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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선교/2000-2002

21세기의 새 시대가 열리다

2000년 21세기가 밝아 오다. 

지난해 말 세계는 2000년 새로운 21세기를 맞이한다고 별 난리들을 다 떨었다. 높아진 과학지식의 발전은 우리 삶을 윤택 편리하게 해 왔다. 자만해진 인간은 사람의 마음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지우려고 노력해 왔다. 영적인 갈급함은 물질적인 갈급함으로 바꾸어졌다. 하나님이 없는 세상, 영적 감동과 역사가 없는 세상은 더욱 무질서와 어두움의 세상이 되어가고 있다. 앞으로 인간이 추구하는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 아마 그것은 인간 스스로가 자멸하는 세상이거나,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켜 멸망의 심판을 불러오는 세상일 것이다.

 

정부의 춘절(설) 선물 1.31

오늘 춘절(음역설)을 앞두고 목단강 시 동안구 공산당 서기가 찾아와 격려하면서 경로 원 식구들과 설을 잘 쉬라고 1000원을 선물로 주어서 고마웠다. 설을 위하여 전 정부에서 돼지 한 마리와 과일 세 상자를 선물로 가져왔다. 설이 되자 정부 인심이 좋아지는 것 같다.우리 경로원이 일년에 한번 지방 정부로부터 노인들을 위하여 선물을 받는 날은 음력설이다.

이태 동안 경로 원 안팎의 일들을 정리하느라 정신없이 살아왔다. 울타리 밖의 개간할 땅을 남겨둔 채, 한 해가 저물어 가고 있었다. 경로 원 식구들이 한자리에 모여 가는 세월 돌아보고 감사하고, 오는 세월을 주님께 의지하면서 찬양과 경배를 드렸다.

 

 

위성 안테나(卫星天线, satellite dish) 3.

우리 경로 원은 뒤로 소나무가 울창한 산을 끼고 있고 동리에서 한참 떨어진 곳이어서 Cable이 들어오지 않아 TV를 전혀 볼 수가 없었다. 인터넷도 전화선으로 쓰는 Modem으로 써야 하므로 속도도 느리고 잘 안될 때도 있었다. 경로 원에 문화 시설이 너무 없어서 위성 안테나를 놓기로 했다. 알아보니 조선 사람들은 한국방송, 중국 사람들은 대만 방송을 보려고 집안에 놓고 있었다. 이때만 해도 개인 집이 위성 안테나를 놓는 것은 불법이었다. 그래서 가끔 빼앗기고 벌금 무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허락된 사람들은 정부에서 인정하는 계층의 사람(교수 등)들과 외국인이었다. 우리 경로 원은 우리가 외국인이어서 놓는 데 별 무리가 없었다. 그래서 위성 안테나를 달았다. 지난 한 해는 양로원 수리 등으로 바삐 지내면서 이 세상 돌아가는 소식은 전혀 듣지를 못했다. 이제 위성 안테나를 달고 나니 문명의 세상으로 나온 것 같았다. 한국방송도 볼 수 있게 되어 반가웠다. 우리도 한겨울을 지나면서 이곳 생활이 적응되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양로원 살림을 해 줄 직원들과 또 한족 복음 사역을 위한 좋은 동력 자를 찾지 못하여 간절히 기도하며 기다리고 있다.

 

토론토에서 온 대북 지원단 4.10 
아침 연길에서 토론토 염광교회 김인철 목사의 전화가 왔다. 나는 깜짝 놀라서 어떻게 연길에 오셨느냐고 물으니, 토요일 연길 대우 호텔에서 만나자고 내려와 주기를 바랐다. 이유를 물으니 한인 장로교회 팀도 와 있는데 의논할 일이 많다는 것이다. 토요일 오후 4시경 연길 대우 호텔에서 만나 캐나다에서 오신 염광교회 김인철 목사와 한인 장로교회 박철순 목사를 반갑게 만났다. 그 외 장로들과 여 선교회장 등 처음 보는 분들이었다. 내가 오자 모두 한방에 모여 토론모임을 가졌다. 그분들은 그동안 자기네 노회 차원에서 탈북자 후원과 양식 보내기를 위하여 지원한 자금이 10여만 불에 달하는데 의심이 생겨서 이렇게 조사차 온 것이란다. 이분들이 이곳에 와서 이미 조선족들을 통해서 연길에 삼 공자가 있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즉 대북 후원 물자를 운반 중계하면서 배를 불린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다. 이들이 자기 아파트와 자가용을 굴릴 정도였다. 또 상당한 자금이 수년 동안 탈북자들을 위하여 쓰였다는데, 조선족 처소마다 몇 사람씩 데리고 있다 하여 생활비로 한 명당 매월 50불씩 보냈는데, 지금 와보니까 한 사람도 없다고 하면서, 탈북자들이 지금 다 어디에 있느냐고 열을 내고 있었다. 나는 그분들에게 이렇게 설명하였다. 그 숫자라는 것이 애매한 것입니다. 전에는 있었지만, 지금은 없을 수도 있고, 다음에는 있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 숫자 문제는 탈북자들의 심리상태와 그들의 사정을 이해하면 해결될 수 있습니다. 즉 탈북자들은 여기 와서 밥이나 먹고 한 자리에 가만히 있자고 온 것이 아닙니다. 두고 온 가족을 위하여 돈을 벌어야 하고 안전한 곳으로 이동하기 때문에 한 자리에 그렇게 오래 머물지 않는 탈북자들의 현실을 알아야 한다고 설명해 드렸다. 그런데 문제는 이 일을 한다는 분들이 숫자 변화를 지원하는 곳에 연락을 못 하는 것은 숫자가 늘면 늘었지 줄어들지는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돈맛에 들린 어떤 사람들에게는 탈북자들은 모금 광고의 주제가 되기도 한다. 그동안 탈북자들을 돕는답시고 많이 뜯어먹기도 한 것은 사실이다. 캐나다에서는 이런 현실을 모른 채 그저 숫자만 믿고 돈을 꼬박꼬박 보냈으니 말이다. 오신 분들은 이런 사실들을 듣고 몹시 허탈해하고 있었다.

