배 모양으로 길쭉하게 파거나 소나무 판자로 만든 몸통을 만들고 그 가운데에 양쪽으로 작은 구멍을 뚫어 가는 나무를 끼워 끈을 매어 만든다 시계추와 같이 중력을 이용하여 물을 밀어 올렸다가 손잡이를 위로 세워 물을 다른 곳으로 옮긴다.



시내 가운데 있는 용정 우물은 관광명소로 관광객은 물론 조선 사람들의 축제마당으로 사용하고 있다.마침 회갑을 맞이한 가정에서 이곳에 와서 Video 촬영을 하면서 즐거워하고 있었다. 아기들의 한복이 조선 옷이면서도 디자인이 약간 중국적인 것을 닮아서 이중 문화의 복합성을 느낄 수가 있었다. 조선족들은 전통문화를 잘 간직하고 있고, 아기 첫돌, 결혼 그리고 환갑은 아주 성대하게 지낸다고 한다.
오늘은 용정시를 돌아보려고 가는데 바람이 세차게 불고 날씨가 쌀쌀하여서 내복 생각이 났다. 연실서 용정 가는 버스는 몹시 낡은 차였다. 연길과 용정 사이에는 517m 높이의 모아 산이 경계를 이루며, 모아 산을 돌아 넘으면 왼쪽으로는 골짜기에 펼쳐지는 서전 평야에 가득한 논들이 한눈에 들어오고, 오른쪽 산 중턱으로는 사과배 밭이 12Km 이상이나 뻗어 있어서 온 산이 사과배 나무로 덮어져 있었다. 한국식으로 지은 기와와 함석집들과 초라한 초가집들이 섞여 있는데 대체적으로 안정된 농가 같이 보였다. 용정시 인구는 31만이 넘으며 그중에 조선족은 65.8%를 차지하고 있고, 사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 지형으로써 농업 경제가 상당히 발전하였다. 개방 뒤 조선 민족의 인구 가운데 한국으로 나가는 바람에 인구가 급격히 줄어들게 되었다. 룡정에는 침략제국주자들인 왜국의 지배 때에 있던 조선 민족학교인 [대성중학교]의 건물이 남아 있어서 지금은 민족 역사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대성중학교와 민족박물관은 연변 조선족 역사의 다루는 장에서 자세히 다룬다.



사과 배(苹果梨)의 유래
이 지방은 중국에서 유일한 ‘사과배’ 생산지로서 우리 동포들의 연변 정착 역사와도 관계가 있다. 사과 배에 얽힌 사연도 재미있어서 소개해 본다. 어떤 함경도 농부가 연변으로 오면서 사과를 심어 재배하려고 사과 씨를 가져와 심었는데, 돌 사과가 되어 버려 그냥 버려두었는데, 최창호씨란 분이 이 돌사과를 이용하여 세계 단 하나 뿐인 사과배를 생산해 냈다. 최창호는 1909년에 함경도에서 조부를 따라 중국 료녕성 안도현 내두산에 이주했으며 1916년에 연길현 로투구진 소기촌에 정착했다. 그때 일본에 유학 중인 동생 최범두가 ‘일본에서도 조선의 배나무가지를 당지 과일나무와 접목해 성공한 사례가 있으니 형님도 한번 해보라’고 제안했다. 1921년 동생인 최범두는 조선 북청에서 우수한 품종의 참배나무가지를 6대 가져왔는데 최창호가 그 것을 김치움에 보관해두었다가 이듬해 4월에 꺼내여 집 뜨락의 돌배나무에 접붙임을 했다. 그중 살아남은 것은 세그루를 최창호는 알뜰히 보살펴 1927년에 처음으로 나무에 흰꽃을 피웠다. 달린 과일은 모양이 배 같기도 사과 같기도 했으며 새콤달콤하고 과즙이 풍부하고 맛 좋은 사과배라는 새 품종이 생겨났다. 1997녀 1월 연길시 로투거우 진(老托镇) 정부의 초청으로 갔을 때 사과배의 원산지인 연길시 북쪽에 있는 로투구진 소기 촌에 거기에 가보니 는 사과 배 원조 세 그루가 기념물로 보호되고 있는데 1987년 한 그루는 죽고 두 그루만 남아 있다.


◈ 이 사과배 조상 나무들은 1997년 1월에 로투거우 전(老托镇) 정부 초청으로 갔을 때 찍은 것임
사과 배는 생김이 큰 것은 큰 사과나 배만 하고 누런 배 색깔에 불그스레한 사과 빛을 띠고 있는데 껍질은 배 쪽을 닮았다. 달콤한 맛과 신맛이 조화를 이루어 새콤달콤한 맛에 물이 많아서 맛이 아주 좋다. 여행할 때 몇 개만 가지면 다른 음료수가 필요하지 않다. 연변 지방에서 생산되는 사과 배는 품질이 좋아서 중국 여러 도시에 비싼 값에 팔려 나가므로 농가 수입에 큰 보탬이 되고 있다.

용정 백화점에 들어가 약품을 파는 여점원과 대화를 나누다가 가지고 간 휴대용 성경 한 권을 주면서 예수님을 믿으라고 권했더니, 감사합니다, 하고 받는다. 어느 사거리에 조선족 교회당이 있기에 들어갔더니 마침 장로님이 계셔서 이곳의 역사를 대강 듣게 되었다. 일본 침략자의 시대에는 6개의 교회가 있었는데 문화 혁명 때 다 부서지고 이 교회당만 남았는데 문화 혁명 때 폐쇄되었다가 1979년에 다시 문을 열었다고 한다. 서울 모 교회에서 재정 지원을 하여 준다고 하여 건축 허가 신청을 했는데 번화가란 이유로 건축 허가가 안 나오고 있다고 하면서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그러나 2년 뒤 다른 장소에 예배당을 짓게 되었다. 버스 대기실에서는 60년대 가요곡을 틀어 놓고 카세트 장사를 하는 중년 여자분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예수님을 믿고 살도록 권하면서 성경 한 권을 건네주니 고맙다고 반가워하면서 받는다. 오늘은 혼자서 용정을 돌아보는 값진 하루였다.
김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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