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독일 여행

Hitler와 유대 인

                                                                          Hitler는 왜 유대인을 미워했을까?

 

나는 독일에 있는 동안 이 문제를 이해하려고 독일 교회의 여러 형제에게 물어보았지만, 대충 이야기를 해 주긴 해도 구체적으로 속 시원하게 대답해 주는 사람은 없었다. 독일 사람들은 홀로코스트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들어서 더 물어보지 않았다. 세월이 가는 동안 나의 궁금증들은 여러 경로를 통하여 풀어졌다. 지금 Site에서 제공하는 독일 고등학교 교과서를 보면 독일이 유대인 문제에 관해서 바른 역사 교육울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먼저 교과서는 게르만 민족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를 분석하며 과거사의 어두운 면을 파헤쳐 어린 세대에게 사실 그대로 바르게 가르쳐 조상들이 저지른 민족적 죄악을 다시 저지르지 않도록 예방적 교육을 하는 면이, 저 섬나라 왜인과 근본 다른 민족임을 알게 되었다.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고 진정으로 사죄하고 보상하는 행동이야말로 게르만 민족의 멋있는 모습이었다. 코넬젠 출판사의 아비투어 비센 역사 교과서는 민족 사회주의를 파헤쳐 이데올로기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인 인종주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1933년 히틀러는 ‘뉘른베르크(Nürnberger) 법’을 만들어 유대인은 게르만 민족과 결혼을 금하며 모든 분야의 사회 활동을 금지하고 배척하면서 인종주의를 추구하기 시작한다. 히틀러의 인종주의 추구 목적은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민족인 게르만 민족의 피를 순수하게 보전하는 것이 민족의 가장 큰 과업이라고 생각하였다. 이처럼 나치 정권의 인종주의를 설명한 뒤 교과서는 "게르만의 " 피를 순수하게 보전하는 데 가장 큰 장애는 유대인과 함께 사는 것이라고 여겼다. 이어서, 이런 극단적 민족주의에 휩싸인 나치 정부는 게르만족의 정통성 보전을 위한 가장 안전한 방법으로 유대인 말살 정책(대량학살)을 택했다고 설명한다.

뉘른베르크법-1935년 9월 15일 뉘른베르크 전당대회에서 발표된 나치 독일의 반유대주의 법이다.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정권 하에서 제정된 2개의 법률 《독일인의 피와 명예를 지키기 위한 법률》과 《국가시민법》의 총칭이다. 유대인의 권리를 박탈한 법률로 악명이 높다. 

 

베르사유 조약(Treaty of Versailles)

유럽에 악마의 화신인 히틀러와 인종주의 이념을 가진 집단이 게르만 민족 가운데 생겨난 것은 인류의 불행이요, 유대인에게는 저주였다. 유럽 유대인의 불행과 고통은 세계 1차 대전에서 독일의 패전으로 새로 일어나는 민족사회주의 정치세력과 맞물려 있다. 세계 1차 대전은 1914년 7월 28일에 시작하여 1918년 11월 11일에 끝난다. 그리고 전쟁에 패한 독일은 엄청난 국가적 재앙에 빠지게 된다.  승전한 25개 연합국(미국, 영국, 프랑스, 등)은 전후 처리를 위하여 프랑스 베르사유에서 패전국과 함께 평화조약과 전쟁 배상 조약인 베르사유 조약을 체결했다.  

▶패전 동맹국--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오스만(터키) 제국, 불가리아 왕국(패전 뒤 왕국들 해체)
▶베르사유 조약(Treaty of Versailles)--1919년 6월 28일 서명, 1920년 1월 10일 공포
▶독일의 전쟁 배상금 : 영토 15% 상실,  국민 10% 잃음, 대포 5000문과 비행기 25000대 양도와 함께 군사력 제한, 1320억 DM(마르크)를 금으로 20년 안에 상환.

