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가 열리면서 활기차고 그래야 하는데, 나의 허리 상태가 나빠져 신경통으로 시달리고 있어서 그리 밝은 새해만은 아니었다. 아픈 허리로 아르바이트까지 해야 하기 때문에 어려움은 컸다. 또 자매도 일을 나가고 있었는데 몸이 좋지를 않아서 산부인과 진단 결과 작은 혹이 생겨 제거를 해야 한다고 날 자를 정해 주었다. 그래서 일을 그만두게 되었다. 주님께서 잠시 우리를 어려운 가운데 두셨다가 다시 일으키시리라 믿는 마음이다. 이 불편한 몸을 이끌고 학교로 일터로 근근이 지내다가 2월 24일 오늘 저녁 가게에서 일하는 중에 Banana 상자를 들다가 허리를 더 다쳐서 일도 못하게 되었고, 학교도 못 갈 형편이 되었다. 이 고통을 어떻게 표현하랴!
인도 형제를 만나다 March 3. Tue
미국 초청이 있어서 불편한 허리를 가누면서 미국 비자를 받으려고 미국 대사관까지 Taxi로 갔는데, 아차 재학 증명서를 놔두고 왔다. 다시 Taxi를 타자니 돈 생각이 나서, 아픈 허리를 가누며 전철로 겨우 집에 와서 재학증명서를 가지고 길에 나와서 개인 Taxi를 탔는데. 기사가 인도 사람인데 자기를 15분만 도와줄 수 있느냐고 물어서, 그러겠다고 하자, 한국에서 온 편지 한 장을 내게 주면서 번역을 해 달라고 한다. 한국 여자와 연애 중이었다. 나는 내가 비자를 받고 집에 갈 테니까, 저녁쯤에 전화를 하라고 하니까, 괜찮다고 기다리겠다고 한다. 나는 비자를 받고 나오니 기다리고 있어서 집으로 데리고 와서 편지를 번역해 주고 답장을 써 주었고, 내가 목회자 인 줄로 알고 자기도 크리스천이라고 하면서 $5를 준다. 사양하는 데 너무 권해서 받았다.
James 형제의 도움 March 6. Fri
여러 날 학교를 가지 못하여 오늘은 학교에 꼭 가야 하겠는데, 눈은 내리고 있어서 답답하여 인도 형제 James를 부르니, 자기 차는 고장이 나서 고치고 있다고 하면서 차를 빌려 가지고 와서 나를 Finch 역까지 태워다 주어서, 택시로 학교에 갔다. 올 때는 Steve가 집에까지 태워다 주었다. 그동안 알고 지내던 홍콩 출신 Anna자매가 $100과 우황청심환 같은 약을 두통 주어서 고마웠다. 이 자매는 홍콩에서 이런 약을 생산하는 공장을 가지고 있는 데, 이민을 와서 약방 등지에 도매 공급 상을 하고 있었다. 홍콩에서 대학을 나오고 영어는 너무 잘하고 있었다. 이런 홍콩 중국 형제자매들을 보면서, 우리도 저 간악한 왜구들에게 짓 밝히지 말고 차라리 영국이나 미국의 식민지 생활을 했더라면 영어라도 제대로 남았을 텐데 하는 푸념을 해 보았다. 저녁에 미국 비자는 받아놓고 허리가 너무 아파서 뉴욕에 천 형제를 불러서 갈 수 없다고 알려 주었다. 다음 주간은 Reading Week으로 한 주간 학교에 가지 않게 되므로 집중 치료를 받기로 했다. Dr. 김이 집으로 와서 침을 놓아주었다. 이름뿐인 천주교인인 그에게 전도할 기회도 가졌다. 하와이에서 St, Clair 할머니가 $ 20을 영국에서 Betty 노자매가 $ 52을 보내 주셔서 어려운 형편이 도움이 되었다.
