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서 맞이하는 두 번째 새해 1998
설날(元旦) 1.1 1998
중국에 와서 아직 정착의 실마리를 풀지 못한 채 두 번째 새해를 맞이하고 있었다. 이 해에는 주님께서 예비해 놓으신 곳으로 인도하시리라 믿는 마음이다. 아직 정착은 안 되었지만, 이제는 사역을 구체적으로 준비를 해야 할 것 같다. 선교 초기부터 지금까지 몇 년의 경험으로는 이제 조선족을 위한 사역은 그만 생각하고 중화 대륙의 주인인 한족들을 위한 사역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절실해졌다.
중국 사람들은 양력설을 원단(元旦, yuwendan)이라고 부른다. 설날의 아침이라는 뜻으로 한 해의 첫날이요, 시작을 뜻한다. 사범학교 선생인 손정옥 자매의 여동생이 신년 첫날을 우리와 함께 보내고 싶다고 초청하였다. 여동생의 남편은 조선족 고등학교 화학 선생님으로 은퇴하시고 집에서 개인 교습을 하고 있었다. 손 자매는 사범학교 교사요 남편은 중학교 교장 선생이셨다. 점심 식탁은 푸짐하게 차려서 즐거운 교제의 시간이 되었다. 음식을 다한 뒤에 시간을 내어서 사회주의에 깊이 교육된 두 선생님 부부에게 그리스도 구속의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되어서 기뻤다. 원래 목단강에는 우수한 조선족 지도자들이 많이 있었다고 한다. 예를 들면 검찰청장 서안구 공안국장 등, 여러 분야에서 활동을 했는데 문화혁명이 지나면서 모두 늙고 은퇴하고 소수민족들이 얻어맞으면서 빛을 읽게 되었다고 한다. 북경에서 직장생활을 하는 딸이 다니러 왔는데 중국 친구와 결혼을 하게 된다고 소개한다. 우리 민족의 딸들이 이렇게 한족 화 되어가고 있어서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선생님들과 이야기를 나누어 보니까. 자기들도 조선 아이들과 결혼하기를 바라는데 똑똑한 아이들이 없단다. 우리는 오후 내내 이야기를 나누면서 시간을 보내다가 저녁에 물만두(饺子)를 만들어 먹고 나서야 하루를 마쳤다. 꼭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특별한 날에 아침에 초청하면 해가 맞도록 함께하다가 저녁을 먹고서야 헤어지는 것이 중국식이라고 한다. 아주 피곤한 하루였다. 그러나 부인들은 우리 모임에 나오니까 좋은 데 남편들과는 자주 만나지 못하는 데 비하면 오늘은 복되고 좋은 날이다. 우리는 이렇게 새해 첫날을 복음 전하는 일로 시작하였다.
I. M. F. 위기
한국은 지금 I. M. F. 위기를 맞이하여 국가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소식이 우리 마음을 무겁게 하고 있었다. 대통령 김영삼 정부의 경제 실책으로 I. M. F.라는 경제위기를 겪고 있었다. 전 국민은 나라 살리기 운동으로 개인이 가지고 있는 금을 내놓기 시작하였다. 내놓는 각종 금붙이 가운데는 운동 메달, 훈장, 돌 반지, 육순의 결혼반지 등은 눈시울을 뜨겁게 했다. 이런 한국의 전 국민적인 금 헌납 운동에 대해 중국 저장성 대학교의 한 교수는 중국 신문 칼럼에서 "중국이 만일 저런 지경이라면 금을 내놓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라고 한국 사람들의 나라 사랑하는 마음을 높이 사는 글을 보았다.
