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올 때 북경을 찾아볼 생각은 한 적은 없다. 그런데 이렇게 길을 가다가 좋은 친구를 만나서 중원의 대도를 돌아보게 되었다. 북경에 있는 교회에 대한 아무 정보도 가지고 있지 못해서 교회를 방문하거나 믿는 자들을 만나 보지 못하고 떠나는 것이 아쉽기만 했다. 북경에서 연변으로 가는 열차는 북경 남역에서 떠나고 있었다. 역에 도착하니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석탄이 한쪽에 쌓여 있어서 길바닥과 역 마당 그리고 대기실 안에도 석탄 먼지가 일고 있었다. 대기실 의자에는 이미 누워 자는 사람들과 보따리와 가방을 가진 사람들이 수도 없이 많았다. 주로 남방에서 일자리를 찾아 올라온 사람들로 오갈 데가 없어서 역 대기실을 임시 거처로 삼고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중국은 정말 인구가 많은 나라이다. 여기는 표를 한곳에서 파는 것이 아니라 목적지에 따라 표 파는 장소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고 또 나가는 곳도 다 달랐다. 연길행 개찰구에서 줄을 서서 기다리는 데 이 기자가 잠시 어딘가를 갔다가 오더니 저쪽에 빨리 나가는 곳이 있다고 하여 그리로 가보니 급행료 1원씩을 내고 개찰 전에 먼저 나가는 곳이 있었다. (10여 년 뒤 북경 역사가 새로 지어져서 현대화되었다.)
중국 대합실 문화
중국 여행을 하다 보면 그 많은 대열 속에 휩싸여서 서서 무거운 가방을 들고 시달리며 기다리다가 나가는 것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니다. 그래서 대개 큰 역에는 VIP Room이 있어서 5원(지금 10원 정도) 정도를 내면 편하게 쉬다가 일반 개찰보다도 한 10분 전에 개찰을 시켜 주는 곳이 있다. 소파와 TV 그리고 어떤 곳에서는 침대도 있는데 물론 돈을 조금만 더 내면 잠도 잘 수 있고 시간이 되면 깨워 준다. 돈 버는 방법도 여러 가지였다. 급행료 덕분에 홀가분하게 나와서 지정된 차에 올랐다. 우리 침대 번호를 찾아가서 자리를 잡자 여자 승무원이 와서 우리 표를 가져가고 대신 파란 표를 주었다. 표를 보관해 두었다가 목적지가 가까워 지면 표를 다시 바꾸어 준다고 한다. 연길 가는 열차의 종작 지는 도문이었다. 우리가 탄 침대차는 경화(硬铺)라고 부르는 딱딱한 자리인 3층 일반 침대차로 서로 마주 보며 여섯 사람이 탈 수 있었다. 나는 1층이고 이기자는 3층이었다. 북경에서 연길까지 28시간 걸린다는 말에 피곤해 짐을 느꼈다. 우리 칸은 천진 당고에서 사람을 싣는 칸이어서 약 2시간 반 정도 텅 빈 차에서 조용하게 여행을 할 수가 있었다. 당고 역에 닿으니 사람들이 구름 떼 같이 정신없이 오르고 있었고 삽시간에 선반에는 짐들로 꽉 차고 열차 안은 시끄러워지면서 공기가 탁해지기 시작하였다. 인천에서 같이 배를 타고 오던 낯익은 얼굴들이 보였다. 어떤 아저씨는 처음 연길로 가는 길인데 표를 구하지 못하여 이틀이나 여관에서 머물다가 186원인 표를 600원이나 주고 샀다고 머리를 흔들고 있었다. 중국의 장거리 침대표 같은 것은 역에 나가서는 살 수가 없다. 이틀 전에 가도 다 팔렸다고 한다. 그러나 큰 호텔이나, 암표상한테 가면 표는 항상 있기 마련이다. (그때는 그랬다. 역에는 언제나 표는 없다. 표는 뒤로 다 빼돌려서 역원이나 암표상에게 사야 하는 시절이었다.)
어린이 기차 표준 요금
중국의 어린이 기차 요금 기준이 재미있어서 소개해 본다. 우리는 어린이 요금은 나이를 기준으로 하여 6살까지는 무임승차 12세까지는 반액을 내도록 정해 놓고 있다. 그러나 중국은 나이 기준으로 하지 않고 키 기준으로 한다. 키가 1m 10cm 이하인 어린이 한 명에 한해서 무임승차할 수 있다. 1.10m~40cm 어린이는 반액이며, 어린이라도 1.40m가 넘으면 어른 표를 사야 한다. 나는 이 열차를 타고 가는 동안 중국 사람들의 문화 즉 생활 속에 젖어 있는 여러 가지 습관들을 경험하게 되었다.