깊어지는 통증
허리를 다친 지 4주가 지나고 있는데 좋아지는 것이 아니라 더 나빠지고 있었다. 아직 바로 서서 걷지를 못하고 있었다. 자리에 누워서 좌우로 움직이는 것조차도 쉽지 않았다. 다음 주부터 학교에 가야 하는데 의문스러웠다. 삼월이 가고 사월이 되었다. 모두 일들을 나가고 나 혼자서 종일 빈집을 지키며 허리 통증과 싸우고 있었다. 인생이 긴 여로를 가노라면 생각지도 못한 어려움을 만나기도 하는데, 지금 내 인생에 있어서 기장 큰 위기를 맞이하는 것 같다. 척추 디스크로 인한 좌골신경통은 내 인생의 연약함을 한없이 느끼게 해 주고 있었다. 그래도 전에는 움직이면서 아팠지만, 이전 자리에서 일어나지를 못하고 있으니 이렇게 참담할 수가 없었다. 전능자 앞에서 인생은 그저 먼지에 불과하다는 시편의 말씀을 깊이 새기게 되었다. 상태가 좀 좋아지면 아픈 때를 잊어버리고 뭔가를 하다가 다치면 몇 달을 고생을 하는 편이었다. Canada에 오자마자 다친 허리, 지난 12월 새집으로 이사하다가 다시 다친 허리, 2월 다친 허리로 난 이제 편하게 일어날 수 없는 몰골이 되었다. 지금 5주째 몸을 가누지 못할 만큼 심각해 있다. Chiropractor에게 치료도 많이 받아 보았지만 아직은 효과가 나타나지 않고 있다. 학기는 이제 한 달 정도 남았는데 어찌 되겠는지 나도 모르겠다. 수술이라도 하는 결과는 아닌지 궁금하기만 하다. 이렇게 사선을 헤매고 있는 오늘 회계사로 은퇴하신 모임의 Buckan 장로님이 심방을 오셨다. 너무 반갑고 고마웠다. 기도해 주시고 위로하여 주시면서 $25 선물을 주시고 가셨다. 나는 오늘 주일(4.6) 교회를 갈 수가 없었다. 차만 있으면 억지로라도 가겠지만 마음만 한창이었다. 나만 빼놓고 식구들 모두 교회를 갔다. 자매편에 Hilda 할머니가 Get well Card와 함께 $ 50을 보내 주셨다.
지팡이 April 8. Tue.
학교를 오래 동안 못 가서, 가야 한다는 생각이 나를 움직이게 했다. 택시를 불러 불과 1Km 밖에 되지 않는 Christie 지하철까지 가서 아픔을 무릎 쓰고 지팡이를 짚고 Sheppard 역에서 같이 공부하는 의사인 Mic가 나를 태워 학교에 같다. 반 친구들이 갑자기 지팡이에 몸을 의지하고 나타난 나를 보고 교통사고라도 났느냐고 모두 놀라고 있었다. 의자에 앉아 있는 자체가 고통이었다. 오는 길은 학부에서 공부하는 송 형제가 집까지 태워다 주어서 편했다. 몸은 아픈데 네 과목의 숙제가 밀려서 큰일이다. 이번 주일도 모임에 도저히 나갈 수가 없었다.(4.13) 식구들 편에 피아노를 치시는 Mrs. Cummer 노 자매님이 $ 60을 보내주셨다.
놀라운 변화 April 18. Fri
오늘은 아픈 허리에 약간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오후에는 좀 불편했어도 바로 앉을 수가 있었다. 지팡이를 의지하지 않고 1Km 거리인 역에서 집까지도 빠른 걸음으로 걸어올 수 있게 되었다. 큰 고통의 여정이 끝나가고 있는 것 같다. 주님의 놀라우신 은혜였다. 저녁에 Johnston 노형이 문병 차 오셨다. 예쁜 벽걸이와 과자 두 Can을 가져오셔서 아픈 나를 위로하여 주셨다. 한국의 예쁜 담요를 드렸더니 좋아하셨다. 이 분의 수고와 사랑은 우리 가정이 일생동안 잊을 수 없는 분이다. 월요일인(4.21) 오늘 학교를 가기 위하여 아침부터 몸을 가볍게 움직이며 준비운동을 했다. 아직 불편은 하지만 지팡이 없이 학교에 가서 모처럼 수업을 다 받고 도서관에서 숙제도 좀 하고 올 수 있었다.
