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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선교/2000-2002

조선족 선교의 현황

조선족 선교에 대한 기대와 포기

중국 선교를 나아가면서 기도하는 마음에는 중국 동북(만주)에 사는 우리 민족인 조선족 선교에 대한 기대가 있었다. 중국은 비록 개방은 하였지만, 아직 공산주의 나라이고 외국인에 대한 종교활동의 자유가 없는 불안정한 나라였다. 그래서 언어가 같은 우리 민족이 100만이나 살고 있어서 우선 중국어에 대해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어서 쉽게 조선족 선교에 마음을 두게 되었다. 1994년 5월부터 1995년까지 세 번 방문을 통해서 여러 곳에 흩어져 있는 조선족 마을에 있는 가정교회들을 방문하여 집회와 성경공부반을 만들어 가르치는 활동을 하였다.

 

동북 삼성

 

 

지금 동북 삼성이라고 부르는 지역은 원래 청나라를 세웠던 만주족이 처음부터 살던 땅이다. 일제강점기에는 왜인들이 만주를 간도(间岛, Jiāndǎo)라고 이름 지어 불렀다. 침략자 왜적은 동북 삼성을 점령한 다음에 중국 본토 침략을 준비하면서 청나라 마지막 황제인 부의를 내세워 일본의 앞잡이 만주국을 세웠다. 이 만주에 우리 민족이 뿌리를 내리고 살게 된 것은 역사과정을 통해 몇 가지 경로를 통해 이루어지는데, 조선조 초기와 왜정시대로 나뉜다. 전반기는 대략 조선조 초기(1433경) 4군 6진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가난과 궁핍에 시달리던 조선 사람들이 두만강과 압록강 건너편에 끝없이 펼쳐진 들을 보면서 새 삶에 도전을 받게 되었다. 후반기(1910 이후)는 조선이 왜구의 발굽에 짓밟히게 되자 자유와 세 삶을 찾아서 만주로 떠나오게 되었고, 또 민족주의자들이 독립투쟁을 하기 위하여 왔다. 또 한편 만주를 점령한 왜구가 관동군 양식 공급을 위하여 우리 농인들을 속여서 개척 이민이라는 명목으로 데려와 광활한 만주 들판을 논밭으로 개간하여 쌀 생산지로 만들었다. 개척 이민 단은 주로 길림성 북부와 흑룡 강성 동북에 흩어져 살게 되었다. 조선족은 이런 간고한 역사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

 

♣ 사군 육진(四郡六镇)

조선 세종대왕 시기에 계획된 북방 개척의 결과물이다. 1433년 평안도 절제사로 임명된 최윤덕 장군이 조선군 약 1만 5천을 이끌고 압록강 유역의 여진족을 소탕한 후 설치한 4군(四郡)과, 같은 해 김종서 장군이 이징옥황보인 등과 함께 함길도(함경도) 지방의 여진족을 물리치고 두만강 유역에 설치한 6진(六鎭)을 설치하였다. 세종대왕은 이 6진에 삼남 지방의 백성들을 이주시켜 인구를 보충하였다. 현재 이곳은 북한 행정 구역 기준으로는 나선특별시와 은덕군경원군, 온성군회령군부령군, 그리고 청진시 동부 지역이다.

동북 삼성

동북 삼성의 조선 사람들은 역사과정을 통해서 같은 조선어라도 억양과 문화 습관 그리고 성격이 아주 다르다.

랴오닝성(요령 성, 辽宁省, Liáoníng Shěng)-이 성의 서울은 선양(봉천)으로 압록강을 끼고 있으며 맞은편은 북한의 평안도 신의주로 중국 단동에서 북한으로 이어지는 교통과 무역로의 중심지이다. 요령 성의 조선족은 주로 평안도 사람이다.