3등 일반 칸
마주 보는 침대칸 사이 창문 쪽으로는 조그만 탁자가 붙어서 음식물을 놓을 수 있게 했고 그 밑에는 더운물을 넣은 보온병이 있는데 더운물은 승무원이 수시로 채워서 도착할 때까지 떨어지지 않았다. 열차에는 더운물을 끓이는 보일러가 있어서 차와 컵라면 같은 것을 먹기에 편리했다. 그리고 복도 창문 쪽에도 작은 탁자가 붙어 있고 양쪽에 의자가 있어서 쉬기 편했다. 사람들이 자기 침대에 자리를 잡은 후에는 크고 작은 뚜껑이 달린 병들을 꺼내서 차를 넣고 물을 담아 열차가 도착할 때까지 마시며 가고 있었다. 중국 속담에 “밥은 사흘 굶어도 차는 못 굶는다”라는 말이 있듯이 중국인들의 차 문화를 실감할 수 있었다. 우리도 차를 마시고 싶었지만, 미리 준비해 간 컵이나 병이 없어서 주스 깡통을 잘라서 차를 만들어 마시니 그 맛도 괜찮았다. 지루해서 몇 칸을 지나서 가보니 그곳은 루완푸(软铺)라고 해서 자리가 푹신하고 마주 보는 이층 침대차로 네 사람이 탈 수 있었다, 문도 있고 3층 침대차보다는 고급스럽고 분위기가 달랐다. 값은 배나 비쌌다.
담배 가래침 문화
우리가 서양을 코 푸는 문화라고 한다면 중국은 가래침 뱉는 문화라고 할 수 있다. 중국 사람들의 공중 문화는 제로라고 생각해도 좋을 듯싶다. 중국 사람들은 남의 불편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다. 음식을 먹는 곳이든 어떤 곳이든 상관하지 않고 가래침을 뱉어 댄다. 이 층 삼 층 침대에서 아래 복도로 가래를 내려 뱉는 데는 미칠 지경이다. 가래침을 너무 자주 그리고 아무 데나 뱉어서 대단히 불결하게 보였다. 그리고 중국 사람들이 어떤 민족보다도 담배 많이 피우기로 세계에 소문나 있듯이 정말 담배를 많이 피운다. 실내 공기가 어떻든 옆에 사람이 좋아하지 않든 상관하지 않는다. 중국 사람들의 하품하는 모습을 보면 손으로 입을 가리는 사람은 거의 보기 어렵다. 입천장과 목구멍이 드러나기까지 시원하게 하품을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른다. 열차 안은 이제 호흡하기가 곤란할 만큼 담배들을 끊임없이 피워 대고 있었다. 나는 더워서 창문들을 시원하게 열어 놓았으면 좋겠는데 이 사람들은 아직도 털실로 된 내복을 입고 있으면서도 더운 내색을 하지 않고 있었다. 내가 화장실을 가려면 가래침을 피하여 다녀야 할 형편이라는 것을 독자들이 얼마나 이해해 줄지 모르겠다. 열차 안에는 금연이라는 경고문이 붙어 있지만, 승무원도 열차 공안원도 아무도 말리지 않는다. 담배 연기 속에서의 28시간의 여행은 고통스러웠다.
첫 번째 문화 충격
천진 당고 역을 떠나서 다음 역에 도착했을 때 4개월 정도 된 아기를 가진 부부가 탔다. 부인은 내 침대 위의 2층이고 남편은 건너편 3층이었다. 중국은 부부라고 해서 편리한 자리를 살 수 없다. 한 사람이 누우면 겨우 알맞은 자리에 아기를 가진 부인을 위해 내가 자리를 바꾸어 주겠다고 양보를 하고 이 층으로 올라갔다. 남편 되는 사람이 고맙다고 미국 럭키 양 담배(짝퉁) 한 갑을 주려고 해서 안 받으니까 이 기자에게 주었다. 얼마를 가다가 아래층을 내려다보는데, 아기를 가진 새댁이 책상다리깐하고 앉아서 아이의 바지를 벗기고 침대와 침대 사이의 좁은 복도에다가 피피(쉬)를 시키고 그리고 푸푸(대변)도 함께 시키고 있었다. 냄새가 진동하는데, 그 밑에는 신문지를 깐 것도 아니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너무 놀라서, 이 기자를 불러서 이 여자 남편을 부르라고 했다. 남편이 서둘러 신문지로 싸서 버리고는 마포를 가지고 들어와서 닦았다. 나는 너무 어이가 없어서 중국 여자들은 이렇게 하느냐고 물었더니, 전에는 이런 정도는 보통이라고 한다. 조선 여자들도 이렇게 하느냐고 물었더니 그렇지 않다고 하였다. 이것이 내가 중국에서 받은 첫 번째 문화 충격이었다.