무사히 통과된 성경 1.19
잠시 한국에 나갔다가 다시 중국으로 들어오는 길에 큰 이민 가방에는 작은 신구약 성경 60권과 주석 책들이 들어있었다. 하얼빈 공항 X-Ray 검사대에서 걸렸다. 큰 가방을 검사해 보라고 나를 검사대에 보냈는데 검사관은 큰 가방은 관심이 없고 내 손가방만 열어보고 보내 주었다. 주님께서 이렇게 성경을 무사히 통과시켜 주셨다. 중국공항 당국은 종교 서적 가운데는 개인이 쓰는 한 두 권의 종교 서적(성경 등) 외에는 모두 빼앗고 있어서 책을 가져올 때마다 조마조마한 마음이다.
정월 대보름
중국 사람들은 정월 대보름을 원소절(元宵节, Lantern Festival )이라 부르는데, 이 날은 찹쌀로 둥글게 만든 떡에 여러 종류의 고물을 넣어서 삶아서 먹는다. 불꽃놀이도 하고 액땜을 한다고 눈 위에 구르기도 한다.
고성진 학습 2.9-14
이번 학습은 춘절(음력설) 보름 기간에 고성 진 처소에서 모였다. 춘절기간은 단속이 좀 소홀하고 모두 축제 분위기에 젖어 있는 기간이라 학습하기가 편하다고 하여서 가진 학습이다. 연변에서 네 명의 사역자가 올라오고 10여 명이 모인 조선족 학습이다. 종일 학습을 하고 저녁에는 기분전환 겸 중국 사람들이 보름이면 얼음 위에서 구른다는 문(滚, 구른다)을 보러 강변으로 갔지만 좀 늦어서 볼 수는 없었다. 여기저기 타이어에 불을 붙여 불놀이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 시내 사진관에 차린 빙덩(冰灯, 얼음 축제)을 보면서 시골 형제들이 즐거워했다. 처음 동역자 처소에서 학습하면서 허물없는 교제를 나누며 지내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 감사한 일이었다. 무사히 4박 5일의 학습을 마칠 수 있어서 주님께 감사하였다. 학습 내내 음식 준비를 하여 준 강 자매와 고성 처소 몇몇 자매들의 수고를 잊을 수가 없다. 연변서 온 네 형제는 오늘은 내려가는 차가 없어서 우리 집에서 쉬면서 교제하였다. 석두 최광현 형제에게 5000원 정도 경운기 사도록 후원하기로 약속했다. 세 형제에게는 겨울 잠바를 하나씩 주었다. 최 형제가 아직 양복이란 것은 입어 본 적이 없다고 해서 내가 입고 있는 밤색 양복을 주었다.
저녁(2.17)에 미국 Atlanta에 있는 한인 침례교회 여전도회 회장의 전화가 왔다. 서울 은평교회에서 함께하던 김형숙 자매의 제안으로 올해부터 매달 $50을 후원하겠다는 반가운 소식이다. 알게 모르게 후원하시는 주님의 손길을 느끼며 감사하게 되었다.
열린 편지
우리는 아직 편지 받을 주소가 확실하지 않아서 미화 자매 직장 주소를 사용하고 있었다. 저녁에 미화가 직장으로 온 나의 캐나다 편지를 가지고 왔는데 뜯어진 채였다. 미화에게 왜 편지가 뜯어져 있느냐고 묻자, 올 때 이미 뜯어져 있었고 우표도 떼어져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중국은 자기들 편지도 가끔 검열하는데 그래도 검열을 하고는 붙여서 보내는데 이렇게 열린 채 올 때도 있다고 한다.
