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새해에 바라는 소원
중국에 정착한 지 세 번째 해를 맞이하지만, 아직 합법적으로 정착할 수 있는 조건을 찾지 못하고 있어서 간절한 기도를 주님께 드리고 있었다. 올해도 바라는 소원을 다음과 같이 적어본다.
- 합법적인 정착지를 허락해 주시기를
- 한족 학습 반을 정기적으로 가지도록
- 북한 빵 공장 계약이 잘 이루어지도록
- 이 겨울 동안 중국어 실력이 나아지도록
♣ 주님의 응답
주님은 새해 둘째 달 우리가 그토록 기다리고 있는 정착의 길을 열어주셨다. 목단강시 씽롱전(읍) 정부에서 우리와 경로원 문제를 의논하고 싶다는 소식을 목단강 시 정부 화교연합회를 통해서 전해왔다. 이 씽룽전 중예허촌(中也河村) 은 우리가 일본 제국주의가 망하기 전에 살던 곳이다. 화교연합회 간부와 함께 전 정부에 가서 전장(읍장)을 만났다. 자기네가 지금 재정 상태가 어려워서 경로원을 운영하기 힘들다고 나보고 도와주기를 청한다. 어떻게 도와주면 되겠느냐고 물으니 맡아서 해달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선 경로원을 가보기로 하였다. 우리가 경로원 가까이 이르자 세 남자가 신나게 뛰어나와 내 팔을 잡고 좋아하는데, 그들에게서는 독한 냄새가 나서 나를 역겹게 하고 있었다. 이들은 씻지 않아서 목에 떼가 꽤 제재하게 묻어 있고 입은 옷은 언제 빨았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내가 과연 이들을 위해서 살 수 있을까, 하는 의아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다섯 사람을 하루 두 끼니를 겨우 먹이면서 원장, 회계, 전장 조카인 식모 이렇게 국가의 공자(월급)를 받는 세 사람이 달려 있으니 비생산적이고 제정 낭비를 하고 있었다. 그 옆에는 수백 마리의 돼지를 키우는 공장이 있는데 그곳에서 오는 냄새는 어지럼증을 일으킬 정도로 심했다. 주변 자체 환경은 열악하고 불안정하여 더욱더 정이 가지 않았다. 모든 설명을 다 들은 뒤 한 주간 생각해 보겠다고 하고 돌아왔다. 나는 노인들을 모시고 사는 이런 경로원을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마음의 준비가 안 되어 있었고 할 자신도 없었다.
원래 이 경로원은 성 정부의 모범 경로 원으로 좋은 건물과 넓은 땅을 가지고 있었다. 제정 사정이 어려워지자 이 양로원 건물을 가라오케 사업을 하는 사람에게 30년간 세로 주면서 거기에서 나오는 건물세로 경로 원을 운영하려고 했단다. 그런데 몇 년을 잘 운영하던 사업이 주룽지 총리 정부가 들어서면서 국가공무원들의 부정부패 척결을 시작하자 사업이 안 되어 문을 닫게 되어서 형편이 더 어려워졌다고 한다. 노인들은 뒤 창고 같은 곳에 몰아넣어 잘 먹이지도 않으니 모두 달아나고 갈 수 없는 다섯 명만 남아 있는데, 세 남자와 한 여자는 는 정신이 좀 모자라는 사람들이었고, 나이 많은 할머니 한 분이 있었다.
처음 만난 경로원 식들
나는 전 간부들에게 운영이 어려우면 닫으면 되지 않느냐고 물으니, 자기들도 그러고 싶단다. 그런데 중국 정책이 지방정부 단위마다 경로 원을 운영하도록 법으로 정해져 있어서 못 없애고 이렇게 고민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이제야 그들의 사정을 알게 되었다. 우리 자신은 새로운 경로 원을 지을 형편은 안 되고 정부의 이름을 빌려서 가볍게 할 수 있는 좋은 점이 있었다. 나는 좀 생각해 보겠다고 결정을 미루었다.
돌아온 뒤 이른 아침 기도를 하려고 눈을 감으면 경로원 사람들이 마음에 떠올라 마음이 편하지 않아서 기도할 수가 없었다. 내 마음이 그런 사람들과 함께 산다는 것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기도하려고 할 때마다 그 냄새 나고 콧물을 질질 흘리며 떼가 쾌 제재한 그들이 떠올라서 기도가 방해를 받곤 해서 아예 기도하지 않게 되었다. 매일 기도를 하다가 기도를 하지 않으니 성령이 번거롭게 하시고 계셨다. 엿새째 기도하려고 이른 아침에 눈을 감고 무릎을 꿇었는데, 부르지도 않았는데 그 친구들이 또 떠오른다, 나는 주님께 주님의 뜻이면 이들과 살도록 해 보겠습니다. 하고 기도하자 내 마음이 그렇게 편안해질 수가 없었다.
