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독일 여행

하이델베르크 요리 문답

The Heidelberg Catechism, 1563년) 

 

 

1. 하이델베르크 교리 문답서를 ‘신앙고백서'라고 하면, 자기가 믿는 바를 선언하는 것 같은 엄숙한 느낌을 받는다. 한국은 외국에서는 평이하게 쓰는 용어를 번역할 때 엄중한 뜻을 가진 용어로 번역하기도 한다. Heidelber Catechism은 묻고 답하는 '교리문답서' 란 뜻이다. 그저 성경 교리를 공부하는 책이다. 또 다른 예를 들면, 가톨릭의 교황은 영어로는 Pope으로 한 종교집단의 우두머리란 뜻으로 중국처럼 '교종(총회장)'이라고 번역하여야 옳은데, 한국에서는 괜히 정치적인 뜻을 지닌 '교황'이란 무시무시한 용어로 번역하여 허세를 떨고 있다.(※Blog. 혼합종교 로마 가톨릭)  

한국어로 번역한 '신앙고백'은 원본의 독일어는 ' Katechismus'는 영어의 catechism으로 모두 '가르친다'라는 헬라어 동사에서 유래한 단어이다. 그래서 바른 번역은 “신앙 교육서, 교리문답서, 교리 집”이다.  따라서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서는 믿는 사람과, 새로 믿는 사람에게 기독교 기본신앙의 요소들이 무엇인지를 쉽게 배울 수 있도록 만들어진 문답 형태의 교리 책이다.

 

2. 기독교의 교리, 신조, 신앙고백서의 역사적 배경

기독교 역사에는 수많은 교리, 신조, 신앙고백서, 등의 이름으로 기독교의 본질을 확인하는 문서들이 만들어졌다. 이 모든 행위는 기독교를 대적하는 악의 무리로부터 성경의 진리를 보존하고 방어하기 위해서였다. 처음 복음이 이 세상에 전해지면서, 이 땅에 원래 자리 잡고 있던 철학과 토착 종교들이 복음의 저항을 받게 되자, 나름대로 기독교의 진리를 공격하고 와해시키려는 사단의 노력이 왕성하게 일어났다. 이를 저지하고 믿는 자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성경의 가르침과 거짓 가르침이 무엇인지를 가르치는 데 힘쓰게 되었다. 그때는 아직 성경이 완전하게 책으로 이루어지지 않아서 진리를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컸다. 통신망이 갖추어지지 않은 그 시대는 여러 나라와 지방에서 생겨나는 신학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날을 정하여 모여야만 했다. 그래서 사도와 속사도, 교부 시대에 이르기까지 종교회의를 자주 열어야 했고 그때마다 교리, 신조를 만들어 믿는 진리를 확정하고 이단 사설을 방어하는 일에 힘쓰게 되었다.

 

악용되는 종교회의

그러나 538년부터 로마 가톨릭의 종교 암흑시대가 시작되면서 이런 종교회의는 본연의 의무를 망각한 채 이교와 혼합된 가톨릭의 거짓된 교리를 마치 성경의 진리인 양 합법화하는 도구로 악용하여 오늘날의 로마 가톨릭이 만들어졌다. 어거스틴이나 오리겐 등 여러 교부들도 가톨릭의 혼합종교화에 일조하는 교리적인 주장들을 도운 공범자들이다. 일반적으로 기독교의 대표적인 교부로 여기나 그들의 영성 안에 들어가 보면 철학과 세속 종교가 뒤섞인 이단적인 요소들이 가득하다. 예를 들면, 교종 제도, 연옥, 마리아의 여신 승격, 등. 가톨릭의 이 교화 과정과 교리적 타락에 관해 관심이 있다면 blog.daum.net/jewhakim에 올려져 있는 “로마 가톨릭(천주교)은?” 자료를 참고 바람.

16세기에 들어서면서 로마 가톨릭의 타락과 부패가 극에 달하고 있었다. 성경의 진리인 “오직 성경으로, 오직 그리스도로, 오직 은혜로, 오직 믿음”을 회복하려는 개혁의 불길은 개혁의 새벽 별, 영국의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 1384)와 체코의 얀 후스(Jan Hus 1415) 순교자의 무덤을 넘어 독일의 마르틴 루터, 스위스의 츠빙글리, 칼빈, 영국의 낙스 등의 개혁자들에 의하여 유럽 전역으로 번져나갔다. 그런데 개혁 시대에도 개혁 뒤에도 교리나 신조 그리고 신앙고백서들이 근대에도 멈추지 않고 나오고 있다. 성경이 완성된 뒤에는 성경 하나면 다 될 텐데, 왜 그런 것은 필요할까? 대답은 이렇다.

