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 생활 4년 차 1988
1987년을 힘들게 보내고 88년을 맞이하면서, 지난 3년여를 돌아보면 우리 가족이 경험한 엄청난 변화와 기적적인 축복들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양을 드리게 된다. 벌써 캐나다에 온 지 4년 차에 들어서고 있었다. 우리 가족이 캐나다에서 새로운 삶의 변화를 맞이하여 그동안 힘들었지만 이제 우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곳 생활에 적응이 되어가고 있었다. 아이들도 영어에 잘 적응이 되어서 학교 생활이 자유로워져 가고, 신분만 다를 뿐 사는 데는 아무 차이가 없었다 학교 공부가 힘들어서 1년 차는 full course로 하다가 조금 장기전으로 하려고 세 Course씩 하다 보니까 3년 과정을 4년으로 하게 되었다. 이제 3년 차를 마치고 이제 9월에 4년 차를 시작하면 내년 5월에는 졸업을 하게 되는데 그다음은 어떻게 되는 것인지 나 자신도 아는 바가 없다. 아이들의 교육문제, 법적신분 문제 등 풀어야 할 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나 자신이 가장 바라기는 선교사로 선교지로 나가는 것이 나의 가장 큰 꿈인데, 지금으로서는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지, 주님만 아실 일이다. 이제 봄학기가 끝나고, 캐나다 친구들은 다음 학비를 벌려고 여러 곳으로 떠나가고 있었다. 나는 그래도 밥은 먹고사는 생업이 있어서 고마운 일이며, 여름에는 2학점짜리 한 과목을 가볍게 하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피아니스트 맥코믹 별장
우리 교회에서 피아노를 치시는 맥코믹 자매님은 아주 아름다운 큰 집을 가지고 사셔서, 시에서 주택 투어 코스 가운에 하나일 만큼 전통있는 집이다. 이분들이 북쪽 숲 속에 별장을 하나 가지고 계셨다. 이번 여름은 우리 가족이 쉬라고 일주일을 빌려 주셨다. 연세가 많으신 노부부는 남편은 연합교회의 장로이며 자매님만 모임 자매로서 음악 봉사를 하시고 계시는 경건한 분이시다. 부부가 예수님은 같이 믿으면서도 교회를 다르게 다니는 것은 처음 보는 일이어서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듣고 보니 서양에는 제법 있다고 하는데, 쉽게 이해되는 일은 아니었다. 그리고 지난달 노 자매님이 아프시다고 하여서 내가 그 집을 방문하여 나는 영어 조금 그리고 한국말로 건강을 비는 기도를 드린 적이 있는데, 다음 주에 교회에 와서 여러 형제자매들에게 내가 기도해 주었는데 신기하게 그때부터 불편한 몸이 회복되었다고 선전을 하고 계셔서 좀 미안한 마음이었다. 마침 연휴로 주말이 끼어서 가게 문을 닫고 처음으로 가족 나들이를 떠났다. 우리 가족은 자연에 파묻혀 캐나다에 온 뒤로 쌓여있는 긴장감 등으로 무거워져 있는 마음들을 다 내려놓고 가벼운 마음이 되었다. 우리 가족이 처음으로 이렇게 오붓하게 지내보기는 처음이어서 주님의 축복을 감사했다.
Summer School
이번 여름학교에서 제공하는 코스 가운데는 2학점짜리 the History of Plymouth Brethren 이 있어서 택하였다. 바로 영국에서 시작된 형제교회의 역사였다. 이 사실을 Harold 형에게 알렸더니, 연세가 있으신 모임의 몇몇 형제자매들이 청강생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학생들도 거의 모임의 사람들이어서 분위기가 아주 좋았다. 교수는 일리노이 주립대학 박사학위를 가지고 있는 모임의 형제였다. 교수와 함께 점심시간에 Harold 형 우리 함께 대화를 나누는데, 가을에 벨기에로 선교사로 나간다고 하였다. 한국 모임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로 물어서 좋은 시간이 되었다. 한 달간의 공부는 코드가 통하는 80%의 모임 식구들과 함께하여서 아주 재미있었다. 또 지난 학기에는 아프리카 잠비아에서 선교하는 모임의 선교사 형제가 안식년으로 나왔다가 나와 함께 공부를 하게 되었고 또 summer 학기에 함께 우리 모임 역사를 공부하게 되어서 우리 모두 즐거워했다. 그들은 가을에 아프리카 선교지로 돌아간다고 했다.
