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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선교/1996-1998 정착

단동((丹东, dandong) 1997

단동(丹东, dandong) 9.22-30, 1997

1997년 5월  단동 시 민정국(민정국)으로부터 유치원이나 양로원 사업을 위하여 의논하고 싶다는 초청을 받았다. 목단강에서 저녁 열차로 15시간 밤새 달려서 다음 날 아침 심양 역에 내렸다. 심양에 사는 조 자매가 단동 표를 사서 우리를 기다리기로 했는데 단동 기차 시간이 다 되어도 나타나지 않아서 답답한 가운데 있다가 기차표를  사기로 했다.

그때만 해도 아직 중국은 줄을 서서 표를 사는 일은 없었다. 몰려든 인파들의 돈을 쥔 손들은 모두 창구를 향해 뻗쳐 있고 너도나도 표를 달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이 어지러운 인파 속에서 겨우 단동 표를 달라고 하여 사서 보니 단동 표가 아니고 장춘 표였다. 내 중국 발음이 아무리 시원찮아도 단동, 장춘은 발음 자체가 근본 다른데 어떻게 이렇게 될 수 있는지, 하기는 수많은 손이 창구에 넣고 서로 표를 사려고 소리치니 장춘 소리를 듣고 나에게 그 표를 준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빨리 표를 무르는 창구에 가서 표를 무르고 다시 단동 표를 샀다. 5시간 만에 단동에 내리자 내 눈길을 끈 것은 거대한 모택동 동상이 북한을 향하여 마치 축복이라도 하는 양 오른손을 들고 서 있었다. 

처음 보는 중년의 강 집사 부부가 우리를 맞이하여 주었다. 그리고 우리를 북조선 식당으로 안내하여 점심 대접을 해주었다. 그리고는 금강산 공원 밑에 있는 금강산 호텔에 들었다. 강 집사가 젊어서는 집단 농장에서 노동 영웅 칭호를 받을 만큼 강단이 있는 여성이다. 지금은 단동 정치위원회에 적을 두고 있으면서 신의주를 오가며 무역 사업을 하고 있었다. 강 건너 신의주 사정도 자세히 들을 수가 있었다.  압록강 하류에 자리 잡은 단동 시는 인구 250만의 도시로 아담하고 깨끗한 도시로 강 건너 신의주시와 마주 대하고 있다. 북한과 무역거래가 활발한 국경도시이다. 매캐한 매연과 추위에 움츠리는 북방에서 온 우리에게는 푸근한 날씨와 깨끗한 공기 그리고  도로변에 핀 꽃들이 정서적으로 편안함을 주고 있었다.

단동 시는 중화인민공화국 요영성(遼寧省)에 있는 도시로, 압록강 가에 있으며 압록강 건너편 북한 신의주시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국경도시이며, 인구는 약 241만 명이다. 지금 인천항에서 페리가 다니고 있다.

 

금강산(錦江山) 공원

호텔 뒤로는 소나무 숲이 울창한 공원이 자리 잡고 있는데 단동 인민들의 휴식처이다. 단동의 금강산(錦江山)과 북한의 금강산(金剛山)이 한글로는 같지만, 한자는 다르다. 단동의 금강산 이름은 강의 이름에서 온 것으로 중국사람들은 압록강을 금강(錦江)이라고 부른다. 금강산은  높이가 151.8m ×151㎢ 의 넓은 공원으로 8개의 구역으로 나누어져 다양한 활동 장소를 제공하고 있다. 주요경관으로는 아름다운 누각들이 함께하는 휴식처와 동물원 식물원은 볼만하다. 항 미원 조 박물관  등이 있다. 울창한  숲 속으로 등산로가 잘 나  있고 각종 유락 시설들도 잘 꾸려져 있다.

