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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선교/1996-1998 정착

조선족 학습 1997

공개적으로 집회를 하고 학습하기 어려운 중국에서 우리가 수도 없이 해 온 것이 소규모의 성경학습 반 활동이다. 그 가운데 얼마를 실어 본다. 지금은 시간이 많이 흘러가지만, 우리가 그때 어디서 무엇을 하였는지 기억이 새로워진다.

 

아파트 학습 12.29-31, 1997

김홍섭-구림숙, 설원식-리순월, 오용남. 학습을 하는 가운데 간증문을 쓰게 했는데, 두 자매가 쓰지 못한다. 쓰도록 격려하여 다음 날 아침 반장씩을 썼다. 일생에 처음 글을 반장이나 써 본 것이다. 이제 이 만큼 썼으니까 또 더 길게 쓸 능력이 생기게 되었으니, 이들에게는 얼마나 큰 경험인가! 저녁 성경공부를 하는데 갑자기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난다. 우리는 깜짝 놀라서 숨을 죽이고 있다. 계속 두드린다. 한 자매가 문에다 대고 누구냐고 물으니 아무게다, 라고 대답하는데 집을 잘 못 찾은 사람이다. 모두 얼마나 놀랐는지! 이런 일이 두 번이나 있었다. 여기 아파트 계단에는 불이 없다. 그래서 종종 사람들이 잘 못 두드리는 일이 있었다. (계단이 어두워서 여자들의 가방을 빼앗기는 일들이 생기면서 지금은 방범용으로 울리는 소리에 불이 들어오는 자동 등을 달아 놓게 되었다)

 

목단강 경박 호 학습 7.1998
한국 아멘 선교회에 단기선교팀이 들어오면 경박 호에서 조선족 20여 명의 일꾼을 데리고 학습하도록 계획했다. 집회 장소와 머물 곳을 찾고 있는데, 마침 목단강 집안 종형의 여 조카 부부가 이곳에서 송평 여관을 하고 있다고 소개해 주어서 연락하여 여관 전체를 며칠 빌렸다. 조카네는 앞으로 조선족 민속촌이 되는 폭포 촌 위쪽에 집을 지어서 여관을 차렸다. 처음 만나는 종씨 조카 관계이긴 하지만, 30여 명의 우리 식구들을 잘 돌보아주어서 마음 편하게 학습을 할 수 있었다. 아멘 선교회 회장에게 안 입는 양복들과 넥타이를 가져오도록 부탁했는데 양복 15벌과 많은 넥타이를 가져와서 학습 온 형제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조선족이나 한족들 가운데는 양복이라는 것을 모르고 사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모두 평생에 처음 양복을 가져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한 형제가 양복을 입고 나서 말하기를, 이런 양복은 당 간부나 입는 줄 알고 살아왔는데, 이제 입어보니 간부가 된 것 같은 기분이라고 멋을 내보여서 한바탕 웃었다.

 

연변 훈춘지역의 조선족 처소들 방문
경박 호 학습을 마치고 목단강을 거쳐서 선교팀은 연변 훈춘으로 내려가서 당신들이 마련한 계획에 따라 여러 조선족 마을의 처소를 찾아보게 되었다. 하남교회, 팔년촌, 광신촌, 포대촌, 이렇게 한곳 한곳 잠깐 모여서 교제한 뒤 기도하여 주고 사랑의 선물 봉투(500원)를 전해주면서 기념사진을 찍는 것이 이분들의 단기 선교 여행이었다. 이틀 훈춘 조선족 교회를 방문하고 연길에 와서 쉬었다. 오늘 주일은 각자 좋은 대로 흩어져서 가기로 하였다. 나는 최종호, 양명호 후배들을 데리고 도문 우리 가정교회에서 교제를 나누도록 했다. 자기네 선교팀에서 준비한 사랑의 선물 300원 처소 헌금으로 내놓았다. 오후에는 두만강 강변을 거닐면서 건너편 가난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북한의 형편을 나누었다. 어두워지자 밤 시장에서 장사하는 교회 자매에게 가서 오징어, 명태, 감자 부침 이를 구워 먹으면서 교제의 즐거움을 나누었다. 이번에 우리가 이 팀과 함께 백두산을 오르면서 비용으로 1400원을 내었는데 돌려주었다. 도문 사역자 형제 아들이 조선족 학교에서 한족 학교로 옮기는데 비용이 1500원이 든다고 하여 1000원을 도와주었다.