오래 만에 교회에 April 27 Sun
오래 만에 우리 식구 모두가 교회에 나가니 모임 식구들이 몹시 기뻐해 주시고 반가워해 주셨다. 나도 여러 주만에 만찬 예배를 드리니 감격하였다. 주님의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데, 이렇게 약해져 있는 모습이 죄송스럽기만 했다. Johnston노형이 당신들이 쓰던 Single 침대 두 개를 주시겠다고 전화하셨다. 그리고 또 놀라운 소식은 모임에서 장로 형제님들이 한 $2,500짜리 정도의 중고차를 한 대 사주시려고 의논 중이라고 전해 주셔서 너무 뜻밖의 일이었다. 이 불편한 형제를 위하여 타고 다닐 차를 준비해 주시는데, Johnston 노 형의 주선한 일인 것 같다. 주님의 은혜가 크시기만 하다.
학기 마지막 수업 April 30 Wed
그렇게도 하고 싶었던 공부의 첫 학기의 마지막 수업을 받는 날이다. 언어의 장벽과 몸의 아픔과의 싸움으로 뒤범벅이 된 한 학기였다. 몹시도 길고 긴 학기였다. 좌절과 포기 그리고 수 없이 망설여졌던 길고 긴 고뇌의 12주였다. 다음 한 주간 동안 시험만 보면 길고 긴 3개월의 방학인데. 학기말 시험과 여름휴가를 주님께서 어떻게 인도해 주실지 기도하고 있었다.
Datson 차 May 5 M
Johnston씨와 함께 Datson 차 딜러에 갔다. $2,500 정도의 중고차를 골라 시험해 보고 사도록 결정했다. 이제 이 캐나다에서 주님께서 편하게 공부하라고 차를 주시고 계셨다. 교회를 개척하던 젊은 시절 너무 힘들어 자전거 한 대를 달라고 구했을 때 오토바이를 주셨든 주님께서 구하지도 않은 차를 주시니 이 은혜가 얼마나 크신가! 우리를 도우시는 주님은 우리의 산성이셨다. 우리 학교가 우리가 사는 곳에서 북쪽 외곽에 있기 때문에 지하철을 두 번 타고, 학교 버스를 타지 못할 경우에는 버스로 가다가 내려서 거의 2Km 정도 걷는 길이라 차가 없으면 시간에 쫓기고 힘든 길이었다. 수요일 아침 Johnston 씨와 함께 Datson 중고차를 가지고 Inspection(검사)을 맡겼다. 이제 차 보험을 해결해야 하는데 얼마나 될지? 목요일 오전에 우리 교회의 Phillips 장로의 아들인 John이 척추전문 교정 사여서 가서 허리 교정을 받고 돌아오다가 Eglington역에서 버스를 타고 계시는 Johnston 노형을 만났다. 검사를 맡긴 내 차를 가지러 가는 길이라고 하셔서 같이 가겠다고 하자 괜찮다고, 내일 함께 번호판 달러 가야 된다고 오늘은 가서 쉬라고 하셨다. 그리고 내일 차 보험을 알아 보아주기로 하셨다.
