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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선교/1996-1998 정착

나의 살던 고향 1997

1997년 새해가 밝았다.

그토록 목메던 중국 선교를 위하여 지난 3년간은 너무나 많은 고뇌와 인내의 시간이었다. 목단강은 내가 5살까지 살았던  동심의 세계가 있는 고향으로 55년 만에 중국 사람이 되기 위하여 고향에 돌아왔다. 조선분들은 나가지 못해서 환장들인데, 이 썩어질 중국은 뭐하러 왔느냐고, 묻는다. 육신의 눈으로 보아서는 현실은 한 걸음도 나아갈 길이 열릴 것 같지 않지만, 주님의 은혜로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 영의 눈으로 보이는 현실은 그저 희망과 가능성이 넘치고 있었을 뿐이다. 낯설고 물선 이곳에서 이제부터는 기도와 믿음으로 현실을 해치고 나아가야 할 것이다. 유치원을 지으려는 환쟈향도 지리적으로 좋은 곳도 아니다. 그래서 조건이 좋은 곳이 있다면 옮기고 싶은 생각이 일어나지만, 빈손으로 일하는 나에게 그럴만한 곳도 없으니 좋든 싫든 여기서 시작해야 할 것 같다. 그동안 영안 시 교육위원회에서 외국인에게 독자 허가를 줄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토론이 있었다. 향(면)장이 하얼빈 교육위원회에 전화하여 허가를 줄 수 있다는 유권해석을 듣고서야 모든 일이 풀렸다. 이제 남은 일은 건물을 짓는 것이다. 오는 5월부터 과연 건축을 시작할 수 있는지는 나도 모른다. 그저 믿음으로 그렇다고 대답하고 있을 뿐이다. 아들 Andrew가 하늘나라로 가면서 남긴 얼마의 유산이 나의 믿음에 힘을 더해 주고 있지만, 마음 한편은 쓰리다. 그의 희생으로 남겨진 얼마의 유산이 중국 선교의 밑거름이 되고 있었다. 주님이 어떻게 이 한해를 인도해 주실지 기대하게 된다.

 

새해 첫날은 멈출 줄 모르는 눈이 종일 내렸다. 굶주리고 있는 북조선 인민들을 생각하면서 이 눈이 밀가루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새해가 열리면서 하늘에서 쏟아지는 눈은 넘치는 한해를 알리는 듯했다.

 

 

새해를 맞이하면서 차분히 중국에 살 준비를 하려나 했는데, 갑자기 캐나다에 가야 할 일이 생겼다. 아들의 교통사고로 정부에서 나오는 보상금으로 정부 서류에 우리 둘이 서명해야 하는 일로 뜻하지 않게 떠나온 지 몇 달도 안 된 2월에 캐나다에 돌아오자, 생가지도 않은 축복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울러 미국으로 가는 길도 열려서 4월까지 바쁘게 보내면서 주님의 인도하심과 축복을 누렸다. 남은 이삿짐을 꾸려서 목단강으로 돌아오자, 이번엔 아직 가본 적이 없는 중국 남방지역, 장쑤성의 상해 우시 남경 그리고 안후이성 리양을 방문하는 행운을 누렸다.

 

우리는 NBC의 중국 자원선교사(Faith Mission 또는 Tent making)로서, 우리가 필요로 하는 재정은 우리 스스로가 해결해야 한다. 새해가 밝으면서 주님께서는 우리가 새 힘을 얻을 수 있도록 기쁜 소식을 들려주셨다. (1.23)

미국 매사추세츠에 있는 성결교회에서 $710의 후원금을 보내왔다. 미국 남부 루지에나 주 Bossier 침례교에서 후원의 뜻을 보내왔다. 우리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에게서 오고 있었다. (시편 121편)

 

사랑 한인 침례교회
Michiga 주사랑 한인 침례교회 김성문 목사님이 매월 선교헌금 100을 돕겠다는 반가운 소식을 보내왔다이 분과 나는 원래 모르는 사이인데 미주 크리스천 신문사에서 개최한 South Carolina에서 있었던 선교 수양회에서 함께 강사를 하면서 사귄 분으로 우리 아들의 사고를 알고 위로해 주시고 교회로 돌아가셔서 이렇게 결정하여서 고마운 마음이다

 

영국 Ruth 자매의 후원

파키스탄에 간호사 선교사로 가 있는 Ruth 자매가 내 은행 계좌로 145.45(316.15)를 보내왔다. Ruth는 나와 영국 Chelston Bible College 동창생으로 Liverpool 모임의 장로의 딸로서 파키스탄 기독교 병원에서 간호사로서 봉사하다가 이제는 돌아와 영국에 이민 온 파키스탄 사람들을 위하여 사역하고 있는 귀한 자매다고마운 Ruth 자매.

