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단강 정착 10. 30, 1996
목단강시 牡丹江(Mǔ‧danjiāng)
아들을 먼저 하늘나라로 보내고 허전한 우리의 마음은 중국 선교에 대한 기대로 채워지고 있었다. 우리는 모든 염려와 시름을 뒤로하고 서울로 나가는 날틀에 몸을 실었다. 마침 우리 옆자리에는 사고 차에 탔다가 중상자가 된 홍현주 어머니와 함께 자리하게 되어서 위로해 드리며 태평양을 건넜다. 한국에 머무는 두 주 동안 양가 형제들과 주안에 형제자매들로부터 위로와 사랑의 선물들을 받도록 해 주셨다. (동생 정희와 은영 100만, 이희만 10만, 김종덕 $200, 김명근 10만, 강북교회 10만, 박상호 30만, 박영호 10만, 박석호 50, 큰 처형 7만, 수원 처형 10, 순호 처제 10만)
김포공항 9.30,1996
정교수와 그 교회 두 여 집사가 우리를 전송하여 주려고 나와 주셨다. 목에 털이 달린 겨울 세무 잠바와 금 십자가 목걸이 그리고 $200을 주면서 우리를 보내주었다. 고마운 분들이었다. 우리는 주님이 주신 사랑의 선물을 가득 안고 북경에 내렸다.
북경공항
목단강 가는 날틀을 갈아타는 과정에서 짐이 많아서 초과분 짐 값을 내는데 얼마의 잔돈은 아예 줄려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 내가 중국어로 잔돈은? 하니까, 미안하다거나 줄려는 노력은 하지 않은 채, '잔돈이 없다.'. 하고는 그만이다. 말하지 않으면 그저 떼어먹는 것 같았다. 거스름돈이 많든 적든 정확히 계산해 주는 것이 상거래의 기본인데, 하물며 중국의 수도 북경 국제 국제공항에서 그것도 외국 사람에게 이런 일이!!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다.
목단강 공항
목단강 공항에는 어두워져서 내리게 되었는데, 우리는 서울서부터 반 팔 옷을 입고 왔는데, 날틀 문이 열리자 싸늘한 북방의 찬 바람이 우리를 움츠러들게 했다. 여기는 초겨울 날씨다. 긴 입국 절차를 끝내고 밖에 나오니 미화 자매가 차를 가지고 와서 기다리고 있어서 반가웠다. 짐 때문에 좀 늦게 나와서 차에 짐을 싣는데 비행장 마당에 불이 다 꺼져버린다. 어두워진 마당 여기저기서 아우성들이다. 아직 사람들이 다 떠나지도 않았는데 공항 광장 불을 꺼서 혼란하게 만드는지 이해가 안 되었다. 마침 미화가 순 전등을 가지고 있어서 그런대로 짐을 챙겨 실었다. 이제 우리는 중국에 방문자로 온 것이 아니라 살려고 이사를 온 것이다. 처음 온 아내가 이 낯선 중국에서 잘 적응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앞으로 될 일들은 주님께 맡기고 인도하심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 우리의 남을 삶을 여기서 바치려고 하오니 주여 인도하여 주소서, 아멘
중국에 오자마자 갑작스러운 북방의 추운 날씨로 몸살감기가 들어서 우리를 힘들게 하고 있었다. 지금 임시로 리화 아파트에 있지만, 더 추워지기 전에 살 아파트를 구하여야 했다. 영안 시가 가까운 환쟈 향에서 유치원을 하면서 사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서 리화와 환쟈 향에 들려서 간부들과 인사를 나누고 영안시를 가보았지만 마땅한 아파트를 찾을 수가 없었다. 중국에 이사 온 지 며칠 안 되어 캐나다에 계시는 최상봉 목사님 부부와 한국에 계시는 장로님 부부가 연변 왕청에 오셨다가 방문하여 주셔서 큰 위로가 되었다. 우리가 일할 지역인 강남과 환쟈 향을 둘러보시고 사랑의 교제 $300을 주시고 떠나셨다.
