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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선교/중국선교답사여행

1. 북경(北京,베이징)

북경은 3천 년 역사의 고도이다. 북경이 최초로 수도로 등장한 것은 거란족이 세운 요(遼) 나라가 도읍을 정하면서 남경이라 이름했다. 1013년에 연경(燕京)으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1125년 요를 멸망시킨 금(金)이 중도(中都)로 바꾸었다. 1231년 금을 몰아낸 윈(元)은 대도(大都)라고 하다가, 원을 멸망시킨 명(明)은 1421년 대도를 명나라 서울로 정하면서 오늘의 이름인 북경(北京)이라 했다. 인구는 천백만이 넘으며, 날씨를 제외하고는  유명한 볼거리로 가득 한 도시 박물관이다. 북경에서 보낸 시간은 2박 3일이었다. 짧은 시간을 알차게 보내고자 곤한 잠에 떨어져 있는 이 기자를 깨워서 호텔 식당에 내려갔다. 아침은 Scramble Egg, 조그만 토막의 햄 4조각, 찐빵(만토우) 4개, 그리고 쌀죽이었다. 흰 쌀죽은 생각보다 맛이 괜찮았다. 두 사람의 식대는 12원이었다. 식사 후에 팁을 놓으려고 하니까 여기는 팁을 주지 않는다고 했다. 7시 40분경 거리에 나오니 출근하는 자전거 행렬이 줄을 잇고 있었다. 만리장성을 다녀오기 위하여 반디라고 부르는 7인승 노란색의 택시를 300원에 하루 쓰기로 했다. 환율은 $1=8¥)이었다.

 

명(明) 13 릉

장성 가는 길에 우리는 13 릉에 들렸다. 북경에서 서북쪽으로 50Km 지점인 昌平区 天寿山麓 산자락에 있다. 명나라 열세 분의 황제와 23명의 황후 외에 함께 묻힌 비빈과 궁녀들과  어려서 죽은 황자 공주 등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는 대규모 황릉 묘 군이다.  

 

나는 이 지하 궁전에서 중국의 호화로운 궁중 문화를 볼 수 있었다. 특히 중국 비단의 아름답고 우아한 색상과 섬세한 무늬들은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13 릉은 명나라 3번째 황제 7년(1409)부터 마지막 승정황제 17년(1633)까지 230여 년에 걸쳐 막대한 인력과 물자가 동원되어 건조된 13개의 무덤으로 총면적은 40㎢이다. 그 가운데 발굴되어 일반에게 공개되는 정릉은 신종 13년에서 18년까지(1585-1590) 6년에 걸쳐 완공된 것이다. 13 릉 가운데 3번째로 크며 호화스러운 지하 궁전의 정교한 건축과 출토품들을 볼 수 있다. 사진을 못 찍게 해서 아름다운 비단과 공예품들을 담을 수가 없었다. 이 공사에는 은 800만 냥이 소모되었고, 연인원 6,500만 명, 그리고 하루 3만 명의 노동력이 동원되었다. 이것을 쌀로 환산하면 100만 명이 6년 반 동안 먹을 수 있는 양이라고 하며 당시 가구당 5~6명의 노동력을 바친 셈이라고 한다. 당시 국가 재정 수입이 4백만 량에 지나지 않았다고 하니 백성들의 고생이 어떠했는지 상상할 만했다. 제왕들이 죽어서 묻힐 자기 집들을 짓다가 국운이 기울어졌으니 이 어찌 어리석다 아니하랴. 참고로 임진왜란 때 조선에 원군을 파병한 방탕한 황제  만력제도 여기에 묻혀있다. 