쉬지 않고 달리는 기차 안에서 이런저런 불편한 환경들에 에워싸여 가면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내가 중국에서 선교하려면 이 사람들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저 사람들의 문화까지도 사랑할 수 있어야 할 텐데 과연 그렇게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깊이 하게 되었다. 열차 복도를 아기 화장실로 무분별하게 사용하는 저 문화도 거부감 없이 받아 드리는 너그러움이 있어야 저들을 능히 섬길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연길 가는 열차 안 풍경은 무료함을 달래려고 사람들이 패를 이루어 카드놀이 하는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줄 곳 피워 대는 담배 연기와 술들을 마시고 떠들어대는 소리는 나를 몹시 짜증스럽게 만들어 주어서 불평을 하고 싶어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내가 짜증을 낸다고 들어줄 사람도 없고 불평을 한다고 될 일도 없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기도했다. “주님 제가 이 환경에 잘 적응할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해 주십시오. 그리고 저 사람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면서 한동안 깊은 묵상을 하다가 눈을 뜨니 짜증스럽게 보이던 이웃들이 조금 좋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 마음도 평안해지고 있었다.
차창으로 스치는 중국은 아름다운 전원의 나라였다. 넓은 들에는 농부들이 두 필의 말들을 앞세워 밭을 가는 모습은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이다. 중국 사람들은 대체로 진 감색과 검은 색깔 계통의 옷들을 많이 입고 있었다. 마을의 집들도 온통 붉은 벽돌 일색이어서 그런지 중국에 대한 나의 첫인상을 색깔로 표현하면 밝고 환한 색이 아니라 좀 어둡고 침침한 색깔이었다. 열차가 길림을 향하여 들판을 가로질러 북으로 달리고 있는 동안 서쪽 지평선 너머로 해는 지고 있었다. 다음날 낯 12시에 열차는 길림에 도착하였다. 많은 사람이 내리고 그만큼 많은 사람이 탔다. 여기서부터 11량을 끌고 온 디젤 기관차는 석탄 기관차로 바꾸었다. 증기 기관차는 거꾸로 열차를 끌고 험한 산악 지대로 가고 있었다. 길림서 탄 일단의 철도국 사람들이 술에 취해 난장판을 벌여서 연길 오는 5시간 정도는 고통스러웠다. 1층에 새로 탄 부부는 한 침대에서 같이 앉아 가는데 그들은 그 부부 사이에 끼어 앉아서 마치 자기 침대에 앉은 듯 무례하기가 짝이 없었다. 연길 전방 3시간 전 내가 잠시 자리를 비운 동안에 그 무리 가운데 하나가 올라가 누워 잠을 자고 있어서 그냥 내버려 두었다. 연변에 들어오면서 고산준령을 돌고 돌아 오르고 내리고 있었다. 푸릇푸릇 나뭇가지에 새싹들이 나오는 것을 보니 계절이 캐나다와 같았다. 열차는 이제 높은 곳에서 계곡으로 내려오니 넓은 들에 논들이 보이며, 조선식 집들로 이루어진 마을들이 보이는 것을 보니 연변 조선족 주에 들어온 것을 알게 되었다. 소를 몰아 논갈이하는 조선 사람들을 보니 친근감이 느껴졌다. 오후 5시 30분 스물여덟 시간을 달려온 기차는 드디어 연길에 도착하였다. 이 기자의 부인이 홈 안까지 들어와서 짐을 받아 주었다. 이 기자가 전기 담요를 부탁하여 이래저래 짐이 좀 있는데 조사를 받게 되면 시끄럽다고 한다. 이 기자 가정이 이사 온 지 1주일 밖에 안 되었다는 아파트에서 연길에서의 첫날밤을 보내게 되었다. 저녁상에는 이웃에 사는 이 형제의 장인이 함께했다. 개방 전에 부산에 있는 친척 초청으로 한국을 다녀온 소감을 나에게 말하는데, 남조선은 완전히 미국 식민지가 되어있더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처음 만났고 아직 이곳 분위기를 잘 모르므로 가볍게 받아넘겼다.
김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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