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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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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하남 촌 평양진 하남 촌하남 촌은 계동 현 평양 진에 있는 유일한 조선족 마을이다. 약 160호로 이루어진 마을은 넓은 들녘에 자리하고 논농사를 주업으로 하고 있으며, 쓰러질 것 같은 초가삼간 오막살이를 면하지 못하고 사는 가난한 농촌이었다. 동서남북 3-10Km 거리의 들녘과 산밑으로 드문드문 있는 한족 마을들이 저 멀리 둘러 있었다. 여러 중국 마을 사람들이 읍내에 가려면 이 조선족 마을을 지나야 만 했다. 마침 조선족 마을이 들 가운데 길목에 자리 잡은 탓으로 가끔 민족 싸움이 일어난다고 했다. 북쪽에는 높은 산이 가로막고 있는데 그 넘어가 러시아라고 한다. 나는 하남 촌에서 7일 동안 성경집회를 하였다. 목회자라고 와 본 적이 없는 이곳에 내가 8일간이나 머물면서 강습회를 하자 모두 감격하고 고마워했다..
8. 전진 촌 계동현 계림조선족 자치향 전진 촌 6월 11일 오후 2시 30분 전진 소학교 교감이신 권종수 집사님이 나를 데리러 오셨다. 나를 놀라게 한 일은 타고 오던 노선 소형 버스를 전세해서 나를 데리러 왔다. 중국에서는 이런 일도 가능하다니 놀랍기만 하다. 떠날 때 김 형제도 같이 가겠다고 따라나섰다. 정든 성도들의 흔드는 손길을 받으며 마을을 벗어나 다시 들어올 때 검문소에 서서 검문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속으로 이 순간을 피하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마침 근무를 마치고 퇴근하는 경찰관이 기사와 아는 사람이었다. 그 경찰관이 타고 함께 가게 되어서 검문은 필요가 없었다. 놀라운 주님의 은혜였다. 한 20 Km을 달려서 전진에 도착하였다. 이곳의 행정구역은 계동현 계림조선족 자치향 전진 촌이었다. ..
9. 목단강 시 오늘 리화가 직장에서 목단강시 정부의 왕 국장이 나를 만나고자 한다는 소식을 리화가 가지고 왔다. 오후에 시에 가서 만났다. 내가 캐나다에서 온 줄 알고 사업가들을 소개해 달라는 부탁과 함께 나에게도 목단강에 투자하면 여러 가지 좋은 혜택이 있음을 알려 주었다. 바로 이 만남을 통해서 나는 정부 관리들을 상대로 교육, 사회복지 시설을 설립하는 일에 대해서 다양하게 대화하기 시작했다. 연길서부터 마음에 싹터 오던 교육 또는 사회사업 시설을 설립하여 정착하고자 하는 마음이 구체화되기 시작하였다. 나는 중국에 도착하면서 어떻게 중국에 합법적으로 거주하면서 주님 일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깊이 잠겨 기도하면서 목단강까지 온 것이다. 이곳에서 나의 선교 전략의 청사진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것은 합법적으로 정..
10. 경박호(镜泊湖) 북국의 서호(北國的西湖) 경박호 6. 1994목단강시에서 경박 호까지 거리는 110킬로 정도. 경박호는 옛날부터 수면이 거울처럼 맑고 고요하여 명나라 때부터 경박 호라고 불렀다. 경박 호는 독특한 호광산색(湖光山色)과 자연적인 매력으로 중국 44개 관광 명승지 중 하나이다. 중국의 개혁개방을 이끈 지도자 덩샤오핑(鄧小平)이 1983년 8월 11일 경박호에서 피서를 즐기면서 [뛰어나게 아름다운 경박]이라는 뜻의 ‘경박승경’(鏡泊勝景)이란 친필 휘호를 남겼다. 2006년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으로 등재되면서 세계적인 관광 명소로 이름을 알리게 됐다. 경박 호는 세계에서 몇째 안 가는 아름다운 호수라고 한다. ▶호광호색(湖光山色)-호수의 빛과 산색이 어우러져 이루는 아름다운 경치 경박호 관문 오른편 바위벽에는 ..
