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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선교/중국 여행

왜군의 둥닝(동영) 요새(东宁要塞)

일본 관동군 마지막 격전지 동녕요새(东宁要塞 dongning yaosai)

흑룡강성 목단강에서 동쪽으로 가다가 양수진을 만난다. 계속 동쪽으로 가면 소련으로 가는 관문인 수분하에 이른다. 중국 소련간 국제열차가 하얼빈에서 수분하를 거쳐서 소련 우수리스크로 다니고 있다. 1995년 연해주에 단기선교를 마치고 우수리스크에 머물다가 국제열차로 수분하로 들어 온 곳이다. 양수진에서 동남으로 내려오면 소련 국경선 동녕현삼차구진에 이른다. 국경 지역인 동녕현에 일본 관동군의 마지막 격전지였던 동녕요새가 지금은 관광지로 개방되어있다.

 

 

1930년대 초만주를 점령한 일본은 어용 만주국을 세운 뒤 소련의 침략을 예상하고 일본은 1934 5 12일 관동군에 만주와 소련 국경선에 전략적 군사 요새와 비행장 등을 건설하였다. 흑룡강(아무르강)을 따라 우수리강을 거쳐 길림성 훈춘(琿春)에 이르는 5000의 국경선에 14곳의 동굴 요새를 만들었다. 같은 해 6월에 동녕요새를 만들기 시작해서 10개의 요새 가운데 대표적인 쉰산요새(勛山要塞), 동녕요새는 1937년 말에 완공됐다. 동녕 요새는 삼차구 중소 국경선에서 중국 땅으로 2~5 안쪽에 있으며 해발고도 230~500m의 산악에 지하 땅굴 요새를 만들었다. 동굴 높이 1.8m,  1.5m로 사방으로 연결되어있다. 경사로에는 포탄과 물자를 운반하기 위해 레일이 설치되어 있고, 요새는 3층으로 만들어졌으며 깊은 곳은 80m까지 파 내려갔다. 지면으로 바로 올라갈 수 있는 수직 통로가 만들어져 은폐와 공격을 신속하게 하기 위한 구조로 설계됐다.

 

땅굴에는 지휘소, 의료소, 무선실, 사병 숙소, 창고, 탄약고, 전기실, 화력발사지점, 방독 가스 방지 이중 격리문 등 전투를 위한 용도에 따른 공간배치와 설비가 갖춰져 있었다. 이 요새는 아시아 최대로 꼽힌다. 내부에는 거대한 철근콘크리트 땅굴이 미궁(迷宮)처럼 서로 열결돼 있다. 땅굴은 300 구경의 박격포 공격에도 끄떡없을 정도로 견고하게 지어졌다. 쉰산 요새는 가장 완전하게 남아 있는 곳이다. 총면적이 5로 통로길이만 1163m이다. 지휘소 등 크고 작은 콘크리트 공간만 21곳이며 가장 큰 곳은 300이다.

 

 

1945 8 15일 일본 국왕이 세계를 향해 항복선언을 했으나, 이곳 요새는 통신 두절로 왜군은 패망 소식을 모른 채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이 전투에서 소련군의 1500여 명을 포함하여 8219명이 숨지고 2만여 명이 부상하는 등 엄청난 피해를 내면서 830일 개전한 지 22일 만에 전쟁은 끝났다. 소련이 승리한 뒤 동굴 요새는 대부분 폭파해 지금은 쉰산(勛山)의 동녕요새가 온전히 남아서 유적지로 복구돼 일반인들에게 개방되고 있는데 하루에 일천여 명이 찾고 있다고 한다.

 

 

우리가 방문하여 들어가 보니 트럭 하나가 드나들 만큼의 넓은 동굴이며 양옆으로 병력과 무기 식량 등을 보관할 수 있도록 뚫려 있었다.

 

왜군 병력

그때 동녕 주위의 인구는 고작 35000명 정도인데, 동녕요새를 중심으로 수십 킬로 주위에 왜군은 최대 13만여 명에 주둔하였으니 왜군의 천지가 되었다.