지린성(길림성, 吉林省, Jílín Shěng)-길림 성의 서울은 길림이며 두만강을 끼고 있어서 조선조 초기 4군 6진 때부터 함경도의 가난한 농민들이 개척하고 논농사를 발전시키면서 오랜 시간 함경도 조선 사람들의 집성촌을 이루면서 살아왔다. 지금은 북한보다 더 함경도 사투리가 살아 있는 곳이다. 조선 사람이 많이 살다 보니 “연변주 조선족 자치주”가 되었다. 왜정시대부터 훈춘과 도문은 조선을 잇는 교통 중심지로 조선족 중심으로 일찍부터 경제 활동이 활발하여 상업과 무역이 발달하였다. 왜정 때에는 용정이 연변의 교육 행정 중심지로 조선 민족의 교육중심지이기도 했다. 그리고 길림성은 독립군들의 항일투쟁 중심지이기도 했다.

 

헤이룽쟝성(흑룡강성: 黑龙江省, Hēilóngjiāng Shěng)-의 서울은 하얼빈(哈尔滨)이며 북쪽으로는 흑룡강을 사이에 두고 러시아와 긴 국경선을 이루고 동쪽은 소련의 아무르강을 사이에 두고 역시 러시아 연해주를 마주 보면서 동해에 이른다. 왜국이 중국 침략을 위해 관동군의 양식 공급을 위하여 조선 농민들을 데려와 개척하게 했다. 흑룡강성에 뿌리내린 조선족의 대부분은 경상도 전라도 자손들이다.

 

연변 조선족 자치주

중국은 56개 민족으로 이루어진 복합민족의 나라이다. 55개의 소수 민족을 다 합해도 인구는 얼마 되지 않지만, 중국 법에는 어느 지역에 소수 민족이 2/3가 되면 그 지역을 그 소수 민족의 자치 행정지구로 만들기로 되어 있다. 1952년 9월 3일에 중앙정부는 길림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조선족 집 거지를 모아서 연변 조선족 자치주로 승격하였다. 총면적은 42,700Km에 달하고 연길, 훈춘, 도문, 돈화, 룡정, 화룡 등 6개 시와 왕청, 안도 2개 현(군)을 관할하며, 주 정부 중심지는 연길시이다.

 

인구

1952년에 9월 3일 연변 조선족 자치주가 성립될 때에는 총인구 854,000명 가운데 조선인은 530,000명으로 전체의 62%였다. 2014년 연변 조선족 자치주의 총인구는 2,200,000명으로 그 가운데 조선족 인구는 854,000명으로 39.7%, 한족 인구는 57.4%를 차지하며 기타 소수민 죽인 만족, 회족, 몽골족, 좡족 등이다.

특히 중심도시 연길의 조선족이 떠나가는 현상으로 2014년 기준 65만 이상으로 늘어나고 있는데, 반해 조선족 인구는 줄어서 전체 인구비율 20% 수준이다. 조선족은 줄면서 한족이 늘어나면서 연변 조선족 자치주가 취소될 위기에 있다.

 

네 번에 걸친 단기선교

네 번엔 걸친 단기선교 여행으로 중국 선교의 방향과 내용을 파악하게 되었다. 처음 연길에 와 보니 중국이 한국과 국교를 맺자마자 한국 교회에서 들어와 이미 상당한 일을 하고 있어서 나는 늦은 감을 느꼈다. 왜정 때 한국 선교사가 개척한 연길교회를 첫 주에 나가 보았다. 그리고 도문 조선족 교회에서는 한 주간 머물며 설교하면서 여러 사람을 만나면서 주위 형편을 돌아보았다.