 

Grace Bye 노 자매님의 편지

캐나다 북쪽 Edmonton Westwood 교회에 나가시는 Grace Bye라는 노 자매님이 어떻게 우리 소식을 듣고 매월 선교헌금 $50을 선교계좌로 넣으시겠다는 고마운 소식을 보내주셨다고맙고 놀라운 일은 원래는 모르는 사이인데 아들이 천국으로 먼저 간 일로 초교파적으로 선교 후원의 문이 열리고 있었다.

 

미국서 온 아들의 부조금 $10,000
아이들의 사고로 미 한인 침례교회에서 모아 보낸 부조금 만 불을 사망자 네 집에 나눈 만 불 수표를 무지개 봉사회에서 우리에게 전하여 주었다아들을 보내고 이런 것을 받게 되니 마음이 아팠다아들이 우리에게 남기고 간 이런 값진 선물들이 중국에서 하나님의 복음 사역에 크게 써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이 세상에는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이나 자기 집단만 아는 사람만 사는 것 같지만이웃의 슬픔을 내 슬픔 같이 여기며 마음을 같이하여 주는 따뜻한 마음들을 이번에 많이 느꼈다이웃에 대한 사랑은 곧 실천이다.

 

한국 서울 4월

지난해 가을 중국으로 이사는 했지만, 이번에는 살림살이를 모두 정리하여 가져가는 길이다. 13년 살던 Toronto에서의 삶을 정리하고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중국에서 우리의 삶을 마치고 싶은 마음으로 떠났다.

 

주님의 축복들

신학교 교수이면서 인천 주안에서 목회하는 정 목사가 선교 후원금 10만 원과 두 지역 선교를 위한 10만 원을 주었다. 그리고 안정숙 집사가 LG 전기밥솥을 보내와서 고마웠다.

 

부천 침례교회 4.11 주일

토론토에서 잠깐 본 후배가 잊지 않고 불러주어서 고마웠다. 오후 집회에서 특별 선교헌금을 하여 375,000원+한 장로님 50,000=425,000을 주셨다.

 

원효로 침례교회 5.4 주일

New York 주 Birmingham 교회 목사가 자기 친구인 서울 원효로 장 목사에게 나를 소개하여서 초청을 받도록 해 주었다. 처음 보는 목회자이지만 신학교 후배였다. 오후 찬양 예배에 이어 나의 중국선교에 관한 사명을 나누었다. 집회 뒤 사무실에서 다과를 나누고 있는데 장전순 집사가 들어와서 그동안 그린벨트에 묶여있던 지역이 풀려서 그 지대 안에 있는 땅을 어저께 팔도록 계약을 했다고 받은 선금에서 100만은 중국 선교헌금으로 나에게 주시고, 100만 원은 교회 에어컨 사라고 목사에게 내놓는다. 어찌 이런 일이 생기는지 놀랍고 놀라울 뿐이었다. 수고해서 번 돈을 주님께 먼저 드리는 그 귀한 믿음을 주님께서 축복하여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이삿짐과 함께 중국으로  5.12