My Car May 9. Fri
오전 Johnston 노형과 함께 Licence Office에 가서 등록비를 내고 번호 판을 받아서 달았다. 한국에서는 번호판에 납봉을 달고 그러는데 여기는 차 주인이 알아서 달고 있어서 참 자유로운 나라라는 생각이 들었다. 번호판을 달자, 노형은 나에게 이제는 형제 차라고 하면서 차 열쇠를 넘겨주시었다. 그리고 Gas Station에 데리고 가서 $10 어치 Gas를 넣어 주시었다. 이제 내 차가 된 것이다. 주님의 축복이 얼마나 놀라 우신가! 비록 중고차이기는 해도 우리에게 My Car시대가 열린 것이다. 돌아오니 같은 반 홍콩 출신 Anna 자매가 기다리고 있었다. 아픈 내 허리를 위하여 홍콩의 한약을 가져고 왔다. 고마운 자매였다. 나와는 여러 코스를 같이 하고 있었다. 나이 먹어 공부하는 나에게 여러 가지로 마음을 써주고 있는 고마운 자매였다. 오늘부터 밤늦게 수고하는 자매를 마중하러 차를 가지고 나갈 수가 있게 되었는데, 차가 있음으로 우리 생활의 구조가 바뀌고 있었다.
잊지 못할 미소 May 15 Th
이제 차가 있으니까 shopping 하기도 편하고 활동 범위가 넓어지기 시작하였다. 아들 혁이와 John에게 가서 허리 교정을 받고 Bayview로 내려오다가 앞에 가는 사업용 Cadillac을 너무 가까이 따라가다가 그 차가 신호등을 미리 주지 않고 좌회전하려고 서는 바람에 그 차 뒤 Bumper를 살짝 받았다. 플라스틱 Bumper 덮개가 찌그러져서 벗어지는 정도였다. 나의 첫 번째 가벼운 교통사고였다. 나는 내려서 기사에게 미안하다고 말하는데, 나를 놀라게 한 것은 Cadillac 기사는 나에게 아무 말 없이 조용한 미소로 나를 대하고 성을 내거나 큰 소리를 내지 않았다. 당황해하는 나의 마음을 말없이 편안하게 해 주고 있지 않는가? 그 아름다운 미소를 나도 가진 자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아름다운 미소를 가질 수가 있다면 능히 하나님의 평화를 보여 줄 수 있을 것이다. 잠시 후에 교통경찰이 와서 확인하고 갔다. 그 기사는 고요한 미소로 손짓하고 떠나갔다. 돌아와서 Johnston 노형에게 교통사고에 대해서 의논을 드렸다. Cadillac 회사의 전화번호를 달라고 하여 드렸다. Johnston 씨는 그 지역에서 정치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계시는데, 리무진 회사 사장과 만나 범퍼 수리비 $146.36을 내는 것으로 끝내 주셨다. 현재 은행에 $300 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의 전부인데 절반이 허무하게 없어지게 되었다.
$1,000 놀라운 선물
아침에 Mr. Johnston 노형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MSC(형제교회 선교부)에서 나의 전 주소로 $1000을 보냈단다. 이 얼마나 기쁜 소식인가 그리고 얼마나 놀라운 축복인가! 전에 살던 아파트에 가서 천불 수표가 든 편지를 찾아왔다. 이 어이 큰 선물인가! 한마디로 기적이다. 메말라 가는 주머니를 주님이 또 이렇게 채워주셨다. Mina Mart에서 우리 아이들이 일해 주기를 바라서, 내가 일할 때 데리고 가서 한 세 시간 정도 Cashier 기계를 다루는 일을 가르쳐주었다. 이제 아이들도 자기 필요는 자기가 벌어서 쓰기 시작하였다.
5월 26일에 아이들을 토론토에서 인문계로 이름난 Jarvis Collegiate High School로 전학시켰다. Summer School부터 다니기로 했다. 모두 Visa를 연장하는 데는 별 문제가 없게 되었다. 이 고등학교는 수준이 있는 학교로 소문나 있지만 실력은 자기의 노력에 달려 있을 것이다. 미국 포틀랜드에 계시는 Brother Grusy가 $ 200을 보내 주셔서 반가웠다.
