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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유학

학교 졸업/ 영주권 예비 심사

1989년을 맞이하면서,

새해가 밝으면서 우리 가족이 지난 4년 반 동안 캐나다에서 살아온 삶의 막바지에 이르었다. 우리가 계속 캐나다에서 살 것인지 떠날 것인지 얽힌 매듭이 풀어져야 한다. 해묵은 우리의 간절한 기도를 응답해 주시면, 그때 우리가 새로운 길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주님의 인도하심을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새해를 맞이했다. 

 

 한인교회 설립 1. 1. Sun

그동안 함께 성경 공부해 오던 형제자매들이 이제 20여 명이 되었다. 우리도 이젠 모일 장소가 필요하였다. 그래서 좀 알고 있는 Canadian Scarborogh Bible Baptist Church의 목회자를 만나서 교회당을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다. 이 교회는 교단적인 조직이 없는 독립교회였고, 목회자 부인과 자매들이 예배 때 수건을 쓰며 성찬예배는 한 달에 한번 드리고 있었다. 담임 목회자는 미국에서 성서 침례교회 성경학교를 졸업하신 분이지만 조직을 통하여 목사 안수를 받은 적이 없는 자비량하는 목회자였다. 그리고 교회가 재정이 어려우므로 Plumbing 회사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그분의 설교를 들어보면 구원의 복음을 강하게 전하는 성경 중심의 설교자였다. 그동안 우리 성경모임의 식구들을 데리고 캐네디언 모임에 나가보면 하나 같이 싫어했다. 그것은 언어와 문화 차이에서 오는 불편함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한인 교회 시작을 위하여 의논을 끝내고 새로 얻은 교회당에서 모이기로 하였다. 이제 한인 사회에 드러내 놓고 전도활동을 시작하려는 것이었다. 교회 이름은 Scarborogh Korean Church란 이름으로 창립 예배를 드렸다. 지난 두 해 교제해 온 형제자매들을 가르쳐서 자매들이 성서적으로 예배 시 머리에 무엇을 쓰는 것은 옳다고 생각하여 형제자매 모두를 설득하였더니, 10여 명의 자매들이 모자를 사러 가자고 하여서 각각 좋아하는 모양과 색깔로 샀다. 어떤 자매들은 평생에 모자를 써 본 적이 없는데 처음 써 본다면서 좋아하기도 하였다. 자매님들이 예배드릴 때 캐내디언들과 같이 모자를 쓰기 시작했고 그리고 성찬 예배도 드리기 시작했다. 여기 이민 사회에서 내가 지향하는 교회는 누구든지 올 수 있는 한인 교회를 이루고 싶었다. 

        

   

 

 

마지막 학기
신년 휴가가 끝나서 인지 사업이 제 궤도를 찾고 있었다. 졸업에 필요한 2학점이 부족하여서 저녁 시간에 2학점짜리 “기독교 개발학과(Christianity and Development)”를 택했다. 교수는 세계선교지에 필요를 보내는 거대한 선교 지원 단체의 책임자로 이 분야의 전문 박사학위를 가지고 있었다. 이 코스를 시작하고 보니, 내가 농업학교와 한미재단에서 배운 것들로 사후동에서 매카피 선교사와 함께 20만 평을 개간하던 그 사역의 일부와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선교지에서 복음만 전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필요를 가능한 도와주면서 복음을 전하는 사역이다. 즉 가능하고, 기능이 있다면 뒤떨어진(낙후, 落後) 지역, 선교지에서 그들의 삶의 일차적인 문제도 해결하도록 도와주는 일이다. 그리고 교육, 의료, 농업, 각종 기술 분야 등이다. 아주 흥미 있고 재미있는 코스였다. 시험은 없고 30쪽짜리 페이퍼만 만들어 내면 되어서, 이 학기는 부담이 없어서 가벼운 마음이다.

 

교통사고 날 뻔  1. 4. Wed
갑자기 내린 눈으로 고속도로에는 소금을 빨리 뿌리지 않아서 얼어있었다. 밤 11시경 학교 도서관애서 돌아오는 고속도 Collector Line의 경사진 길 가운데에는 얼어서 낮은 턱을 이루고 있는데 그 턱에 앞바퀴가 미끄러지면서 차가 3차선을 넓은 길을 둥그렇게 원을 그리면서 2바퀴나 넓게 돌다가 겨우 섰다. 마침 늦은 밤이어서 가까이 뒤 따르는 차가 없어서 다행이었다. 내 차가 도는 것을 보고 저 멀리에서 차들이 멈춰 서 주어서 고마웠다. 

