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선교/1999-2001 양로원

2. 싱롱전 경로원 수리

싱롱전 경로원(兴隆镇敬老院) 수리 1999-7

강남촌의 식당은 산 밑 외진 곳에 있는데, 중국의 국가 간부들(공무원)의 부패가 만연하여 그 도가 넘치던 때를 맞추어 차려진 이 식당은 말이 음식점이지 실은 밤이면 음란한 요지경의 요식업체였다. 주룽지 총리 시대가 열리면서 부정부패 척결 운동이 강화되자 이 식당은 문을 닫게 되었다. 이 건물의 수리는 사실 지붕과 기초를 내놓고는 전체를 다시 짓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길이가 70m이고 폭이 10m의 건물이었다. 이때는 몹시 가물어서 농작물도 시들고 있었고 공사하기에도 힘든 나날들이었다. 그러나 집은 나날이 좋은 모양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식당에서 헐어낸 벽돌을 다시 쓰려고 다듬느라 수고했다.

 


우물 파기

원래 식당을 할 때 판 우물은 20m 정도 판 것인데 여름에 물 냄새가 나는 건수였고 이렇게 가물 때는 물도 잘 고이지 않고 있었다. 물이라도 좋은 것을 마시고 살고자 우물을 파기로 했다. 우물 파는 업자, 따징뚜이(打井对)를 불렀다. 업자는 70m 정도에서 생수가 나올 것이라고 하면서, 비용으로 15,000원을 요구하여 계약했다. 다음 날 착암기(drilling Machine)를 실은 차가 와서 자리를 잡더니 뚫기 시작한다. 10여 일 바위를 뚫고 70m 가까이 내려가더니 드디어 자갈과 모래가 나오면서 생수가 펑펑 쏟아져 나온다. 기적 같다. 물맛이 좋았다.

가뭄 끝에 비가 올 듯이때 중국은 7년 만에 오는 가뭄이라고 할 만큼 가뭄이 심했다. 오늘은 낮에 비가 좀 내리다가 그쳤는데 검은 구름이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저녁에 강이 아버지가 밤에 비가 올까 봐 걱정된다고 전화가 왔다. 강이 아버지 말이 “하나님이 지켜 주셔서 지붕 일이 끝날 때까지만 비가 오지 않도록 해 주셔야 한다고 말하기에, 지금 가물어서 곡식이 타 죽고 있는데 지붕이 문제냐고, 지붕은 또 하면 되지만 곡식은 죽으면 그만이라고 하면서, 비가 와야 한다고 말해 주었다.” 다음 날 부인인 한 선생이 학교에 가서 나의 이 말을 동료 선생들에게 말한 모양인데, 그 선생들이 그분은 좋은 분이라고 하면서 공산당도 이렇게 말은 안 할 것이라고 하면서, 다 자기를 위해서 살기 바쁜 세상에 남을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는 데 대해서 감명을 받는 것 같다고 한 선생이 전해주었다. 날씨는 매일 30~35도로 숨 막힐 듯하였다. 흑룡강 전성에 타는 가뭄으로 옥수수가 타 죽어가고 있었다. 양로원 수리도 언제 끝날지 모를 힘들기만 한 나날이다. 지붕을 하기 전에 전선을 설치해야 하는데 전공들 불러보니 돈을 너무 많이 달라고 하여서, 내가 하기로 했다. 전선을 사다가 한 주일 간 연구하면서 설치를 하였다. 목수를 불러서 나무 침대 20개를 만들도록 했다. 그리고 이 층 철 침대 10개를 샀다. 이곳은 화장실이 바깥에 멀리 있어서 추운 겨울 노인들이 힘들 것 같아서 안에다 남녀 반 수세식 각각 세 개씩을 새로 만들었다.