 

주님께 충성하는 딸 1.1999

영안 시에서 소문난 보신탕 전문 식당 홍순관을 운영하는 전호남 형제의 여동생이 초대하여 주어서 전 형제를 데리고 갔더니 극진히 대접하여 주었다. 그리고 이 층으로 자리를 옮겨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원하여 말씀을 한 시간 성경 모임을 했다. 오상 조선족 사범학교 학생 주석(회장)이며 졸업반인 전호남 형제의 딸이 와서 고모의 식당 일을 돕고 있었다. 고모가 학교 공부를 시키고 있었다. 아버지인 전호남 형제는 원래 공산당원으로 있다가 예수님을 믿게 되었는데 아직 당원 직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전에 내가 그 집에서 성경 모임을 할 때 말씀으로 당원 신분을 버리고 주님께 온전한 마음으로 충성하라고 권했지만, 여전히 양다리를 걸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딸은 달랐다. 지난해 2학년 때 나의 설교를 듣고 힘을 얻어서 3학년이 되자 학생회장이 되었다. 회장은 자연히 당원이 될 수 있는 특권을 가지고 있지만, 포기하고 주님께 더 충성하기로 했다니 얼마나 기특한 일인가! 주님께서 이 어린 딸에게 이런 큰 은혜 주신 것을 감사했다. 지금 이 학생은 목단강 조선족 소학교 선생으로 있으면서 교회에 어린이들을 가르치는 일에 충성하고 있다. 지금도 중국에는 이렇게 두 다리를 걸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현실이다. 워낙 혹독한 시련을 경험한 중국 사람들은 당원이 가지는 특혜를 포기하려고 하지 않는다. 중국이 개방되어서 사회와 모든 조직이 빠르게 변하여 가고 있지만, 언제 변할지 모르는 공산당의 불안한 앞날 때문에 쉽게 포기 못 하고 있었다. 이런 공산 독재 사회에서 살아보지 않은 사람은 잘 이해하지 못할 일이다. 삶의 편의를 위해서 공산당의 기득권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제법 많은 편이다. 이것이 다른 나라 사람들이 쉽게 판단하기 어려운 중국의 현실이다.

 

김강 학생을 캐나다로 보내다 2.10 1999
한족 소학교에 교사로 근무하는 한 선생이 그동안 우리하고 성경공부도 하면서 친분을 가지고 있었다. 법과대학 학생인 아들 김강이 캐나다 언어 연수를 가고 싶다고 하여서 토론토 한사 영어 학교를 소개하여 주었고, 영어 하교 입학 허가서가 와서 비자를 위해서 내가 추천서를 써주었다. 생각보다 빠르게 북경에 가서 비자를 받고 돌아와서 감사의 표시로 나의 세터, 진의 옷과 밍크 담요를 사 왔다. 그리고 돈을 주려고 해서 말렸다. 그때 대개 한국으로 가는데 드는 비용이 중국 돈 5만 원 정도여서 이분들이 이렇게 쉽게 가도록 해주어서 좀 보답을 하려고 했지만, 아무것도 받지 않았다. 이 일로 우리가 인연이 되어서 우리가 양로원 수리를 할 때 품삯을 받지 않고 큰 도움이 되어주었다.

 

도문 학습 3.22-24
이번 학습에는 새로운 식구들을 데리고 학습을 하였다. 조 형제 허 자매 호범 부모의 구원 간증을 듣고 목욕탕을 빌려서 침례식을 하였다. 이 황무지 같은 곳에 주님은 영혼들을 부르고 계셨다. 도문 처소도 방이기는 해도 이젠 강대상을 만들어 놓고 설교를 하게 되니 분위기가 좋았다. 학습을 마치자 어저께 직장 때문에 오지 못했던 김 형제가 침례를 받겠다고 하여서 그의 구원 간증을 듣고 다시 목욕탕을 빌려서 침례식을 했다. 그간 학습 기간 밥하느라 수고 많이 한 자매들과 시내 식당으로 가서 점심을 대접하면서 위로했다. 저녁은 호범이 학생 집에서 준비한 음식과 함께 저녁 집회를 하면서 학습을 마쳤다.

 

연변 왕청 조선족 지도자 학습 3.24-28, 2000
조선족 지도자들 15여 명을 모아놓고 학습을 하였다. 이번 기간에는 율법과 은혜 그리고 갈라디아서를 통해서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 진리를 깊이 공부하였다.