 

도 선생이 지나간 가게 1. 12. 
오늘 아침은 딸 은하가 가게 문을 열려고 내려갔다가 도둑이 든 것을 알았다. 돈 통에 잔돈과 여러 가지 물건들을 쓸어갔다. 잃어버린 것을 돈으로 치면 조그마한 것이었다. 즉시 경찰에게 신고하여 경찰이 와서 도난당한 현장을 보고 보고서를 만들어 주어서 도난 보험 회사에 신고하였다. 며칠 뒤 보험회사에서 도둑맞은 것에 대한 보상금을 보내주었다. 

 

주일 저녁 성경공부 3. 26 Sun
새해부터 6권으로 된 새 신자 훈련교재 공부를 김현중 형제 가정에서 시작하여 왔다. 오늘 저녁 2권을 마치고 4월 한 달은 쉬기로 했다. 밤 10:30에 모이는 심야 성경공부는 김형제 부부와 권혁철 형제 이렇게 모이고 있었다. 이 늦은 시간에 모이는 것은 가게 문을 닫고 모이기 때문이다. 시간이 없는 바쁜 분들을 위하여 제자훈련 코스로 하는 것이었다. 이 과정은 한 주에 한 번씩 6개월 하는 과정이다.

 

마지막 수업 4. 26 Th
오늘은 나에게 남다른 감회가 있는 날이다. 그렇게도 한번 해 보고 싶었던 공부, 이제 4년간의 고난의 투쟁을 통하여 마지막 수업을 마치고 필을 놓는 날이다. 다시 후회 없을 이 긴 시간이 나의 생애동안 주님의 복음 전도 사역을 위하여 가치 있는 밑거름이 되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나의 아내 된 자매는 이 부족한 사람의 공부와 여러 지역의 개척교회를 일으켜 세우느라 고생을 많이 했다. 모든 수고와 영광을 아내에게 돌리고 싶다.

 

Tyndale(Ontario) Theological Seminary  졸업식   5. 6 St   

덧없는 욕망의 불길을 저지른 지난 4년간의 각고가 끝나 가는 엄숙하고 보람 있는 순간이기도 했다. 배우고자 하는 열망이 나로 하여금 캐나다 신학대학원에서 신학석사 과정에 도전하는 모험을 했었다. 그 모험은 고난과 시련을 가져오기도 했다. 이제 이 모든 고난과 시련들이 시간 저 편으로 묻혀가고 있다. 나는 이제 지극히 육신적인 것일지라도 배움에 대한 한을 풀었다. 남은 나의 생애에 이 배움이 주님을 섬기는 일에 적은 도우이라도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지난 4년 간 공부할 수 있도록 해 주신 주님의 크신 은혜를 감사하며 부족한 사람의 공부를 위하여 물질적으로 기도하여 주신 Central Gospel Hall의 모든 형제자매님들의 기도와 도움 그리고 MSC(모임 선교회)의 지원을 잊지 못한다. 그리고 4년 동안 나의 영어 에세이와 모든 영문 문장을 읽어주시고 고쳐주시느라 수고 많이 하신 Dr. Harold McCarthy 형에게 특별히 감사를 드린다. 오늘 내가 있기까지 내 아내의 수고와 희생을 잊을 수 없다. 이 석사 학위의 일부분은 나의 사랑하는 아내의 것이며, 또 일부분은 나의 영어를 지도해 주신 Harold 형의 것이다. 즉 나의 석사 학위는 세 사람이 만들어 낸 합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모든 것은 주님의 한량없으신 은혜였다. 내 졸업식에는 김상원 가족, 민 형제, 유형제, Harold 등이 와 주셨다. 신학 석사 학위를 받는 그 시간 나는 다시는 학생 신분을 가지고 공부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 중국을 향한 선교사의 길을 나서고 있었다.

                    

 

Hudson Tailor의 일화

Hudson Tailor(허드슨 테일러) 선교사에 대한 에피소드 하나가 기억난다. 그분은 영국에서 의대를 다니다가, 선교의 열정 때문에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다니던 의대를 그만두고 중국 남방에서 선교사로서 중국 사람들을 섬기고 있을 때, 그동안 배운 의학지식으로 병자들을 치료하고 돌보는 일들도 하고 있는데, 미국에서 온 의료선교사들로부터, 속된 말로, '돌팔이 의사'노릇을 한다고 비난을 받으면서 괄시를 많아 받았다. 이런 영향들은 선교지 원주민들에게도 좋은 인상을 주지 못 했을 것이다. 참다못한 그는 선교의 열정을 잠시 내려놓고 영국으로 돌아가서 의대에 복학하여 드디어 의사가 되어서 다시 선교지로 돌아왔다.