 

탈북 청년
북에서 온 젊은 청년 김충성이가 찾아와서 일을 시켜달라고 하여서 일당을 주기로 하고 일을 시켰다. 이런저런 북조선 이야기를 나누어 보면 진솔한 데가 있었다. 군대 생활을 4년 하다가 엄마가 돈을 써서 병가 제대를 했다고 한다. 나는 식사 시간에 그에게 달걀을 삶아서 주면서 북한에서 먹어 본 적이 있느냐고 물으니 전혀 먹어 본 적이 없다고 해서 우리 모두를 놀라게 했다. 자기는 처음 중국에 와서 달걀을 보고 무엇인지 잘 몰랐다고 하면서 북한에서는 보통 사람들이 달걀을 먹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고 한다. 우리가 일하다가 점심에 오늘은 잔치국수를 했는데 충성이가 부엌에 가서 밥이 있느냐고 물으니 없다고 한다. 내가 그 소리를 듣고, 왜 국수를 안 좋아하느냐고 물으니, 습관이 안 되어서 밀가루 음식이 입에 안 맞는다고 한다. 그럼 조선에서는 쌀밥만 먹었느냐고 묻자, 아니라고 한다. 나는 그에게 중국은 왜 왔느냐고 물으니, 배가 고파서 왔단다. 배고픈 사람이 밥, 국수, 빵을 가리느냐고 물으니 가만히 있는 다. 집에 아버지가 무엇을 먹든지 자녀들이 먹듯이, 설사 개인적으로 안 좋아하더라도 원장인 나도 일하고 국수를 먹으면 그냥 참고 먹어야지 그렇게 하느냐고 타일렀다.

 

이제야 지붕이 완성되었다. 지붕은 슬레이트를 얹도록 했다. 이때만 해도 중국은 아직 기계로 눌러서 슬레이트를 만들지 못하고 손으로 만들고 있는 수준이었다. 슬레이트를 만드는 공장을 가보았는데 마음에 들지 않아서 고민하고 있는데, 강이 아버지가 트럭이 지나가도 안 깨어진다고 선전한 큰 공장이 있다고 하여서 찾아갔다. 제법 공장같이 시설이 컸지만, 여전히 슬레이트는 손으로 만들고 있었다. 다른 공장 것보다는 그래도 품질이 좋은 것 같아서 사기로 했다. 이젠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강이 아버지가 사장에게 우리가 하는 일들을 설명하면서 가격을 흥정하여 한 장에 15원에 파는 것을 13원에 주겠다고 하였다. 다시 싸게 흥정하니 사장이 내가 중국어를 전혀 모르는 줄 알고 강이 아버지에게 소개비를 원하느냐고 묻자, 필요 없고 싸게 해달라고 하여 11원에 사도록 결정이 되었다. 슬레이트를 다 올린 지붕 안에 올라가 보니 이게 웬일인가 환하게 빛이 비쳐 들어오는 곳이 많지 않은가! 이것은 만드는 과정에서 밑에 비닐을 깔고 시멘트와 백회 그리고 석면을 펴고 그 위에 다시 비닐을 덮어 내리누르는 과정에서 블록 튀어나온 부분의 시멘트가 미끄러져 내려서 이런 현상이 생긴 것이다. 이 비닐이 뚫어지면 비가 샐 것이 당연했다. 새 지붕인데 어이가 없었다. 슬레이트가 모자라서 150장을 더 주문하여 작은 차에 사장이 싣고 왔다. 나는 그분에게 한번 지붕에 올라가서 보라고 했다. 이런 슬레이트로 어떻게 사람이 사는 지붕을 할 수가 있느냐고 했더니 미안해하는 척하더니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어느새 돈도 받지 않고 사라져 버렸다. 이제 지붕을 해서 비가 와도 안심이었다. 오늘부터 천정에 합판을 붙이기 시작하였다. 7월 30일 새벽과 오후에 비가 한참 내려 농작물에 도움이 되었고 공기도 맑아지고 시원해졌다. 더위에 지친 노동자들에게 생기가 나게 하여 주었다. 무덥던 날씨가 오늘부터 찬기가 섞인 한 줄기 바람이 북에서 붙어오더니, 다음 날부터 그렇게 무덥던 날씨가 한풀 꺾이고 있었다.