 

민족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나치) 창당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안은 독일은 정치, 사회, 경제적으로 어렵고 혼란한 틈을 타 1920년 민족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이 창당되었다. 히틀러는 1919년 9월 12일에 노동자당에 입당한다. 나치는 게르만 민족의 우수성을 강조하면서 민심을 사로잡기 시작하였다. 1929년의 세계대 공황은 독일을 더 어렵게 하면서 국민들의 불안과 불만이 하늘을 치솟고 있었다. 국민의 불안 불만을 해소시킬 희생양으로 유대인을 선동 선전의 표적으로 삼았다. 히틀러는 대중 선전선동의 전문가 괴벨스(Goebbels)와 함께  대중 연설과 대중매체를 통하여 유대인을 게르만 민족의 원수라고 흑색선전(조작과 모략의 가짜뉴스)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선전하기를, 우리가 전쟁으로 힘들어할 때 그 전쟁으로 이익을 본 것이 유대인이었으며, 증권거래소에서 투기를 일삼고 우리 등에 칼을 꽂은 유대인이요, 암시장 거래로 막대한 이득을 취한 자들이 유대인이라고 국민의 불만 불안을 유대인 탓으로 돌렸다. 그리고 유대인은 독일을 헤치는 독버섯으로 독일 사회에서 박멸해야 하는 존재라고 선동하여 정권을 잡는데 큰 발판을 마련했다.

국민들은 나치의 거짓 선전에 속아서 나치당을 적극 지지하기에 이르러 1932년 총선에서 나치당이 득표수 1/3을 얻으면서 제1당이 되어 히틀러가 총리가  되면서 측근들을 내각에 임명하였다. 그러나 제1당이 되지 못한 나치는  국회를 해산하였다. 나치당의 당수이며 총리인 히틀러는 1933년 3월 5일 총선에서 국민들의 절대 다수의 지지로 승리하자, 전권위임법(수권법)으로 모든 정당을 강제 해산시키고 헌법(바이마르 헌법)을 폐지했다. 이때부터 나치 일당 독재, 히틀러의 총통시대(1933-1945)가 열린다. 패전국으로 막대한 전쟁배상금으로 나라가 부도에 직면하고 있었고, 경제 파탄으로 물가가 천정부지로 오르면서 사회 혼란과 고통은 극심해지고 있었다. 나치당이 정치적인 패권을 장악하면서, 이 혼란한 나라를 안정시키고 패전으로 상처 입은 독일 국민을 하나로 뭉치게 하기 위하여 유럽의 돈줄을 쥐고 있는 유대인인의 재물을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또 엄청난 전쟁 배상금을 갚지 않을 한 가지 방법은 전쟁하는 길밖에 없었다. 그래서 10월에는 국제 연맹을 탈퇴하고 베르사유 조약을 일방적으로 폐기하고 군대를 재정비하면서 유럽의 맹주가 되려고 준비한다. 그리고 1939년 9월 1일 폴란드 침공으로 전 유럽을 점령하면서 독일은 과거 로마제국이 누렸던 1000년 제국의 환상을 가지게 되었으나 6년 만에 그 꿈은 깨어지고 말았다(1945.9.2). 

 

크리스털나흐트(Kristallnacht, 깨진 유리의 밤)

나치의 선동으로 1938년 11월 9일 밤. 독일 전 지역에 있는 유대인 상점과 사업장 7500개를 박살 내고 불태웠다. 이 밤을, “크리스털 나흐트, 깨진 유리(수정)의 밤”(유대인 약탈과 방화사건)이라 부른다. 그리고 전국의 수백 개의 회당을 불태웠다. 나치의 탄압으로 유대인들이 독일을 떠나려고 하자, 나치는 유대인들에게 재산의 90%를 바치는 조건으로 출국을 허가하였다. 실상은 나치가 바라던 기대였다. 이때 독일 유대인 50만 가운데 25만 이상이 떠났다. 

▶ Kristallnacht(깨진 유리(수정)의 밤)
    나치의 돌격대와 독일인들이 유대인 상점과 회당을 공격한 사건으로 수많은 유리창이 깨졌다고 해 서 붙여진 이름이다.