목단강을 향한 그리움

내가 중국 선교를 생각할 때 처음부터 마음에 둔 곳은 내가 어렸을 때 살았던 기억이 있는 헤이룽장성 목단강이다. 한국에서 친구가 준 조선족 두 자매의 주소로 인하여 목단강에 도착하자마자 믿는 두 자매를 만난 것은 하나님의 큰 축복이었다. 오후에 도착하여 잠시 쉰 뒤에 저녁 열차로 흑룡강성 북쪽 계서시 계동현 평양진 하남촌에서 한 주간 성경 학습을 하고 또 두 곳의 다른 마을의 조선족 가정교회에서 성경 모임을 가지면서, 조선족들의 사는 모습과 새로운 지역들을 살펴보는 좋은 경험을 하게 되었다. 연변은 조선 인구가 많아서 한국어 사용이 편하고 심지어 한족조차도 조선말을 어느 정도 하지만, 목단강은 한족 중심의 사회여서 환경이 달랐다.

 

                                                            나눔의 집 라일락

 

1. 중국의 종교활동 상황

중국 공산당 정부는 종교법을 통해 종교활동을 엄중하게 단속하고 있었다. 외국인은 중국 경내에서 일체의 종교활동을 금하고 있어서 드러내 놓고 선교활동을 할 수 없다. 한족들은 겁이 많아서 외국인과 접촉하여 종교 활동하는 것을 꺼리지만, 조선족은 달랐다. 조선족은 외국에서 오는 같은 민족을 반갑게 맞이하여 주었고 어찌하든지 자기에게로 인도하여 사귀고 가까워지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한국계 외국 기독교인들의 방문은 주로 조선족 교회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래서 작은 촌에 사는 사람들은 중심 교회를 방문한 한국 분들을 자기네 마을로 연결하려고 노력하였다. 선교 목적으로 방문한 한국 사람들은 새로운 지역에서 선교하려고 기대하는 마음이 그러한 개인과 만나 져서 조선족이 사는 곳이면 어디든지 한국 사람들이 찾아들게 되었다. 그래서 한국 사람들이 낸 아이디어는 한 지역을 정하여 그곳을 자기 교회의 지 교회로 정하고 사역 집사를 세워놓고 매달 생활비로 미화 50 정도를 주었다. 그때 중국 실정이 농사를 지으면서 매월 50불은 받는 직장이 생긴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지 교회를 만들어 놓은 다음에는 이곳 일꾼을 통해서 일해 나간다. 조선족 일꾼은 그분들이 방문할 때마다 여러 사람을 모아 학습을 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가교 역할을 한다. 처음에는 순수하게 한 교회만 상대하면서 신앙적인 사명까지도 가졌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찾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전문성을 띤 중개인 성격을 띠면서 하나의 비즈니스가 되었다. 조선족끼리 서로서로 불러 모여 학습을 하면서 점차 어디서 오는 누가 더 경제력이 있고 얻어먹을 것이 많으냐에 따라 인기도가 정해지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이렇다.

춘양에는 미국에서 여름이면 매년 한 번 오는 목사가 있다. 이 분은 올 때 서울 생명의 말씀사에서 교재로 쓸 책을 사 온다. 공항에서 빼앗기면 그만이고 다행히 통과되면 나누어준다. 그리고 한 주간 학습이면 대개 소 한 마리를 잡게 한다. 그때 중소 정도는 200불 정도였다. 일주일 내내 끓여 먹으면서 학습을 한다. 그리고 개인에게 줄 선물들도 있다. 한 번은 50원짜리 물 끓이는 기계를 모두에게 선물하고 공부가 끝나면, 차비하라고 200원씩 주는 것은 연변지역은 어디를 가도 공식적인 일이었다.

나는 중국에 사는 사람이므로 먹을 음식이나 함께하는데, 언제부터인가 배우러 온 참석자들 가운데 나에게 말하기를, 김 원장님도 다른 목사같이 선물을 주기를 요구하고 있었다. 외국서 오는 분들로부터 얻어먹어 난 습관이 있어서 나에게도 그렇게 요구하고 있었다. 그들은 배움보다는 제삿밥에 더 관심이 있었다. 나도 그들이 원하는 만큼 하는 대도 뭔가 더 받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배우는 데 대한 고마움은 찾아볼 수 없고 오로지 물질에만 관심을 보였다. 그래서 나는 조선족들의 학습을 그만두었다.

