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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선교/1996-1998 정착

아파트 학습

조선족 가정교회 1.1997

다투고 나누어지는 조선족 가정교회들

중국이 시장경제체제를 도입하여 세계를 향하여 문을 열자마자 온갖 자본주의의 쓰레기 문화들이 쏟아져 들어오면서 중국 사회는 퇴폐한 문화와 물질 제일주의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배금주의 사상이 만연하면서 개인과 개인 그리고 공동체 관계는 멀어지고 오로지 내가 살아야 한다는 이기주의가 자리를 대신하였다. 돈을 벌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은 생명 천시 풍조에 이르게 되었다. 개방과 함께 한국 기독교는 재빠르게 중국 조선족 선교에 헌신했다. 사회주의 혁명 반세기 동안 고립된 채 기독교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살아온 조선족 마을에 한국 기독교인들이 반가움으로 찾아들었다.

 

계동 현 평양전 하남 조선족촌은 150호 정도의 오지에 있는 조그마한 농촌 마을이다. 연변대학을 다니던 자매가 믿고 돌아와서 수년간 가정교회를 이루어 30여 명이 잘 모여왔다. 내가 목단강에 도착하자마자 방문하여서 한 주간 학습하면서 여러 사람이 믿음을 가지는 역사가 있었던 곳이다. 가정교회를 시작한 자매는 결혼하여 심양으로 떠나고 그동안 자란 형제들이 사랑으로 가정교회를 위하여 봉사하다가, 어느 날 두 형제가 다투어 따로 모이면서 나도 더 방문할 수 없게 되었다. 이제 이곳은 전도의 문이 닫히고 있어서 안타깝다.

 

동녕 전 광영 조선족촌 가정교회는 내가 여러 번 성경학습을 한 곳이다. 지도자 선거에서 떨어진 자매가 자리를 내놓지 않는 일로 시끄럽다니 안 믿는 촌민들에게 부끄러운 일이다.

 

목단강 가정교회 시작 6.1 1997

그동안 복음을 전하여 모은 조선 사람들 중심으로 6월 첫 주부터 가정교회를 시작하기로 하였다. 6월 첫 주일 형제의 셋방에서 8명이 첫 예배로 모임을 했다. 주님께서 계속 이 교회를 발전시켜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오늘 목단강 가정모임에서는 믿는 자들이 서로를 알고 사귀는 교제가 무엇인지를 설명하고 간증하는 모임을 가졌다. 오랫동안 서로 경계하고 조심하는 사회주의 사회에서 경직된 생활을 해 온 이들에게 마음을 열고 나눈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먼저 나는 왜 예수를 믿게 되었는지와 예수를 믿고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지를 나누었다. 이 사람들은 대개 그저 믿기만 하지 자신이 믿고 있는 내용에 대해서 말해 보거니 나누어 본 적이 거의 없다. 말해 보지 않으면 말할 줄 모르게 된다. 전도의 첫걸음은 내가 믿는 것을 말하고 행동으로 보여주어야 한다, 그것이 곧 간증이다. 내가 믿는 것이 무엇인지 말할 수 없다면 그것은 아직 자기가 믿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다. 어떤 사람은 믿는 것을 간증한다고 하지만, 자기가 무엇을 믿는지를 잘 들어내지를 못했다. 혹자는 다음으로 미루거나 모두 어려워했다. 일생에 처음 남들 앞에서 자기가 무엇을 믿는지를 말하는 것을 어려워하고 힘들어하지만, 거듭함으로써 잘 하게 되리라 믿는다.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베드로전서 3:10

 

믿음의 딸

전형제의 딸이 오상 조선족 사범학교 3학년 학생이며 학생회장을 하고 있는데 훌륭한 믿음의 딸이다. 학생회장이면 공산당 입당은 그저 되는 일로, 학교에서 당에 입당하도록 권해도 공산당에 입당하지 않았다. 공산당 나라에서 당원이 얻는 이점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지만, 딸은 당원이 되기를 거절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믿기 때문이다. 지금은 졸업하고 목단강 조선족 소학교에서 선생을 하면서 주일에는 교회에서 주일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중국에는 이렇게 놀라운 믿음을 가진 주님의 자녀들이 있다.

 

아파트 학습 1.27-28

다시 우리 아파트에서 오상-백승일, 동녕-심봉우, 김기섭, 김정애 네 사람을 데리고 1박 2일의 학습을 가졌다.