▶ 독일의 인플레이 에피소드 두 가지, 
1. 커피 한잔에 5000DM에 사서 마시는 데, 5분 뒤 한 친구가 와서 커피 한잔 사는데 1400DM로 올랐다고 한다.            
2. 한 사람이 손수레에 한 보따리 돈을 싣고 식료품을 사러 가서 잠시 볼일 보는 동안 도둑이 돈은 놔두고 수레만 훔쳐 갔다고 한다. 

 

거짓 구국의 영웅 아돌프 히틀러   

패전 뒤 절망의 그늘에서 헤어나지 못하던 독일 국민들은 나치의 선전선동에 속아서 혜성 같이 나타난 히틀러를 구국의 영웅으로 착각한다. 불행하게도 그는 전체주의 군주가 될 악마의 화신이었다. 민족마다, 나라마다, 태어나지 않았어야 하는 인간이 있는데, 게르민 민족에게는 히틀러였다. 같은 시대 저 섬나라 왜국도 게르만 민족의 동맹국으로 써 멸망과 저주가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역사를 보면 한 시대 또는 한 민족의 위기를 구원할 인물이 나타남을 드물게 보는데, 히틀러는 게르만 민족을 구원은커녕 나라와 민족을 망하게 하려고 태어났다.(세계 제2차 대전, 1939-1945)

 

선동 선전의 전문가 괴벨스(Goebbels) 

사회주의자(공산당), 우경주의 자들은 선전 선동에 능한 집단이다.  정권을 잡기 위하여 쓰는 전법으로 메스메디아와 연설, 그리고 인쇄물이다. 이 선전 선동은 사실과 진실보다는 중상모략과 가짜 뉴스로 사람을 속이는 체면술이다. 선동 선전의 전문가인 괴벨스가 히틀러 옆에서 정권을 장악하는데 악마의 한 수가 되었다.   

유대인을 저주한 괴벨
유대인은 세계의 적이요,
문화의 파괴자이며,
인류의 기생충이고,
혼돈의 자식이고,
악마의 화신이고,
부패의 효소이자
인류를 멸망 시킬 탈을 쓴 악마이다.
(독일제국 선전부 장관. 괴벨스)

 

뉘른베르크 (Nürnberger) 법 

1933년 히틀러가 나치당의 당수로서 독일 총리가 되어 일당독재 체재를 확립하면서, 유대인 배척 운동을 적극적으로 펼친다. 1935년 나치당의 첫 전당대회를 뉘른베르크(Nuremberg)에서 열면서, 이 첫 전당대회에서 뉘른베르크 법을 제정하였다. 이 법은 유대인을 배척하면서 홀로코스트로 이어지는 첫걸음이 되었다. 뉘른베르크 법은 독일인의 피와 명예를 지키기 위한 법이라는 두 개의 법률로 구성되어 있다. 그래서 모든 독일 국민에게 "티펜뿔라드(sippenblatt)”라는 혈통 증명서(종족 카드)를 만들어 주어 필요할 때에는 선조의 혈통 순수성을 증명하도록 하게 했다. 이 법의 요점은 우월한 게르만 민족의 피를 오염시키는 주범으로 유대인이라고 단정하여 철저히 격리하려는데 있었다. 독일인의 피와 명예를 지키기 위한 법률 7조와 제국 시민법 4조에서 게르만 민족의 혈통관리를 엄격하게 하였다. 독일인과 유대인의 결혼(성관계)을 금지하였고, 모든 공직에서 유대인을 내보냈고, 유대인은 일반대학에 갈 수 없게 했다. 그리고 시간이 갈수록 유대인에 대한 탄압은 그 도를 더하여 체포 구금 이송을 합법화하였다. 이제 유대인은 국민으로서 아무 인권도 권리도 없는 그저 없어져야 하는 거추장스러운 존재에 불과하였다. 그리고 독일과 유럽에 유대인을 전멸시키기 위한 수용소를 만들어 강제수용하기 시작되었다. 유럽의 독일 점령지 전역에 흩어져 사는 유대인을 집단으로 수송하는데 천재적인 역할을 한 자가 바로 아돌프 아이히만(Adolf Eichmann)이었다.