    

                                      

 

문을 닫은 Central Gospel Hall

우리 가족이 캐나다에 와서 6년 정도 몸을 담고 주님을 섬기며 사랑을 받던 Central Gospel Hall 모임은 100여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유서 깊은 교회가 문을 닫는 것을 보면서 마음이 아팠다. 지난 한 세기 동안 토론토 지역의 모교회로서 도시가 발전하고 뻗어나가면서 교회도 개척되어 나가는 큰 역할을 해 오던 교회였다. 그 뒤 형제교회의 선교회 MSC 사무실로 쓰다가 지금은 모임의 젊은 형제들이 Yonger Street Mission으로 다문화 선교를 위한 장소로 사용하고 있다. 그 뒤 또 한 곳의 모임이 문을 닫았다. 문을 닫는 데는 환경과 사정이 있겠지만, 새로운 세대들을 향한 아무 계획 없이 당신들만 주님을 잘 섬기면서 주님이 알아서 하시겠지 하고 살던 모임들은 이렇게 하나하나 문을 닫아가고 있었다. 이 시대를 알고 이끌어갈 전문적인 일꾼들을 키워 전략적으로 일하지 않는다면 지금의 교회들의 앞길이 밝다고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꼭 이것만이 이유는 아닐 것이다. 교육을 너무 잘해서 문제인 전체 기독교도 같은 현상들을 보여주고 있어서, 기울어져 가는 이 세대를 바라보면서 안타가운 마음이다.   
   

Ethnic Group Mission 추천장 5. 27 St
이제 졸업은 했고 학생 비자는 아직 두 달은 살아 있지만, 그 안에 비자를 연장하는 길을 찾지 못한다면, 다시 학생이 되던지, 캐나다를 떠나든지, 아니면 불법체류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가 예배당을 빌려 쓰는 교회의 목회자인 Bowler 형제에게 내 사정을 말하고 한인선교를 계속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을 요청하였는데, 그는 두 말하지 않고 또 아무 조건도 없이, 우리 교회가 Ethnic Group Mission(소수민족 선교)을 위해서 Evangelist Mr. Jewha Kim이 필요하다고 하는 편지 한 장을 써 주었다. 얼마나 간단한가! 그에게는 사랑과 동정이 있었다. 그러나 형제교회의 장로들은 법만 가지고 있고 동정과 자비는 없었다. 그 뒤부터 나는 법이나 전통이나 규범보다는 사랑과 동정이 먼저라는 것을 크게 깨닫게 되었다. 이런 일들이 나로 하여금 한 걸음씩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가는데 힘을 더해 주고 있었다.

 

종교 고용허가 비자 5. 13

내일 이민국 순서 번호표를 일찍 받기 위해서 아들 혁이와 밤새 교대해 가면서 자리를 지켜서 아침 일찍 번호표를 받아서 일찍 Visa를 받았다. 이렇게 이민국에 한번 가는 것은 큰 곤욕을 치르는 일이었다. Bowler 목회자가 자기네 교회의 heading이 있는 편지지에 몇 줄 써준 편지 덕택에 Religious Working Permit Visa(종교 고용허가 비자)를 받았다. 이제 또 캐나다에서 일 년을 살 수 있는 문제가 해결되었다. 이제는 학생 신분이 아닌 취업자가 된 것이다. 신청한 영주권이 일 년 안에 나오기를 바랄 뿐이다. 모임 사역을 위하여 거주할 수 있는 도움을 받을 곳은 전혀 없었다.

 