새 아파트로 이사 10. 12
오늘 西平安街와 东西4条路 도매상 뒤 편에 있는 아파트가 마음에 들어서 오늘 계약을 하였다. 월세는 600원에 일 년 살기로 했다. 리화 직장 차로 이삿짐을 싣고 새 아파트로 이사를 하였다. 이제 중국에서의 생활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릇들을 사고 살림 장만을 하였다. 중국에 온 날로부터 지금까지 소화기관에 이상이 있고, 편두통이 계속 있어서 이름 있다는 조선 한의사에게 진맥하고 저주파 검사를 받았다. 위가 약하고 동맥경화증이 있다고 투석을 받으라고 권하여 나를 놀라게 했다. 오늘 혈압을 재니 100으로 지난번 보다 내렸고, 어제까지 심하던 오른쪽 목이 뻐근하고 오른쪽 편두통 증세가 좀 사라지고 있어서 마음도 가벼워지고 있었다.
첫눈 10. 25
밤새 눈아 내려 온 세상을 하얗게 만들었다. 눈이 이렇게 일찍 내리다니! 중국에 와서 처음 맞이하는 눈이다. 캐나다에서 은하가 보낸 소포가 와서 혼자 우정국에 찾으러 갔더니 말이 많고 통하지 않아서 리화 직장에 가서 리 과장과 함께 갔다. 소포를 찾는데 여권을 확인하고 얼마나 복잡한지 짜증스러웠다. 소포를 찾으니 아이들을 보는 듯 반가웠다. 큰 손녀 Michelle의 유치원 큰 사진이 얼마나 귀여운지 응접실에 놓고 아침에 방에서 나오면 제일 먼저 맞이하여 주면서 인사를 하였다.
중국어 공부 시작 11.6
우리가 중국에 살면서 중국 사람들을 상대로 선교를 해야 하므로 중국어를 꼭 배워야만 했다. 욕심 같아서는 하얼빈에 있는 대학에 가서 정식으로 중국어 과정을 한 2년 공부하고 싶지만, 우리의 형편이 여의치 않아서 아주 아쉬웠다. 그래서 개인 교습을 받기로 하였다. 강남 소학교 중국어 선생인 이향옥 선생 집에 저녁에 가서 중국어를 한 시간씩 배우기 시작하였다. 눈이 천지를 하얗게 덮은 오늘(11.11) 조선 아주머니 네 분이 찾아오셨기에 복음을 전했다. 그 가운데 사범학교 송 선생이 마음이 기쁨이 생긴다고 큰 관심을 보였다.
아멘 선교 팀 11. 20 수.
연길에서 오산에 있는 아멘 선교팀이 열차로 목단강으로 왔다. 예정된 대로 동쪽 소련 변경 동녕으로 가는 작은 버스를 탔다. 한 분이 화장실을 가고 싶다고 하여서, 남자 차장에게 말하니 조금만 나가서 세워주겠단다. 시내 외곽 한 차 수리공장에 차를 세워 간단한 수리를 한다고 하였다. 화장실을 물으니 저 앞이라고 가리키기만 한다. 앞에 가보아야 없다. 다시 와서 물으니 우리를 데리고 자전거들이 세워져 있는 벽에서 볼일을 보란 이야기였다. 날은 어두워졌지만 환한 불빛은 불과 30m 뒤에는 탄 차가 우리를 보고 있었다. 한국 분이 이런 데서 소변을 보는 일에 습관이 되지 않아서 안 되겠다고 하여서 데리고 캄캄한 데로 데리고 가서 볼일을 보게 했다. 여기 환경이 이렇게 어려웠다. 내가 중국에 살면서 겪는 일 가운데 하나는 버스들이 손님들의 편리를 위하여 편하게 화장실을 가도록 편의를 제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차를 타고 가다가 손님이 청하면 가다가 선다. 중국 사람들은 뒷바퀴에 가서 후딱 볼일을 보고 타는데 나는 너무 힘들었다. 그 당시 장거리 버스를 탄다는 것은 너무 힘든 일이었다. 또 나무 한 그루 없는 허허벌판에 가다가 차를 세운다. 남자들은 알아서 볼일을 보는데, 여성들의 문제는 참 힘든 상황이다. (여러 해가 지나면서 이런 일 불편은 거의 없어졌지만 농촌 차는 보장이 없다) 그래서 그 당시 나는 버스를 타는 날은 물을 잘 마시지 않고 조심했다. 동녕에 늦게 도착하여 김 종교국장과 심우봉 형제가 우리를 맞이하여 주었다. 다음날 우리는 김국장과 경제적으로 어려운 가운데 있는 한족과 조선족 교회당 지어주는 일들을 의논하였다. 아멘 선교회를 이끌고 있는 이진선 회장은 꼭 필요한 곳이 있으면 앞으로 돕겠다고 하면서 $100을 주시고 일행은 소련으로 떠났다.
