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선교/2000-2002

나눔의 집 학습

나눔의 집 학습  3.28-3.3 2000

나눔의 집 건물 가운데 이 층은 은밀하게 학습하는데 좋은 장소였다. 이 이 층은 아무도 쉽게 올라갈 수 없도록 통제된 지역이다. 여기서 10여 년을 산 분들도 이 층은 한 번도 올라가 보지 못한 분들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높은 곳에서 사방을 멀리 볼 수 있어서 경계하기에도 좋았다. 이런 곳을 지하 성경 학습 반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곳에 왕청 하마탕, 석두, 도문 지역 일꾼들을 모아 학습을 하였다. 지금 연변 지역에 탈북자들이 심심치 않게 들리는데 그들을 도울 수 있도록 해 달라고 하여서 우리도 특별한 자금이 없어서 우선 100원씩 주었다.

 

북한 입국 소식 

지난번 북한에 들어가다가 여권 문제로 못 들어갔는데 저녁 늦게 도문 최 선생으로부터 4월 15일 북한 입국이 허락되었다는 전화가 와서 반가웠다.

 

 

하마탕과 전하 처소 3.12-15
하마탕 골 안(골짜기 안) 친구들을 위하여 학습하려고 내려왔다. 우선 주일을 하마탕 처소에서 보내고 월요일부터 유정에서 며칠 학습을 할 계획이다. 하마탕 처소는 원래는 연길 삼자교회에 속한 교회로 한국에서 처소를 위하여 집을 사주었는데, 집을 사는 과정에서 책임 집사가 얼마를 떼어먹었다는 일로 싸움이 생겨서 교회가 문을 닫게 되었단다. 다음 해 예배당은 창고가 되었다가 다음 해에는 양조장이 되어버렸다. 기가 막힌 일이었다. 알게 모르게 한국 교회에서 후원하여 사준 연변의 여러 지역의 처소 건물들이 개인의 것이 된 경우는 심심치 않게 있다. 교회당 목적으로 집을 살 때 그 지역 지도자의 이름으로 사게 된다. 그리고 대개는 지도자가 살게 된다. 집을 산 뒤에 내분이 있어서 교회로 모이지 않게 되면 그 집은 자연히 살 때 이름으로 되어있는 그곳 지도자의 것이 되고 만다. 그 집이 영구히 교회의 재산이 되도록 할 수 있는 안전장치가 없었다. 우선 외국에서 자본이 들어왔다는 것이 알려지면 종교 국에서 빼앗기 때문에 아예 살 때부터 구성원들에게 알리지 않고 지도자 개인이 사는 것으로 하게 된다. 그러므로 건물이 개인의 것이 될 수 있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믿음과 사명감이 별로 없는 사람들이 집을 하나 얻기 위하여 교회 이름을 팔아서 한국의 지원을 받아 집을 하나 장만하는 때도 있었다. 아까운 주님의 헌금들이 이렇게 허비되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나는 10여 곳에 이런 경우를 알고 있었다. 지금 이 하마탕 교회의 지도자도 그때는 그 교회에 나가다가, 교회가 문을 닫자 따로 모이기 시작하면서, 수년 동안 동네 파출소의 급습으로 수갑과 벌금을 년 중 행사로 지내오다가, 이제 연변주 종교 국으로부터 종교활동 장소로 비준이 받았다. 그리고 며칠 전에 십자가와 교회 간판을 달아도 좋다는 공문이 와서 이제야 마음 놓고 활동하게 되었다고 모두 기뻐하고 있었다.

 

주일 아침에는 주일 학생 10명이 모여서 삭개오 이야기로 복음을 전했다. 9시에 어른들 30여 명이 모였다. 대부분 노인이었다. 오후에는 김철호 형제가 수고하는 전하 처소 저녁 모임을 위하여 갔다. 이곳은 골 안 마지막 촌인데 조선족 150여 호가 사는 집성촌으로 이제 조선족들이 많이 떠나고 한족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저녁에 20여 명이 모여서 복음을 전했다. 한 칸에 김 형제 부부와 우리 둘넷이 나란히 누워서 자는데 밤새 자리가 딱딱하여 불편하였다.