이사하는 날 3.12-15
이 아파트에서 산 지 일 년. 일 년 살기로 한 집이어서 이사하는 날이다. 한국 갔다 온 조선분이 사서 꾸며 놓은 西二条路에 있는 아파트를 얻었다. 마침 학습을 하려고 한 날이어서 모여든 형제들의 도움으로 이사를 쉽게 하였다. 이사한 새 아파트에서 대강 정리하여 놓고 학습을 시작하였다. 이번에는 성찬 예배의 중요성을 공부하고 성만찬 예배 실습을 하였다. 손 선생의 가정 성경공부, 손 선생은 한족 사범학교 교사로 하얼빈 대학에서 사회주의 이론을 전공한 골수 사회주의자였다. 이 손 선생이 우리를 만나 성경을 배우면서 예수님을 자기의 구주로 받아들였다. 오늘은 다음 주일 침례를 받기 위하여 그의 구원받은 간증을 듣게 되었다. 사회주의에 심취되었던 그가 이제 사회주의가 얼마나 모순되었는지를 비판하면서 거듭난 기쁨의 간증은 우리 모두에게 큰 은혜가 되었다. 이제 사회주의를 버리고 성경을 품에 안은 하나님의 딸이 되었으니 얼마나 놀라운 변화인가! 주님께서는 이곳에서도 여전히 일하시고 계시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동안 몇 번 우리 성경 모임에 참석한 백 자매란 여성과 교제하면서, 천국에 갈 수 있느냐고 물으니, 모른다고 하면서, 자기네 평안교회와 설교 말씀이 다르다고 느껴왔는데, 네 번째 온 오늘은 설교말씀이 자기 마음에 와닿는다고 하였다.
거류증 연기 3.24
오늘 나는 화교연합회 왕 주석과 미화 그리고 공안국 외사 처 후주임 팀과 함께 점심을 나누었다. 이 자리에서 왕 주석은 공안국 후 처장에게 환자 향에서 나에게 사기 친 일을 설명하면서 우리가 처한 형편을 설명하였다. 처장은 나에게 거류증을 연기해 드릴 테니 걱정하지 말고 목단강 지역에서 꼭 좋은 일을 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연변 왕청 하마탕에서 학습 4. 1-6
하마탕 향의 골짜기에는 다섯 곳의 처소가 있어서 흥미로웠다. 처음으로 골 안에 있는 다섯 곳의 처소 지도자들이 하마탕 태상범 형제 집에서 15명이 학습을 시작했다. 둘째 날 오전에는 분위기상 찬송은 부르지 못한 채 학습을 시작했다. 아직 허가를 받지 못해서 가끔 붙들러 가서 벌금을 내는 형편이어서 조심을 하고 있었다. 태 형제가 자기 집에서 모임을 시작하다가 한국에서 집을 하나 사주어서 수리하여서 예배당으로 쓰고 있었다. 오전 학습을 마치고 예배당으로 가서 자매들이 준비한 점심을 나누었다. 우리가 밖에서 잠시 쉬면서 교제하고 있는데, 한 형제가 달려오면서 우리 보고 숨으라고 한다. 마침 예배당 옆길로 파출소 소장이 오토바이를 타고 천천히 내려가서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 다시 올라오는 것을 본 태 형제가 좀 불안한지 우리 보고 먼저 집에 가서 쉬라고 하였다. 우리는 집안에서 쉬고 태 자매가 밖으로 문을 잠그고 갔다. 우리는 본의 아니게 갇혀 있게 된 것이다. 얼마 뒤, 태 형제 부부와 윤 형제가 왔다. 누가 꼬장질(일러바치는)을 했는지 기미가 심상치 않다고 학습을 그만두자고 하여서 외부에서 온 형제들을 보냈다. 태 형제 집은 창문들이 많은데 커튼이 없어서 밤에는 안에서는 밖이 안 보이고 밖에서는 안이 잘 보이니 평안치 못했다. 남은 형제들과 함께 저녁에 교제를 가졌다. 앞뒤로 좁은 골목 맞은편 집들에서 개들이 짖는 소리와 지나가는 사람들의 소리는 신경 쓰이게 하고 있었다. 말을 하다가 쉬고 또 쉬고 태형이 나가 보고 오기도 하는 불안한 환경이었다. 밤 9:40 분 경 분위기가 평안하지 않아서 학습을 그만 마쳤다. 그러나 이 밤을 그냥 보낼 수가 없어서 7명이 두 패로 나누어서 파출소 뒤편에 있는 모친 자매님 집에 모여 서 한 시간 학습하고 마쳤다. 안전하고 모두 마음이 평안한 마음으로 교제하다가 모친이 밤참으로 국수를 삶아서 주셔서 우리의 교제를 더 풍성하게 해 주셨다. 밤 1시경에 동리 뒤로 돌아서 집으로 왔다. 초조하고 불안함이 감돌았던 하루를 무사히 지낸 것을 감사했다. 우리는 오전 학습을 한 번 더 하고 마무리하였다.