이른 아침이면 길을 메울 만큼 많은 시민이 산을 오르고 있었다. 우리도 아침에 시민들과 어울려 공원을 올랐다. 공원 꼭대기(정상)에는 17.5m의 웅장하고 아름다운 전망대가 우뚝 서 있다. 전망대에 서자 발밑 저 아래 백두산 천지에서 흘러내린 압록강이 위화도를 에워싸 흐르면서 중국의 단동과 북한의 신의주를 가르며 유유히 흘러가고 있다. 금강산에서 압록강은 1.8km로 저 건너 신의주시가 한눈에 들어온다. 책에서만 배워 알고 있던 위화도를 보고 있노라니, 이성계의 반정 회군의 그 날이 떠 오른다.  

♣이성계 장군의 위화도 회군(威化島 回軍)
고려의 역사가 끝나갈 무렵인 1388년(우왕 14) 음력 5월에 요동 정벌 차 군사를 이끌고 압록강 하류 위화도에 이른 우군 도통사 이성계 장군의 군단이 반정 쿠데타를 일으켜 개경으로 회군한 사건이다.

 

  금강 공원 정문                                                                                    정상에 있는 금강 정

신의주의 모습
신의주 시내에는 보기 흉하리만치 많은 공장 굴뚝들이 높이 솟아 있었다. 섬나라 왜국이 산업단지로 건설하여 쓰던 것들이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그 많은 굴뚝 가운데 연기 나는 곳은 한 곳도 없다. 이 모습이 저곳 형편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주는 한 장의 그림이었다. 단동에 비해 신의주 시내는 우중충하고 생기가 없어 보여서 마음 한쪽이 울적해졌다. 아침이어서 굴뚝에 연기가 나지 않나 해서 다음 날은 오후에 올라와도 여전히 연기는 없었다. 며칠 뒤 신의주로 무역 사업을 하는 분을 통해서 들은 것은 원자재가 없어서 공장들이 일을 못 한 지가 오래되었다고 한다. 이 모습을 보면서, 우리의 반쪽 조국을 도울 수 있는 길이 있다면 다른  일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민족이 다 함께 잘 살 수 있는 데, 북쪽은 어떻게 저렇게 고집스럽게 살고들 있는지 안타깝기만 했다. 산에서 내려오는 동안 내 마음이 아주 편하지를 않았다.

 

신의주 공장지대

      

압록강의 풍경

아직 겨울 추위가 가시지 않은 북방(목단강)에서 온 우리는 봄의 따스함을 느끼며 가벼운 옷차림으로 압록강 변으로 나갔다. 시내 길 화단에 피어 있는 꽃들은 우리에게 봄의 형기를 느끼게 해 주고 있었다. 압록강에 나가 보니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놓은 철 다리는 6.25 한국 전쟁 때 유엔군 폭격으로 다리 상판은 다 무너졌고 다리 기둥(橋脚)들만 덩그렇게 남아 있었다. 다행하게도 중국 쪽으로 겨우 두 칸이 남아 있어서 사람들이 가 볼 수 있도록 열어 놓고 있었다. 소련과 중국 그리고 조선의 합작으로 일으킨 적화통일 불장난의 아픈 흔적이 이렇게 세월을 달래며 서 있었다. 우리는 그 다리 끝에서 더 갈 수 없는 저 건너면 반쪽 고국을 바라보면서, 언제나 저곳을 마음대로 다닐 수 있는 때가 올 수 있을까 하는 아쉬운 마음을 달랬다. (끊어진 이 다리는 조선 왜국 총독부가  놓은 다리다. (1909년 5월-1911년 10월 완공) 길이 944m, 넓이 11m, 12개의 교량 가운데 신의주 쪽에서 9번째 중국 쪽에서 4번째가 개폐식으로 되어 90° 회전하게 해서 배들이 지나다니도록 했다. 1950년 미군에 의해 폭파되어 신의주 쪽은 교각만이 단동 쪽은 네 개의 상판이 그대로 남아 있다.

