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선교 18년을 정리하면서,
네 차례 단기 선교 여행
♣격세지감(隔世之感)
1994년 중국 Vision Trip은 선교를 위한 답사 여행이었다. 그때 중국의 모습과 지금의 중국을 비교해 보면 격세지감을 느낄 정도로 빠르게 변화 발전되었다. 중국은 2008년 세계 올림픽을 기점으로 모든 면에서 한 단계 Up-Grade 되었다. 시민들도 많이 교양되어서 공중도덕이나 사회질서가 놀랄만한 수준이 되었다. 지금도 시골 등지는 아직 옛 모습 그대로이지만 생활의 여러 분야에서 변화되었다. 우리가 1994년부터 중국 선교를 시작하여 2011년 마감하기까지 쓴 글들을 정리하는 나 자신도 중국이 이렇게 빠르게 변화 발전하여 다른 나라가 되어가고 있는 모습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다. 지난날의 보고 느낀 많은 부분이 이제는 옛이야기 같은 것이지만, 나에게는 그때의 그 현실이 추억이어서 그대로 남겨 두려고 한다. 열차를 예를 들면, 목단강에서 하얼빈까지 약 360km 정도인데 과거에는 급행이 6시간 반이나 걸렸는데, 이제 중국은 고속전철화되어서 한 시간 반 남짓 걸리는 세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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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선교 여행을 떠나면서, 5.11 , 1994
▶ 오늘은 내 인생에 있어서 역사적인 날이다.
▶ 중국 선교의 꿈을 이루기 위하여 첫 걸음을 내 딛는 날이다.
이 기록은 1994~1996년에 이르기까지 4차에 걸친 나의 중국 선교 여행기이다. 모든 내용은 지금과는 어울리지 않지만, 그때는 그랬다.
왜 중국을 선교지로 택했을까.
지금 중국은 새 바람이 불고 있다. 새 바람은 지난 10여 년 동안 모든 분야에 있어서 극적인 변화를 일으키고 있는데, 이 바람은 중국 사회의 개방과 경제 개혁을 가져 왔으며, 나아가서는 정치의 변화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고, 서방의 요구에 따른 인권 차원에서 종교의 자유도 어느 정도 허용되면서 외부에서 중국 선교의 문을 조심스럽게 두드리고 있었다. 이젠 아무도 이 바람의 방향을 바꾸지 못할 것이다. 나의 중국 선교에 대한 동기는 나의 동심의 세계와 신앙의 초기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1962년 내 나이 스물한 살이 되던 때 나는 죄와 죽은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에(로6:23; 계21:8) 관하여 심각한 가운데 있다가, 예수님께서 나를 구원하시려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을 깨닫고 예수님을 내 개인의 구주로 영접하였다.
“내게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요한복음 5:24
구원받은 뒤 나는 내 인생이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가에 대하여 깊이 생각한 때가 있었다. 나는 약 삼 년 정도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동안 사도행전에서 위대한 사도 바울의 생애에서 깊은 감동을 받았다. “….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사도행전 1:8)”는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환난과 역경을 무릅쓰고 끝없이 나아가기만 하는 그분의 생애를 통해서 내 인생의 장래를 결정하게 되었다. 내게 이제 꿈과 새로운 희망이 생겼다. 그것은 복음을 전하는 것이 나의 사명이요 삶의 목적이다. 주님은 나에게 복음 전하는 자가 되도록 길을 열어주셔서 24살 때부터 복음을 전하면서 교회를 개척하기 시작했다. 교회를 개척하는 동안 언젠가 주님께서 길을 열어주신다면 내가 태어났고 다섯 살까지 살았던 동북 삼성(만주)의 흑룡강성 목단강, 내 고향에 가서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바람이 생겨났는데, 이 바람이 일생 동안 사라지지 않고 구체화 되면서 중국 선교의 꿈(Vision)이 되었다.
