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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유학

캐나다 영주 권 1987

캐나다 정착의 첫걸음 

지난해부터 우리 가족은 캐나다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였다. 아이들과 나는 학교생활에 바빴고 생활을 위해서 자매는 매일 일터에 나가고 아이들과 나는 주말에 일을 하면서 좀 힘든 생활을 이어오고 있었다. 아직도 여러 해 공부를 해야 할 형편인지라, 근본적으로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해야 하지만 마음만 있을 뿐 방법이 없었다. 그저 이렇게 하루 벌어 하루를 살면서 목표를 향하여 나아가는데 최선을 다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주님은 놀라운 방법으로 우리에게 또 새로운 길로 가게 해 주시고 계셨다. 영어 학교에서 같이 공부를 하던 40대 초반의 친구가 나이가 든 우리가 공부하며 힘들게 사는 것을 보고 나를 찾아왔다. 이렇게 고생하지 말고 조금만 투자하여 조그마한 Fast food 가게를 하면 남의 집에서 일하는 것보다는 낫다고 새로운 정보를 들려주었다. 그리고 나를 데리고 자기 부인이 하는 도넛 가게로 가서 커피와 도넛을 대접해 주면서 자세히 안내하여 주었다. 이 분들은 한국의 장로교단에서 목회를 하다가 유학을 왔는데, 부인이 한국에서도 사업을 했다고 한다. 사업 수단이 좋은 부인은 학생부인 신분으로 영업허가를 내어서 이 가게를 하고 있었다. 유학생 부인은 허가를 얻어 사업을 할 수 있다고 들려주는데 처음 들어보는 일이었다. 모두 세상사는 데는 지혜로운 분들이었다. 우리는 이렇게 세상 사는 일에 골(머리)을 쓰지 않고 살아서 인지, 이런 분들을 만나면, 우리 자신이 한심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기는 밥도 먹어야 복음도 전하는 것일 테니 어찌 상관관계가 없다 하겠는가!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려고 할 때 어떤 사람과도(혈육) 의논하지 않았다고 하셨다.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갈 1:16    전에 우리도 복음을 전하여 교회를 개척하고 있을 때 누구와도 필요를 의논한 적이 없었다. 필요를 절실히 느끼면서도 세상살이에 적극적이지 못했다. 그가 나에게 소개한 것은, 후진 공장 지대 부근에 그저 밥이나 벌어먹을 수 있는 가게를 맡아서 일 년만 잘 운영하여 한 가족이 먹고산다는 것만 증명이 되면 영주권을 신청할 수 있다는 새로운 소식을 알려 주었다. 나중에 알아보니 Small Business로 영주권을 신청할 수 있는 Case가 있었다. 우리 삶에 필요한 정보가 이렇게 여러 가지로 열려 있는데 왜 우리는 지금까지 이렇게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는지... 원인은 우리가 케네디언 교회에만 나가고 한인들과 접촉을 자주 하지 않아서, 그런 면에 대한 정보가 어두운 면도 있었다. 그래서 그분의 소개로 Etobicoke Evans 길에 있는 조그마한 Fast food을 소개받았다. 그 지역에 있던 크고 작은 공장들이 떠나면서 주위의 먹거리 사업도 부진해졌다. 길 옆으로 네 집이 연이은 2층 연립 건물은 아래층들이 모두가게로 꾸며져 있는데 업종이 다 달랐다. 남의 집에서 눈치 보고 일하느니 힘들어도 내 일을 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팔아먹는 사람의 감언이설도 있었고 싼 것을 사서 식생활이나 해결하고자 하는 바쁜 마음이 맞아떨어져서, 이런 사업의 내용도 모른 채 그저 덥석 사서 하도 록 결정을 했다.

 

가격이 $25,000이었다. 우리는 가진 것이 별로 없고 이 자금을 마련하는 것도 상상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마음이 내키어서 자금을 마련해 보도록 노력했다. 마침 어머님이 여기 오셔서 그동안 벌어 모으신 것이 만 불이나 되었다. 나는 망설이다가 Harold 형에게 의논드렸는데, 서슴없이 년 10%로 $10,000을 빌려 주셨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과 합하여 $25000에 사도록 계약을 하였다. 처음 일주일간 Break Fast, Hamburger 등등 여러 가지 여기 음식 만드는 기술을 배웠다. 변호사를 통해서 매매 서류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이 가게가 이미 은행에 저당 설정이 된 것이 드러났다. 속아 사지 않았나 하는 염려가 있었는데 시간이 좀 지나서 해결이 되었다. 모든 설비가 오래되어 에어컨이나, 몇 가지는 쓸모가 없었다. 사실 우리는 이런 사업을 잘 모르는 데 이 가게를  팔지를 못해서 거의 내버릴 지경에 있는 것을 산 것이다. 그저 자매의 이름으로 영업허가를 받아서 자리를 부치고 살 수 있다는 기대 밖에 없었다. 이 때는 방학 때가 되어서 일을 배워서 자립하는 준비를 하고자 했다. 올해는 얼마나 더운지 캐나다에서도 몇십 년 만에 온 더위라고 한다. 가게 에어컨은 오래되어서 고장이 나 있고 그저 선풍기 바람만 나올 뿐이었다. 