 

만리장성(萬里長城)

중국 사람들은 그냥 장성이라고 부른다. 장성의 실제 길이는 6,350Km(12,700리)이다. 동쪽으로는 하북성(河北省)의 산하이관(山海關)에서 서쪽 간쑤 성(甘肅省)의 지위관(嘉浴關)에 이르기까지 북경, 천진 2개 시 허베이, 산서, 섬서, 감숙, 등 그리고 영하 회족자치구 등 모두 7개 성과 시 자치구를 통과하고 있다. 장성은 주전 5세기경부터 조나라, 연 나라 등이 외적을 막기 위해 만든 성벽이었다. 최초로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이 변방 민족의 침입에 대비해 증축 연결한 것이다. 그 후 역대 왕조들도 계속 장성을 보완하였으며, 특히 명나라가 몽골족의 재침입을 막기 위하여 증축 개축에 힘썼는데, 현재의 성은 대부분 명나라 때 완성된 것이다.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에 하나요, 달에서 보이는 유인한 인조물이라고 한다.

 

장성으로 가는 길은 험한 계곡 사이로 잘 닦아져 있었다. 산굽이를 돌고 돌아가는 산들은 나무와 풀이 제대로 자랄 수 없는 돌산들이었다. 드문드문 서식하는 측백나무들이 겨우 벌거벗은 산의 흉한 모습을 가려 주고 있었다. 좁은 개울이 흐르는 계곡에는 아카시아, 감나무들이 많았다. 아카시아 꽃향기가 차창으로 불어오고 있어서 초여름의 싱그러운 훈기를 느끼게 하여 주었다. 우리는 산을 오르고 올라서 드디어 관광 코스를 위하여 특별히 개발한 팔달령(八達嶺)에 도착했다. 이곳은 사통팔달의 교통의 요지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팔달령은 북경에서 서북쪽으로 75Km 지점에 있다. 장성은 팔달령 성문의 오른쪽 왼쪽으로 뻗어 있는데 왼쪽은 4K 이상 멀리 뻗어 있고, 오른쪽은 경사가 완만하고 망루까지 2Km 정도 이다. 우리는 짧은 코스인 서쪽 성벽으로 올랐다. 팔달령 부근 성벽의 높이는 7.8m 폭은 6.5m이며 산 능선으로 오르는 성벽의 높이는 5.8m였다. 돌 하나하나가 그 크기가 같으며 빈틈이 없이 쌓아진 성벽은 하나의 위대한 예술품이었다. 산 정상에는 망루가 있었고 동과 서로 뻗은 능선을 따라 구불구불 연이어지면서 끝도 없이 뻗어 가는 장성을 보면서 그 옛날 아직 기계 문명이 발달하지 않은 그때 이와 같은 엄청난 일을 할 수 있었다는 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망루에 올라서니 하늘은 가깝고 천하가 한눈에 들어온다.

 

중국에는 “不倒長成非好漢(부도장성비호한)” 즉 "만리장성에 올라 보지 않은 사람은 사나이가 아니다"라는 말이 있듯이 중국 사람들이 평생에 한 번은 가보고 싶어 하는 곳이다. 장성을 쌓느라고 죽어 간 사람의 수는 엄청난데, 일하다가 죽으면 그 자리에 묻어 버리고 쌓아진 장성은 또한 무덤이라고 한다. 진시황 한 사람의 정권 유지와 일신의 영화를 위해서 이런 엄청난 인명의 희생이 있었다는 것은 역사의 악이라고 느꼈다. 영생하기를 원했던 진시왕도 성의 완공을 보지 못하고 한번 죽는 것은 정하신 것이라는(히9:27) 말씀대로 100세 수도 못 한 체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야만 했고, 그의 제국도 14년 만에 장성과는 무관하게 멸망하고 말았으니 인생의 행사가 다 헛된 것뿐이었다. 5월 중순의 뜨거운 햇살이 이마에 땀을 흐르게 하였으나 장성을 넘어오는 북풍의 시원함이 상쾌하기만 했다. 장성 위로 넘나드는 흰 구름도 잠시 쉬어 가는 듯했다. 