New Yorker 차  6. 6
몇 년 전 모임에서 사준 차가 너무 낡아서 조수석 바닥한쪽이 삭아서 길바닥이 보이고 비가 오면 물이 튀어 오르고 있었다. 마침 이 캐네디언 교회의 목회자 아버지가 되시는 Mr. Bowler 씨가 내 차를 보시더니 큰일 나겠다고 하시면서, 나에게 좋은 중고차를 소개해 주시겠다고 하셨다. 다음 날 당신네 차로 나를 데리고 나이아가라로 가는 길에 있는 Grimsby라는 작은 도시로 갔다. 그곳에 이분 친구분이 차 판매상을 하고 있었다. 나에게 86년도 New Yorker를 보여 주었다. 86년 차이기는 해도 그리 많이 달린 차가 아니어서 보기에 좋아 보여서 형제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걱정이 되었다. 모두 힘들게 사는데 목회자란 내가 중고이기는 해도 너무 좋은 차를 타면 덕이 안 될 것 같아서 우선 형제들과 의논해 본 후에 결정하기로 했다. 돌아오는 길에 Mr. Bowler 씨는 나에게 차 판매상을 하는 자기 친구도 주안에 형제라고 하면서, 어려운 개척교회 목회자인 나에게 싼 가격으로 주는 좋은 차라고 하시면서 꼭 사도록 하라고 부탁하셨다. 내 차가 이렇게 안 좋지만 형편이 안 되어서 조심조심 타고 있는 중이었다. 이렇게 차 사는 일도 주님이 간섭하셔서 좋은 분들을 만나도록 해 주시니 놀랍기만 했다. 주일에 예배를 마치고 형제들에게 차 사는 문제를 의논했더니, New Yorker가 고급 차도 아니라고 사라고 모두 권해 주었다. 그리고 유형제가 차 사는데 보태라고 $4,000을 주어서 차 문제가 해결되었다. 모두 고마운 분들이다. 주중에 신문사에 나가는 장 형제 부부를 위하여 그 집에서 교재 공과 공부를 하면서 구원 문제를 깊이 다루었다. 장 자매는 구원 문제가 선명해지는 것 같고 장 형제는 좀 헤매는 듯했다. 오늘은 자매와 함께 Grimsby로 내려가서 New Yorker 차를 사 가지고 돌아왔다.

        

 

반가운 이민국 편지 6.7
고용 비자를 받은 지 두 달여 만에 이민국에서 편지 한 통이 왔다. 이민국 인터뷰 날자와 시간 그리고 석사 학위증과 목사 안수 증을 가지고 오라는 것이다. 이민국에서 우리의 영주권을 위하여 내가 졸업을 할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거의 3년이나 기다리던 소식이 이제 온 것이다. 그러나 내가 목사 안수를 받은 적이 없는데 안수증이라는 것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또 다른 문제가 생겼다. Glidewell 선교사와 의논했더니, Acting Pastor Certificate을 만들어 주겠다고 하였다. 이 어려운 문제가 또 이렇게 해결되고 있었다.

 

이민국 인터뷰 8.1

약속 시간에 이민국에 가서 이민 관을 만나 간단한 Interview를 했다. 가져온 “the Certificate of Master” and “the Certificate of Acting Pastor”를 보더니 좋다고 하면서 복사를 하고는 우리가 신청한 영주권이 곧 나오게 될 것이라는 기쁜 소식을 들려주었다. 내가 졸업하기를 기다린 것이다. 그리고 어머니와 함께 신청하여 영주권을 받게 되니 이 얼마나 반가운 일인가! 이제 어머니를 계속 모실 수 있게 된 것이 제일 기뻤고, 아이들 학교 문제 우리 거주문제 등 모든 시름이 물러가는 듯하였다. 주께서 우리에게 새 기쁨과 희망을 주시니 너무 감사 감사했다.

 

제일 많이 나온 주일 8.13 Sun
오늘 주일에는 개척교회를 시작한 이래 제일 많은 사람들이 나왔다. 오늘 저녁으로 김현중 부부와 권혁철 형제의 6단계의 성경 공부가 끝났다. 밤 11시에 시작하는 한밤중 성경공부는 피곤하지만 모두 잘 견디어 내주어서 고마웠다.

 

아들 대학의 수업료 독촉장  

9월이 되어 새 학기가 시작되면서 혁이 대학에서 수업료를 더 내라는 통지서가 왔다. 이제 곧 영주권을 받게 된다는 변호사의 서류를 보냈는데, 좋다고 하면서 1학년 수업료는 청산해 달라고 하면서 학교에서 좀 싸게 해 주어서 그 일 년 치도 한꺼번에 못 내고 무리해서 두 번에 끝내고, 2학년 수업료를 연기해 주어서 고마웠다. 이제 영주권만 나오면 만사가 해결이다.

 

새 모임 장소
우리가 모이는 예배당이 우리 모두에게 너무 멀어서 지난주 High Park Baptist 교회 staff들과 만나서 Interview를 했는데, 오늘 그 교회에서 건물을 사용하라는 연락이 와서 10월 두 번째 주부터 모이기로 하다. Mr. Bowler 형제의 배려와 도움이 너무 커서 그곳을 떠나고 싶지 않지만, 한인들 중심으로 모여야 하므로 어쩔 수 없었다. 수요일 인사차 참여하였는데 High Park 교회에서 잠깐 시간을 주어서 우리 한인 교회를 소개하고 사용하도록 허락해 주어서 고맙다는 인사를 드렸다.

 

주일학교 10. 8 Sun
오늘은 우리 개척교회가 새 장소에서 드리는 첫 예배였다. 젊은 가정에 어린아이들이 있어서 부족하더라도 주일 학교를 시작하도록 하였다.