나의 부모님은 일본 침략자들이 우리나라를 무자비하게 짓밟고 있던 1930년대에 살길을 찾아서 만주로 떠나게 된다. 길림성 연길현 동불사 세린하라는 곳에서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고, 나는 그곳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핏덩이든 나는 다시 흑룡강성 목단강으로 가서 살게 된다. 우리 아버지는 일본 관동군 사령부 의부 부대 양성소에서 치과 부분의 교육을 받고 수년간 군 의무대에서 일하시다가 나와서 개인 치과 치료소를 열었다. 치과의사가 없던 그 시절 꽤 인기가 있었고 수입도 좋아서 우리는 유복하게 살았다. 다섯 살 위인 형님은 일본소학교에 다녔고, 내 나이 만 다섯 살이 되던 해 8월에 잔악한 일본이 패망하고 조국은 해방을 맞이하게 되었다. 고국으로 돌아가는 대열 속에 끼어 우리 가족은 조국이 마주 보이는 도문에서 내 나이 일곱 살을 넘기게 된다. 이것이 내가 만주에서 살았던 전부이다. 나의 어린 시절은 왜군이 만주를 짓밟고 있던 때였다. 조선족, 한족, 만주족, 그리고 일본, 등 민족 간에 긴장이 있었던 곳이었으며, 연보라색 타래붓꽃들이 아름답게 피던 그 들녘에서 나의 동심의 세계가 이루어졌다. 나의 중국 선교에 대한 동기의 한 부분은 그 동심의 세계에서 살면서 복음을 전하려는데 있다 하겠다.
캐나다는 소련 공산주의가 무너지기 전인 1970년에 벌써 중국과 정식외교 관계를 맺었으나 왕래는 그리 활발하지 않았다. 중국과 원활한 왕래는 한국이 중국이 국교를 맺음으로 시작되었다. 1990년 소련 공산주의가 무너지면서 1992년 8원 24일 양국이 상호 승인하고 대사급 외교 관계를 수립하기로 합의함으로 한국과 중국이 정치적인 이념을 뒤로 한 채 국교를 맺게 되었다. 이때부터 중국 선교에 대한 나의 마음은 뜨거워지기 시작하였다. 내게 향하신 주님의 뜻을 알기 위하여, 1994년 믿음으로 중국 선교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그리고 중국 땅에서 주님의 부르심에 대해 깊은 확신을 하게 되었다.
황해를 건너면서,
1992년 한중 국교가 맺어지고 다음 해인 1993년에 한국에서 중국으로 가는 바닷길이 열리게 된 것은 실로 반세기 만에 일어난 역사의 이변이었다. 1994년 5월 12일은 내게 향하신 주님의 뜻을 분별하고자 중국으로 가는 날이었다. 천진가는 배를 타는 인천 국제항은 몹시 복잡하고 무질서하여 아주 불편스러웠다. 중국으로 건너가는 사람들은 대부분 검은색 이민 가방들에 물건을 가득히 넣어 줄로 여러 번 꽁꽁 묶어서 보기에 살벌하게 보였다.
여행자 오까무라
가방을 부치고 건너편 식당에 가서 점심을 먹으려고 설렁탕을 시켜 놓고 있는데, 빨간 손수건을 삼각형으로 접어서 이마에 질끈 동여맨 키가 큰 청년이 들어와 앉을 자리를 찾다가 내 앞에 와서 앉았다. 그 청년은 일본 사람으로 무엇을 시켜야 할지를 몰라서 어물거리다가 무엇인가를 시킨 모양인데 나에게는 설렁탕이 나오고 그에게는 맥주 한 병이 배달되었다. 의아한 눈빛을 띠고 있기에, 내가 종업원을 불러서 설렁탕을 먹을 수 있도록 도와준 것이 인연이 되어 천진에서 헤어질 때까지 나의 사진사 노릇을 잘해 준 오까무라 라는 일본 청년이었다. 배를 타기 위하여 항만 버스를 타고 여객선으로 갔다. 나는 모처럼 가는 중국여행이어서 기념사진을 남겨 두고자 배 선체 전체를 볼 수 있는 곳으로 오까무라를 데리고 가서 사진을 찍었는데 경비원이 불러서 가보니까 그곳은 군사기지로서 사진을 찍지 못하는 통제 구역이라는 주의를 듣고 배에 올랐다. 인천항을 한 30분 늦게 떠난 여객선은 1시간쯤 지나서야 갑문을 빠져나왔다. 여객선은 점점이 떠 있는 섬들을 해치며 앞으로 나아가면서, 인천항은 멀어져 가고 있었다. 인천 천진 간을 운항하는 Tien Jin호는 일본서 폐선 직전의 낡은 배로서, 길이는 128.7m이며 승무원과 승객 697명을 태우고 18노트 속도로 752Km의 거리를 달리고 있었다.