 

외국 목사들이 가정교회에서 학습하는 것이 점점 어려워지기도 하고 환경도 불편하여 자금이 넉넉한 한국 목사들은 자기가 머무는 연길 장춘 선양(심양) 등지 호텔로 불러서 호텔에 며칠간 머물게 하면서 학습을 하면서 사우나나 볼링도 치는 문화생활도 즐기게 하고 있었다. 이런 대우를 받은 조선족들은 수준이 높아져서 어지간한 대우를 해 주지 않으면 모이지 않게 되었다. 돈 많은 한국 목사들과 어울리는 조선족들은 이제 자존감보다는 허영이 들기 시작하였다. 그저 밥이나 먹이고 가르치기만 하는 선교사들은 인기가 없어졌다.

 

종교 중개인

중국의 정치적인 특수 상황 때문에 방문자들이 쉽게 활동할 수 있도록 연결해 주는 중개인이 필요하였다. 나는 그들을 중개인이라고 부른다. 개방과 함께 밀려오는 방문자들은 조선족들이 사는 모습과 또 그들의 가정교회를 가 보고 싶어서 하는 기대를 현지 중개인들이 해결해 주게 되었다. 처음에는 단순히 소개하고 인도해 주다가 시간이 갈수록 마치 관광 가이드같이 전문성을 띠게 되었다. 방문한다는 소식을 보내면 중개인은 여러 곳에 소식을 보내서 약속된 날과 장소에 모이도록 준비해 준다. 영적이고 오지랖이 넓은 중개자를 만나는 것은 방문하는 사람들에게는 단기선교의 활력소가 될 수 있었다.

 

우리 같은 외국 선교사는 누군가 인도하여 주어야만 만날 수 있고, 준비해 주어야만 집회나 성경공부를 할 수 있는 형편이다. 그것도 소극적으로 아니면 은밀하게 해야 하고, 어떤 지역은 그 가정교회 지도자가 그 지역의 행정과 정치지도자들과 가깝거나 혈육일 때는 여유가 있어서 좀 편하게 활동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가정교회 지도자도 눈치를 보고 사는 곳에서는 아주 자유롭지 못하고 조심스러웠다. 종교 비자가 허용되지 않는 중국에 상주하려는 일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꼭 중국에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합법적으로 중국 거류증을 얻었다 하더라도 종교활동을 금하고 있는 이 법을 무시하고 활동해야 하는 선교사들은 늘 긴장 관계 속에 있어야만 했다.

 

한족 사역

조선족 사역하는 동안도 한족 가정교회와 연이 닿기를 늘 바라고 있었고 조선족에게도 부탁하였지만 시원하게 소개해 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던 중 길림 지역 농촌 한족 가정교회 지도자들이 소개되어서 도문에서 몇 번의 학습을 할 수 있었다. 이 사역을 가능하도록 협력하는 조선족 전도사가 있었는데 그쪽 한족 가정교회 지도자들에게는 대부 같은 존재였다. 내가 생활이 좀 넉넉해서 그 중개자에게 돈이라도 섭섭지 않게 쥐여주었더라면 일이 더 오래 계속되었을 텐데, 주는 것이 시원치 않으니까 학습은 몇 번으로 끝나고 말았다. 우리는 조선족에 대한 기대를 접고 이제 주님께서 원주민인 한족들 선교사역에 나아가려고 간절히 기도했다. 주님은 길을 열어 주셔서 세 곳의 한족 교회와 하나의 가정교회 그리고 조선족 교회 한 곳을 개척하는 축복을 주셨다.