 

유대민족과 게르만 민족의 구분법

문제는 지난 2천 년에 걸쳐 유대인이 유럽 전역에 퍼져 유럽인들과 섞여 살면서 동화되었고 또 수많은 유럽 민족이 뒤엉켜 살면서 혼혈이 될 대로 된 상황인데 게르만 민족의 순수혈통이 어디에 있다고 말하는지 어리석기 그지없다. 그래서 나치는 독일인, 유대인이라는 이분법적 구분보다는 혼혈 정도에 따라 6단계로 구분하여 최종 유대인을 정의하였다. 나치는 유대인과 독일인을 가르는 혈통의 기준은 증조부모까지로 한정하면서 그 증조부모 가운데 유대인이 4명이면 독일인으로 인정한다. 그러나 유대인이 5명 이상이면 유대인으로 인정하여 독일 시민권을 박탈했다. 그러나 이런 분류와 상관없이 모호한 경계 선상에 있는 혼혈들은 1935년 11월을 기준으로 이전이면 혼혈로, 이후면 유대인으로 분류하도록 정했다. 그러면 유럽의 다른 민족은 괜찮고, 왜 유대인의 피만은 안 되느냐? 하는 것이다.

 

히틀러는 왜 유대인을 그렇게 미워했을까? 

 히틀러가 유대인을 그토록 미워하는 데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첫 번째 설은 역사와 정치 그리고 민족주의에 있고, 두 번째는 히틀러 자신에게 있다는 설이다.

1. 유대인에 대한 피해망상증 

히틀러가 왜 그렇게 유대인을 미워했는지는 그의 성장 과정에서 엿볼 수 있다. 그의 성장 과정은 평탄치 못했다. 아버지의 폭력적인 환경에서 자랐다. 부모를 일찍 여의고 고아원 등지에서 자라면서 그림솜씨가 있는 그는 엽서 등을 그려 팔았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유대인이 대한 열등감(complex)이  자리 잡고 있었다. 엄마가 유방암이 걸렸는데 의사가 왕진을 와서는 어머니 젖을 만지면서 검사하는 것을 보고 충격스러웠는데, 그 의사가 바로 유대인이었다. 미술학교에 입학시험을 보아 불합격하였는데 그 시험관 7명 가운데 4명이 유대인 선생이었다. 거리에서 그림을 그리는 동안 예쁜 아가씨와 사귀게 되었는데, 얼마뒤 자기를 버리고 다른 남자와 결혼을 했는데, 그 남자도 유대인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세계 1차 대전에서 독일이 패하고 나라가 엄청난 어려운 형편에 처하게 되었는데, 히틀러는 전쟁에 패해야 할 아무 이유가 없는데, 내부의 적 때문인데 바로 그 적이 바로 유대인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그의 마음에 자리 잡은 유대인에 대한 피해 망상증이 권력을 잡았을 때 무서운 앙갚음으로 나타난 것으로 본다.

 