 

석탄 보일러 설치중국은 석탄 보일러를 많이 쓰고 있었다. 우리 경로 원에도 석탄 보일러를 놓아야 하므로 공사 팀을 불러와서 견적을 내고 흥정을 했다. 재료는 우리가 모두 사기로 하고 시공비 6000원에 계약을 하였다. 오늘부터 보일러 공사가 시작되었다. 한주 만에 공사가 다 끝나서 바닥에 시멘트를 바르는 일을 하였다.

경로 원으로 이사 8.16
경로원 수리가 다 끝난 것은 아니지만, 시내에서 경로원으로 드나드는 일이 너무 불편하여 이사하기로 하였다. 마을이 없고 외적 진 곳이어서 시 정부에서 말렸다. 그리고 공안국에서도 아직 통신 시설도 없는 그곳에 외국인이 사는 것은 안전하지 못하고 자기네도 안전문제를 책임질 수 없다고 말리면서 시내에서 출퇴근하라고 권하였다. 모든 사람이 우리가 그곳에서 가서 사는 것을 반대하면서 말렸다. 그렇지만 어차피 우리가 살아야 할 곳이고 미리 적응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여 이사하였다. 저 앞에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 모르지만, 우리에게는 주님을 의지하고 있는 오늘만이 있을 뿐이었다. 우리가 이사하자 강이 아버지가 위험하다고 모든 창문에 쇠창살을 달자고 하는데 나는 그만두라고 했다. 목단강 시내가 저 멀리 보이는 앞 창문은 바닥에서 2m로 좀 높지만, 산을 끼고 있는 뒤 창문은 1.2m로 낮아서 위험하다고 우리가 없는 사이에 강이 아버지가 쇠창살을 달아 놓았다. 아직 예수님은 믿지 않지만, 우리 하는 일과 자기네 아들을 캐나다에 언어 연수를 갈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고 우리를 크게 생각해 주고 있어서 고마웠다. 이 수리공사를 위하여 한 푼도 받지 않고 부부가 도와주셨다.

 

그동안 캐나다에서 왔다 가라는 소식이 왔다. 아들이 떠난 지 3주기가 되는 해인데 캐나다 정부에서 4만 불이 우리 둘 앞으로 나왔는데, 본인이 사인해야 찾는다고 하지만, 여기 일이 바빠서 나갈 형편이 못 되었다. 여기 변호사를 통해서 서명하여 보내는 것이 어떤지 알아보라고 했는데, 우리 아이들 사고 처리를 맡은 변호사가 정부 수표는 우리가 직접 자기 앞에서 서명해야 한다고 하면서 독촉이 여러 번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원치 않는 여행을 하게 되었다. 우리는 아직 짐도 풀지 못한 채 한 선생 부부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떠나기로 했다. 이렇게 모든 것을 맡기고 떠날 수 있는 친구가 있어서 다행한 일이었다. 8월 19일 비 내리는 아침 6시에 한 선생 부부의 전송을 받으며 하얼빈으로 떠났다.

 

한 선생 부부

한족 소학교에 여교사로 근무하는 한 선생이 그동안 우리하고 성경공부도 하면서 가까이 지내고 있었다. 법과대학 학생인 아들 김강이 캐나다 언어 연수를 가고 싶다고 하여서 토론토 한사 영어 학교를 소개하여 주었고, 비자를 위해서 내가 추천서를 써주었다. 생각보다 빠르게 북경에 가서 비자를 받고 돌아와서 감사의 표시로 우리 옷과 밍크 담요를 사 왔다. 생각보다 쉽게 빠르게 캐나다로 가게 되자 감사의 표시로 돈을 주려고 해서 받지 않았다. 그때 대개 한국으로 가는데 드는 비용이 중국 돈 5만 원 정도였다. 이 일로 우리가 인연이 되어서 우리가 경로원 수리를 하게되자 한 선생 부부가 아들을 캐나다에 갈 수 있도록 소개해 주었다고 품값을 받지 않고 힘써 주어서 고마웠다. 한 선생 부부가 아니면 어떻게 이 어려운 일을 할 수 있었을까, 생각만 해도 주님의 큰 축복이었다.