눈 속에 우산
지난밤부터 눈이 아침까지 펑펑 내리고 있어서 우산을 들고 인민공원에 아침 운동을 하러 갔는데,그 많은 사람(공원, 시장, 출근길)가운데 우산을 쓴 사람은 나 외에는 아무도 없다.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오전 리화와 환쟈 향에 가면서 왜 눈이 그렇게 오는데 우산은 안 쓰느냐고 물었더니, 중국 사람들은 눈 올 때는 우산을 쓰지 않는단다. 환쟈 향에 가서 간부들과 만나서 유치원에 대해서 의논하는 가운데 알게 된 것은 중국 교육법에 모든 교육 기관의 장은 중국 국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강남 소학교 시청각 교재 후원 11.30
내 마음에 늘 남아있던 동심의 세계 그 현실을 그리 아름답지 못했지만, 그곳에 조선족 소학교가 있는 것을 본 뒤 무엇인가 민족교육에 좀 도움이 되었으면 하고 생각하던 가운데 열악한 교육환경을 돕기 위하여 시청각 교육재료로 금성 TV와 비디오(4240원+1400원)를 사서 주었다. 오늘 증정식을 한다고 오라고 해서 갔더니 한 교실에 책상을 사각형으로 놓고 다과를 준비해 놓고 학생대표들과 선생님들이 모였는데, 먼저 학생대표가 우리 목에 붉은 수건을 메어주었다. 붉은 수건은 혁명 열사들의 피를 상징하는데 소학교 학생까지는 학교에 올 때는 모두 의무적으로 매고 다닌다. 이 붉은 수건을 목에 메어 줄 때 기분이 좀 이상했다. 그리고 학생대표가 감사의 말을 하고 학교에서는 대나무로 만든 족자에 만리장성이 그려진 선물을 주었다. 보람 있고 재미있는 하루였다. 이 일로 여러 선생과 촌 간부들을 알게 되었다.
유치원 허가장 12.4
아침 화교연합회에서 전화가 왔는데, 환쟈 향에서 유치원 허가장을 받아 주겠다고 오라는 소식이다. 리화와 내려가서 향장과 영안 시 교육위원회에 갔다. 원래는 가 허가장을 주고 건물이 완공한 뒤에 정식 허가장을 주는 것이 원칙이지만 김 선생께서 꼭 유치원을 해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미리 정식 허가장을 주는 것이라고 교육위원회 관계자가 말했다.