2. 히틀러 할아버지가 유대인이라는 설

히틀러가 “뉘베른스크 법”을 만들기 전인, 1933년 10월 14일 영국의‘Daily Mirror’ 신문에 “히틀러의 할아버지가 유대인”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이 기사는 떠도는 소문인 '가짜 뉴스' 일지도 모르지만, 이로 인해 히틀러는 심리적으로 정치적으로 강한 위협을 받게 되었을 것이다. 만일 사실로 밝혀진다면 나치의 지도자는 물론 그의 정치적인 야망이 물거품이 되고 말 것이다. 이런 소문과 기사는 그를 초조하게 만들었으며 그의 위기의식은 그를 반유대주의자로 만들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해 본다. 반유대주의가 가장 두려워한 것은 혼혈문제였다. 즉 유대인 남성들과 게르만 여성들과 관계로 유대인의 피가 게르만의 신성한 피에 섞어지는(혼합(混合) 것을 가장 두려워했다. 히틀러는 게르만의 피는 신성하여 우월한 민족이고 유대인의 피는 더럽다고 여겼다. 그는 게르만의 피가 유대인의 피로 더러워져 가는 것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다. 히틀러는 유대인을 몰살시켜 버림으로써 자신이 유대인 혈통일지도 모른다는 불안에서 벗어나려고 저지른 만행으로 추측해 보기도 한다. 이 고등학교 교과서는 당시 나치 정부의 무모함이 자기 민족에게까지 영향을 미쳤음도 밝히고 있다. 게르만 민족이라도 동성애자, 정신박약자, 신체장애자 등 열성(劣性, 잡종)의 피를 가진 사람이라고 판단되면 모두 제거 대상이었다.” 이 같은 독일 교과서의 과거사 반성은 나치 정권이 저지른 온갖 잔혹한 행위들을 숨김없이 사진의 자료들과 함께 그대로 보여주고 있어서 존경스러웠다. 나는 역사 인식을 바로 하는 게르만 민족의 새로운 지도자들은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역사 인식을 바로 하지 않고 있는 저 왜구는 정말 구제 불능의 야만 족인 아닌가!!

 

◈ 연합국이 독일을 점령하였을 때 처리하지 못한 유대인 시체들이 부지기수였다. 

미군들이 학살 당한 유대인들의 시체들을 치워주고 있다.

▶ Hitler는 적 그리스도의 화상
히틀러, 그는 스스로 유대인들을 미워하는 것이, 가증스럽게도,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면서 자기의 악행을 정당화하고 있다.  
“나는 위대한 창조자의 뜻에 합당하게 행동하고 있다고 믿는다. 
유대인들로부터 나 자신을 보호할 뿐만 아니라, 주님의 사역을 위해 투쟁하고 있다고 나는 믿는다.”
(I believe that I am acting accordance with evil of the Almighty of Creator. 
By defending myself against Jews, I am fighting for the work of the Lord)  
(히틀러의 남긴 기록물에)

 

게르만 기독교의 휘장(1934)

유대인을 향한 히틀러의 이 말은 유럽 기독교의 무언의 동의를 얻어내기 위한 정치적인 협박이며 술수였다. 그가 정권을 잡은 뒤 독일 교회를 장악하기 위해 거짓 평화의 마수를 내민다. 우리 서로 손잡고 평화롭게 잘해 보자는 악마의 속임수에 독일 교회(루터교회) 지도자들이 속아서 교회를 악마의 손아귀에 갖다 바쳤다. 나아가서 히틀러는 독일 목사들은 교회나 돌보라고 하면서, 나라는 내가 돌 본다고 하면서 목사들의 활동범위를 교회로 제한하였다. 이 말을 들은, 니멜로 목사는, 하나님이 독일 국민에게 주신 책임은 국가만 국민을 돌보라는 것이 아니라, 교회도 국민을 돌보라는 책임을 주셨다. 당신도 누구도 이와 같은 권리를 빼앗아 갈 수 없다. 세상에 일어나는 악한 일에 교회가 침묵할 수 없다. 이 말을 한 니멜로 목사는 그날 밤 아무도 모르게 비밀경찰에 잡혀갔다. 히틀러가 민족 영웅으로 떠오르자 변절된 루터교의 한 무리도 이 나치 운동에 협력하는 들러리로 춤추게 된다. 독일 신앙의 결집체라 불리는 새로운 '게르만 기독교'라는 친 나치주의를 선전 선동하는 교단이 생겨났다. 나치당원으로 이 교단의 수장인 '호센트 켈러'는 '게르만 기독교' 강령에 "하나님은 나를 독일인으로 창조한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하나님은 나를 독일인을 위하여 투쟁할 것을 원하신다. 민족사회주의와 인종주의에 찬성하는 아리안 주의에 동의하며, 기독교 안에는 유대인은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 유대인은 다 죽여야 한다", 고 썼다. 그리고 목사 가운데 유대인과의 혼혈인 자는 다 떠나라고 했다.