 

천안문 광장(天安门广场, Tiananmen Square)

오후 3시경 지하철을 타고 천안문 광장으로 갔다. 천안문 광장은 북경의 중심이자 중화 인민 공화국의 상징이다. 남북으로 880m 동서로 500m이고 면적은 44㎢로서 세계에서 가장 넓은 광장이라고 자랑하는 곳으로, 백만 명 이상이 한 번에 모일 수 있다. 광장 북쪽으로 천안문이 자리 잡고 있고 남쪽에는 전문, 동쪽에는 중국 역사박물관과 중국 혁명 박물관, 서쪽에는 인민대회당이 있고, 광장 가운데는 인민 영웅 기념비가 있고, 남쪽으로는 모택동의 미라가 안치된 모택동 주석 기념 당이 자리 잡고 있다.

 

천안문 광장은 역사를 통해 굵직굵직한 사건이 벌어졌던 곳이기도 하다. 1919년 5.4 운동이 시작된 곳이며, 문화혁명이 전개되고 있던 1966년 백만 명이 넘는 홍위병이 운집했던 곳이다. 1976년에는 사인방(四人幇)과 주은래 양편의 지지 세력 사이에 충돌이 있었던 현장이다. 아직도 기억에 생생한 1989년 6월 민주화 운동으로 희생된 젊은 대학생들의 피로 붉게 물든 곳이기도 했다. 자유를 사랑하는 수많은 젊은 청년들의 함성이 중국을 흔들고 있던 그날 탱크를 앞세운 중공군의 무차별 진압은 수천 명의 자유의 순교자들을 내었다. 이 숭고한 순교자들의 피는 어느 날 꼭 꽃을 피우게 될 것이다. 문화혁명이 끝나고 개방과 함께 모택동 주석의 사치하고 호화로운 사생활이 드러나자 헐벗고 굶주린 일단의 백성들이 모 주석의 미라 전시관을 때려 부수려는 난동도 일어났었다.

 

천안문

천안문은 1417년에 세워졌고 높이는 34m이다. 다섯 개의 문이 있고, 문 앞에는 물도랑이 있고 그 위에 대리석으로 된 5개의 다리가 놓여 있다. 가운데 문은 옛날에는 황제만이 사용할 수 있었으며, 황제가 조서를 반포하던 자리였다. 그 웅장함은 청나라 제국의 위엄을 보여 주는 듯했다. 그 옛날 제국의 황제를 만나기 위해서는 천안문을 지나 일곱 대문을 지나서야 황제의 보좌가 있는 자금성 문턱에 이르게 되었다니 그 권세의 위엄이 대단했으리라 짐작되었다. 천안문은 자금성의 관문으로 황제의 집무실과 거처로 중원의 중심이며, 권위의 상징이었다.

 

 

천안문은 1949년 10월 1일 모택동이 중화 인민 공화국의 수립을 선포한 곳이며, 국경일에는 중국의 지도자들이 행사 참관을 위해 국민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곳이기도 하다. 천안문에는 모 주석의 초상화가 걸려 있는데 모 생전에는 이곳에 오면 누구든지 초상화를 향해 절을 했다고 한다. 내가 잠깐 지켜보았지만, 절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볼 수 없었다. 이제는 모 주석이 상징적인 인물로 인민들의 마음에 남아 있는 듯했다.

 