이 배는 한중 합작으로 운영하는데 운영의 주도권이 중국 쪽에 유리하게 되어있어, 한국 쪽에서는 신경을 쓰지 않아 배의 시설이 낡고 환경이 아주 지저분하다고 한국인 사무장이 말했다. 배 안의 사람들은 황색 인종뿐인데 거기에는 중국인, 중국 화교, 몽골인, 일본인, 귀국하는 조선족, 여러 가지 목적으로 가는 한국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모든 사람의 생김새와 차림새를 보면 누가 누구인지를 알 것 같았다. 내가 들었던 선실은 2등 칸으로 넓은 방에 11명씩 쉴 수 있도록 만들어진 일본식 다다미 마루들이 11개 정도 있었다. 한 사람이 담요 두 장씩을 사용할 수 있는데 그 담요들은 한번 쓰고 빨지 않는 것이어서 아주 지저분하였다. 배가 떠나기도 전에 벌써 선실 여기저기에서는 끼리끼리 둘러앉아 화투 또는 카드놀이를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서로 억양이 다른 한국 사람들의 말씨는 선실 어디에 가도 쉽게 들을 수가 있었다. 스물여섯 시간 동안 여러 사람과 어울리면서 들은 사연들을 옮겨 본다.
후회막심한 아줌마
배제일 밑에 있는 3등 보통 객실에 내려갔다. 한 마루방에는 조선족 여성들 8명이 둘러앉아서 이야기들을 나누고 있었다. 함경도 말씨를 하는 40대의 아주머니가 열 받은 눈빛으로 하소연을 늘어놓는데 그의 첫마디는 “난 재수가 없어서 경찰한테 잡혀서 쫓겨났다”고 내뱉는다. 그리고는 한 6개월만 더 벌었더라면 계획한 데로 될 수 있었는데, 하고 말끝을 흐렸다. 사연인즉 내외가 친척 방문으로 왔다가 아주머니는 식당에 취직하였는데, 얼마 뒤 중국서 온 친구가 찾아와서 돈을 더 주는 데가 있으니까 옮기라는 말을 듣고 말없이 떠나 버렸다. 다른 곳에서 일하면서 보름 이상 일한 삯이 미련이 생겨서 어느 날 남편과 함께 찾아가서 사과하고 품값을 주기를 청하였다. 주인이 돈을 준비하는 동안 잠시 기다리라고 해서 기다리는 동안 경찰이 들이닥쳐서 이렇게 쫓겨나게 되었다고 몹시 억울해하는 표정이었다.
골동품 장사
내 방 옆에는 한 무리가 빙 둘러앉아 있는데, 입담이 좋은 한국 사람은 중국으로 골동품을 사러 가는 분인데 그 방면에는 전문가 같이 보였다. 그분의 골동품 감별법 그리고 도굴에 관한 이야기들은 지루한 여행자들을 즐겁게 해 주었는데, 나도 골동품에 대한 많은 상식을 얻게 되었다. 그분의 골동품 강의는 2시간이나 계속되었는데 자리를 뜨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본가(本家, 친정)에 가는 새댁
내 옆자리에는 심양이 집이고 이모 덕분에 한국으로 시집와서 두 아기를 낳고 행복하게 사는 부인이 3년 만에 친정 가는 길이라고 했다. 그 부인의 이야기로는 자기가 몇 명의 친구 조선족 여자들을 한국 청년들에게 소개해 주었는데 이혼하고 있어서 속이 상해 죽겠다고 하면서 중매한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추방당하는 부부