마침 아멘 선교회 선교팀 세 분이 함께 연변으로 가게 되어서 우리의 제법 많은 이삿짐이 가벼워졌다. 우리는 원래 대련에서 연길 날틀을 타야 하는데 일기 관계로 선양(심양) 공항에 임시로 내려서 기내에서 3시간 정도 대련의 일기가 좋아지기를 기다리다가 안 되어서 심양 공항에 모두 내려놓았다. 승객들은 계산대에서 항의들을 하느라 난리들이었다. 모든 짐도 내려놓아서 찾아서 계단을 오르내리느라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 항공사에서 마련한 심양 시내 호텔에서 쉬었다. 힘든 하루였지만 서로 교제할 수 있는 시간이 많아서 좋았다. 다음 날 아침 일찍 공항에 우리를 데려다 놓고는 마냥 기다리게 하고 있었다. 오후 1시가 되어서야 어저께 온 날틀이 와서 대련으로 떠났다. 대련에서 다시 연길 날틀을 갈아타는 일은 무척 힘들었다. 무질서함과 많은 짐으로 인하여 땀나는 일이었다. 내 짐이 많다고 돈을 더 내라고 하여 유치원 허가장을 보여주었더니 통과되었다. 때때로 이렇게 힘든 일들을 당할 때마다 이런 중국에 왜 살려고 할까, 하는 불편한 육신의 감정이 우러나곤 한다. 구원받을 영혼들의 행복을 생각하면 우리가 당하는 이런 불편이야 무슨 큰일이 되겠느냐. 그동안 마구잡이 식으로 살아온 천연스러운 모습들이 이제 개방도 하고 외부 사람들과 접촉을 하면서 곧 질서가 잡히고 정돈되리라 믿는다. 연길에 내렸는데 그때만 해도 아직 공항이 시설을 제대로 갖추지 않아서 우리 승객 가방들은 큰 트럭에 싣고 와서 부려 놓는데 모두 찾느라 전쟁이었다. 하루 쉬고 아멘 선교회 팀과 우리가 목단강으로 가기 위하여 소형 버스를 1200원에 전세했다.

 

내 유치원 땅에 누가?

올라오다가 한국에서 오시는 분들에게 유치원 땅을 보여주려고 환쟈 향에 들려 보니 이게 웬일인가? 내 땅에 누가 집을 짓고 있지 않은가? 향에 들리니 향장 하던 사람은 향 서기가 되었는데 그 사람에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으니 향 장이 영안에 갔다고 나중에 물어보라고 둘러대고 있었다. 기가 찬 일이었다. 지방정부가 계약까지 해 놓고 이렇게 나를 놀라게 하고 있었다. 돌아오자마자 목단강 시 정부에 환쟈 향 땅에 대한 소식을 알렸다.

 

이를 잡아먹는 사람들

아멘 선교회 팀과 함께 하얼빈으로 갔다. 하얼빈에 하루 쉬면서 돌아보고 다음 날 다음 목적지인 소련으로 떠났다. 우리는 하얼빈 역에서 기차를 타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아직도 날씨는 찬데 역 광장에는 많은 노숙자가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그런데 내 눈에 놀라운 모습이 들어왔다. 앉아 있는 한 무리 가운데 한 사람이 바지를 뒤집어 이빨로 뜯어먹는 시늉을 해서 자세히 보니까 이를 잡아먹고 있었다. 나와 함께한 조선족 형제도 보더니 전에 자기 촌에서 이를 잡아먹는 한족을 여러 번 본 적이 있다고 했다. 내가 듣고 설마 하던 일이 오늘 사실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분들은 내 피를 빨아먹은 이라고 잡아먹는다고 한다.

 

금성 TV

오늘 중국서 생산하는 한국산 금성 TV 한 대를 샀다. (2450원) 그동안 냉장고 없이 지내다가 오늘에야 2700 원 주고 한 대 샀다.

 

거류증 5.27

오늘 우리는 목단강 공안국으로부터 중국 거류증을 받았다. 이로써 우리는 이제 중국에 합법적으로 살게 되었다. 나는 사회주의 나라 중국에서 선교하려면 우선 사는 문제는 명분을 가지고 합법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주민들의 선한 이웃으로 사는 것이 곧 전도다.