 

 

일 년 전 조용한 이곳의 형제자매들에게 한국에서 성령 파가 와서 가르친 뒤 모두 신비주의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큰 병이 든 것이다. 특히 방언 문제는 혼란한 가운데 있었다. 방언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가르쳤다. 유정 이용국 형제가 키보드를 사서 처소 음악 봉사를 하려고 하는데 돈이 모자란다고 하여서 부족한 265원을 도와주어서 키보드 한 대를 사도록 했다.

 

유정 처소는 골짜기 입구에 자리 잡고 있었다. 가정처소 지도자 20여 명이 모여서 이스라엘의 일곱 절기를 공부했다. 유정도 핍박을 많이 받았다. 외국에서 사준 집이라고 왕청 종교 국에게 빼앗겼다가 8,000원을 주고 다시 찾았단다. 이 경우에는 처음 교회 구성원 가운데 누군가가 일러바치므로 당하는 경우였다. 이날 형제들이 자기네는 산골이라 외국 사람들이 오지 않는데 원장님이 맡아서 학습해 달라고 청해서 그렇게 하기로 하여서 자매결연을 한 셈이 되었다. 춘양 대흥구에서 시작된 골 안에는 4개의 처소가 있고 가까운 곳에 3개의 처소가 있어서 학습할 만한 곳이었다. 또 한족 처소도 여러 곳 있어서 환경이 좋았다. 나는 이 골 안을 위하여 기도하고 계획을 세워나가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일생에 처음 목욕탕에 가는 조선족 부부
학습을 오전으로 마치고 대흥 구에 나가는 김철호 부부에게 나가는 길에 목욕을 같이하자고 데리고 목욕탕에 갔다. 남자 10원 여자 5원이었다. 김 형제는 탕 안에서 나에게 평생 처음 목욕탕에 온 것이라고 말해서 놀랐다. 생활이 어려우니까 목욕탕에 한 번 안 가보고 사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집에서 대충 씻고 살고 있었다. 미리 목욕을 간다고 말했으면, 수건이나 비누를 가져올 줄 알았는데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다. 기대한 내가 얼마나 무리인지를 알게 되었다. 궁금한 것은 입장료가 남자는 10월 여자는 5원이어서 왜 여성은 반값인지 알아보니, 여탕에는 탕이 없단다. 왜 없느냐 질병 때문이란다. 허기는 중국 사람들은 탕 안에서 때를 밀고 있어서 나는 탕에는 들어가 본 적이 없다.

 

미국 Louisiana 주 Bossier 교회 방문 6.7-9

북경을 거쳐 연길로 오는 미국 가장 남쪽 Louisiana 주 Bossier  교회의 이용구 목사와 강 집사를 공항에서 맞이하였다. 대절한 택시로 목단강으로 올라오는 데 차가 고장이 나서 고치느라 시간이 가고 비도 내리는 캄캄한 산길은 험하여 처음 오시는 분들이 고생이 많았다. 밤 2:30분에 나눔의 집에 도착했다. 미국서 오시느라 잠시도 쉬지 못하고 이 험하고 먼 길을 방문하여 주어서 너무 고마웠다. 이용구 목사는 미국 가장 남쪽 Louisiana 주 Bossier 시에 있는 한인 침례교회 목회자로 1995년 미국 South Carolina 주에서 있었던 선교 수양회에서 함께 참석했고, 그때 나의 중국 선교 간증과 보고를 듣고 동함이 있어서 교회에 광고하여 선교헌금을 매월 400불을 보내주시고 계셨는데, 바로 함께 온 고 자매님이 매월 $400을 교회 선교헌금에 넣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번에 이렇게 함께 오시게 된 것은 이 목사는 연변에 있는 조선족 지하 신학교에 한 주간 가르치러 오게 되었고, 고 집사는 제주도 친정에 가는 길이어서 선교지도 볼 겸 함께 오시게 되었다는 것이다. 고 자매는 중년으로 미국인과 결혼하여 자녀를 두고 행복하게 살면서 조그마한 사업을 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의 필요를 먼 곳에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감동하셔서 우리의 중국 선교 일이 되도록 축복해 주시고 계셨다. 이 목사는 나에게 자기네 교회가 지금까지 어느 선교지도 이렇게 큰 액수를 매월 후원한 적은 없었다고 한다. 놀랍고 감사한 일이었다. 다음 날 고 자매는 나에게 $1000, 나의 자매에게 $200을 주면서 격려하여 주어서 고마웠다. 아직 나눔의 집 주변 환경이 완전히 정리되지 않은 이곳에서 며칠 쉬면서 목단강 주변을 돌아보았다.