한국 사람 한 분이 마침 내가 라운지에서 커피를 한 잔 마시고 있는데 3층 109호 실에 추방당하는 조선족 부부가 있는데 밥도 못 먹고 있다고 알려 주면서 자기가 사발 라면을 몇 개 주었고, 어떤 한국 아주머니가 한국 돈 이만 원을 주었다고 하면서 도와주면 좋겠다고 했다. 내가 가보니 3층 109호실에는 강제 추방당하는 조선족 부부가 있었다. 나이는 56세인데 70이 지난 노인처럼 늙어 보였고, 부인도 50세인데 할머니처럼 보였다. 서울에 있는 외삼촌이 초청해 주어서 한 몇 년 벌어 가지고 올 계획으로 논 3,000원(元), 집 3,000원, 그리고 소는 2,000원에 팔아 살림을 다 정리하고 8,000원으로 한국에 가지고 갈 선물을 사고 두 사람 배표를 사고 나니까 남는 돈이 없었다고 했다. 돈을 벌리라는 생각만 가지고 난생처음 방문하게 되는 고국 땅을 설레는 마음으로 내렸는데 인천항 출입국 관리소로부터 강제 추방당하게 된 것이라 한다. 문제는 부인의 여권에서 생겼다. 부인은 자기 나이가 60이 되어야 방문이 되는 줄 알고 50인 자기 나이를 볼펜으로 60으로 고친 것이 발각되어 2박 3일간 선실에 갇혀 있다가 배가 인천항을 벗어나자 자유롭게 되었다고 한다. 남편은 통과가 되었지만, 부인을 그대로 두고 갈 수가 없어서 함께 남게 되었다고 한다. 나는 그분들에게 예수님을 믿고 살 것을 한참 동안 전했다. 그리고 그들의 고향인 연길서 혹 기회가 되면 만나기로 하고 동생 집의 전화번호를 받아서 나오면서 20불을 차비에 보태 쓰라고 주었다.
딱하고 서글픈 사연이 있는 반면에 그동안 한국에서 약초를 팔고 일을 해서 달러를 두둑이 가지고 금의환향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어떤 사람들은 강보에 싸여 떠난 지 50~60년 만에 고국에 왔다 가는 사람들, 친척을 방문으로 왔던 사람들, 사업차 가는 사람들, 만리장성과 백두산을 보러 가는 관광객들, 수많은 사람의 희로애락이 어우러지면서 바다 위에 떠가는 배는 한 작은 지구촌을 이루고 있었다. 서쪽 수평선 언저리에 붉은 노을이 깔리면서 동녘에서는 어두움이 몰려오고 있었다. 배가 깊은 밤을 향하여 달려가는 동안 소란하던 선실은 점점 조용해져 가고 있었다. 배가 중국해역에 들어오자 시계를 맞추라는 안내 방송이 나온다. 중국은 한국보다 1시간 늦게 가고 있었다. 북미에 비교하면 그 넓은 대륙에 6~8개의 시간대가 있어야 할 텐데 단 하나의 북경 시각으로 전 대륙이 통일하여 사용하는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11시가 되자 취침 시간이라는 방송이 나오면서 선실의 큰 전등은 모두 꺼지고 복도의 비상등만 남는다. 그렇게나 소란하던 선실은 고요함이 깃들이고 있었고 피로에 지친 영혼들은 꿈나라로 달려가는 숨결 소리만이 선실의 고요함을 깨고 있었다. 한날의 고뇌와 한들을 다 잊어버리고 밝아 오는 내일에는 새로운 희망을 품고 일어나는 영혼들이 되기를 바라면서 나도 잠을 청했다.