퇴근길에는 자동차와 자전거가 질서 있게 그리고 서로 무리 없이 어울려 잘 들 가고 있었다. 엄청나게 많은 자전거는 내가 네덜란드에서 본 것만큼이나 많았다. 자전거는 중국 사람들에게는 유일한 교통수단이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자전거를 즐겨 타고 있었다. 환경문제나 에너지 문제를 생각하면 자전거 이용이 편하고 좋은 것 같았다. 젊은 처녀들, 아주머니들이 자전거로 아기도 싣고 다니고 짐도 나르고 볼일을 보러 다니는 것을 보면서, 한국에서는 시골에서 여성들이 짐을 머리에 이고 등에 지고 먼 길로 다녔는데, 그때 왜 부녀자들이 자전거나 손수레를 사용할 생각을 못하고 그렇게 고생을 하고 살았는지 안쓰러운 마음이다. 6시경에 호텔에 돌아와 샤워하려고 하는데 물이 나오지 않는다. 호텔 방의 설명서를 자세히 읽어보니까 오후 7시에 더운물이 나온다고 하였다. TV를 켜 보니까 홍콩의 저질적인 무술 영화와 미국 영화들이 나오고 있었다. 저녁은 배에서 만난 박 사장과 양 씨 조선 사람 식당으로 갔는데 오늘은 이 기자가 저녁을 샀다. 잉어 요리를 했는데 몸체에 붙은 살을 베어 세워서 마치 비스킷 같이 만들어 왔다. 그 맛이 생선보다는 과자를 먹는 것 같은 맛이었다. 요리와 채소 접시들이 3층이나 쌓여지도록 먹으면서 밥이 언제 나오나 하고 기다리면서 어지간히 다 먹었는데 이제야 된장찌개와 밥이 나오는데 나는 먹을 수가 없었다. 중국 식탁 문화는 먼저 요리와 채소를 술이나 음료수와 더불어 먹을 만큼 먹고 난 뒤에 마무리로 식사(밥, 국수, 만두)가 나온다.  중국의 식탁 문화는 손님을 위해서는 무조건 많이 시키고 차리는데 이렇게 하는 것이 손님을 대접하는데 체면이 서는 것이라고 한다. (그 뒤에 내가 손님으로 초대받아 중국 사람들과 중국 요릿집을 가보면 손님들이 떠난 상에는 엄청난 음식들이 남아나고 있었다) 허영과 체면은 중국 경제의 엄청난 손실이라고 한다.

 

다음 날 아침 북경을 떠나기 전에 백화점을 한번 가보기 위하여 택시를 타고 가까이에 있는 Lufthansa Center에 갔다. 아침 출근 시간이라 자전거 행렬과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는 듯했다. 독일 Lufthansa 항공 회사에서 지은 빌딩으로 그 안에 우의상점(友誼商店) 백화점이 있어서 둘러보았다. 중국의 고급 상품들과 외제 물건들이 많았고 가격은 북미와 같은 수준이었다. 백화점을 둘러보던 이 기자는 우리 같은 노동계급 시민들은 올 수 없는 곳이라고 한마디로 잘라 말했다. 이 백화점을 이용할 수 있는 사람은 당 고위 계층이나 돈 많은 계층 사람들만이 이용할 수 있는 곳이라고 느꼈다.

 

煎饼 果子(전병과자)

그 센터 입구에는 “전병 과자”를 구워 파는 손수레가 있는데 출근길에 하나씩 사서 아침을 대신하고 있었다. 그 전병은 물에 풀은 밀가루를 한 국자 퍼서 철판에 붓고 엷게 둥글게 펴서 굽는다. 그리고 뒤집어서 그 위에 달걀 한 개를 깨어 으깨서 어느 정도 익으면 빨간 매운 소스를 붓으로 바르고 그 위에 잘게 썬 파를 뿌린 뒤 네모로 된 넓적한 과자 같은 것을 놓고 4번 접어서 종이에 싸 주는데 값은 2원 50전이었다. 마치 우리가 출근길에 커피 한잔에 도넛이나 머핀 한 개로 아침을 대신하는 것과 같았다. 맛이 그런대로 괜찮은데 조선 사람들은 길거리에서 중국 사람들이 만들어 파는 음식들은 별로 잘 사 먹지 않는다고 이 형제가 말한다. 그 이유는 주로 두 가지인데 입맛에 맞지 않으며, 더럽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무엇인가 좀 사 먹어 보려면 맛없다고 말리는 때가 많았다. 그래서 주로 나 혼자 있을 때 사 먹어 보곤 했다. 

김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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