 

돌아온 캐나다

우리는 2년 3개월 만에 토론토로 돌아왔다. 아이들이 떠난 지 3주기가 되어서 서울에서 의선이 부모 변 선생과 함께 오게 되었다. 변 선생은 오퍼상을 하는 사장이신데 예수님은 안 믿으나, 부인은 국가공무원으로 은퇴하시고 여의도 순 복음교회 권사로서 병원선교회 행정 담당자로 오랫동안 수고하면서 여러 선교지를 다니고 있었다. 딸인 의선 자매가 서울서 음대를 나오고 순 복음교회 4부 예배의 작곡 담당자로 있다가 사고나 나던 해에 토론토 음악 대학원에 유학을 왔다가 학교를 시작도 못 해보고 불의의 사고가 났다. 변 사장은 딸의 사고로 우리를 만나게 되어서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그 뒤로 우리는 마치 사돈 같이 한국을 오갈 때마다 만나면서 가까이 지내게 되었다. 2년 석 달 만에 보는 손녀 손자들이 달라 보게 컸다.

8월 23일은 비명에 간 네 아이의 3주기 추도식을 묘소에서 가졌다. 우리를 아는 여러분의 목회자들이 오셨고 나의 동창생 김대억 목사가 추도 설교를 해주었다. 오신 목사님들과 함께 식사를 나누면서 중국 선교에 대하여 교제를 나누는 좋은 시간을 보냈다. 며칠 뒤 Chicago에서 M. Div 코스를 같이 공부한 동창생 김명근 목사 가족이 Toronto에 왔다. 사모님은 초등학교 교사인데 명태를 하시고 아이들의 교육을 위하여 왔다고 했다. 모두 대단한 결정을 하고 온 가정이다. 아파트를 얻지 못해서 고생하는 것을 내가 알고 딸 은하에게 말하여 아파트 사무실에 가서 보증을 서주고 얻도록 도와준 일로 인연이 되어서 우리 중국 선교를 적게나마 10여 년간 지원하여 주었다.

100원짜리 새 돈과 위조지폐

돌아온 경로 원은 안과 바깥에 해야 할 많은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필요한 자재를 사러 시내에 나갔다가 돈을 쓰는 일이 몹시 불편하였다. 우리가 나가 있는 사이에 중국은 100원짜리 새 돈이 나왔다. 오늘 처음 나온 붉은색의 100원짜리를 은행에서 찾았다. 그런데 돈이 나오기도 전에 가짜가 돌아서 국가에서 모두 회수하느냐 안 하느냐 하고 있어서 새 돈을 모두 환영하지 않고 있었다. 얼마 뒤에 국가에서 그냥 사용하기로 하여 불편한 문제는 사라졌다.

 

 

경로 원 첫 예배
처음으로 주일예배를 양로원에서 드렸다. 이정자 선생도 오셨다. 도문 처소에 있는 이명옥 자매를 불러올려서 당분간 양로원 부엌일을 맡아하도록 했다. 11월 15일인데 지난밤에 내린 눈으로 온 세상을 하얗게 만들었다. 바깥벽도 칠하지 못한 채 꽁꽁 어는 겨울을 맞이하면서 봄이 오기를 기다려야만 했다. 강남 촌 동 서기와 이 교장이 만나자고 하여 가보니 한 해가 다 간다고 조촐하게 송년회를 열어주어서 고마웠다. 12월에 들어서면서 내 몸에 좀 이상이 생긴 것 같다. 위가 좀 불편하고, 빨리 뛰거나 힘들게 하면 심장이 급하게 뛰면서 헉헉하게 되는 것을 처음 느꼈다. 혈압이 항상 높지만, 혈압이 높아서 오는 이상 감을 느꼈다. 자매도 위가 안 좋고 모두 상태가 좀 안 좋다. 이제 먼 앞을 바라보고 이제 막 일을 시작하고 있는데 주님께서 우리의 약한 부분들을 치유해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하였다.