Driving School Certificate May 29 Th
캐나다는 좋은 제도들이 많이 있다. 운전자들이 특별 훈련 코스를 마치고 Driving School Certificate을 받으면 차보험료에 혜택이 있다고 해서 한 주간 며칠 저녁 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많은 것을 배웠다. 우리가 집에 없는 사이에 Dr. Philip 장로님이 2 Box의 옷들을 갖다 놓고 가셨는데, 그 옷들은 실제로 우리가 입을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대개 버리기는 아깝고 가지고 있자니 부담스러운 그런 것들이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줄만한 것들도 못되어 모두 구세군에 갔다가 주었다. 6월이 되는 첫날인 월요일 오전 좀 늦게 우리 가족 모두 Visa 연장을 받으려고 이민국에 가서 3시간을 기다렸는데 오늘 분량이 다 차서 내일 오라고 해서 한없이 피곤했다. 우리는 언제나 이런 Visa가 없는 세상을 살게 되려는지, 다음날은 모두 일찍 이민국에 가서 일 년 Visa 연장을 받았다. 매년 체재 비자를 받는 일이 행사 가운데 하나요, 번거롭고 긴 시간 기다리는 것은 피곤하기가 이를 데 없는 일이었다. 다음 날 자매와 나는 미국에 선교사 훈련코스를 가야 하므로 미국 총영사관에 가서 미국 Visa 신청을 했더니 여러 번 다녀서 인지 일 년 복수 비자를 주어서 반가웠다. 그리고 한국 대사관에 가서 한국에 계시는 어머니 초청장도 만들었다.
IMI(Internation Mission Inc 국제선교회) 선교사 훈련 코스 June 7-July 3
자매와 함께 미국에 있는 IMI 선교회가 주관하는 4주간 선교사 훈련을 받으러 가는 날이다. 사랑스런 아이들의 손짓을 뒤로하면서 떠났다. 처음 장거리 고속도로 운전이어서 좀 긴장했지만 Niagara Fall까지 한두 시간 운전하면서 캐나다 고속도로에 익숙해지면서 편해졌다. 나이아가라 Rainbow Bridge를 건너 New York through way로 달리다가 피곤하여 7시경 Motel에서 쉬었다. 얽매인 캐나다 생활을 벗어나 단 둘이 끝없이 펼쳐지는 미국의 하이웨이를 마음껏 달리는 여행은 즐겁기만 했다. 때 마침 주님께서 차도 주시고, 건강도 주셔서 감사했다. 앞으로 내 인생이 선교사로서 살기를 원하지만 주님께서 어떤 길을 허락해 주실지 두고 볼 일이다. 다음 날 647Km를 달려서 훈련장인 Harmony Heart Camp 장에 왔다. 약 80여 명의 선교사 후보생들이 훈련을 받기 위하여 모였다.

첫날 수업 가운데 Psychology Test 과정이 있었는데 언어 관계로 정말 어려운 과제였다. 500개의 질문을 읽고 문장을 이해하고 답을 쓰는 일도 힘들었고, 자매의 것도 해주느라 힘든데 마침 Dimitrious 형제가 오후 Free 시간까지도 희생하면서 우리의 paper 과제를 도와주어서 너무 고마웠다. 주님은 늘 우리 옆에 돕는 사람들을 보내주셨다. 우리도 늘 남을 돕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깊은 감동을 받았다.

그리고 다양한 사람들과 교제할 수 있어서 좋았다. 지도를 보니 전에 한번 와 본적이 있는 West Chest 김순겸 형님 댁이 그리 멀지 않아서 21일 주말에 방문해도 좋은지 전화를 드렸더니 환영해 주어서 고마웠다. 그리고 New Jersey에 있는 김명섭 자매에게는 27일 주말에 가기로 연락을 하였다. 훈련코스도 주말이면 어김없이 쉬고 있었다. 도착한 주말은 그냥 수양관에서(14-15) 보냈는데, 내 아내와 함께 평화롭고 아름다운 주말을 보냈다. 수업이 없는 주말 부담 없이 자연 속에 묻혀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던 것은 큰 축복이었다. 다시 월요일부터 강행군의 훈련이었다. 우리 두 사람은 Mission Trustee Committee와 우리들 자신들의 여러 가지 부분들에 대해서 interview를 했다.