아직도 중국 땅이 보이지 않는 바다에서 날이 밝아 오고 있었다. 밝은 태양을 맞이하고자 갑판 위에 올라갔더니, 오까무라가 밝게 웃으면서 오하이요고자이맛스(good morning)하고 아침 인사를 한다. 그는 28살인 회사 직원으로 휴가 기간에 한국 동해안을 돌아 북경으로 해서 티벳까지 가는 길이라고 했다. 그의 수첩에는 그동안 한국에서 배운 간단한 말과 오징어 찌게, 된장국 등 간단한 음식 이름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영어를 아주 조금 알고 있었고 나는 일본어를 아주 조금 알고 있어서 최선을 다해 예수님을 소개해 주었다. 많은 사람이 갑판으로 나와서 맑은 바다 공기를 마시면서 몸들을 풀고 있었다. 어저께 무거운 짐들을 들고 배를 타는 일들로 지쳐 있던 얼굴들, 한을 뿜던 얼굴들이 한밤을 통해 모든 것을 잊은 듯 밝고 환한 얼굴에 맑은 웃음들을 머금고 있어서 내 마음이 한결 기뻤다. 아침 식사는 천진에서 가라오케 공장을 설립한 박 사장과 함께 된장국으로 했다. 하룻밤 사이기는 해도 그동안 우리는 서로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내가 천진에서 나를 마중 나오는 방송국 기자를 만난다고 하니까 자기 사업 광고를 위하여 만나고 싶으니까 소개해 달라고 하였다. 그리고 천진서 자고 내일 연길로 간다고 했더니, 잠자기는 마찬가지니까 내가 북경 가는 길이니까 같이 가서 북경서 쉬고 구경도 하고 가는 것이 경제적이고 효과적이라고 권해서 그렇게 하기로 했다. 원래 이번 여행에서는 북경을 방문할 계획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무리 없이 북경을 방문하게 되었다. 길을 가다가 좋은 친구를 만난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었다. 점심시간에는 소고기로 된 중국 음식을 주문했는데 기름이 너무 많아 느끼해서 잘 먹지 못하고 있는데 연길 사는 40대 중반 그리고 20대 후반의 여자분이 돼지고기 음식을 가지고 내 앞에 와서 앉는다. 말이 돼지고기지 실제로는 비계가 전부였다. 중국 사람들은 좋아하는 음식이지만, 그분들은 모르고 시킨 것이었다. 맛이 없어서 못 먹겠다고 끼적거리고 있었다. 나도 기름이 많아서 잘 먹지 못하고 있다고 말하고 먹어 보라고 하니까 맛을 보더니 스스럼없이 자기 음식 인양 먹는 것을 보며 격이 없이 둥그렇게 어울리는 이웃사촌의 기분을 느껴 볼 수 있었다.
천진항에서
저 멀리 천진항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26시간을 달려서 오후 4시에 도착하자 중국 이민국과 세관에서 올라와 배에서 비자를 신청한 사람들에게 비자를 내어주고 있는 2시간 동안 우리는 배에서 기다려야 했다. 손님들이 부친 화물들은 컨테이너 두 개에 넣어서 배에 싣고 왔는데, 기중기가 와서 컨테이너를 들어다가 항만 이민국 마당에 짐짝 같이 쏟아 놓았다. 어떤 짐은 터져서 물건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이제야 왜 가방들을 그렇게 꽁꽁 묶어야 하는지를 알게 되었다. 이민국을 통과한 사람들은 마당에 나가서 각자 자기 짐을 찾느라고 야단법석이었다. 어두워지기 시작하므로 나는 한참 헤매다가 겨우 짐을 찾을 수가 있었다. 밖에 나오니 마중 나온 사람들과 여관 택시 손님을 부르는 사람들로 정신이 없었다. 마침 나를 마중 나온 연변방송국 이 기자를 만나니 조심스럽기만 한 땅에서 임을 만난 듯이 기뻤다. 박 사장과 함께 택시를 450원에 대절해서 북경으로 달렸다. 천진과 북경을 잇는 고속도로는 잘 닦여져 있었다. 약 2시간 반을 달려서 밤 10시경에 중원의 대도 북경에 도착하였다. 박 사장이 전에 묶곤 했다는 Two Star 호텔에 들어갔다. 이기자는 내국인이라 하룻밤에 200원이고 나는 외국인이라 300원을 내야 했다. 그리고는 박 사장은 자기 오피스텔 가까이에 있는 조선 사람 식당으로 갔다. 식당 주인 양 씨는 목단강에서 살다가 왔다는데 조선말이 서툴렀고 부인은 중국 여자였다. 식당은 얼마나 지저분한지 밥맛이 떨어질 정도인데 박 사장은 줄 곳 이곳에서만 음식을 먹는다고 한다. 그 날 저녁의 푸짐한 음식은 노반(주인)이 돌아온 박 사장과 캐나다에서 고향 찾아온 나를 환영하고 이 기자를 위하여 낸다고 하여 대접을 잘 받았다. 지저분한 환경에 비해서 음식 맛은 괜찮았다.
김제화
jewhakim@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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