거부감을 가지고 있던 내 마음이 경로 원을 하도록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아내에게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는데, 나의 아내는 이미 할 수 있다는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어서 놀랐다. 우리는 먹을 것을 사 가지고 다시 경로 원을 가보니 전에 좀 미나게(밉게) 보이던 친구들이 좀 이쁘게 보이고 친근감이 생겨서 손을 잡고 어루만져주게 되었다. 가져간 빵과 먹을 것을 나누어 주니 좋아들 했다. 떠나올 때 따라 나와 손짓하는 모습들이 이제는 좀 정겹게 느껴졌다. 큰 자금이 요구되지 않는 이런 일이 우리 형편에 부담이 없어서 좋은 것 같았다. 이 낯선 곳에서 중국 지방정부와 이만한 관계를 가지게 된 것도 주님의 축복이었다. 이제 주님께서는 고향 땅에 머물도록 인도하시고 계셨고, 언짢았던 경로 원 사역이 사명감 같은 일로 닦아 오고 있었다.
경로원 인수 계약 준비 3.30
오늘 두 부 전장들을 만나서 경로 원을 맡아서 운영하기 위한 구체적인 내용을 긴 시간 의논을 하였다. 그리고 합동 서(계약서)를 만들기 위한 내용을 대강 의논하는데 전 정부에서 현재 남아 있는 네 명을 무상으로 받아 달라는 것과 직원 세 명도 받아 달라는 요구를 하였다. 나는 수용자 네 명은 무상으로 받겠다. 그러나 직원은 안 받겠다고 거절하였다. 그리고 경로원 이름은 그대로 놔두어 달라고 해서 그러기로 했다. 경로 원을 종교 활동 장소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를 하였다. 그리고 투자는 인민폐 30만 원(U$4만)을 투자하기로 하였다. 이 정도 자금 투자로 장기거주 허가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은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아들이 남겨 놓은 자금이 이 정도는 되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우리가 경로원을 10년 운영을 하고, 만일 그때 가서 그만두게 될 경우는 모든 것을 그대로 전 정부에 주기로 한다는 내용으로 합동 서를 마무리했다. 먼저 중국어로 만든 다음 조선 글로 번역하여 검토하기로 하였다. 이제 우리 마음에는 경로 원에 대한 평안함이 가득하기 시작하였다. 이제 이 길은 주님이 주시는 길이라고 받아들이면서 여기서 복음을 위하여 살리라는 믿음과 희망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兴隆镇 敬老院(씽룽전 경로원) 인수 합동서(계약서) 서명식 4.29
전 정부에서 준비된 합동 서(계약서)에 서명을 하기 위하여 전 정부 회의실에 간부들과 함께 모였다. 대단한 일도 아닌데 이렇게 공식적으로 회의를 마련하다니, 좀 웃기는 일이다. 이제 전 정부 대표로 두 부 전장이 서명하고 내가 서명을 하자 모두 손뼉을 치면서 환영하여 주었다. 아울러 나는 오늘부로 싱롱전 경로원 원장이 되었다. 중국에 정착하고자 여러 곳을 다녀보았고 따뜻하고 정치 환경이 좋은 곳에서 살고자 노력하였지만, 주님께서는 이 추운 북방의 동토 내 고향에 정착할 수 있도록 해주셨다. 이제야 합법적으로 중국에 정착하면서 선교를 향하여 한 걸음 내딛게 되었다.