 

                                                                                   나눔의 집 도라지

 

한국 목사를 등쳐 먹는 종교지도자들

한국 분들이 많이 드나들면서 집회나 학습하는 일이 많아지면서 지역 공안국과 종교국은 한국 목사들이 돈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한 사람만 잡으면 돈이 생긴다는 계산이 선 것이다. 죄목은 외국 사람이 법으로 금한 종교활동은 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자주 잡히고 유치장에 갇히고 벌금 물고 또는 추방되는 일들이 빈번해지면서 한국 사람들은 점점 경계가 느슨한 곳을 찾는 노력을 하였다. 그것도 여의치 안 차 드디어 시내 좋은 호텔에서 비싼 대가를 치르면서 학습을 하는 일들도 생겨났다.

 

2. 거주방법

선교사가 선교하려는 나라에 자리를 잡고 살면서 선교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그러나 모슬렘과 사회주의 나라에서는 외국 사람의 종교활동을 못 하도록 법으로 금하고 있다. 선교활동을 위한 비자는 근본 받을 수 없다. 이 문제에 대해서 우리 기독교인들의 세계관은 좀 다르다. 너희의 세상 법은 그렇지만, 우리는 위의 법을 따른다고 한다. 이 점이 독선적이고 모순이 아닐 수 없다. 때로는 신체적인 고통을 받을 수도 있고 또 생명이 위험할 수도 있지만, 개의치 않는다. 왜냐하면, 위의 법이 더 권위가 있고 사명감을 가지기 때문이다. 중국에 살면서 이 사명감을 실현하려는 사람들은 합법적인 방법을 찾게 되었다. 그 방법 가운데 가능한 세 가지를 소개해 본다.

1. 중국에 투자 사업으로 나와 있는 회사의 직원으로 위장하여 거주 비자를 받는 경우.

2. 자본을 투자하여 사업 비자를 받는 경우.

3. 중국 지방 정부 양로원의 명예원장으로 거주 비자를 받는 경우.

 

세 번째 양로원 명예원장은 한국 사람들의 기발한 생각으로 만들어진 묘수였다. 이 일들은 주로 연길 지방에 한때 있었던 일이다. 중국은 법으로 행정단위마다 양로원이 있다. 그러다가 사회주의 경제가 무너지고 나서 너무 가난하여 운영이 어려워지고 노인들을 먹여 살리기도 힘들어졌다. 그 시절 나이가 드신 한국 신앙인들이 연변에 살고 싶어서 탐색하다가 경제에 허덕이는 양로원을 지원하는 명목으로 거류증을 얻는 길을 열었다. 내가 알기로는 후원하는 금액은 대개 일 년에 중국 돈 만 원(미화 1,200 정도) 정도였다. 캐나다 토론토에서 여러분이 와서 이런 일로 몇 년 머무신 분들이 있었다. 나름대로 선교지에서 살아보려고 애쓴 흔적들인데, 한국 사람에게나 가능한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거류 문제가 해결되었어도 선교활동을 하다가 걸리면 세 번 경고하고 그다음은 추방했다. 특별히 사업 투자를 하는 분들이 직접 종교 활동하는 일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었다. 그것은 사업체를 빼앗기고 추방당하기 때문이다. 이런 사례가 여러 곳에서 일어났다.

 

우리는 복음을 전하라는 위의 명령을 실천하기 위해서 중국에 정착하기로 했다. 그래서 중국에 사는 일만큼은 합법적인 길을 찾아야만 했다. 합법적인 방법은 투자하여 무엇인가를 해야만 하는 데, 우리는 가진 것이 너무 없어서 선뜩 나서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는 주로 지방 정부에서 미화 10만 불 투자를 요구하고 있었는데 우리에게는 천문학적 숫자였다. 그러나 우리의 형편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간절함에 응답하셨다. 목단강 시 나의 고향 싱롱 전(읍)의 운영 불가능한 전 정부의 경로원을 맡아서 불과 $25,000 투자로 18년을 살게 해 주셨다. 사회주의 나라, 나의 고향 중국에서 살고 싶은 대로 살게 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있다. 주는 나의 길이시며 산성이셨다.

김제화/ jewhakim@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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