 

 우리는 중국사람의 보트를 타고 압록강 변 신의주 20여 미터 가까이 아래서부터 압록강 다리 가까이 까지 올라가면서 돌아보았다. 경계 근무하는 병사들, 빨래하는 여인들, 낚시를 드리우고 있는 아이들의 초라한 모습들은 그들의 넉넉지 못한 삶을 보여주고 있었다. 우리가 그들에게 손을 흔들고 소리를 질러도 그들은 반응하지 않아서 괜히 쑥스러웠다. 우리가 신의주 강가를 거슬러 올라가는 동안 인공기를 단 큰 나무배(목선(木船) 한 척이 사람을 가득히 싣고 강을 거슬러 올라가고 있는 데 우리는 조심스러워서 그저 물끄러미 쳐다만 보고 있었다. 그들 가운데 누구 하나 손을 흔들거나 하는 사람은 없었다. 모두 무표정하게 보였다. 차림새로 보아 일하러 가는 노동자들 같았다.  

밤에 다시 우리는 다시 압록강 강변에 나가 밤의 모습을 보려고 갔다. 중국 강 이쪽에는 반짝이는 오색 네온 불빛이 어두운 밤을 밝히는 식당들과 유흥장들이 소란스럽고 외식 나온 사람들이 많다. 오색네온의 불을 밝힌 유람선이 어두운 강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저 건너편 압록강 다리 끝에 있는 검문소의 희미하게 비치는 불빛 말고는 신의주 시내 어느 곳에도 불빛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캄캄한 어두움에 묻혀 있을 뿐이었다. 지금 이곳은 사람들이 무리 지어 몰려다니는 유흥객들과 강바람을 쏘이러 나온 사람들로 붐비고 있는데, 저 건너 쪽은 그저 고요하기만 하다, 모두 깊은 잠에 빠져 있는지, 아니면 삶의 고뇌를 안고 씨름하고 있는지, 궁금하기만 했다.

 

카메라에 비친 신의주의 밤


신의주 일일 관광 신청  
우리는 호텔 계산대에서 신의주 일일 또는 이틀 관광객을 모집하는 광고를 보았다. 아침에 호텔 계산대에 가서 나는 캐나다 사람인데 신의주 관광을 갈 수 있느냐고 물었다. 여직원이 여행사에 전화해 보더니 캐나다 여권이면 갈 수 있다고 한단다. 우리 보고 사진을 두 장씩 준비해서 가지고 오라고 해서, 우리는 너무 반가워 바로 나가서 사진을 찍어 가지고 와서 신의주 일일 관광 신청을 했다. 종일 단동 정부 관계자들과 만나 복지사업 관계를 의논하고 그분들의 안내로 여러 곳을 돌아보고 저녁까지 얻어먹고 늦게 호텔로 돌아왔다. 우리는 기대하는 마음으로 계산대에 갔는데, 우리 여권을 돌려주면서 우리 여권에 한국을 방문한 도장이 찍혀 있어서 안 된다고 하면서 다음에는 새 여권을 가지고 오라고 하였다. 우리는 좀 섭섭한 마음이었지만, 다음에는 새 여권을 만들어 한국을 거치지 말고 중국으로 바로 들어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뒤로 우리는 어떻게 강 건너를 한 번 가 볼 수  있을까 하는 마음이 떠나지 않고 있었다.

 

북조선 TV

우리는 이곳에서 처음으로 북조선 TV를 볼 수 있게 되었다. 방영 시간도 짧고 기술적인 면도 초라했다. 마침 이때는 위대한 영도자요, 전략가요 영명하신 혁명가 김정일 지도자 동지를 당 총비서로 추대해야 한다는 전국의 열화 같은 선전 대회가 한창일 때여서 매일 저녁 똑같은 소리여서 이틀을 보고 나니까 조선 TV를 더 보기에는 피곤할 정도다. 우리는 이번 단동 방문에서 금강산에 올라 신의주를 바라보면서 조선을 방문하고자 하는 동기가 생겨났다. (조선 방문기 참고)

우리는 단동 시 정치 협상 위원장을 만나서 양로원을 하겠다는 의논을 하였더니 환영하면서 행정적으로 힘써 주겠다면서, 한 삼 일간 우리를 위하여 찾아 주는 건물들은 모두 문 닫은 공장들이었고 가격도 비싼 것들이어서 흥미가 없었다.