 

노동자들의 희생

동굴 요새를 건설하는 노동자는 약 17만명으로 포로들(중국, 조선, 소련) 이며, 강제로 잡아오거나 속여서 데려온 노동자들이었다. 왜군은 노동자 돈을 벌고 싶으면 빨리 오라 는 거짓 모집 광고지로 속여서 데려오거나, 강제로 잡아 왔다. 일단 요새에 들어오면 살아나간다는 보장은 없었다. 지하 요새는 저들이 패망할 때까지 건설하였다. 죽음의 채찍 위협 아래에서 하루 20여시간 동안 생지옥 같은 살인적인 노동에 시달렸다.

 

만인갱(萬人坑)

왜군들이 주둔하던 만주에는 석탄광산 그리고 요새 공사에 동원 되었던 노동자들을 집단으로 죽여서 묻은 만인갱이 여러 곳에 있다. 노동자들이 반항하거나 병들면 죽여서 늑대 굴에 던져져 맹수들의 먹잇감이 되게했다. 노동자들은 병이 나서 일을 못하면 살아있는 채로 흙구덩이에 던져넣어졌다. 이곳을 만인갱이라 부르는 데 추운 바람속에 까마귀밥이 되어 죽어갔다. 생존자들에 따르면 날마다 병든 노동자들을 소달구지에 싣고 와서 이곳에 버렸다고 한다. 발굴된 유해중에는 두 다리가 없는 경우가 많다. 이는 도망가다가 잡혀올 경우 왜군 헌병들이 노동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일본 칼로 다리를 잘라 구덩이에 던져 넣은 것이라고 한다.

 

 

노동자들은 바람만 겨우 막을 수 있는 간이 토담집에서 도토리가루 등 곰팡내 나는 양식을 먹으면서 연명했다. 노동자들은 영하 30~40도가 되는 겨울의 혹한을 붙잡혀올 때 입은 옷 한벌로 견뎌냈는데 닳고 헤져서 기운 옷을 겨우 걸치고 있을 뿐이었다. 노동자들은 2~3년이면 혹독한 노동에 지치고 추위와 굶주림으로 죽어 나갔다고 한다. 소련군과 전투가 시작되자 밤에 일본군은 3천여 명의 중국 노동자들을 구덩이에 몰아넣고 생매장을 했다. 그중 30여 명이 간신히 도망쳐 나와 비참했던 그때의 사정을 알렸다. 강제노역에 시달린 17만 명의 노동자 가운데 살아난 사람은 1천명에 불과하다고 전해진다. 발굴된 유골의 치아로 볼 때 모두 젊은 사람들이었다. 강제징용을 할 때 모두 30살이하만 징용대상이 되었다. 저주받은 백성, 왜놈들이 살다간 자리에는 하소연 한번 해 보지 못하고 원통하게 죽어간 영혼들의 울부짖음만이 들리는 듯하다.

 

종군 위안소

왜군 13만명이 있는 그곳에는 종군위안소가 여기저기 40곳이나 있었다고 한다. 위안소에는 일천여 명의 위안부들이 하루에 20-30명을 상대하고 있었다고 한다. 일본 위안부도 있었고, 조선과 중국 여성들은 취직시켜 준다는 감언이설에 속아서 끌려와 엄한 감시 속에 매 맞고 굶주림과 고통에 시달리는 생지옥에서 살아야만 했다.

 

위안부 박옥선 할머니

2000 5월 중국 현지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박옥선 할머니(94)가 처음 피해 사실을 왕중런(王宗仁) 동녕 요새박물관 연구원과의 대담에서 밝혔다. 1941 17세의 나이로 고향 밀양에서 중국 방직공장에서 돈을 벌 수 있다는 말에 속아서 이곳에 오게 되었다고 한다. 1945년까지 4년동안 일본 이름 아키코로 살았다. 노래를 잘해서 군사훈련 기간이나 명절 때면 위문공연을 다녔다. 정기적으로 신체검사를 받으면서 장교들에게 치욕을 당했다. 1946 6월 동녕현 정부는 대부분 조선인 여성이 포함된 위안부 2000명에게 중국국적을 부여하여 신분 회복을 시켰다. 박 할머니는 2001년 영구 귀국해 광주 나눔의 집에서 여생을 보냈다.

 

김제화

jewhakim@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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