 

오늘은 두 분을 모시고 열차로 왕청 류정 촌으로 갔다. 류정 촌에는 김 형제가 인도하는 조선족 처소가 있었다. 우리는 형제의 대접을 받으며 저녁에 성경 모임을 가졌다. 강 집사는 이 처소의 음악발전을 위하여 키보드를 사라고 $300을 헌금해 주었다. 주일 류정 처소에서 복음 설교 말씀으로 은혜들을 나누었다. 오후에 김 형제의 경운기를 타고 옆 동네에 있는 한족 처소로 갔다. 한족 왕 형제가 자기 집에서 모임을 하고 있는데 사는 형편이 말이 아니었다.

 

                                                             한족 가정교회

 

그곳에 있는 식구들과 함께 교제의 모임을 가졌다. 초가로 되어있는 집 흙벽 한쪽에 비가 흘러내린 흔적이 있었다. 형편을 살펴보던 강 집사가 마음에 동정이 생겨서 $1500을 내놓으면서, 지붕을 새로 하고 벽을 수리하라고 헌금을 나에게 주었다. 손님을 보낸 뒤에 내가 다시 와서 수리를 의논하자고 하였다.


오후에 연길로 나아와서 신풍교회에서 준비한 아파트에 머물게 되었다. 월요일 이 목사는 지하신학교에 강의 가고, 나는 강 자매를 데리고 도문으로 가서 도문 처소에 들려 몇몇 모여진 식구들과 교제들을 나누었다. 그리고 강변 공원으로 나아가서 한 많은 두만강 다리 저 건너 반쪽 조국 북한 남양 시를 바라보면서 내가 어렸을 때 이 두만강을 건너갔다고 들려주었다. 자매는 생전 처음 중국과 북한을 건너볼 줄은 기대도 하지 않고 왔다가 큰 경험을 한다고 좋아하고 있었다. 다음 날은 고 자매가 서울로 가는 날이어서 오전에 강 자매를 데리고 연길 시내를 둘러보고 북경으로 떠났다.

 

도문 처소 학습 6.15-18주일
지하신학교 금요일 강의를 마치고 우리는 도문 처소에서 학습을 시작하였다. 이 목사는 매일 아침 샤워하는 습관이 있다고 목욕탕을 가자고 하여 이 마을에 개인이 하는 조그마한 공중 탕에 갔는데, 그는 어색해서 인지 여럿이 같이 씻고 어울리는데 어려워했다. 다음 날부터는 독탕을 쓰도록 해 주었다. 멀쩡한데 성격상 습관이 안 되어서인지 아리송했다. 차를 세를 내어서 훈춘 방천 삼각지를 다녀왔다. 도문 처소에서 주일을 함께 보내고, 북경으로 떠났다. 이때는 아직 서울 연길 하늘길이 열리지 않아서 선양이나 북경으로 돌아다녀야만 했다. 이번에 크게 도움이 되는 고마운 분들을 보내 주셨다.