개혁 시대 유럽의 정치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때 유럽은 신성로마제국이 지배하고 있었고 독립국은 없었다. 영주들이 다스리는 권한의 경계가 다르고, 시대에 따라 벌어지는 가톨릭과의 분쟁, 같은 개혁파의 신학적 논쟁 등으로 문제를 정리 정돈하기 위해서였다. 오늘날에도 예를 들면 신신학 주의자들과 보수 정통 사이, 그리고 서로 다른 교파 간의 문제들로 저들 나름대로 꾸민 신조나 교리 신앙 고백들은 저들의 종교적 정체성의 표현으로 만들어지고 있었다.

 

신성로마제국에서 독일은 정치적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독일은 여섯 곳으로 나누어져서 각 지역을 지배하는 분봉 왕 같은 제후가 있었는데, 이들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뽑을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는데, ‘선제후(選帝侯 Elector)’라 부른다. 이 여섯 제후 가운데 ‘하이델베르크’를 중심으로 하는 팔라티네이트(Palatinate)의 지역을 다스리는 프레더릭 3세는 선제후로 제국의 황제와 가까운 사이로 여섯 제후 가운데 가장 영향력이 컸다. 프레더릭 제후는 로마 가톨릭에서 개종한 루터 교인으로 자기 지역을 가톨릭의 영향에서 벗어나 기독교화한 진리의 수호자였다. 제후들이 다스리는 지역에서 기독교와 가톨릭이 서로 부딪히면서 일어난 종교적 갈등은 곧 사회적 혼란으로 이어져서 제후의 간섭으로 가톨릭이 전 같이 마음대로 독재를 못 하게 되었다. 개혁의 영향과 함께 각 지역 제후들의 정치력이 강해지면서 교황권은 약해지고 있었다. 이렇게 되자 가톨릭은 1555년 제후들과 다음과 같은 정치적 타협을 하게 된다. 그것은 한 지역의 종교는 그 지역을 다스리는 제후가 결정한다는 내용을 가톨릭과 기독교 개혁자들 간에 합의한 것이다. 이 합의는 암흑시대가 끝나가고 있음을 알리는 한 줄기의 빛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 제후(諸侯 Lt. Princeps)=옛날에 일정한 영토를 다스리던 통치자의 칭호

♣ 선제후(選帝侯 Lt. Princeps Elector)=제후이면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를 뽑는 권한을 가진 선거인단으로 황제 다음의 높은 서열이다.

 

1562년 막강한 힘을 가진 선제후 프레더릭 3세(Frederick Ⅲ)는 자기가 다스리는 팔라티네이트(Palatinate) 영지의 종교를 기독교를 선포하여 악랄한 로마 가톨릭의 악행을 끝냈다. 그리고 연이어 선제후는 루터 교도이지만, 칼빈의 가르침을 따르는 경건한 통치자로, 자기의 영지 사람들을 성경의 진리로 통일시키고, 바르게 가르칠 수 있도록 하려고 기독교 신앙의 근본적인 가르침을 요약한 문서를 만들 결심을 하게 된다. 그는 자기 영지의 백성들이 누구든지 쉽게 성경의 진리를 배울 수 있도록 교리 문답서를 만들도록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젊은 신학 교수인 울시누스(Zacharius Ursinus 28세)와 궁중(宮中) 교회 설교가인 올레비 아누스(Caspar Olevianus 26세)에게 이 일을 하도록 명했다. 이렇게 해서 1562년에 완성된 원고를 프레더릭 3세가 읽어보고 만족하자, 이 교리 집은 하이델베르크에서 열린 총회에서 인준을 받아 1563년 초에 발간되었다. 하이델베르크에서 썼기 때문에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집'(Heidelberg Catechism)이라 불리게 되었다. 이 교리 집의 첫판은 독일어로 써졌으며 프레더릭 3세는 자기 영토 안에 있는 교회에 매 주일 이 교리 책을 가르치도록 명했다. 그리고 이 교리문답서는 유럽, 아프리카, 아시아, 미주 온 세계로 퍼져나가 많은 사람에게 도움을 주었다.

 

 

깊고 오묘한 성경의 진리, 여러 교리를 일반적으로는 알고는 있지만, 막상 물으면 대답을 잘 못 하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성경을 분해하고 주제를 일일이 설명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시간을 내어서 성경을 구체적으로 배울 필요가 있다. 하이델베르크의 교리문답서는 이러한 우리의 요구를 체계적으로 도와준다.

김제화

 

'독일 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안네의 일기  (0) 2021.04.29
Hitler와 유대 인  (0) 2021.04.29
제3차 독일 선교 여행(1)  (0) 2021.04.29
제3차 독일 선교 여행(2)  (0) 2021.04.29
제3차 독일 선교 여행(3)  (0) 2021.04.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