     

다미선교회의 피해
이곳에서도 다미선교회 무리의 불행한 흔적을 볼 수 있었다. 92년 10월 28일 밤 12시 주님의 재림설을 선전하고 있을 때 관전 지방의 믿음이 좋은 네 사람은 재산을 정리한 후 자살을 했다고 한다. 미리 승천하기 위해서였다니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그날 수백 명이 콩밭에 모여서 12시 주님의 재림을 기다렸지만, 콩밭만 버린 채 촌극으로 끝나고 말았단다. 그 뒤 종교 국에서는 그곳의 조선족 기독교를 폐쇄하고 주동자들을 체포했다고 한다. 이 내용은 시 관계자가 나에게 들려준 말이다. 중국이 개방하고 아직 어리숙할 때 한국에서 선교나 사업을 한다고 단동에 왔던 분들이 남기고 간 사기행각은 이래도 되는가 하는 한심스러워 몇 가지 예를 들어 본다.

 

한국 사기꾼들의 일화

예 1 - 한국 사업가가 와서 시내 중앙에 있는 몇 층짜리 큰 건물에다가 한국식 백화점을 차리겠다고 하자 시 관계자들이 너무 좋아서 계약을 체결하고 나서, 시에서 너무 반갑고 고마워서 한국 사장에게 우리가 도와 드릴 일이 있으면 말하라고 하자, 북한을 한번 가 보고 싶다고 했단다. 그랬더니 시에서 북쪽 압록강 변방 부대로 하여금 북쪽으로 살짝 건너가서 바람을 씌워주고 온갖 융숭한 대접을 했다는데, 한국에 자금을 가지러 나간 사장은 함흥차사라고 나에게 푸념을 했다.

 

예 2 - 한국 사장이란 분이 와서 시계 공장을 차리겠다고 하여 낡은 시계 공장을 계약하고는 일주일 내에 내부를 청소하도록 요구하여 내가 아는 집사 남편이 일꾼을 사서 죽으라고 했는데, 한국 사장은 시 정부로부터 대접만 잘 받고는 사라진 후로는 2년이 넘도록 무소식이란다. 
    
예 3 - 한국서 온 사업가 박성수는 산도 무역회사라는 것을 꾸려서 병원을 차린다고 하면서 시 관계자들을 얼려(속여) 먹다가 달아났다고 한다. 

이상은 순진한 중국사람들을 얼려(사기 쳐) 먹은 사건들이다. 이런 이야기는 중국에는 이제 수두룩하다. 이런 일들을 통하여 이제는 중국사람들이 한국 사람들을 경계하며 조건을 강화하고 있었다. 

 

또 사업과 선교를 아울러 하다가 추방당한 사례들을 들려주었다.

예 1 - 미국서 온 공 목사는 봉성 지역에 간장 공장을 짓고 있었다. 그러나 선교하는 일들이 드러나서 공장을 차리다가 추방당하였다. 
 
예 2 - 한국의 추 목사라는 분은 컴퓨터 학원을 차려서 운영하면서 선교 일을 한 2년 정도 하다가 추방당하였다.

위의 두 경우는 우선 사업부터 확실하게 하여 이 나라 사회에 유익한 일에 먼저 이바지했으면 좋았을 텐데, 모두 너무 서두르는 데서 오는 사고였다.