아들의 교통사고 보험금
오늘(12.90 캐나다에서 딸 은하가 기쁜 소식을 보내왔다. 아이들 교통사고로 가해자 보험회사에서 희생자 유족에게 보상금을 준다는 소식이다. 우리 두 사람에게는 각각 $1,3000씩 나오고 누나인 은하에게는 $5,000 이 나왔단다. 청년지도 담당자가 빌려온 Van은 보험 기간이 지난 차로 사고가 뒤 아무 보험 혜택을 받을 수가 없었는데, 캐나다는 무과실 보험이라고 해서 잘못이 없었더라도 인도주의 차원에서 보상해 주는 제도가 있어서, 우리 측 변호사가 컨테이너 회사의 보험사에 요구해서 이런 보상을 받게 된 것이다. 그토록 기도하던 선교사업의 자금이 아들의 희생으로 가능하게 되어가고 있었다. 이것을 두고 하나님의 응답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지! 아들 혁이의 희생이 중국 선교의 밀 알이 되고 있었다. 주신 자도 여호와 이시고 거두시는 자도 여호와 이시니 우리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으랴마는 전능자가 하시는 일에 우리는 토를 달아서는 안 되며, 그저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아멘, 할 뿐이다.
석탄 연기 속에 묻힌 목단강 시내 12. 1996
시내는 석탄 연기로 자욱하여 앞을 보기가 쉽지 않다. 목단강은 구릉 지대여서 바람이 불지 않으면 공기가 빠져나가지 못하여 이런 현상이 생기고 있었다. 화력발전소와 길거리에 연이어 자리 잡은 노점상 가게에서 뿜어져 나오는 석탄 연기가 이 현상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길에 나서면 석탄 연기 냄새가 코를 찌르고 있었다.
오늘은 아멘 선교회의 부탁으로 동녕 한족 교회당 짓는 일을 의논하기 위하여 동령으로 떠났다. 시내를 벗어나니 연기도 없고 공기가 얼마나 신선한지! 오후에 도착하여 허름한 한족 기독교당에 들어가니 작은 방에서 6명이 해바라기를 얼마나 까먹었는지 바닥이 쓰레기장같이 해놓고 있으면서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정말 한심하고 딱한 백성들이었다. 교회 대표자 6명과 동명 한족 기독교 예배당을 짓는 일에 대해서 의견을 나누었다. 나는 한 500여 명이 들어가는 건물을 지을 것을 권하니, 리페이칭이라는 자매가 천여 명이 들어가는 이 층 예배당을 지어달라고 한다. 나는 작게 짓고 넘치면 동서남북에 예배당을 지어서 기독교가 널리 퍼지도록 하면 좋지 않겠느냐고 설득하였는데, 중국 사람들은 금방 불어난다고 큰 집을 요구해서, 여러분이 큰 교회당을 가지면 정부에서 목사를 보낼 텐데 그러면 여러분들이 마음대로 교회 운영을 못 할 텐데 그래도 좋으냐고 물으니 말들이 없다. 특히 리 자매가 억지스러웠다. 다른 사람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는데 자기가 교회의 대표라도 되는 듯 독판 치고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 사람들이 욕심은 많아서 자금이 그냥 굴러 들어와 지어지는 줄 알고 있는 사람들 같았다. 분수에 지나친 사람들이었다. 일단 그만두기로 하였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나도록 그 한족 교회는 예배당을 짓지 못하고 교인은 250여 명으로 일어서지 못하고 있었는데, 다른 지역에 허가받은 교회가 두 곳이나 서게 되었다) 2015년 우리 양로원 부엌일을 하시던 노 자매들 세 분이 동녕에 살고 계셔서 우리가 찾아가 뵙고 리페이칭 자매도 함께 하게 되어서 그 교회 주일에 함께 했는데 교인 수는 여전히 250여 정도였다. 리 자매에게 지난날 이야기를 했더니 쑥스러워했다. 종교 국 김국장과 만나 저녁 식사를 하면서 동녕에 일꾼이 정해지면 조선족 교회당을 짓도록 도와달라는 말을 해서 반가웠다. 김 국장은 재미있는 분이다. 자기가 누구보다도 전도를 많이 한다고 하였다. 어떻게 전도를 하였느냐고 물으니, 외국에서 들어오다가 압수된 성경과 미국의 중국인 교회 목사의 녹음테이프를 현(군) 지도자들에게 기독교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 읽어보고 들어 보라고 하면서 준다고 했다.