 

아파트 학습 6.16-18

날이 더워지니 6명(김경호, 윤장일, 이웅로, 강길선, 설부부)을 데리고 학습을 하려니 아파트가 더워져서 쉬는 시간에 선풍기 420원에 한 대를 샀다…. 오늘 주일예배에 손 선생의 동창생이고 은퇴하신 목단강 조선족 고등학교 중문학 선생 이정자 선생이 오셨는데, 복음의 말씀을 듣고 좋아하면서 다음 주에는 자기 집에서 모이자고 청했다. 복음은 이렇게 천천히 퍼져 나가고 있었다. 집회를 마치고 모친들을 데리고 들에 나가 채소밭도 돌아보고 화차이(花菜, cauliflower)도 샀다. 이 선생에게 중국어를 배우기로 했다.

 

상지 남흥 조선족 촌 6.11-12

상지 시에 있는 조선족 가정교회를 처음 찾아보게 되었다. 아침 열차로 상지 시 남흥 조선족 촌 전재문 자매님 댁을 찾았다. 전 자매는 60대 초반으로 이촌의 가정교회를 세우고 인도하는 노 자매였다. 이곳의 안타까운 사정들을 들으면서 저녁 모임에는 10명이 모였다. 이젠 가정교회가 문을 닫기 직전이었다.

 

이곳의 사정을 요약하면 이렇다.

이곳은 조선족 농촌 지대로 5개 소대(다섯 마을)로 이루어져 있는데, 각 소대는 4~50호로 되어 있었다. 촌의 거리는 길 하나를 사이를 두고 마주 보거나 저 만큼씩 있는 모두 이웃사촌들이다. 조용기만 하던 이곳에 한국에서 각종 교파 기독교 목사들이 드나들면서 소란해지기 시작하면서, 서로 반목하고 원수같이 오가지 않는 사이가 된 지가 오래되었다고 한다. 명절이면 음식을 나누어 먹고 서로 찾아보면서 다정다감하게 살든 조선족 마을이 기독교가 들어오면서 원수같이 살고 있다니 이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 이건 기독교의 믿음이 아니다, 그러한 영향력을 끼친 주동자들이 한국 목사, 장로, 집사들인데, 사실은 사단이 그들을 통해 역사하고 있었다. 예수를 믿어서 구원을 받아 영생 얻은 기쁨으로 이웃을 사랑하고 섬겨야 하는 사회적 책임을 져야 할 기독교인들이 이렇게 망나니같이 된 것은 너무 슬픈 일이다. 심지어 4~50호 동리에 삼자교회, 광야교회로 나누어져 있어서 믿는 사람들이 서로 헐뜯고 공안국에 꼬장질(일러바치는, 고발)하는 일들로 믿지 않는 사람들로부터 욕을 먹고 있었다. 거기다가 한국 사람들이 오면 자주 붙들리고 카메라, 무비카메라 등 물건을 빼앗기고 벌금 물고 쫓겨나는 일들이 심해지자, 한국 사람의 방문이 뜸해지면서 광야교회의 발전은커녕 퇴보하면서 선교의 문이 닫히고 있었다. 조그만 촌에 믿는 사람들이 화목하고 잘 살아도 모자라는데 손가락질을 받고 있는데 무슨 전도가 되겠는가? 안 믿는 사람들이 믿는 사람들끼리 싸우는 모습을 보면서, 이렇게 말한다. ‘생기는 것이 있으니까 저렇게 하겠지!’, 하면서 물질과 연계해서 생각한다. 사실 그렇다. 이러한 분열과 다툼은 드나드는 한국 사람 때문이다. 이익을 챙기려고 주도권을 가지려는 주도권, 일에 욕심이 많은 한국 사람들이 자기파를 만들려는 데서 생겨나는 문제이다. 중국의 특성에 맞게 아무 파도 없는 그대로 성경 중심으로만 모이도록 자연스럽게 내버려 두면 좋으련만….

광야교회라는 말은 상지 지역에서 생겨난 말이다. 삼자교회는 중국 정부의 통제 밑에 있는 교회이며, 광야교회는 한국 사람들의 재정적 지원을 받으면서 독립적으로 모이며 영향을 받고 있었다. 서로 고발하고, 붙잡히고, 갇히고, 벌금물고, 추방하는 일들이 자주 일어나는 곳으로 목단강 지역에서 소문이 나 있는 곳이다. 바로 이런 일이 우리 민족이 사는 곳에서 기독교의 일그러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서 씁쓸하다.