인도 문화 체험의 시간
오늘은 인도 선교사로서 은퇴하신 분으로부터 교육을 받고 인도 문화를 체험하는 시간은 점심시간이었다. 음식을 먹을 때 숟가락이나 포크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 인도 사람들과 똑같은 방법으로 오른손으로만 먹는 훈련을 했다. 안남미 쌀밥에 카레를 얹은 것이다. 먹는 방법은 엄지서 중지까지 세 손가락을 사용하여 밥을 이겨서 약간 덩어리가 되게 하여서 먹는 것이다. 처음이라 먹는 일들이 어색했다. 또 인도 습관 가운데 하나는 화장실에 갈 때 휴지를 사용하지 않고, 화장실에 갈 때는 물주전자 하나를 들고 간다. 볼일을 보고는 물과 함께 왼손으로 닦는다고 한다. 인도에 사는 서양 사람들이 휴지를 쓰는 것을 보고 비위생적이라고 비평한다고 한다. 인도인을 친구로 받아들이기 위해서 이런 문화에 함께 해야 한다는데 쉬운 일 같지가 않았다. 전 인도 사람들이 다 그렇지는 않겠지만, 받아들이기가 쉬운 일이 아닌 것 같다.



오늘 금요일 수업이 끝나자 말자 본부에 우리 여행 계획을 알리고 우리는 김순겸 형님 집으로 달려갔다. 구두 수선을 하시면서 두 딸을 키우시느라 형제님 내외의 수고가 많았다. 자매님이 준비하신 순 한국식 저녁 음식은 오랜만에 고향생각을 하게 했다.
Lancaster, Pennsylvania

이 지역은 화란계의 Amish Mennonite Brethren들이 조상 대대로 자리를 잡고 사는 곳으로 미주에 살고 있는 기독교인들은 한 번은 가보고 싶어 하는 곳이다. 특히 이들은 아직도 현대 문명의 이기를 부정하고 여전히 마차를 타고 다니며 농사도 트랙터보다는 말 쟁기를 쓰고 있다. 그러나 전기나 냉장고 등 일부는 쓰고 있어서 시대의 모순 속에 사는 사람들이었다. 세속에서 죄를 짓지 않기 위하여 공무원 등의 직업은 가지지 않고 그저 자연과 더불어 사는 농경 사회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면 국가와 안보 경제는 누가 해야 하는지, 모두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사는 이기자들 같았다.





성막 모형
실제 크기와 같이 만들어 놓은 Tabernacle(성막) 때문에 이곳은 기독교인들에게는 성지 같이 여기는 곳이다. 우리도 이곳을 방문한 것은 성막에 대한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성막 안과 밖을 돌아보도록 되어 있어서 산 교육장이었다. 그동안 성막에 대해서 그림만 가지고 가르치다가 이제 실물 같은 성막의 안과 밖을 둘러보니 실감이 났다. 구속의 비밀들을 잔뜩 간직한 성막은 신약시대에 죄인을 구속하시는 그리스도(십자가)를 예언적인 그림자와 모형으로 나타내고 있는 성막은 신비롭기만 하다.


배신자들 June 22. Sun.