무례한 공안원
밤이 깊어서 형제와 나는 호텔에 들었다. 밤 1시나 되었는지 방문이 갑자기 꽝하고 열린다. 자다가 깜짝 놀랐다. 문은 열린 채 아무 기척이 없다. 한참 들여다보다가 별 볼일이 없으니까 그냥 닫고 가버린다. 공안원이 복무원을 데리고 와서 검문하는 것이다. 얼마나 무례하고 비인격적인가! 노크도 없이 도둑이라도 잡는 양 벼락같이 들어오려고 하고 있었다. 밤새 콧물감기가 발전하여 열이 나고 있었다. 대기실에서 두 시간이나 기다려 돌아오는 버스를 탔는데 견디기 힘든 하루였다. 동녕에 있는 조선족 형제들이 나하고 학습을 하도록 날짜를 정하고 약속해 놓고도 하얼빈으로 학습을 간다고 다음에 하자는 소식이 왔다. 저들은 더 이익이 되는 곳이라면 언제든지 약속은 깨는 친구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렇게 모두 안정하지 못하고 얻어먹는 사람같이 부단히 쏘다니고 있었다. 아마도 경제적으로 얻게 될 선물들이 더 관심이 많은 것 같다. 오늘은( 12. 21) 동짓날이다. 캐나다에서 살다 보니 절기에 대해서 잘 모르고 살아왔는데 여기 오니까 그 옛날 어렸을 때 생각이 났다. 지난 15일 자매가 캐나다로 떠나고 혼자 지내고 있는데, 미화 집에서 동지 페끼(팥)죽을 먹으러 오라고 불러서 말씀 교제를 하면서 하루를 보냈다. 저녁에는 만두(쬬오즈, 饺子)를 만들어 먹으면서 동지의 하루를 마쳤다. Christmas Eve 눈이 내리는 멋있는 밤인데, 중국에서는 멋있는 White Christmas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음산하고 어두운 밤이다. 중국은 국가적으로 25일이 공휴일이 아니다. X-mas card나 Three는 어디에도 없다. 그저 교회당 안에 가야 크리스마스를 볼 수 있는데, 산타가 더 크게 나타나고 있었다. New Year 카드는 많은데 주로 청소년들이 즐기는 것이라고 한다. 이 좋은 저녁 중국은 고요하기만 하다. 중국의 북방 추위는 나에게 내복 위에다 두꺼운 바지를 껴입고 모자를 쓰고 움츠리고 걷게 하고 있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모습이 점점 중국 아바이(노인)가 되어가고 있었다. 추운 데는 장사가 없는 것 같다.
1996년 보내면서,
1979년 1월 내가 영국 Chelston Bible College로 떠날 때 공항에서 송찬호 형제가 우리 집사람이 있는 자리에서 사라져가는 내 뒷모습을 보면서 “돈키호테” 같다고 말했다고 한다. 나는 그런 기질을 좀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새로운 환경 속에 대책 없이 뛰어들어 보는 과당 성이 있다. 그 뛰어든 현실 속에서 고난과 고뇌를 감당하면서 드디어 무엇인가를 만들어 내는 것을 보게 된다. 중국에 뛰어든 이 사건이야말로 그러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후원의 약속도 없이 빈손으로 중국을 드나들기 네 차례 하나님의 선하신 인도하심을 경험하였다. 그리고 주님은 우리가 가는 길에 함께 하신다는 확신을 하게 되었다. 땅도 계약하고 허가장도 받아 중국에 정착할 준비가 되었다. 유치원을 어떻게 짓느냐 하는 일은 나중 문제이다. 이제 중국에 정착할 수 있는 기본적인 준비가 되었으니 이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 아닌가! 앞일은 우리는 모른다. 여기까지 오게 하신 주님께서 다음 길을 가게 하시리라 믿을 뿐이다. 우리는 지금 하나의 큰 작품을 만들어 가고 있다. 이제 1997년 봄이 되면 사업을 시작해야 하는데 더 큰 주님의 뜻을 기대하고 있을 뿐이다.
김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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