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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선교/2005-2012

취업증((就业证)

代吗证(따이마정)과 2007
우리 체류비자를 연장하려는데, 공안국 외사 처에서 올해부터는 외국인은 먼저 따이마정(代吗证)을(代吗证)을 내 가지고 그다음 하얼빈 성 정부에 가서 쥬예증(就业证, 취업증)을(就业证,취업증)을 내야만 체류비자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원래 절차인데, 그동안 목단강 정부에서는 그냥 해 오다가 상부로부터 지적을 받아서 올해부터 정식으로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거의 13년 넘게 양로원 사업을 하면서 거류증을 받아왔는데 이제부터 정식으로 한다니! 중국은 재미있는 나라다. 그동안 몇 번 공안국 교통과에서 내 자동차 검사 때 代吗证이란 말을 들었다. 그때마다 없다고 하고 넘어갔는데 사실은 양로원 총무 일을 하고 있는 자매가 귀담아듣고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보지 않은 채 그대로 지나쳐서 오늘날과 같이 바쁜 시간을 가지게 된 것이다. 취업 증은 우리가 한 번도 내 본 적이 없어서 어디서 내는지도 모른다. 목단강 공안국 외사처에 물었더니 자기네도 잘 모른다면서 하얼빈 공안국 외사처에서 취급한다면서 거기에 보라는 것이다. 자기 분야가 아니면 아는 것이 없다고만 하니 그 먼 길을 가야 하니 인민들이 얼마나 힘들게 사는지를 알만했다. 중국 일이 이렇게 쉽지 않았다. 그래서 하얼빈에 전화해서 갖추어야 할 서류가 무엇인지 물어보니 또 와봐야 안다고 한다. 거리가 얼마인데 와 봐야 안다 하니 기가 막혔다. Website에서 찾아보아도 대충 있고 자세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주 자매가 하얼빈에 올라가서 알아서 다음 날 내려왔다. 먼저 목단강에서 서류를 만들어 하얼빈 공안국으로 가야 하는 절차다. 먼저 준비해야 할 서류는 건강 검사서로 목단강에 있는 변경 검역국(边境貿易國)이라는 곳에 가서 건강검사 서를 먼저 떼라는 것이다. 처음 들어보는 기관이고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시 정부 화교 연합회 빠오() 주임에게 연락하였더니 그 기관의 2인자 부국장이 자기와 학교 동창생이라고 걱정하지 말라고 하면서 내일 만나도록 해 놓겠다고 했다. 검역국은 우리 지역에 있었다. 다음 날 빠오 주임과 함께 검역국으로 가서 부국장을 만나서 이사를 나누었다. 그는 우리를 환영해 주었다. 그리고 직원을 불러서 나의 검사증을 만들도록 지시했다. 직원은 내 여권을 복사하고 나의 혈액형과 키를 물어 서류에 적었다. 원래는 신체검사를 정식으로 받아야 하는데 다 생략한 채 직원에게 부탁해 놓고는 점심을 먹으러 가자고 우리를 데리고 식당으로 갔다. 우리는 함께 만나 점심을 나누면서 서로 사귀는 기회가 되었다. 점심값을 내가 내려는데 부국장이 중국에 와서 좋은 일을 하는데 자기가 대접하겠다고 우겨서 오늘은 그의 대접을 받았다. 그리고 사무실에 돌아오니 검사증이 다 만들어졌다. 중국의 일은 뒤에 사람만 있으면 일이 이렇게 쉽게 되고 있었다. 그래도 중국 인민들의 건강과 안전을 위해서라면 정식으로 건강검사는 해야 할 텐데 이렇게 건너뛰고 있었다. 다음 날 새벽에 주 자매 우리 여권과 따이마정,검역 검사서를 가지고 이른 새벽에 하얼빈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오후에 쥬예증을 가지고 내려와서 거류비자를 연장할 수 있었다. 며칠 바쁜 시간을 보냈다.

 

한 줄기 바람 8.21
8월이 다 가려고 하는데 날씨가 숙으러 지지 않아서 늦더위라고들 말하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농장에서 땀을 흘리고 일을 하는데 이제까지 느껴보지 못한 찬 기운의 바람 한 줄기가 북으로부터 불어와 몸을 서늘케 한다. 이때로부터 선선한 바람이 일어나더니 기온이 내려간다. 이제 가을이다. 매년 경험하는 일이기는 한데 8월 중순부터 날씨를 조심스럽게 관찰하다 보면 어느 한날 찬 기운을 가진 바람이 북쪽에서 불어올 때가 있는데 그 바람이 바로 여름은 가고 가을이 오고 있음을 알리는 분기점이었다. 해마다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올해는 실감 나게 경험하였다.