 

전 자매 가정에 생긴 슬픈 일

전재남 노 자매님의 큰아들은 2년 전 대구에 있는 친척 초청으로 나가서 돈을 벌고 있었다. 올해 초 이 마을에 밀선으로 한국에 갈 수 있도록 해 주겠다는 브로커가 나타났다. 소개비가 싸고 수속 할 필요가 없다니까, 순진한 농촌 사람들이 혹한 것이다. 그때 며느리가 한국을 가서 남편과 함께 돈을 벌다가 오겠다고 사정하여서 할 수 없이 보냈단다. 이 처소에 한 형제와 함께 4만 원씩 내고 2월에 대련에서 배를 타고 떠난다고 떠났단다. 한국에 도착하면 남편에게 연락하기로 하였는데 한 달이 가고 석 달이 가도 소식이 없어서 애가 탄 남편이 들어와서 대련, 천진, 등 항구 도시들을 두루 돌면서 공안국에 신고도 하고 알아보았지만,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하였다고 한숨을 내 쉬고 있었다. 남편은 나에게 브로커의 사진과 이름을 주면서 한국 경찰에 조사를 의뢰해 보도록 도와달라고 하였다. (사진과 이름을 한국 경찰국에 보내어서 조회해 보았지만 그런 이름은 없었다. 불법 자 수용소에도 조사하여보았으나, 며느리와 형제의 이름은 없었다. 또 이 기간에 밀항선 사건도 없었다는 회보이다) 나는 한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 본다. 올해 2월인지 3월에 중국을 떠나 인천으로 향하던 정체불명의 선박 하나가 폭풍에 침몰했다는 KBS 뉴스가 있었다. 보도는 이 침몰한 배가 밀항선일 가능성이 있다고 추정하였는데, 혹 이들을 태운 밀선이 침몰한 배가 아닌지? 이 가정도 침몰한 배의 사건을 알고 있었다. 오랫동안 소식이 없으니까 그런 쪽으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전 자매는 자기 때문에 며느리가 이렇게 되었다고 깊은 죄의식에 빠져 있고 남편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가정교회는 자연히 모이지 못하고 있었고 그 끝이 보였다.

이 사건과 아울러 밀항 사기 사건을 하나를 떠 올려본다. 아주 가끔은 중국 밀선들이 밤에 중국 항을 떠나서 어두운 밤에 한국이라고 내려놓고 떠난다. 날이 밝고 시내로 숨어 들어가다가 한국이 아니라 중국 남쪽 어디라는 사실을 알고 황당해한다고도 한다.

 

한족 학습 2.4 1997

소련과 맞닿아 있는 동녕(东宁, dong ning) 한족 교회에서 자매와 두 형제가 왔다. 우리 아파트에서 우선 2박 3일 학습하기로 하였다. 우리는 잠시 다과를 나누면서 교제를 나눈 뒤 가까운 목욕탕에 보내서 우선 먼저 목욕부터 시켰다. 처음 한족들과 만남이고 학습이어서, 이들이 믿고 있는 영적 본질을 이해하려고 마음을 썼다. 그들의 신앙은 말씀에 근거하고 있으며 말씀을 사랑하고 그 속에서 복음의 메시지가 우러나오고 있는 성경 중심의 믿음들이어서 반가웠다. 한 350여 명의 한족 교회는 20여 명의 동역자가 함께 일하며 본 교회와 연결되어있는 농촌의 처소(가정교회)들을 돌본다고 하였다. 그들은 나에게 와서 가르쳐 달라고 하여, 여러분이 배워 가서 가르치라고 하니 자기들은 부족해서 안 된다고 한다. 매월 두 번 정도 학습하기로 했다. 49세 된 치우(邱惠淸) 자매가 처음 그곳 교회를 초음 시작한 자매였다. 자기 딸이 교회에서 아이들을 돌본다고 하여 유치원 사범학교에 보내기로 했다. 아직 중국은 법으로 18세 이하 아이들에게는 종교교육을 금하고 있어서 음성적으로 주일학교를 하는 실정이다. 나는 이 딸이 자급자족하는 훌륭한 주일학교 선생이 되기를 바라서 장학금을 투자하기로 했다.

처음 한족들과 학습을 하면서, 그들이 어려운 형편 가운데서도 주님을 사랑하고 있는 뜨거운 마음을 느낄 수 있어서 감동적이고 고마웠다. 주님이 은혜 주시면 한족 쪽으로 선교하려는 우리에게 희망의 빛을 보게 해 주셨다.

김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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