 

나눔의집 학습 3.28-3.3

나눔의집은 가운데 이 층이 있어서 은밀하게 학습하는데 좋은 장소였다. 이 이 층은 아무도 쉽게 올라갈 수 없도록 통제된 지역이었다. 여기서 10여 년을 산 분들도 이 층은 한 번도 올라가 보지 못한 분들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높은 곳에서 사방을 멀리 볼 수 있어서 경계하기에도 좋았다. 이런 곳을 지하 성경 학습 반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아직은 넉넉지 않지만, 나눔의집에서 왕청 지역 일꾼들을 모아 학습을 하였다. 탈북자들이 심심치 않게 오고 있다고 그들을 도울 수 있는 재정 지원을 부탁하는데, 줄 예산은 없어서 100원씩 주었다.

 

하마탕과 전하 처소 3.12-15 

하마탕 골 안(골짜기 안) 친구들을 위하여 학습하려고 내려왔다. 우선 주일을 하마탕 처소에서 보내고 월요일부터 유정에서 며칠 학습을 할 계획이다. 하마탕 처소는 원래 연길 삼자교회에 속한 교회로 한국에서 처소를 위하여 집을 한 채 사주었는데, 집을 사는 과정에서 책임 집사가 얼마를 떼어먹었다는 일로 싸움이 생겨서 교회가 문을 닫게 되었단다. 다음 해 예배당은 창고가 되었다가 다음 해에는 양조장이 되어버렸다. 기가 막힌 일이었다. 알게 모르게 한국 교회에서 후원하여 사준 연변의 여러 지역의 처소건물들이 개인의 것이 되는 경우가 심심치 않게 일어나고 있었다. 교회당 목적으로 집을 살 때 그 지역 지도자의 이름으로 사게 된다. 그리고 대개는 지도자가 살게 된다. 집을 산 뒤에 내분이 있어서 교회로 모이지 않게 되면 그 집은 자연히 살 때 이름으로 되어 있는 그 사람의 것이 되고 만다. 그 집이 영구히 교회의 재산이 되도록 할 수 있는 안전장치가 없는 실정이다. 그러나 종교극을 통해서 인준을 받아서 사면 종교건물로 등록도 되고 교회 재산으로 나아 있을 수 있지만, 그 절차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다. 외국에서 사주었다는 것을 종교 국이 알고 빼앗아서 다시 사라고 값을 매긴 경우를 10여 건 알고 있다. 그래서 아예 살 때부터 지원하는 한국 교회와 의논해서 아예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사게 되므로 더 쉽게 건물이 개인의 것이 되는 위험이 있었다. 믿음과 사명감이 별로 없는 사람들이 집을 하나 마련하려고 교회 이름을 파는 일도 있었다. 아까운 주님의 헌금들이 이렇게 허비되는 일들은 연변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지금 하마탕 교회의 지도자도 그때는 그 교회에 나가다가, 교회가 문을 닫은 뒤에 따로 모이기 시작하면서, 수갑과 벌금이 년 중 행사로 수년간 지내 오다가 이제 종교 국으로부터 비준이 났고, 며칠 전에 십자가와 교회 간판을 달아도 좋다는 공문이 와서 이제야 마음 놓고 활동하게 되었다고 모두 기뻐하고 있었다.

 

주일학교

주일 아침에는 주일 학생 10명이 모였기에 삭개오 이야기로 구원의 은혜를 전했다. 9시에 어른들 30여 명이 모였다.

 

오후에는 김철호 형제가 수고하는 전하 처소 저녁 모임을 위하여 갔다. 이곳은 골 안 마지막 촌인데 조선족 150여 호가 사는 집성촌으로 이제 조선족들이 많이 떠나고 한족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저녁에 20여 명이 모여서 복음을 전했다. 한 칸에 김 형제 부부와 우리 둘 넷이 나란히 누워서 자는데 밤새 자리가 딱딱하여 불편하였다.

 