인수식을 끝내고 다시 찾은 경로원
경로원 인수인계오후 1:30에 두 부 전장과 전 정부 출납 등 몇몇 공무원들과 함께 경로 원에 가서 원장과 회계가 있는 자리에서 갑작스럽게 인수인계가 이루어졌다. 원장은 이미 쓸 만한 물건들은 다 가져간 상태였다. 출납이 전에서 공급한 물건들을 확인 대조하기 시작했고 이 시간 이후에는 아무도 물건에 손 못 된다고 경고했다. 웃기는 일은 부엌 물건을 대조하는데 다 낡고 하나짜리 녹슨 Gas stove도 원장이란 사람이 제 것이라고 하고 gas 통 두 개도 전에서 사준 것이 아니라고 챙기고 있었다. 지금 원장이라고 하는 자는 전임 전장의 친척이 된다고 하는데 노인들을 등에 업고 그동안 많이 뜯어먹은 것 같았다. 마지막에 찌그러진 세숫대야도 자기 것이라고 챙기는데 공무원들도 모두 놀라는 눈치였다. 인수인계가 끝나자 그저 얻어먹고 살던 직원들이 모두 떠나갔다. 미안하지만 우리 때문에 졸지에 실업자들이 되었다. 전 정부에서도 이 사람들을 처리하지 못해서 그동안 골치를 앓아 왔는데 속 시원하다고 했다. 이제 우리가 주인이 된 것이다. 당장 저녁을 해 먹여야 하므로 강이 아버지를 데리고 시내에 나가서 가스스토브와 가스 두 통을 사서 급히 들어왔다. 수도 물이 안 나와서 한 달 전부터 바보 아이들이 멀리 가서 물을 길어 오고 있었다. 갑자기 부엌일을 해 줄 직원을 구하지 못하여 하남의 이 형제 부부를 불러서 당분간 일하도록 했다. 으스스한 분위기이지만 대강 준비한 저녁을 한 상에서 함께 먹으면서 마음들을 달랬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시내에서 만토우(馒头, 찐빵)를 찔 솥과 부식 등을 사 가지고 들어가니 놀랄 일이 있었다. 부엌이 열쇠로 잠겨 있는데 원래 식모가 와서 열려 있는 창문으로 넘어 들어가려고 하자, 원생들이 집안에 사람들이 있으니까 말하라고 하자 듣지 않고 그대로 넘어 들어갔단다. 마침 채 자매가 나아와서 보고는 몹시 나무라고 부엌에서 쫓아냈단다. 얼마나 무례하고 경우가 없는가! 무엇인가 가져가려고 왔을 텐데, 말이라도 하지, 이 젊은 식모는 지금 여자 전장의 조카였다.
경로원 환경오후에 서쪽 바람이 불어오니 옆에 있는 양돈장에서 나는 냄새가 독해서 사람 살 곳이 아니었다. 이름만 있지 실제로 경로 원의 건물이나 땅도 없는 유령 단체나 다름없었다. 이곳 전 정부의 경로원의 처지는 몹시 불안정하고 앞일이 밝지 않았다. 또 머지않아 고속도로도 난다는데 이 부근 일부가 없어진다고 하지, 현실은 어수선하고 불안정하기만 하다. 정부는 나에게 투자하여 무엇인가를 해 주기를 바랐다. 나는 여기에다가는 아무것도 투자할 수 없으니 새집을 지을 터를 내놓으라고 요구하였다. 만 전장이 새 터를 보여주겠다고 나를 데리고 동촌 향 조선족 중. 소학교에 갔다. 한 운동장 안에 중학교 소학교가 있었다. 조선 학생들이 넘치던 이 학교도 아이들이 없어서 중학교는 2년 전에 이미 문을 닫았고, 이 소학교는 올 7월 학기가 마쳐지는 대로 문을 닫는다고 한다. 중학교 건물은 지은 지 4년이 되는 새 건물이고, 소학교는 오래된 낡은 건물이었다. 운동장은 10,000㎡이나 되어서 경로 원을 하기에는 적당하였고 지역과 환경도 마음에 들었다. 이 학교를 전 정부가 백만 원에 넘겨받았다고 이것을 팔아야 전 정부 재정을 해결할 형편이란다. 학교에 남아 있는 조선소학교 세분 여선생을 만나보니 월급이 3개월 치가 밀려 있다고 한다. 한 분은 학교가 닫히면서 은퇴를 하게 되고 두 분은 다른 학교로 가게 된다고 하면서 평생을 가르치던 학교가 없어지게 되어서 섭섭하다고 하였다. 다음 날 전 정부에서 불러서 가니 나에게 집을 짓도록 구해줄 땅이 없다고 하면서 동촌 학교를 70만 원을 내고 사용하기를 권한다. 나는 20만 원을 내고 10년 뒤에 그대로 돌려주겠다고 제안하였다. 그들은 다시 40만을 요구했다. 나는 30만을 줄 테니 20년 사용할 권리와 독자 운영권을 요구했다. 두 부 전장은 전장과 의논해 보겠다고 했다. 터는 마음에 들지만, 중국은 내 이름으로 땅을 살 수 없어서 재산권 행사가 안 되는 여기에 무리한 투자를 해야 할 일은 없었다.