 

박 할머니 주님께로 가시다. 8.24 . 2007
박 할머니는 중국에서 태어난 조선족 2세로 조선족 교회에 몸을 의탁하고 사시다가 8년 전 나눔의 집으로 오시게 되었다. 다행하게도 할머니는 예수님을 신실하게 의지하고 사셨다. 그리고 나눔의 집에 오시더니 우리가 키우는 가축들을 보시더니 자기가 돌보시겠다고 하셔서 지난 8년간 가축(, 우리, 거위, 토끼, )들을 잘 돌보아 주셨다. 해마다 두세 차례 병아리를 까고 키워서 달걀과 고기들을 식탁에 오르도록 수고 많이 해 주셨다. 그동안 아래에서 피가 흐르는 병으로 인하여 고생스러워하셨는데 우리가 고쳐 주려고 노력하였지만, 전문의는 너무 연로하므로 그대로 내버려 두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일 년 이상 할머니로부터 나는 냄새는 온 나눔의 집을 어지럽게 하기는 했지만 모두 사랑으로 돌보았다. 떠나시기 보름 전쯤부터 먹고 싶으신 음식들, 짜장면, 돼지족발 등을 찾기 시작하셨다. 나는 그때마다 바로 시내에 나가서 사다가 드렸다. 그러더니 떠나시기 며칠 전부터는 음식을 전혀 드시지 않으시더니 오늘 오후 4:30분경 수고 많은 육신을 떠나 주님의 품으로 가셨다. 할머니는 아무도 없이 외롭게 세상을 떠나시는 것을 몹시 두려워하시었다. 그래서 우리에게 온 뒤로는 우리가 있는 동안 주님께로 가시겠다고 노래를 하시더니 소원을 푸신 것 같다. 시신을 수습하는데 주머니에서 꼬깃꼬깃 접은 200 100원이 나왔다. 할머니를 잘 돌본 총무 주 자매에게 200원을 주니까 잘 받는다, 100원은 부엌일을 하는 자매에게 주었더니 얼른 받는다. 그리고 물건들은 가지지 않아서 태워야만 했다. 그리고 우체국 통장에 3000원이 들어 있어서 친손녀는 아니지만 키워준 손녀가 하얼빈에서 의사 노릇을 하고 있으면서 일 년에 한두 번 찾아오기도 하여서 3000원을 찾아가라고 하니 사양하면서 양로원에서 쓰라고 했다. 저녁에 우리 곁을 떠난 할머니를 위해 나눔의 집 장례식을 했다. 다음 날 박 할머니를 보낸 양명구 가두(동사무소)에서 영구차를 가지고 와서 박 할머니를 화장터로 모시고 갔다.

 

서출선 목사 부부 방문 9.1 . 2007
중국 연길에서 선교하려고 오신 서출선 목사 부부가 올라왔다. 저녁에 난청 교회에 가서 서 목사 설교하다. 집회 뒤 동공(动工동역자)들과 모여서 집수리하는 일로 의논하다가 내가 모은 3000원 수리비를 주었고, 자기네가 지금까지 4000원을 모았다고 해서 7000원이 되었다. 이 회의를 보고 듣고 있던 서 목사가 1000원을 수리비에 보태라고 헌금하여 주어서 모두 고마워하고 기뻐하였다. 오늘 서 선교사 부부가 나눔의 집에서 아침 경건의 시간을 인도하고 오후에 연길로 돌아가게 되었다. 중국 연길에 선교사로서 오면서 살림 도구를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못하였다고 하여서 우리에게 있는 이불과 살림 도구를 큰 이민 가방으로 하나 기득 담고, 우리가 생산한 농산물 콩류와 채소 등 몇 개 상자에 싸서 한 살림 버스에 실어 보냈다.