모임의 선교사 형제와 자매들이 일년 휴가차 오면 이렇게 필요한 공부를 하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 한국 모임의 정서와는 얼마나 다른가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모르면 배우고, 알면 나누어 주어야 할 것이다. 9월이 되어 나는 마지막 학년을 등록하면서 이제 나의 공부가 끝나가고 있구나 하는 감회에 젖었다. 지난 3년을 어떻게 살아왔는지 되돌아보면 우리는 한 편의 드라마였다. 아들의 대학교에서 영주권이 계속 안 나오자 가을 학기에 유학생 학비를 내라는 독촉장이 왔다. 변호사의 편지를 다시 냄으로써 또 한 학기가 겨우 미루어졌다. 영주권이 어서 빨리 나오기를 바라는 간절함이 기도에 메아리쳐졌다. 영주권이 나온다면 우리의 법적 신분문제가 해결되므로 모든 시름이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다음에 우리가 여유를 가지고 선교지로 가든지, 한국으로 돌아가든지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날이 오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한해가 기울어져 가는 때에 내년 일들을 생각하면서 이미 우리가 모이고 있는 한인성경반이 꾸준히 발전하여 10여 명의 형제자매들로 늘어나고 있어서 한인교회 개척으로 바꾸면 어떨까 하는 생각으로 모임의 장로들과 의논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교회에서도 이미 우리가 한인 성경모임을 가지고 있는 일들을 알고 있었고, 그동안 기도해 주시고 계셨다. 교회 식구들을 우리 가게에 초청하여서 대접도 해 드렸고, 토요일 성경모임의 소식도 알려드려서 모두 기뻐해 주시고 격려해 주시고 계셨다. 나는 졸업한 뒤에도 계속 한인들 선교를 위하여 일하고 싶다고 말씀드리면서, Religious Permit Visa를 받을 수 있도록 모임에서 편지를 한 장 써 주실 수 있는지를 의논드렸다. 그리고 경제 문제는 우리 스스로 해결할 수 있으므로 전혀 기대하지 않는다고 말씀드렸다. 장로형제들은 의논하여 보겠다고 하셨다. 일주일 뒤 모임 장로회의 결정을 알려주셨다. "재정을 후원하지 않으면서 형식상의 고용편지를 만드는 것은 안 된다는 결정"이었다.
그래서 나는 장로들에게 우리가 하고 있는 Fast food 이름으로 이민 신청을 해 놓았기 때문에 내년에는 영주권이 나올 것으로 기대하는데 그때까지만 우리의 비자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은 없겠느냐고 의논했지만 길은 없었다. 내년에 졸업을 하면 학생비자가 끝나게 되는데 계속 무리 없이 거주하자면 내가 또 학생의 신분을 유지해야 하는데, 경제적으로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그렇다고 한국에 나가서 당장 방 한 칸이라도 얻을 자금도 없으니 나갈 수도 없고 앞길이 밝게 보이지 않았다. 실제로 나는 한국에 돌아가는 것보다는 세계 선교를 위하여 나아가고 싶은 강한 욕망에 사로잡히고 있었다. 선교를 나갈 목적지도 이미 오래전 마음에 정해져 있었다. 나의 동심의 세계가 있는 중국 흑룡강 목단강으로 선교하러 가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다. 우리 삶은 한번 딱 왔다가는 것인데, 이미 한국에서 모임 몇 곳을 개척하느라 내 청춘을 거의 다 바쳤고, 이제 남은 시간은 다른 문화권에 나아가 선교사로서 주님을 섬기고 싶었다. 특별히 중립국인 캐나다 비자는 어디서든지 정치적 부딪힘을 가지지 않기 때문에 선교를 위해서도 캐나다 국적은 나에게 꼭 필요한 것이다.
주님께서 우리가 토론토에 머물러 사는 것을 기뻐하셨는지 다른 방법으로 살게 해 주셨다. 우리 교회에서 비자 연장 문제를 거절당한 뒤 많이 기도하며 많이 생각했다. 장로회에서 이제 결정한 일을 또 사정해 볼 수도 없었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법은 가깝고 사랑은 먼 마음들을 경험하면서, 형제교회의 울타리 너머를 바라보게 되었다. 졸업을 하게 되면 당장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히게 될 것인데, 주님이 우리를 어떻게 인도하실 것인지를 기대하면서, 조용히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주님도 우리 때문에 골치가 아프시리라 믿는다(나의 넋두리). 이제까지 형제교회라는 좁은 세계만 바라보던 마음에서 넓은 세계를 향하여 나아가는 자신을 느끼게 되었다.
김제화
'캐나다유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캐나다 유학 1984 (0) | 2018.01.18 |
---|---|
가족 재결합/ 신학 대학원 (0) | 2018.01.18 |
I.M.I. 선교사 훈련 1986 (0) | 2018.01.18 |
캐나다 영주 권 1987 (0) | 2018.01.18 |
학교 졸업/ 영주권 예비 심사 (0) | 2015.04.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