 

이 팀들이 북한 무산 맞은편 중국 조선족 마을에 매일 탈북자들이 건너온다는 소식을 듣고 탈북자들을 만나보려고 하루는 그곳에 갔다고 한다. 그곳 가정 처소에서 기다리면서 이제나저제나 오려나 하고 밤이 늦도록 기다려도 아무도 오지 안 차 여성책임 집사가 오늘은 안 오는 모양이니 쉬도록 하자고 하여 쉬는데, 밤 2시가 되어서 집사가 와서 깨우며 방금 한 사람이 건너왔다고 하여 흥미진진하게 모여 이것저것 물어보았단다. 여 선교회장은 방금 두만강을 건너왔다고 하는 탈북자에게 성경을 본 적이 있느냐? 찬송가를 들어 본 적이 있느냐? 모두 모른다고 하면서, 처음 듣는 소리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탈북자와 함께 북한 사회에 대하여 여러 가지 궁금한 일들을 물으면서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집사가 이제 쉬고 내일 다시 이야기하자고 하면서 마치려고 기도하자고 하니 금방 북한에서 건너왔다는 사람이 무릎을 착 꿇더라는 것이다. 아니 금방 기독교에 대해서 들어본 적도 없다고 했는데, 기도할 때 무릎 꿇는 것을 본, 여 선교회장이 이건 완전히 쇼하는 것이라고 열을 내고 있었다. 두 교회에서 가져온 선교기금에서 염광교회에서 U$ 1.000과 모자 16개를, 그리고 한인교회에 U$ 1,000을 주셨다. 대북 중계업자들과 탈북자 지원금이라는 허울 좋은 이름으로 자금을 빼먹기도 했다. 북한을 직접 못 들어가는 형편 때문에 굶주리고 있는 북한을 도와야 한다는 동정심과 성급함이 대북 중개업자를 만들어냈다. 이 가운데 불량한 중개업자들이 농간을 부려 자금을 들어먹기도 하였다. 여 선교회장이 잡동사니 물건이 가득히 든 큰 이민 가방을 하나 주었다. 그 안에는 화장지도 여러 개가 있었다. 아마 중국에 화장지 걱정이 되었던 모양인데, 이제 짐스러워서 모두 나에게 모두 주었다.

 

김대중 대통령 북한 방문 6.13-15
오늘은 김대중 대통령과 북한의 김정일 위원장을 평양에서 만나는 날이다. 오늘은 한국의 분단 역사에서 뜻깊은 날이다. 분단 반세기 만에 남한의 지도자가 평양에 가서 북의 지도자를 만난 것이다. 이를 계기로 남북의 통일이 당겨졌으면 좋겠다.

 

박정자 할머니

 

오늘 우리 양로원에 새 식구가 들어왔다. 목단강시 양명구 조선족 가정 처소에서 머물고 있던 박정자 할머니가 왔다. 이 할머니는 두 살 때 부모님이 중국에 들어왔단다. 친자식이 아무도 없어서 우리 경로 원에서 모시게 되었다. 주님의 나라에 가실 때까지 7년 동안 경로 원의 닭, 오리 거위, 토끼, 등 짐승들을 잘 거두어 주시면서 복되게 사셨고 경로 원에 크게 도움이 되신 노 자매님이시다. 우리도 잘 모셨고 우리가 나가 있을 때는 우리 대신 경로 원을 잘 돌보아 주셨다. 노 자매는 우리와 함께 사는 동안 주님의 나라로 가고 싶다고 늘 말씀하시더니 소원대로 그렇게 되었다.