 

Ordination 10. 12 Th
저녁 나의 안수 식을 위하여 Chicago에서 강태훈, 안영배 목사님들이 오셨다. Language Mission director도 오고 동창생 최영철도 와주어서 반가웠다. 안수 식을 위하여 여러분들이 오셔서 축하해 주셨다. 이렇게 해서 나는 SBS의 Pastor가 되었다. 그렇다고 사람이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저 김제화 일 뿐이다. 내가 목사 안수를 받자마자 이 소식이 얼마나 빨리 전해졌는지 그동안 교제하던 여러 곳으로부터 교제가 뚝 끊어지게 되었다. 개척교회와 안수는  선교지로 나아가려는 하나의 발판을 구축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동안 하던 가게를 처분하지 못해서 마음의 부담을 가지고 있었는데, 세탁소를 하고 있는 권혁일 형제와 자매가 사겠다고 나선다. 나는 우리들의 경험을 나누면서 하지 말라고 말렸다. 같은 교회에 있으면서 나중에 시험이 들면 곤란하니까 말려도 걱정하지 말란다. 자기들이 사려고 스스로 결정한 것이니까, 우리가 무슨 원망을 하겠느냐고 간절히 사정을 해서 3년 전에 산 값으로 주었다. 주님의 은혜였다. 오늘 Lawyer와 만나 모든 서류 일을 끝냈다. 권혁일 형제는 가게 이층으로 오고, 우리는 권형제가 살던 Valley wood의 아름다운 숲이 있는 House로 이사를 했다(11.28). 캐나다에 와서 이제야 집 같은 집에서 살게 되었다. 얼마간 가르쳐 주고 오늘로 거의 3년 동안 하던 Fast Food에서 손을 떼게 되었다. 힘들었던 사업이지만 조금 자리를 잡아 놓고 미안하지 않게 형제에게 물려주게 되어서 다행이었다. 이제 자유를 얻은 것 같이 마음이 후련했다. 일단 생계의 중심이던 사업은 손은 떼었지만, 앞으로의 생활은 여전히 위를 바라보는 것은 달라진 것이 없었다.

 

St. Jacobs Mennonite Village 12. 12 T
Mr. Bowler 노부부가 우리를 데리고 화란 계통의 메노나이트 사람들이 살고 있는 Waterloo, Bonder에 있는 Amish 마을을 돌아보게 해 주었다. 그들의 식당에 가서 점심을 사 주셨다. 재미있는 좋은 하루였다. 이 지역도 우리가 미국 Lancaster Dutch  MennoniteMennonite과 같이, 또 별세계였다. 마차가 심심치 않게 다니고, 조금 다르게 생긴 모자와 옷을 입은 사람들이 우리와 좀 다르다는 느낌을 가지게 했다. 또 여성들이 말마차를 몰고 있는 것도 새로운 모습이다. 이곳은 이제 관광지가 되어 있어서 그 수입도 대단하리라 생각되었다. 특히 여름과 가을까지 St. Jacobs Farmers' Market & "Mennonite Country" Food Tour는 법석이는 철이었다.

            

            

 

 

우리 학교 학부와 대학원에 바로 이 menonite 가정의 출신 형제와 자매들이 있었는데, 그들의 간증을 들은 적이 있다. 자라나는 세대에 너무 강제로 Amish의 전통적인 삶을 요구에 반항하다가 쫓겨났냐고 한다. 엄마와 연락은 하지만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하였다. 아마 아버지를 보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현실을 거부하는 그들의 삶은 실은 모순 투성이었다. 그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그 믿음과 전통이 새 세대에 의해서 도전을 받고 있었다.  

 

1989년을 보내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희망의 무지개를 떠오르게 해 주신 복된 해이다. 인간의 힘으로 풀 수 없는 여러 가지 일들이 마무리되는 기적 같은 해였다. 빈손으로 캐나다에 온 우리를 주님은 이렇게 살도록 해 주셨다. 주님은 우리를 인도할 자와 도울 자들을 세우셔서 얽힌 매듭들을 풀 수 있도록 하셨다.

한 편의 드라마 같은 우리 삶의 제 일장이 마쳐진 것 같다. 지난 4년 3개월 동안 우리에게 일어났던 일들을 생각하면,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었는지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다. 이게 사람이 한 일이겠는가? 하나님이 하신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남은 삶을 더욱 충성스럽게 하나님을 가까이 섬기며 살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들을 위하여 그 귀한 분들의 수고가 헛되지 않도록 우리가 주님 앞에서 확실하게 살아야 한다. 그 길은 우리가 선교지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를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에 대한 감사일 것이다. 

김제화/ jewhakim@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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