 

우리 가족이 밤을 지내기가 너무 어려워서 선풍기라도 하나 사려고 하는 데 갑작스러운 더위로 토론토에 선풍기가 동이 났다. 이 맹렬한 더위는 우리가 율북리(수부 교회)에서 2년간 교회를 개척할 때 경험한 것과 같았다. 다만 다른 것은 여기는 모기가 없다는 것뿐이다. 그러나 이런 더위와 싸우면서도 내 마음속에는 주님께서 이 초라한 가게를 우리에게 주셨으니 복이 되게 해 주시기를 바라는 기도를 주님께 드리면서 마음의 평안을 얻으려고 애썼다. 아침 5:30에 문을 열어서 Break fast와 Coffee 손님 얼마를 받고, 점심시간에 잠깐 있는 손님 외에는 퇴근 시간에 맞추어 문을 닫는 오후 5시까지 손님이 거의 오지 않는 가게를 지키고 있는 것은 못할 일이었다. 정말 지겨운 날들이었다. 벗어날 수 없는 올무에 걸린 것 같은 마음이 들면서 가게를 속아서 샀다는 후회와 자책 때문에  여름의 무더위와 우리의 마음을 몹시 힘들게 했다. 이렇게 황당하고 어처구니없는 석 달을 보내면서 음식 만드는 기술들은 익숙하게 되어갔다. 9월이 되면서 나는 학교에 등록을 해야 했고 아이들도 학교 갈 준비를 하였다. 이때 이 가게는 하루에 $150 만 팔아도 현상유지가 되는 가게인데 하루에 몇십 불을 팔고 앉아 있으니 말이 아니었다.

              

영업 허가증

 

선선한 바람과 함께 찾아온 위안

9월의 새 학기가 시작되면서 나는 수업 시간을 오전과 오후로 택하면서 점심시간은 학교에서 돌아와서 도와주고 다시 갔다. 그런데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9월 중순이 지나 선선한 바람이 불면서 손님들이 조금씩 늘어나기 시작하면서 모두 휴가에서 돌아와 정상근무들을 하면서 장사가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100-150을 파는 것은 이제 기정사실이 되어가고 있었고, 10월이 지나면서 $ 200을 넘고 있었다. 수입이 늘어나는 만큼 우리도 위안이 되고 힘이 났다. 이제 다시 매상은 $ 250을 넘고 있어서 이 정도만 유지해 주어도 우리는 살 수가 있었다. 위층은 우리의 살림집이었다. 한 달의 세는 가게와 위층까지 해서 $500이었다. 비록 초라하기는 했지만 이국땅에서 우리 힘으로 산다는 것에 대한 보람도 조금 생겨나기 시작했다. 아침 5:30에 일어나 아침 Morning Coffee를 파는 것이 제일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아이들이 둘이 있지만 자기들 학교일에 바빠서 이 아침 가게 일을 도와주지를 않고 있었다. 나도 학교에서 아주 늦게 돌아와서 또 밀린 숙제를 하고 늦게 자다 보니까 아침에 잠이 부족하고 있었다. 자매는 종일 가게에 있어야 하므로 아침이라도 조금 더 쉬어야만 했다. 그래서 아침부터 죄 없는 커피만 마시게 되었다. 그리고 이 가게는 5일 장사로 토요일은 평소의 반 밖에 장사가 안 되었고 일요일은 문을 닫아 편하기는 했다. 집세 내는 것이 아까워서 이래저래 몇 사람 불러 모아서 성경 모임을 가지기 시작하였는데 얼마 되지 않아서 10명이 넘게 모이게 되었다.