 

북한 라진 방문 길 방천에서 쉬다. 6.22-23
북한 라진 시에서 나의 방문 비자 발급을 위하여 필요한 서류를 보내라는 Fax가 왔다. 이때부터 나는 라진 시 정부 당국과 직접 연락할 수 있게 되었다. 며칠 뒤 초청장이 라진으로부터 Fax로 왔다. 라진으로 들어가려고 오전 도문으로 내려갔다. 마침 트럭을 가지고 라진으로 들어가는 김 씨란 분을 최 선생이 소개해 주어서 함께 가기로 하였다. 나는 그분 차로 두만강 하류 삼각지 방천을 돌아보고 그곳에서 조선분이 하는 밥집에서 쉬었다. 조선이 물 건너 저만큼 보이는 곳에서 두만강 물고기 매운탕을 먹는 분위기가 남달랐다. 다음 날 아침 두만강을 건너려고 해관(이민국)에 갔는데 나의 여권에 문제가 생겼다. 나의 새 여권에는 중국에 입국한 기록이 없다면서, 나의 구여권을 찾는다. 왜냐하면, 새 여권을 중국 캐나다 대사관에서 낸 뒤 아직 밖에 나갔다 오지를 않아서 여권에는 출입국 사항이 없기 때문이었다. 나는 나의 거류증을 보여주고 나의 사정을 말하고 컴퓨터에 내 이름을 찾으면 되지 않느냐고 하니 자기들도 노력해 보았는데 못 찾겠다고 하면서 다음에 구여권을 꼭 가지고 오라고 한다. 거의 한 시간을 이렇게 보내다가 결국 건너갈 수 없게 되었다. 중국은 참 힘든 나라였다. 김 씨를 보내고 나는 힘든 몸을 이끌고 목단강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김장하는 날 10.21
오늘은 경로 원이 김장하는 날이다. 시내에서 여러 자매가 와서 김장하는 일을 도와주었다. 함께 사는 한족들이 이런 조선 사람들의 김장하는 이벤트를 본 적이 없어서 모두 신기해했다. 한편으로는 자매들이 만두(饺子)를 만들고 특별한 요리를 만들어 추수감사절의 식탁을 꾸미고 있었다. 중국 사람들은 좋은 날 손님이 오면 특별한 음식으로 만두를 만들어 대접한다. 마치 우리나라의 떡을 만드는 것과 같다 하겠다. 아직 거름기도 없는 땅에 씨를 뿌렸는데 그런대로 여러 채소를 거두어 먹을 수 있어서 경로 원 생활비를 많이 아낄 수 있었다. 처음 지은 농사이기는 해도 겨울에 먹을 옥수수와 여러 종류의 콩들 감자들을 거두어 저장할 수 있었다. 경로 원의 추수감사절은 김장하는 날로 삼아 도우러 오신 분들과 함께 하나님 은혜에 감사하는 예배를 드리며 풍성하며 보냈다. 날이 쌀쌀해져서 밤에만 보일러를 때기 시작하였다.

 

 

우리는 한족들도 만나 가까이 교제하고 싶어서 가까운 곳에 있는 한족 처소에 가서 집회에 함께해 보면 외국 사람에 대해서 호감 적이지만 한편 경계를 하고 있었다. 특히 시내 중심 한족 교회에 속한 가정 처소일수록 위에서 외국 사람을 접대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고 있어서 몹시 겁을 내고 있었다. 혹 집회에 참여하더라도 소개조차 하기도 꺼렸다. 뭐 가르치기보다는 함께 하기도 쉽지 않았다. 반면에 조선 사람들은 어디서든지 접촉만 하면 학습하기 쉬운 점이 있기도 하다. 그러나 또 쉽게 달라지고 헤어져야 하는 단점도 있었다.

주님의 축복들

벌링턴 한인교회 단기선교 팀 방문.(9.18-20) 목회자 전승덕, 장로와 집사 세 분이다. Burlington 교회 $800, 오신 분들 $500 사랑의 선물.

Huston 목단강 목장에서 길기수 형제로부터 북한 지원금 $2,000 이상을 보냈다는 반가운 소식이다.

Louisiana, Bossier 한인 침례교회 고 자매 $1000, 자매에게 $200을 주면서 격려하여 주었다.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이 한 해는 처음으로 중국에서 안정과 의욕을 가지고 일하였다. 개간으로 과일나무 심었고, 첫 농사를 시작하여서 뿌린 씨의 귀한 열매를 거두는 기쁨을 누렸다. 경로 원 살림살이가 안정되어가고 있었다. 또 주님께서는 여러 단기선교 팀들을 이 오지로 보내주셔서 학습하는 일로 바쁘게 살도록 해 주셨다. 새해는 한족들 선교를 향해 한 걸음 더 나아가기를 기도하면서 한 해를 마무리했다.

김제화/ jewhakim@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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