이곳은 원래 삼자 교회가 있었다. 한국교회에서 건물을 사주어서 예배당을 가지고 예배를 드려왔는데 책임 집사가 원조금 얼마를 들어먹은 일이 드러나서 교회가 시끄러워지더니 문을 닫았고 그 뒤 예배당은 창고로 쓰다가 지금은 양조장이 되어 버렸으니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 뒤로 태 형제가 중심이 되어 모이고는 있는데 3년 전부터 동네 파출소에서 매년 한 번씩 년 중 행사같이 예배 시간에 와서 태 형제와 동역자들 손에 쇠고랑을 채워 데려가서 24시간 가두어 놓았다가 한 사람에게 200원씩 벌금을 내게 하고는 내놓기가 일쑤였다고 한다. 사실은 자기네들 술값을 벌기 위해서 이 짓들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핍박에도 불구하고 20여 명이 끈질기게 모이고 있으니 얼마나 아름다운가! 3년이 지나서 종교 국에서 허가를 해주어서 지금은 활발하게 모이고 있다. 도문 처소 침례식하마탕 학습을 마치고 윤 형제와 도문 처소에 오니 침례를 받기 원하는 부부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주일에 간증을 먼저 듣기로 했다. 주일 예배 뒤 오후에 강원율 형제, 태복순 자매, 김분옥 자매들의 구원받은 간증을 들었다. 강 형제 부부는 너무 기뻐서 눈물로 간증을 제대로 이어가지 못하였다. 김분옥은 조선말이 서툴러서 중국어 간증문을 읽고 형제가 번역하였다. 의심할 바 없이 주님은 저들을 변화시켜 주셨음을 알 수가 있었다. 동네 목욕탕의 독탕을 10원에 빌려서 침례식을 주님의 은혜 가운데 가졌다. 모두 돌아와서 성찬 예배를 드리면서 주님의 구속하신 은혜와 사랑을 기억하면서 감사했다.
남양이 건너다 보이는 언덕
오후에 열사 탑이 있는 언덕에 올라 내려다보이는 두만강 저 건너 남양을 보니 강둑에는 검은색 옷을 입은 많은 사람이 서성거리고 있었다. 모두 중국 친척들로부터 소식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한다. 남양 쪽에서 중국으로 나오는 중국 조선족에게 자기네 친척에게 보내는 쪽지 하나를 보내 놓고 막연하게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다. 북한의 동포들은 정말 피곤한 인생을 살고 있었다. 언제나 이런 삶이 끝나려는지. 딱하기만 하다.
목단강 처소(가정교회) 4.19 1998
이제 목단강 처소도 구원받은 형제자매들이 여럿이 되어서 만찬 예배를 드릴 준비를 하고자 오늘 주일에 “만찬 예배”가 무엇인지를 가르쳤다. 유치원 사범학교 리홍 학생의 장학금을 위하여 토론토 김대억 목사가 학생들이 모은 $ 600을 보내 주어서 그의 하반기 학자금이 해결되었다. 그리고 토론토 감리 교회에서 매달 $100을 후원한다는 반가운 은하의 연락이 왔다. 나는 이 교회를 잘 모르는데 우리가 개척할 때 한번 이 교회의 남선교회 주말 수양회에서 구원받은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 하는 문제를 다루었는데, 그때 변화와 감동한 분들이 있었다는데, 이분들이 우리 아들 사고 일로 마음이 동해서 인지 이렇게 중국 선교를 후원하도록 일을 만든 것 같다. 주님은 우리의 부족함을 여러 가지로 채워주시고 계셨다.
김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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