  

교수들과 정다운 친구들과 함께

 

영주권 신청
아직 캐나다에 정착하지 못하고 나그네로 있는 우리에게는 법적으로 그때그때 풀어나가야 하는 일들이 많았다. 어머님의 방문 비자는 6개월씩 주기 때문에 일 년에 두 번 이민국을 방문하는 일은 연례행사가 되었다. 세 번 연장을 하고 네 번째 어머니 방문비자를 연장하러 갔더니 이민관이 당신 어머니는 방문하러 온 것이 아니라 살려고 왔다면서 더 이상은 연장이 안 되겠다고 한다. 나는 이민 관에게 여러 가지 사정을 이야기했지만 들어주지 않았다. 그리고 두 주 안에 캐나다를 떠나라고 기간을 정해주면서 어머니 여권에 “No more extension(연장불가)”이라는 붉은 도장을 찍어주었다. 이제 어머니는 한국으로 돌아가셔야 하는데, 한국에 가셔도 계실 곳이 마땅치 않으셨다. 여기서 우리가 잘 모셔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주께서 길을 열어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하면서 밤을 지새웠다. 다음 날 나는 유대인인 여성 이민 변호사를 만났다. 내 딱한 사정을 듣더니, 지금 small business로 이민 신청을 하면 어머님의 이민 신청이 결정이 날 때까지 캐나다에 머무실 수가 있다고 조언하여 주어서, 나는 망설이지 않고 그 자리에서 어머니를 포함한 우리 가족 전체의 이민신청서를 작성하였다. 수수료는 한 사람에 $1000 해서 우리 식구 다섯 사람이 $5,000이 되었다. 먼저 반을 내고 일이 끝날 때 나머지를 내도록 했다. 우리의 캐나다 정착은 이렇게 생각지도 않은 일로 시작되었다.

 

다급한 현실에 대처해야 하는 나는,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삶의 흐름에 젖어들고 있었다. 이런 우리의 삶 속에도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뜻이 계시리라 믿었다. 며칠 뒤 변호사의 편지를 가지고 다시 이민국에 가서 어머니 비자 연장 신청을 하였는데 이번에는 우리와 같은 기간으로 만들어 주었다. 이제 어머니가 우리와 함께 사시게 되어서 마음이 놓였다. 이 시간까지 우리를 인도하시는 주님의 은혜에 감사할 뿐이었다. 다행한 것은 어머니께서 건강하셔서 일을 하시면서 매월 나름대로 돈을 모으시는 재미로 사시고 계셔서, 우리의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우리가 캐나다에 살도록 영주권을 신청하게 된 것은 본의 아니게 어머니 때문이었다. 나의 생활도 짜인 스케줄대로 돌아가고 있었다. 아침 5:30에 문 열면 출근하는 사람들이 Coffee를 사러 제법 온다. 그리고 각종 샌드위치와 햄버거 그리고 Break Fast 손님들이 오는 데,  우리 집은 나름대로 햄버거 고기를 공장 생산품으로 하지 않고 우리가 직접 만드는 Home Made여서 사람들이 좋아했다.

 

그리고 나는 9:00에 있는 수업을 받으러 학교에 갔다가, 12시 점심시간을 돕기 위해서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오후 3시 수업을 위해 학교에 가서 11시 도서관이 문을 닫을 때까지 있다가 돌아온다. 한국 학생들은 졸업 뒤에도 내가 도서관에 늦게까지 있으니까, 공부를 아주 열심히 하고 있다고 말들을 하기도 하는데, 실은 부족한 시간과 영어 실력 때문이었다. 내가 시험 때나 바쁜 때에는 Helper를 몇 시간 쓸 수도 있지만 그렇게 소비할만한 여유가 없어서 그저 몸으로 때워야만 했다. 50Km나 되는 학교를 하루에 두 번씩 오가며 살았다. 토요일은 나에게 제일 편한 날이다 사업이 느슨하기 때문에 집 사람이 혼자서 할 수 있어서, 이날은  종일 도서관에 박혀서 밀린 숙제를 하느라 부담 없이 지내는 하루였다. 토요일 저녁마다 모이는 한인들의 성경모임은 큰 즐거움이었다. 마침 커피집이라 신선한 커피를 내려놓고 마음대로 마시면서 성경공부를 하고 교제하는 즐거움도 힘든 삶에 큰 보람이 되었다. 이 성경 모임이 이년 뒤 개척교회로 발전하게 되는 발판이 되었다.

 

 

아들 대학 진학
아들 혁이는 언어를 잘 극복하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토론토 대학에 입학하였다. 유학생은 국내 학생들보다 3.3배 정도 학비를 더 내야 하는데, 곧 영주권을 받게 된다는 변호사의 편지를 냄으로써 국내 학생들과 같이 학비를 내고 우선은 무리 없이 다니고 있었다.   
김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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