 예 3 - 미국에서 온 연세 많은 목사는 북조선에 쌀 던지기 하는 것을 좋아하는 분이었다. 이분들은 작은 봉지에다가 쌀을 담아서 단동에서 한 40분 정도 북쪽으로 가면 압록강이 아주 좁아지는 곳이 나온다. 중국인 보트를 세내어 조선 쪽으로 가까이 지나가면서 짤 자루를 던진다. 그곳은 북쪽 경비도 없고 던질 때는 사람이 없지만, 나중에 다 가져간단다. 그런데 문제는 이 좋은 일이 중국 선교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얻는 것보다는 잃는 것이 더 많다는 사실을 그분들이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변경 지구에 불미스러운 소문들이 꼬리를 물게 되자 중국 변경 수비대에서 그 부근을 통제하기 시작하였다. 그곳은 단동을 방문하는 한국 사람들이 자주 찾는 곳인데, 더는 갈 수 없게 되었다. 아울러 쌀자루도 던질 수가 없게 되었고, 공안국에서는 추 목사의 사진을 TV에 내보면서 수배하기도 했다. 이런 일이 있고 난 뒤 단동 공안국은 외국인 종교 활동 단속이 심해졌다.

예 4 - 북한에 무역하는 조선족은 북한선교를 하겠다는 한국 분으로부터 경비를 받고 작은 성경을 자기 짐차에 숨겨서 신의주로 건너가다가 북한 세관에 적발되어 반병신이 될 만큼 매를 맞고 쫓겨난 경우도 있다.

 

45년 만에 만난 어머니와 동생들
조 씨가 나를 데리고 소 목장을 하는 호주 교포 김 집사를 찾아가서 나를 소개해 주었다. 이 분은 호주 교포로 은퇴를 하고 연변 과학 기술학교 기술부장으로 있다가 이곳에 와서 소와 염소 등을 키우고 있었다. 고향이 평안도로 한국 전쟁 때 10대로 아버지를 따라 남쪽으로 감으로써 어머니와 형제를 이별하게 되었다고 한다. 조건 없이 소와 염소 등을 키워 일 년에 몇백 마리씩 평안도 당국에 보내는 일을 하면서, 평안도 당국에 어머니와 동생을 찾아 달라고 부탁을 했는데, 사흘 만에 어머니와 동생을 데리고 왔단다. 45년 만에 어머니와 동생들을 만난 것이다. 아들 덕분에 어머니와 동생들이 주택도 배당받고 양식 배급도 받게 되었다고 한다. 자기는 이제 어머니와 동생을 위하여 사는 것이 주님을 섬기는 것으로 생각한다고 했다.   

 

한국 선교단체의 대북 선교 사고 

이 집사님 농장에 한국의 한 선교단체가 북한에 무상으로 보내는 빵 공장을 차렸다. 김 집사의 소개로 빵을 평안도에 공급하면서, 김 집사는 선교회 대표에게 어떤 경우도 빵 속에 성경이나 전도 물을 넣지 않도록 부탁했다고 한다. 그런데 얼마 뒤 선교회에서 빵 상자 밑에 아주 작은 신약 성경을 숨겨 넣어 보냈는데, 북한 세관원에게 발각되어 운전사가 반죽을 만큼 얻어맞았다. 그리고 김 집사가 불러 들어가서 엄청나게 혼나고 나와서는 빵 공장을 폐쇄하고 다 내쫓아냈다고 한다.

  

- 또 한 번은 김 집사가 소를 가지고 들어갔는데, 평안도 당국에서  한국 기독교 신문에 난 대북지원으로 1억 원을 모금한다는 광고를 보여주면서, 이 돈이 언제쯤 오느냐고 물어서 깜짝 놀랐다고 한다.  
 
◈ 한국 사람들은 중국과 북한의 간접 선교를 너무 쉽고 생각하고 있었다. 바쁜 우리 국민성이 간접 선교를 하는데도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배고픈 어린이들을 위하여 보내는 빵 차에 성경을 숨겨 보내는 것이 무엇이 그렇게도 바쁘고 중요한 일인지 아쉽기만 하다. 우선 먹이고 정을 쌓으면서 오가는 길이 좀 편해지도록 부단히 만나서 대화하는 일이 먼저 중요할 텐데, 왜 그리 서두는지!! 그렇게 힘들게 준비하고 많은 자금을 투자하여 한 번으로 일을 망치는 이것이 그들의 선교 정책인지?

김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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