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해 개발구 7.18-22 1997
중국 남쪽 장쑤 성 상해시 상해 개발구에서 땅을 무상으로 주겠다고 양로원을 해 주기를 바란다는 소식을 목단강 시 정부에서 일하고 있는 리화 자매 편에 전해왔다. 우리는 상해도 가볼 겸 길을 떠났다. 하얼빈에서 상해 가는 밤 침대차에 올랐다. 열차는 32시간이나 간다고 하여서 아직 떠나지도 않았는데 지루함이 몰려오고 있었다. 날은 무덥고 사람은 많고 답답한 데 차가 떠나자 에어컨이 나와서 침대에 누우니 피곤함이 사라지고 있었다. 밤새 달려서 새벽이 오자 날씨가 선선해졌는데도 에어컨은 그대로 나오고 있어 추워서 껐으면 좋겠는데 끄는 데가 없다. 승무원에게 요구하니 스위치가 하나밖에 없어서 전체를 꺼야 하기 때문에 부분적으로는 안 된단다. 모두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찬바람을 피하고 있었다. 열차는 밤새 달려서 아침 6시 상해에 닿았다. 냉방이 있는 열차에서 내리니 날씨가 얼마나 더운지 숨이 꽉 막힌다. 밖에 나오니 여자들이 상해 지도를 사라고 하는데 말씨가 벌써 많이 다르다. 사(史) 선생이란 분이 우리를 맞이하여 주어서 반가웠다. 호텔을 찾아다니느라 여기저기 다녀서 피곤했다. 그때만 해도 아직 외국 사람에게는 두 배의 요금을 물리든 때라 괜찮은 곳을 찾느라 힘들었는데 안 되어서 사 선생과 리화 이름으로 방 두 개를 얻었다. (몇 년 뒤에 이런 제도는 없어졌다) 사 선생은 내일은 우시(无锡) 전(읍) 정부 초청이 있어서 거기를 먼저 가야 한다고 해서 그러자고 했다. 이 사 선생은 원래 상해 사람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에 문화혁명이 일어나자 중국의 지식인들이 농촌으로 투쟁 학습에 내 쫓길 때 목단강으로 보내져서 젊은 청춘이 농촌에서 10년 동안 투쟁하는 동안 결혼하여 살면서 본적도 목단강이 되어 버렸다. 마침 개방이 되어서 고향 상해에서 미국 화교의 사업체에서 일하는데 아직 상해 호적을 가지지 못해서 고민 중이라고 한다. 내가 하얼빈서부터 소화계통에 좀 이상이 있어서, 이른 아침 혼자서 약을 사러 한 가게에 들려 소화제를 달라고 하자, 50대가 넘은 가게 주인은 여성이 내 만다린 표준어를 전혀 알아듣지 못한다. 나는 내 발음이 틀리는가 하여서 몇 번이고 되풀이해도 안 통한다. 그러자 아주머니는 큰 소리로 안을 향하여 소리치니 젊은 여성이 나와서 약을 살 수가 있었다. 한 나라인데 이렇게 말이 안 통하니 다른 세상이다.
상해시 씽훠(星火) 개발구 7.22
씽훠 개발구는 상해에서 50Km 남쪽 바닷가에 자리 잡고 있었다. 개발구 부 경리의 영접을 받았다. 한 없이 넓은 신개발 지역에는 이미 수십 개나 되는 외국 업체들이 들어와 자리를 잡고 있었다.
개발구 부경리(부사장)는 나에게 토비(산적, 마적 떼)들이 사는 흑룡강 성을 떠나서 상해에 와서 사업을 하라고 반 농담 삼아 권한다. 개발구에서는 나에게 양로원을 지어서 운영해 달라고 청했다. 자기들이 신 도시 계획을 하면서 사회복지 시설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에게 개발구 안에서 어디든지 원하는 곳을 택하면 국가고시 가격 중 가장 낮은 가격인 주택지 값으로 살 수 있도록 우대해 주겠다고 제안했다. 사실 땅 값은 목단강시 보다도 싸고 환경은 훨씬 더 좋았다. 이곳에서 자리를 잡고 한족들만을 위한 선교사역을 생각도 해 보았다. 그러나 자금은 유치원 짓는 것과 별 차이는 없지만 자금이 일시에 동원되어야 한다는 점에 있어서 자신을 가지지 못한 가운데 가능한 후보지로 마음에 남겨 두었다. 상해는 서울과 별 다를 것이 없을 만큼 발전되어 있는 현대 도시이다. 시민들의 공중도덕과 공공질서 의식도 대단히 높은 편이다. 예를 들면 시내버스 타는 곳에는 줄을 서서 기다리는 질서를 보여주고 있었고, 가래침 뱉는 사람 쓰레기를 버리는 사람들을 보기가 그리 쉽지 않았다. 저 북방 사람들과는 근본이 달랐다.
황포 공원(黃浦公園)
황포 강이 도시 가운데로 가로질러 황해로 흘러가는 그곳에 황포 공원이 있다. 상해 관광의 하이라이트는 황포강의 유람이라고 한다. 36℃의 무더운 상해는 외국과 전국에서 모여드는 관광객들로 공원은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강 옆으로 중산로가 남쪽으로 길게 뻗혀 있다. (이 길이 지금은 차가 없는 걷는 길로 만들어져 있다) 이 지역은 그 옛날 영국의 조차지로서 유서 깊은 서양 석조 건물이 줄줄이 늘어서 있다. 우리는 서늘한 북방에서 온 사람들이라 갑자기 무더운 더위를 만나니 늘어져서 견딜 수가 없었다. 한 나무 그늘에 겨우 자리를 잡고 얼음과자를 먹는데, 내 맞은편에 서 있는 열다섯 살쯤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가 뜨거운 차가 든 병을 그물망에 담아서 들고 서 있는데 덥다고 얼음과자를 먹는 나를 더 덥게 만들었다. 중국 사람들은 아무리 더워도 더운물을 먹는 습관이 되어 있다. 그러나 현대 젊은 세대는 습관이 많이 바뀌고 있는데 이 어린아이가 노인 행세를 해서 나를 덥게 하고 있었다. 하얼빈으로 돌아오는 열차 표는 삼일 후에나 살 수 있다고 한다. 나는 생각다 못해 날틀로 하얼빈으로 돌아오고자 주머니를 다 뒤지니 모자란다. 목단강에서는 Credit Card를 쓰려면 정해진 중국은행에 가야만 해서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건물 안에 있는 은행에 가서 VISA 카드를 내 밀고 2000원이 필요하다고 하니까 이게 웬일인가! 카드를 기계에 넣고는 군소리 없이 돈을 내주지 않는가! 북방과는 사는 내용이 근본 달랐다. 다행하게 오후 4:30에 있는 날틀 표를 살 수 있었다. 날틀을 처음 타보는 미화는 한 없이 신기해하면서 간식으로 준 음식 상자를 집에 가져가려고 보관해서 내 것도 주었다.
김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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