목단강 처소(가정교회) 부활주일
주님께서 정착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시는 동안 목단강 처소는 조금씩 발전하고 있었다. 오늘 부활주일에는 한 20여 명이 모여서 방을 가득히 채웠다. 인생이 한번 태어나서 살다가 죽으면 끝인 줄 알고 살던 사람들이 다시 산다는 이 소식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자다가 봉창 터지는 소리로 들렸다. 그러나 성령의 감동을 받는 사람들은 기쁨으로 받고 아멘하고 있었다. 인간의 의지로 믿는 것은 위로부터 오는 믿음이 아니어서 깊은 확신과 기쁨을 누리지 못한다. 그러나 인간의 의지로 믿은 것이 어느 날 성령의 감동으로 믿어질 때 굳건한 반석 같이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된다. 무신론 사회 주위 교육을 받으면서 삶이 이 세상뿐인 줄 알고 살던 사람들이 내생이 있다는 것을 알고 믿는다면, 이제부터 이 세상에서 되는대로 살면 안 된다. 믿음으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사람들은 행함이 있는 아름다운 삶을 살아야 한다. 행함은 믿는 것을 보여주는 삶이다. 죄와 욕심을 떠나 주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을 잘 살아야 할 일에 관해서 진지하게 나누었다.
또쌍춘(稻香村)
강남 조선족 촌에 속한 또썅춘이란 곳이 산 밑에 자리 잡고 있는데 사람이 살고는 있지 않았다. 그곳에 강남 조선족 촌에서 식당을 운영하다가 문 닫아 놓은 건물이 있었다. 나는 그 식당을 수리해서 양로원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강남 촌 동 촌장에게 우리가 수리해서 양로원을 하고 싶다고 의논을 했더니, 촌장은 전 정부에 먼저 의논해 보고 좋다고 하면, 촌민위원회에서 의논해 보겠다고 했다. 전 정부에서는 계약한 대로 30만 원을 투자해 주기를 독촉하지만, 나는 그들에게 투자할 곳이 없다고 버티고 있었다. 거의 한 달간 경로 원 새 장소 문제로 골몰하며 시간을 보냈다. 오늘 촌장이 내게 들려준 소식은 전 정부에서 내가 강남 촌 또썅촌 건물 사용을 반대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 뒤 촌장이 부 전장들을 불러서 한바탕 먹이고 마시게 한 뒤, 좋다고 하는 연락이 왔다고 알려왔다. 촌민위원회에서도 고향에 와서 좋은 사업을 하려고 하는 나의 뜻을 만장일치로 받아 주었다.
강남 촌과 합동(계약) 체결 6.8
강남 촌과 합동 서를 만들기 위하여 촌 사무실에서 촌장과 의견을 나누면서 합동 서를 만들었다. 식당 건물을 대폭 수리하여서 10년을 쓰는데 한해 만 원의 사용료를 내겠다고 제안하였다. 그러나 촌장은 15000원을 내라고 한다. 나는 생산하는 사업을 하는 것도 아니고 오갈 데 없는 노인들을 먹이고 입혀야 하는 자선사업으로 더 내기 어렵다고 하자, 만 원에 하기로 했다. 다음 날 강남 촌 반공 실(사무실)에서 완성된 합동 서를 다시 읽어보고 촌장과 여러 촌민 위원들이 있는 가운데 촌장과 촌민 위원장과 그리고 내가 합동 서에 서명함으로써 건물과 10000㎡의 땅을 앞으로 10년간 우리가 사용하게 되었다.
그리고 주변에 버려져 있는 1000㎡ 땅도 사용할 수 있게 되어서 땅은 제법 넓게 차지하였다. 이 땅을 개간해서 농사를 지어 어느 정도 자급자족을 할 생각이다. 강남 촌의 초청으로 이 교장 등 촌 간부들과 함께 시내에 나가서 대접을 받았다. 이제 중국 선교를 위한 정착의 새 시대를 맞이하고 있었다. 우선은 식당 건물을 수리하여 양로원으로 바꾸는 일을 위해서 공사를 해야 하는 큰일이 남아 있었다. 다음 날 촌장과 함께 또썅촌에 가서 닫혀 있는 식당 문을 열고 그릇, 냉장고, 밥상, 등을 인수하고 열쇠를 건네받았다. 이로써 이제 우리가 주인이 된 것이다. 수리는 자기네 건축 대(팀)를 써 달라는 부탁을 했다. 서로의 관계를 좋게 하려고 그렇게 하기로 했다. 반공 실에 돌아와서 한족이 하는 건축 팀과 공사 가격 흥정을 했다. 나를 도와줄 강이 아버지도 건축에 대해서 잘 몰라서 알아보고 연구 끝에 우리가 원하는 대로 수리 전체를 7만 원에 하기로 계약했다. 건축 대와 수리 도면을 놓고 논의하고 합의한 뒤 계약금 4만 원을 주었다. 강이 아버지가 감독으로 돌 보아주기로 했다.
김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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