 

1999를 보내면서,
년 초에 기도하고 바라던 대로 이루게 해 주신 주님께 감사한다. 넓은 중원의 대륙 한 모퉁이에서 주님의 은혜로 살게 해 주신 주님의 축복을 감사하면 찬송과 영광을 드렸다.
- 정착지에 대한 마음을 많이 썼는데 결국 어렸을 때 살던 고향 땅에 머물게 되었다.
- 기적적으로 우리의 거류증을 시간이 되기 전에 연장을 받을 수 있었다.
- 북조선의 빵 공장도 놀라운 방법으로 공급할 수 있게 되어서 감사할 뿐이다.
- 한족 학습은 하다가 그만두게 되었지만, 보람은 있었던 것 같다. 그 학습이 정착되지 못한 것이 아쉬울 뿐이다. 주님께서 새로운 길을 열어주시리라 믿는다.
- 경호원 수리를 위해 한 선생 부부가 아들을 캐나다에 갈 수 있도록 소개해 주었다고 품값을 받지 않고 힘써 주어서 고마웠다. 한 선생 부부가 아니면 어떻게 이 어려운 일을 할 수 있었을까, 생각만 해도 주님의 큰 축복이었다.
오는 새해에는 주님께서 부족한 우리가 한 걸은 더 나아가서 일 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시길 바라는 마음이다.

============== 수리 중 ===============

2000 지난해로 경로 원 수리가 끝나면서 겨울 동안 안을 정리하는 데 힘썼다. 아직도 긴 겨울이 지나려면 석 달은 더 있어야 하고 바깥일은 아무것도 손댈 수가 없었다. 이곳은 얼마나 추운 곳인지 지난해 경로 원 수리를 하면서 집 기초를 파 보니 2m까지 내려가고 있었다. 땅이 녹는 대로 넓은 앞마당을 개간해서 과일나무도 심고 밭을 만들어 씨앗을 뿌릴 계획을 했다. 그리고 울타리 밖에 있는 2000여 평의 땅도 개간하여 어느 정도 자급자족하는 경로 원이 되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전화신청전화를 신청하려고 전화국에 가서 알아보니 다행하게도 전화선이 지나가고 있어서 신청할 수 있었다. 며칠 뒤 전화국에서 와서 200m밖에 있는 전화선 전봇대에 연결해 주고는 200m 전선 두 덩어리를 던져 주고는 가버린다. 왜 집까지 설치해주지 않느냐고 물으니 그것은 우리 보고하라고 한다. 나는 캐나다같이 집안에까지 다 설치해주려니 했다. 200m 전화선 전주에서부터 우리 경로 원까지 사이에는 아무 전주도 없다. 그래서 나무를 사다가 중간에 두 개나 세우고 전화선을 달아 집에까지 와서 전화에 연결하였다. 시내 집들도 전화선을 집에 던져 놓고 가는 것을 본 적이 있는데 여기 전화국은 전화선 대에 이어주고 안에 일은 주인이 알아서 하는 나라였다. 전화선이 연결되자 컴퓨터에 연결하여서 모뎀으로 이제 인터넷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일할 사람을 쉽게 구하지 못해서 남은 일들을 빨리 끝내지 못하고 있어서 답답하다. 날씨는 추워 오는데 아직 겨울 준비가 안 되었고, 차가 없으니 시내를 왔다 갔다 하는 일이 몹시 불편하였다. 이곳은 일교차가 심해서 밤에는 날씨가 차서 그래서 오늘(10.22)부터 보일러를 때기 시작하였다. 아직 중국어가 너무 서툴러서 혼자 시장 일을 보는 것이 힘들었다. 이제 11월이 되어서 날은 점점 추워 오는데 페인트칠, 뒷마당 가축을 키울 집과 창고 짓는 일들은 언제 할 수 있는지 마음을 무겁게 하고 있었다. 이때 춘양 조선족 교회에서 청년들이 올라와서 화장실 배수로 2m 깊이로 40m를 파주어서 큰 도움이 되었다. 우선 우리 살 방이 정리되어서 침대와 소파 등을 사들여 놓으니 이제 좀 안정이 되어 가는 듯했다. 오늘에서야 짐을 완전하게 풀어놓을 수가 있었다. 이제 이 경로 원 살림을 맡아 줄 동역자를 주님이 보내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하였다. 오늘 처음부터 함께 일하던 채 부부가 갑자기 오늘 저녁에 가겠다고 한다. 우리는 놀랐다. 나는 그들을 불러 놓고 어떻게 사람 사는 것이 이런가? 우리에게 미리 알려주어서 우리도 준비하도록 해주어야지 자신들 생각만 하느냐고 나무랐다. 꼭 가려면 내일 저녁에 가라고 했다. 사람들이 예의와 순서가 없었다. 저녁에는 video도 같이 보고 교제하며 좋은 시간을 보냈다. 날은 추워 오고 시내 볼일을 보러 나가는 길은 불편하여 주님께서 차를 한 대 주시기를 기도했다. 날은 점점 추워 오고 있었다. 식구들이 벌써 10여 명이 넘어서 겨울 먹을 김치를 담그기로 했다. 돕는 몇몇 손길들과 함께 김장했다.