▶게르만 기독교회(Deutsche Christen)는 반유대주의, 인종주의, 지도자 원리적 나치즘에 입각하여 독일의 기독교인을 이 교리 전반에 맞추기 위한 목표를 가진 죄파 단체는 히틀러와 함께 시작했다가 함께 끝난다(1932-1945).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1906, 2.4~1945, 4.9)

히틀러의 살인마 공포 정치의 광기 앞에서 유럽의 루터교도, 복음주의 기독교도 로마 가톨릭도 아무 저항도 못한 채 침묵하고 있었다. 이 혼란한 시기에 WCC와 독일 기독교는 히틀러를 마치 구세주같이 고백하며 그의 정책을 맹목적으로 추종할 정도로 급격히 우경화되고 있었다. 독일 교회가 침묵하고 있을 때 분연히 일어난 한 젊은이가 있었는데 그는 '본회퍼'였다. 독일 루터교의 목사요, 복음주의 신학자, 반나치 운동가. 그는 21세인 1927년 12월 베를린 대학에서 ‘성도의 교제(Sanctorum Communio)’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는다. 그리고 1930년 교수 자격을 얻은 뒤 베를린 훔볼트 대학 신학부에서 본격적으로 활동한다.

 

히틀러가 정권을 잡은 1933년부터 본회퍼는 방송을 통해 히틀러의 정책에 저항한다. “하나님의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야 할 교회가 오히려 히틀러를 '그리스도'라고 따르고 있다”라고 강하게 비판한다. 본회퍼와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WCC와 독일 기독교를 정죄하고 저항하는 교회인 "고백교회(Bekennenede Kirche)"를 설립하고 고백교회 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지속하며 기독교 신앙의 회복을 위해 활동하였으나, 게슈타포에 의해 폐쇄되었고, 본회퍼는 교수직과 목회활동에 제재를 받으면서 감시를 받는다. 그 당시 극한 고문과 죽음의 공포 앞에서 독재자 히틀러에게 맞설 신앙적이고 양심적인 기독교 지도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1940년 미국 유니언 신학교에서 연구하던 본회퍼는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반나치 운동에 가담하려고 독일로 돌아온다.

히틀러의 학정을 보다 못한 고위층과 정보부 그리고 본회퍼와 독일군 정보부장의 부관으로 있던 매형 등이 참여하여 암살단을 꾸린다. 본회퍼는 암살단에 참가하면서, “미친 사람이 모는 차에 희생되는 많은 사람을 돌보는 것만이 나의 과제가 아니다. 이 미친 사람의 운전을 중단시키는 것도 나의 과제이다.”라고 했다. 그러나 히틀러 암살이 미수에 그쳐 본회퍼는 체포되어 1945년 4월 9일 새벽에 39세의 나이로 형장의 이슬로 순교자의 영예로움을 안고 주님의 품에 안겼다. 살인마요 전쟁 광인 히틀러를 제거하려는 노력들이 있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그가 교수형에 처해지기 직전에 남긴 마지막 말은,  “이것이 마지막이다. 그러나 나에게 있어서 새로운 삶의 시작이다.”

▶ 히틀러 암살 영화 “작전명 발키리(Valkyrie)” 2008년 개봉된 이 영화는 나치군 대령 폰 슈타펜버그의 히틀러 암살 시도를 다룬 실화를 영화 한 작품이다. 

김제화

'독일 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Martin Luther 종교개혁의 현장  (0) 2024.09.06
안네의 일기  (0) 2021.04.29
제3차 독일 선교 여행(1)  (0) 2021.04.29
제3차 독일 선교 여행(2)  (0) 2021.04.29
제3차 독일 선교 여행(3)  (0) 2021.04.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