김순겸 형님은 거리가 멀어도 뉴저지에 있는 모임으로 다니시다가 이번에 보니 좀 멀리 떨어진 침례교회를 다니고 있었다. 이유를 물어보았더니, 미국에서 모임의 대부 같이 움직이던 박 형제의 과거 스캔들을 알고 실망한 나머지 모임에서 마음이 떠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김 형제 가족이 나가는 Ogle 한인 침례교회로 갔다. 목사님 댁에서 점심 식사를 초대해 주셔서 함께 했는데, 분위기가 이상하다. 알고 보니 박사과정을 밟는 부부가 이 교회에 나오게 되었는데, 피아노를 쳐 줄 사람이 없던 차에 그의 부인이 피아노를 쳐주고 있었는데, 목사는 일 년만이라도 교회에서 피아노 반주 봉사를 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영주권을 받도록 수속을 해 주었는데, 영주권을 받은 그 주일로 Chicago로 간다고 자리를 비웠기 때문에 목사님이 실망하여 허탈한 가운데 있었다. 부동산업으로 돈도 벌어 살만해지고 나이도 들고 하여 뜻이 있어서 신학교를 나와 남은 인생을 주님을 위해서 살자고 나선 지 일 년 만에 이런 배신의 경험을 한 것이다. 이민 교회에서 이런 일들은 가끔 있는 일이었다. 대개 처음 오는 이민자들이나, 유학생들이 교민들이 많이 모이는 교회를 찾기도 하여 이와 비슷한 불상사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목사는 크게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나름대로 다 사정은 있게 마련이지만, 처음부터 마음을 숨기고 목사를 이용해 먹은 것은 젊은 사람들이 배은망덕한 것 같고, 나만 생각하는 지극히 이기주의자들인 것 같았다. 그들의 남은 삶을 그렇게 살아서 얼마나 복을 받고 잘 살 수 있을는지, 박사가 되면 사람이 될까! 김형제는 떠나가는 우리에게 사랑의 선물 $100을 주셨다. 일요일 늦게 훈련소로 돌아왔다.

New Jersey 주 Tenafly Jun 27 Fr
훈련의 4주째 마지막 가지는 주말이다. 이번에는 김명섭 자매가 있는 New Jersey 주 Tenafly로 가기로 하였다. 오후 수업을 마치고 달려서 어두워진 밤에 Tenafly로 와서 김명섭 자매와 만나니 반가웠다. 자매는 반 지하실에서 혼자 살고 있었고, 독일에서 편하게 살다가 미국에 와서 사느라 애쓰는 것 같았다. 우리는 주말을 보내면서 많은 교제를 나누었다.( 김 자매는 캄보디아 선교사로 어린 영혼들을 위하여 열심히 일 하다가 배 사고로 주님께로 갔다) 주일에 뜻밖에 우리를 보게 된 형제자매들이 반갑게 맞이하여 주었다. 오전, 오후 예배와 함께 두 번에 걸쳐 말씀을 나누었다. 그리고 친교시간에 즐거운 교제들을 나누고, 천형이 자기 집으로 청하여 함께 오는 길에 유엔 본부를 보도록 기회를 만들어 주어서 고마웠다. 주일이라 안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겉모습만 돌아보았다. 월요일에는 아침에 출근하는 천형을 따라 시내 천형 가게에 갔다가 자매와 함께 Empire State Building 89 층에 올라갔다. 한눈에 들어오는 New York 시가지는 인간이 이루어낸 거대한 세상, 그리고 꿈의 도성이었다. 우리는 주변을 돌아보고 달려서 오후 3:30경 훈련 훈련장으로 돌아왔다.