 

 

과일나무 준비

4. 4월이 되면서 천여 평이 되는 앞마당을 밭으로 만들어야 하는 큰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조 씨를 데리고 원춘에 있는 농업학교 종묘장에 갔다. 이 지역에서는 이곳에서만 과일 묘목을 살 수 있는 곳이고 한다. 묘목을 사러 온 사람들이 벌써 많았다. 나는 심고 싶은 사과, 자두, 살구, 앵두, 포도 묘목 모두 70주를 샀다. 아직 땅이 정비되지 않았고 심을 것을 정확히 정하기 어려워서 우선 한쪽에 임시로 묻어 놓았다.

 

땅 고르기와 개간 4.24-30

벽돌 공장의 불도저를 2000원에 쓰도록 했다. 며칠 동안 경로 원 옆 높은 언덕의 흙을 깎아내려 앞마당을 평평하게 밭을 만들었다. 그리고 경로 원 식구들과 땅을 고르고 씨를 뿌릴 준비를 하였다.

 

 

5월이 되어서야 과일나무를 심을 수가 있었다. 우리는 농사를 위하여 경운기를 한 대를 샀다. 오늘에야 밭을 갈고 찰옥수수 메옥수수 콩 감자 호박 오이를 심고 토마토 고추 고구마 묘를 사다가 심었다. 이제 한 해 농사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울타리 밖에 있는 풀밭은 개간이 마쳐지기까지 2년이 걸렸다. 아직 경로 원은 울타리가 없어서 마차를 가지고 와서 흙을 파가려고 하고, 뒷산 위에는 묘지들이 많아서 사람들이 경로 원 안으로 아무나 드나들어 번거로웠다. 그래서 나무 기둥을 박고 그물 철망을 사다가 둘러치고 철문을 달으니 이제야 안과 밖이 생겨서 안정되었다. 

 

나눔의 집 석양

하루 수고로운 삶을 내려놓고 피곤함 몸과 마음을 쉴 수 있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살아서 일할 수 있게 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김제화

jewhakim@daum.net

'중국선교 > 1999-2001 양로원' 카테고리의 다른 글

1. 씽롱전 경로원(兴隆镇敬老院) 3. 1999  (0) 2021.03.02
1. 자급자족  (0) 2021.03.02
3. 자급자족  (0) 2021.03.02
나눔의 집 꾸미기 2001  (0) 2021.03.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