11. 상경 용천부(발해 제 3 수도)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 고구려가 망하고 대조영 장군이 이끄는 고구려 후손들이 이곳의 주민들인 말갈족(거란, 여진)을 굴복시켜 698년 발해 나라를 세웠다. 발해는 5곳의 서울이 있었는데, 목단강 영안시 발해전에 있었던 상경용천부는 세 번째 서울로, 문왕이 757년 처음으로 이곳을 옮겨와서 926년 요나라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발해의 중심지가 되었다. 처음 내가 가 보았을 때 발해국의 옛 왕궁터인 상경용천부는 아무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저 박물관 하나가 빈터를 지키고 있었다. 발굴된 유물들을 전시한 박물관에서 그때 그 시절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었다. 그리고 몇 년 뒤 동북공정이란 역사 왜곡 사업이 시작되면서 울타리를 치고 한 2년 공사가 끝날 때까지 박물관은 문을 닫아 놓았다. 한국서 친..
3. 세 번째 선교여행 9.1995 이번 세 번째 중국 선교여행은 먼저 중국과의 접경지역인 소련의 동아시아지역(연해주)에 가서 그곳에서는 어떻게 선교를 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했다. 그리고 소련 쪽에서 중국을 향한 선교의 가능성도 알아보고자 하는 마음으로 먼저 하바롭스크를 찾았다. 그리고 중국으로 들어가도록 계획했다.♣ 소련의 극동, 연해주 방문 내용은 ‘소련 단기 선교’ 에서 다시 찾은 하남 촌1년 5개월 만에 다시 찾은 하남 가정교회는 식구들도 좀 늘고 꾸밈새가 있어서 보기가 좋았다. 처음 왔을 때는 고사리 뜯는 철이 되어서 바쁘더니, 이번에는 바쁜 추수철이었다. 그래서 평일 낮에는 모일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주말에는 거의 추수를 마치게 되어서 주일과 월요일은 풍성한 시간을 가졌다. 처음 왔을 때는 처소 주위에서만 맴돌았지만, 이번에는..
4. 네 번째 선교 여행 4.1996 1996년 4월 나에게는 생사를 결정짓는 것 같은 심정으로 네 번째 중구 선교여행을 떠났다. 지난 캐나다의 긴 겨울은 주님 앞에 기도하는 인내의 시간이었다. 중국에서 살아야 할 이 사람이 갈 길을 가지 못하고 이렇게 답답한 세월을 보내면서 할 일 없는 캐나다에서 보내고 있음이 안타깝기만 하다. 중국 선교는 한다고 나섰는데 떠나지 못하고 있는 내 형편이 주위에 있는 다른 사람들 보기에도 그렇고 점점 어색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선교 모금을 할 만한 형편도 되지 못한 처지였다. 토론토에 있는 Seminary를 졸업하다 보니 동창 관계도 그렇고, 그렇다고 목회하고 있는 한국 친구들이 많은 것도 아니고, 또 재산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세상 적으로 보면 선교사로 나갈 아무 준비도 없는 사람이 ..
12 중국 선교 여행을 마치면서, 하얼빈(哈尔滨) 하얼빈이란 이름은 “그물 말리는 곳”이란 뜻으로 송화 강가의 조그만 어촌이었다. 1898년 청나라로부터 철도 부설권을 획득한 러시아가 하얼빈에서 대련을 잇는 철도 건설의 기지로 사용하면서 근대 도시로 개발된 곳이다. 인구 200만의 흑룡강성의 서울이며 교육, 상업, 공업 중심도시이다. 하얼빈은 우리 한국 근대사와 여러 가지로 얽혀 있는 곳이다. 하얼빈 역은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조선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가 탄 기차가 하얼빈에 도착하였다. 열차 안에서 러시아 재무대신 코코프체프와 회담을 마친 뒤 9:30 분 경 러시아 군대의 사열을 받기 위해 차에서 내려서, 사열을 마치고 열차로 돌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