선교사 훈련 코스 수료 July. 3 Th
오늘까지 우리는 힘든 공부를 이겨내면서 이 시간까지 왔다. 선교부에서 훈련 중인 Candidate 전원을 받아 준다는 광고를 하였다. 그렇다고 선교사로 나가지는 것은 아니다. 이제 문제는 개인이 필요한 선교예산을 모금하여 일정한 액수에 도달해야 선교부 이름으로 선교지에 나갈 수가 있는 것이다. 이제부터 Deputation(모금활동)을 할 수 있어야 되는데, 과연 우리가 물설고 낯선 이곳에서 가능한지! 막연할 뿐이다. 오늘로 4주간의 어려운 선교사 훈련 과정을 마치고 수료증을 받았다. 마음만은 홀가분했다. 이로서 또 한 과정이 끝났다. 정겨운 인사들을 나누면서 우리는 예정되어 있는 Chicago로 향하여 달리다가 어두워져서 모텔에서 쉬고 다음 날 오후에 강태훈 형님 댁에 도착했다. 강형은 나에게 미국에 와서 공부를 하면서, 함께 목회하여 주시기를 바라는 말씀을 해 주셨는데 내가 현실적으로 그것이 가능하지를 못했다. 주일(7.6)에 말씀을 보도록 시간을 주여서 설교를 하였다. 교회에서 사랑의 교제로 $100을 주셨다. 월요일은 푹 쉬면서 그동안의 여독을 풀 수가 있어서 고마웠다. 집으로 돌아가는 날인 화요일 비가 몹시 쏟아지는 아침이다. 건강이 안 좋으신 사모님을 위하여 기도해 드리고 우리는 비속에 길을 재촉했다. 미국 중부를 한 바퀴 돌아오는 여행은 큰 즐거움이었다. 토론토 집으로 돌아와 한 달 만에 사랑하는 아이들을 만나게 되니 반가웠다. 이번 여행은 모두 4,200Km를 달려왔다.
Summer School
8월이 되면서 나는 다시 가게 일을 나가에 되었는데 아들 혁이와 함께 주말 오후 4시부터 12시까지 같은 시간에 가게를 맡아서 일하게 되었다. 주인이 나를 믿고 세 사람이 일하고 이 큰 가게를 나에게 맡기고 있어서 가게의 모든 위험으로부터의 안전에 신경을 써야 했다. 가게 건너편에 있는 Maple Garden은 캐나다에서 유명한 학키 경기장으로 경기가 있는 날에는 도둑 예방을 위하여 감시원을 몇 시간 고용할 정도로 붐비는 곳이었다. 그리고 정규학기에서 공부 부담을 좀 줄이기 위하여 여름방학 때마다 Summer School 2학점짜리 코스를 계속하여 택하여 왔는데 이번에는 James & I Peter를 택했다. 강사는 Chicago에 있는 Trinity Theological Seminary에서 온 신약학 교수였다. 하와이에서 St. Clair 할머니가 $80 보내주셔서 고마웠다. 저녁에 모임에 갔더니 Buchan 할아버지가 손에 $30을 쥐어 주셨다. 자매가 병원에 가서 자궁에 있는 혹(Tumor) 들을 떼어 냈다(8.21). 가정과 아이들 그리고 일까지 하는 자매가 얼마나 힘겨울까 마음이 아프다.
어머니가 오시다 Oct 10 M
여러 해 떨어져 계시든 어머님이 생전에 기대도 못하셨던 Canada에 오셨다. 다시 어머니를 모시게 되어서 반가웠다. 어머니는 오시자마자 가만히 계시지 않고 일자리를 구하여 일을 하기 시작하셨다. 이곳에서도 나그네 같이 우리가 살고 있으니 어머니를 편하게 모시지 못하여 죄송한 마음이다.
Christmas & New Year-Eve
Canada에서 맞이하는 세 번째 Christmas이다. 한 번은 홀로, 또 한 번은 가족과 함께, 그리고 이번에는 어머니와 함께 지내게 되어서 즐겁고 복된 날이 되었다. 수많은 주님의 기적을 경험하고 살아온 한 해. 기다림과 흥분, 인내와 아픔이 뒤섞인 한 해였다. 그러나 주님은 최종적으로 응답해 주셨고, 가족이 하나로 모이는 일을 가능케 해 주셨다. 이제 공부가 끝나면 주님께서 길을 여시고 인도하여 주시리라 믿으면서 한해의 마지막 밤이 깊어가고 있다. 주여, 감사합니다.


김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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