 

제현 판형 방문 7.2007

이달에는 반가운 손님들이 찾아왔다. 동해안 강릉 진리에서 사역하고 있는 동생이 왔고, 서로 약속하고 함께 온 것은 아니지만 은평교회 판만식 형제 가족도 와서 반가웠다. 선교지를 위하여 여러 가지 선물과 선교헌금 8000 을 주어서 고마웠다. 자연스럽게 단기선교 팀이 되어서 활동하게 되었다. 사람이 많아서 택시도 한 대 대절했다. 내 차가 밤새 타이어가 펑크가 났다. 들어온 택시로 타이어를 빼서 시내에 나가서 수리해서 들어와서 맞추어 떠났다. 가다 보니 또 한쪽 타이어 바람이 조금 빠진다. 살펴보니 다른 타이어에 큰 못이 또 박혀 있었다. 해림 시 정부에 가서 강 종교 주임을 만났다. 그가 아는 차 수리소에 가서 타이어 못을 빼고 수리를 했다. 그리고 강주임과 함께 김좌진 장군의 유택이 있는 산시(山市)로 갔다. 김좌진 장군의 생가를 돌아보면서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한 생을 불사른 그의 생애가 위대하게 느껴졌다. 우리는 신안 전 전 정부 간부들로부터 점심 대접을 받았다. 그리고 일제의 속임으로 끌려와서 이 황무지를 옥토로 바꾸어 쌀 생산의 보고를 만든 우리 민족의 애환들 그리고 억압과 착취에 시달리면서 살았던 민족의 아픔을 되새겨 보았다. 우리는 길을 재촉하여 발해 전()에 가서 그 옛날 발해의 제3 황도 황궁 터를 돌아오는 긴 하루였다. 방학을 맞이한 판형의 자녀들에게는 역사탐방의 좋은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

 

타이허 교회 예배의 긴장
오늘 주일(7.15) 아침은 나눔의 집에서 먼저 예배를 드리고 모두는 차이허 교회로 갔다. 찬송하는 동안 나는 사진을 찍느라 뒤에 갔는데 350여 명 가운데 말쑥하게 옷을 입은 낯선 얼굴을 보았다. 혹 정보국이나, 공안국에서 나온 사람이 아닌지 걱정이 되어서 사역자 루오 형제에게 알렸다. 내가 강단에서 한국서 온 형제들을 소개하면서도 좀 조심이 되었다, 하얼빈서 유학하고 있는 형제가 중국어로 찬양하는데 정말 잘 부르고 감동적이었다. 이러는 사이에 한 자매가 가서 그분을 만나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왔다. 처갓 집에 왔다가 교회에 온 것이란다. 이제 안심이 되어서 판 형제 가족을 제대로 소개하고 가족 찬양도 하고 판 형제가 말씀을 전했다. 집회가 끝나고 루오 형제와 함께 그 사람을 따로 만나서 교제를 할 수 있었다. 자기는 안후이성 한 기관에서 당 서기로 있는데 장모가 세상을 떠나서 왔는데, 마침 그 집에 성경책이 있어서, 기독교에 대한 관심이 생겨서 오늘 참석하게 되었다고 했다. 형제의 찬양에 감동을 받았고 판 형제의 말씀에서 예수를 믿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고 하면서 돌아가면 자기 동리에 기독교를 세워야겠다는 마음이 생겼다고 했다. 그리고 우리에게 자기가 있는 곳을 한번 방문해 주면 환영하겠다고 했다. 오늘 주님께서 한 분의 공산당 간부의 마음을 이렇게 움직여 주셨다.


오후에는 알잔 교회로 갔다. 펑친 아들, 순순이 여기 대학에서 한국어를 배우다가 교환학생으로 한국에 가서 공부할 때, 내가 판 형제에게 알려서 학교 기숙사를 찾아 순순을 격려해 주기도 하였고, 돌아올 때 서울 자기 집에 데리고 있으면서 서울 구경도 시켜주고 잘해 주어서 펑친 가족이 판 형제 부부에게 고맙다고 하면서 마른 고사리를 선물하였다. 저녁 식탁에는 중국 농촌의 풍성한 음식들로 가득했다. 저녁에는 성찬 예배를 드리면서 주님의 희생과 구속의 은혜를 감사하면서 찬양을 드렸다. 형제의 중국어 찬양, 판형 가족의 찬양은 힘들게 일하면서 하루를 산 형제자매들의 마음을 위안하는 좋은 시간이 되었다.

김제화

jewhakim@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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