 

연변 왕청 따씽꺼우 한족 학습 6.5-6
지난번 경로 원의 학습을 한 박흥석 형제가 한족 학습을 준비하였다고 내려오라는 소식을 보내왔다. 박형제는 중학교 수학 선생을 한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대흥 조선족 교회당에서 박형제가 모은 한족 형제자매들과 학습을 하였다. 박형제는 전부터 나에게 여러 한족 처소 일을 하는 것 같이 말하고 있었다. 다음 날 학습 마치고 그가 관계하고 있다는 묘령 한족 처소를 가보자고 하였다. 우리가 가는 것을 알리고 준비시키시느라 열심히 그의 핸드폰이 바쁜 것 같았다. 내가 한족 어가 많이 모자랐지만, 눈치로 알아듣고 있었다. 생각한 대로 만나보니 알고 있는 사이이기는 하나 자기네와 아무 관계가 없다고 하였다. 나에게도 자기가 중국인들 사역을 꾀하는 것 같이 펑펑대고 있었지만, 실체가 없었다. 이런 식으로 나를 얼려(속여) 먹으려고 하였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여러 한국 사람들을 이렇게 얼려(속여) 먹었다고 한다.

 

왕칭 따씽꺼우 정 교수 한족 학습 6.
이틀간 한족 학습을 마치고 형제들과 함께 개울로 가서 목욕도 하면서 잡은 고기로 탕을 끓여 먹는 재미도 괜찮았다. 정교수가 한국 봉지 커피를 가지고 와서 한 잔씩 하려고 물을 끓였는데 이 집에는 커피잔이 없어서 사발에 담아 와서 개울에 발을 담그고 마시는 사발 커피 맛도 낭만이 있는 것 같았다. 정교수와 따씽꺼우에서 한족 학습을 마치고 여덟 명의 조선족 형제 일꾼들과 함께 목단강으로 올라와서 학습하였다.

 

따씽꺼우 학습 9.
New York Flushing에서 장길준과 차덕수 목사가 방문하여 연변 왕칭의 따싱 거우, 류팅, 하마탕 일대를 순방하면서 교제를 나누었다. 류팅 처소에서 집회를 마치고 쉬게 되었는데 구들에서 연기가 너무 많이 올라와서 집회와 우리가 지내기가 불편하였는데, 손님들이 수리비를 내놓았다.

 

경로 원 직원들 거류증
우리 지역 파출소에서 공안이 왔다. 타지방에서 우리 경로 원에 와서 일하고 있는 직원 세 사람의 거류증을 만들어 주고 수수료 339원을 받아갔다. 제 민족이 다른 지역에 가서 살면 그곳의 거류증을 내고 거류 비를 내야 하는 웃기는 나라였다.

 

이도백하 양양 할머니
학습을 마친 장길준과 우리는 연길에서 내가 아는 분의 차를 전세하여 장백산으로 갔다. 이도백하 양양 할머니 식당에서 점심을 하면서 할머니와 성경 교재를 나누었다. 이 분 부모님은 강원도 양양분으로 음식점 이름을 양양 반점이라고 했단다. 이제는 한국에도 알려져서 들리는 발길이 많아졌다. 개방 뒤에 예수님을 믿고 그 마을의 조선족 교회에서 집사로 봉사하고 있었다. 내가 목단강에서 경로 원을 하는 것을 아시고 또 우리 모두 목회자인 것을 아시고 밥값을 받지 않으셔서 드리려고 싸우다가 내가 졌다. 고마웠다. 장백산 천지에 오르니 날씨가 좋아서 천지가 한눈에 들어왔다.
장백산 꿀--천지 폭포도 보고 연길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기사에게 장백산에서 딴 꿀을 살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자기가 매년 사는 꿀 집이 있다고 우리를 데리고 갔다. 벌통에서 짜서 아직 정제하지 않아서 벌들이 빠져 있는 큰 꿀통에서 마음껏 퍼마시고 20kg 한 통을 샀다. 중국에서 가짜 꿀을 몇 번 사서 믿지를 못하였는데, 이번에는 눈으로 보고 진짜를 사서 기뻤다.

김제화

 

'중국선교 > 2000-2002' 카테고리의 다른 글

딱한 사람들 2001  (0) 2021.02.28
자동차 축복 2001  (0) 2021.02.28
21세기의 새 시대가 열리다  (0) 2021.02.28
조선족 선교의 현황  (0) 2021.02.28
조선족 학습  (0) 2021.0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