유정교회에서 학습 3.13-15
이번에는 가정교회를 인도하는 20여 명이 모여서 이스라엘의 일곱 절기를 공부했다. 유정도 핍박을 많이 받았다. 외국에서 사준 집이라고 왕청 종교 국에게 빼앗겼다가 8000원을 주고 다시 찾았단다. 처음 교회 구성원 가운데 누군가가 일러바쳐서 당하는 경우였다. 인간의 질투와 시기가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고 있어서 마음이 아팠다. 이날 형제들이 자기네는 산골이라 외국 사람들이 오지 않는데 원장님이 맡아서 학습해 달라고 청해서 그러기로 하여서 자매결연을 한 폭이 되었다. 나는 기대를 하고 이 골 안을 위하여 기도하고 계획을 세워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 골짜기 안은 조선족 처소만도 5개가 있고 한족 처소도 여러 곳이 있어서 일할 만한 곳이었다. 3일간의 학습을 오전으로 마치고 대흥 구에 나가는 김철호 부부와 같이 가면서 목욕을 같이하자고 데리고 목욕탕에 갔다. 남자 10원 여자 5원인데 수건도 비누도 아무것도 준비가 안 되어서 사야만 했다. 김 형제는 평생 처음 목욕탕에 온 것이라고 말해서 놀랐다. 생활이 어려우니까 시내 목욕탕에 한 번 안 가보고 사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아르마탕(哈吗塘) 골 안 학습 3.21-4.1
일 년 전 조용한 이곳의 형제자매들에게 한국에서 성령 파가 와서 가르친 뒤 모두 신비주의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큰 병이 든 것이다. 특히 방언 문제는 혼란한 가운데 있었다. 방언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가르쳤다. 유정 이용국 형제가 키보드를 사서 처소 음악에 봉사하려고 하는데 돈이 모자란다고 하여서 부족한 265원을 도와주어서 키보드 한 대를 사도록 했다. Huston 목단강 목장에서 길기수 형제로부터 북한 지원금 $2000 이상을 보냈다는 반가운 소식이 왔다.

 

나눔의집 학습 4.17-21
연변 왕청현 지역에서 10여 명의 처소 지도자들이 와서 학습을 시작하였다. 기대치도 않았던 연변의 영적 대부 김 목사도 왔다. 이 분의 외조부가 용정 종성동 침례교회의 목사로 순교하신 김영길 목사이시다. 순교자의 자손들로 일찍부터 압박을 받으면서도 삼자교회와 어울리지 않고 독자적으로 교회를 이루어 오다가 정부의 인준을 받아냈다. 첫날에 나는 조선 형제들이 믿고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글로 써 보도록 하였다. 평생 이렇게 써 보는 것이 처음이라고들 하면서 어렵다고들 말한다. 첫날 간증문 쓰기는 모두 빵점이다. 며칠 학습하고 나서 마지막 날 간증문 쓰기를 다시 하였는데 조금 성경적으로 써져서 나아졌다.

 

유정 교회방문 6.9-11
미국 Bossier에서 두 분을 모시고 열차로 왕칭 따씽거우에서 내려 김 형제가 인도하는 조선족 처소로 갔다. 우리는 형제의 대접을 받으며 저녁에 성경 모임을 가졌다. 강 집사는 이 처소의 음악발전을 위하여 키보드를 사라고 $300을 헌금해 주었다. 주일 류팅 처소에서 복음 설교 말씀으로 은혜들을 나누었다. 오후에 김 형제의 경운기를 타고 한족 촌에 있는 한족 처소로 갔다. 한족 왕 형제가 자기 집에서 모임을 하고 있는데 사는 형편이 말이 아니었다. 그곳에 있는 한족 식구들과 교제를 나누었다. 초가로 되어 있는 집 흙벽 한쪽에 비가 흘러내린 흔적이 있었다. 형편을 살펴보던 강 집사가 마음에 동정이 생겨서 $1500을 내놓으면서 지붕을 새로 하고 벽을 수리하라고 헌금을 나에게 주었다. 손님을 보낸 뒤에 내가 다시 와서 수리를 의논하자고 하였다.

 

오후에 우리는 연길에서 준비한 한 가정 주택에서 머물게 되었다. 내일부터 이 목사는 지하 연길 조선족 침례교신학교에서 4일간 강의를 하게 되게 있었다. 월요일 이 목사는 지하신학교에 강의하러 가고, 나는 강 자매를 데리고 도문으로 가는데 고속도로를 건설하느라 길이 복잡하였다. 도문 처소에 들려 몇몇 모여진 식구들과 교제들을 나누었다. 그리고 강변 공원으로 나아가서 한 많은 두만강 다리 저 건너 반쪽 조국 북한 남양 시를 생전 처음 바라보면서 감개무량 해하는 것 같았다. 평생 처음 북한 땅을 볼 줄은 기대도 하지 않고 왔다가 큰 경험을 한다고 좋아하고 있었다. 다음 날 오전에는 강 자매를 데리고 연길 시내를 둘러보고 서울로 가려고 북경으로 떠났다. (그때만 해도 서울 연길 하늘길이 열리지 않아서 대련 심양 북경으로 돌아서 다녀야 했다.)

김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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