 

하얼빈 아성 佳利利(갈릴리) 컴퓨터 학교(4.3)

아 학교는 나의 친구이며 동역자인 서명수 선교사가 세운 학교로 하얼빈만 가면 방문하는 곳이다. 여기에 몇몇 한국 형제자매들이 학교 일을 도우면서 공동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분들이 자원하여 중국에서 헌신적으로 일하지만, 마음에 나름대로 문제들을 가지고 있는데 풀지를 못하고 있었다. 부산 서면교회에서 온 이상은 형제와 교제하는 가운데 그동안 의문시되고 있던 많은 문제가 정리되고 해결되었다고 말해 주었다. 유치원교사를 하는 이상희 자매도 갈등하고 있는 일들이 나와 교제를 통하여 은혜를 받고 해결되었다고 하면서 기뻐했다. 무슨 문제인지는 나에게 말해 주지 않아서 내용은 모르지만 여럿이 모여 함께 일을 하면서 생기는 일들일 것이다. 주님이 이렇게 선교지에 와 있는 형제자매들을 도울 수 있었다니 감사할 뿐이다. 서형이 500원, 이상은 $100과 칼슘, 그리고 상희 자매 곰열(웅담)(웅담) 5병을 넣어 주었다. 집에 와서 가방을 열어보니 1300원이 들어있어서 놀랐다.

 

임시 거류증

중국은 인민들이 어디든지 가서 살 수는 있지만, 법적으로 주민등록증을 옮겨 오지는 못한다. 그러나 도시마다 요구하는 최소의 투자를 하면 거주증을 허락해 준다. 조건은 아파트를 산다든지 사업 투자를 하는 조건이다. 외지인은 매년 얼마씩 거류 세를 내야 한다. 우리 양로원 경우를 보면 목단강 밖에서 온 직원들은 파출소에 매년 50원씩 거주세를 낸다. 그러다가 3년 전부터는 10원씩 받아간다. 지금 시내에서는 150원씩 받고 있어서 숨어 지내는 것이 산책이라고 한다. 제나라에서도 마음대로 못 사니 이상한 나라다.

 

목단강 거주증 얻기

동녕 시골서 목단강에 와 있는 온 설 형제가 목단강에서 사역하기 위해서 목단강 거주자가 되어야 안전하다고 목단강 주민증을 얻을 수 있도록 해 달라고 부탁한다. 종교 활동을 하다가 걸리면 외지인은 벌금을 물고 추방당하기 때문이다. 우리도 외국인으로 이런 일을 부탁할 만한 사람들이 쉽지 않은데, 혹시 해서 손 선생과 소학교 교장을 하는 남편에게 의논을 드렸더니, 시골에 사는 조카를 목단강에 와서 벌어먹고살게 하고 싶다는 내용과 함께 신원 보증서 한 장을 써 주었다. 이제 문제는 그 지역 파출소 소장의 도장을 어떻게 받느냐가 큰 문제였다. 손 자매와 의논하니 마침 그 지역 파출소 소장의 부인이 예수 믿는 자매인데, 손 자매님이 잘 아는 사이여서 부탁하여 소장의 도장을 받아서 신청하였다. 모든 필요한 수속비는 내가 지원을 하였다. 중국에서 모든 행정 서류는 이분들의 도장을 찍음으로 시작되기 때문에 파출소 소장이나, 촌장, 그리고 시내는 위(동)의 주석의 권한 또한 대단하다 하겠다. 우리와는 다른 세상이다. 세월이 한 반년 흘러 형제는 목단강 시민이 되었다. 고마운 마음에서 부부를 청하여 점심 대접을 해 드렸다.

 

침례식 8월 2일

전호남 형제의 아파트에서 학습하고 나서 침례를 받기 원하는 하남촌 조선족 가정교회의 세 사람을 위하여 아파트의 목욕탕에서 침례식을 했다. 하남 촌 가정교회의 이 형제 부부와 최 자매는 구원을 받은 뒤 침례를 받기를 기다려 오다가 오늘 침례를 받고 나서 몹시 기뻐하고 있었다.

 

N. Y. Birmingham 교회에서 매월 $50을 지원해 주기로 했다고 하면서 6개월분 $300원을 우편으로 보내왔다.

목단강에 우리를 찾아온 반가운 손님들이 계셨다. 밴쿠버 한인침례교회의 한 바울 목사님과 두 분이 오셨다. 전에 토론토에서 모였을 때 약속한 $500을 주셔서 고마웠다. 함께 온 이 집사란 분은 18K 손목시계를 풀어놓으셔서 당황하였다. 어떻게 이렇게 큰 헌신을 하실 수 있는지!

김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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