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준(1883~1921) 열사 기념공원
몽골이 오랫동안 사회주의 국가여서 한국과 교류가 없어서 이태준 열사에 대해서 늦게서야 알려지게 되었다. 우리 정부에서는 1980년 광복절에 건국공로 포상을 수여했다. 울란바타르에서 처형됐다는 사실만 알려져 있을 뿐 그의 유해는 현재까지도 찾지 못하고 있다. 몽골 정부는 그의 유해를 찾는 데 현상금까지 걸어 놓고 있다. 2000년 3월 몽골 정부가 2천여 평의 땅을 내놓고 연세대에서 비용을 내서 같은 해 7월 8일 이태준 열사의 기념공원을 마련했다.
이태준 열사는 1883년 경남 함안에서 태어나, 1907년 2월 세브란스 의학과에 입학하여 1911년 6월 세브란스의 2회 졸업생 6명 가운데 한 명이다. 그는 아직 학생이던 1910년 고문 후유증으로 세브란스에 입원한 도산 안창호 선생을 치료하면서 그의 권유로 비밀 학생 조직인 청년학우회에 가입한다. 1911년 10월 중국에서 신해(辛亥) 혁명이 일어나자 조국 광복의 희망을 안고 1912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1914년 울란바타르에 오게 된다. 독립운동의 열망에 들뜬 그에게 망명과 몽골행을 권한 이는 사촌 처남인 독립운동가 김규식 선생으로 알려져 있다. 김규식 선생은 미국으로 유학, 로아노크(Roanoke) 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해 새문안교회의 장로로 있으면서 광복 운동에 참여하다가 중국으로 망명한 독립투사이다. 김규식 선생은 이 열사를 통해 몽골에 독립군을 양성하는 군관학교를 설립할 기반을 마련하고자 했다.
이태준 의사가 몽골에 도착한 그때, 몽골은 성병 등이 넓게 퍼져 국민건강이 큰 위협을 받고 있었는데 성병 퇴치에 심혈을 기울였다. 또 일본과 맞서 싸우는 몽골인들에게도 큰 도움을 주었다. 동의의국(同義醫局)이란 이름의 병원을 세우고 몽골 사람들을 헌신적으로 치료한 그는 몽골에서 신의(神醫)로 추앙을 받았다. 몽골의 마지막 황제인 보그트 칸의 주치의로 섬기기도 했다. 그의 헌신적인 노력에 몽골 정부는 1919년 몽골의 최고 훈장(에르 테닌 오치르)을 수여했다. 그의 병원은 독립운동을 위한 자금의 유통 경로이자 독립운동가들이 쉬어가는 거점이 되었다. 이태준 열사는 독립운동 자금을 조성해 상해 임시정부에 전달하는 한편 헝가리 출신 폭탄 제조 기술자 마자르를 섭외, 항일운동에 쓸 무기를 만들게 하는 등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또 소비에트 정부가 상해에 있는 대한 임시정부에 지원한 50만 루블의 금괴 가운데 8만 루블을 김립과 함께 상해로 운반하고 돌아와서 또 4만 루블의 금괴를 옮기던 중 1921년 체포되어 일군에 의해 이 열사는 그해 38년의 짧은 생을 마감하게 된다. 울란바타르에서 큰 뜻을 펼친 지 7년 만에 일어난 비극이었다.
귀족풍 게르
기념 공원으로 들어가면서 오른쪽으로 평범한 흰 천에 덮힌 게르 한 채가 있다. 대개 관심을 가지지 않고 지나쳐 버린다. 나도 처음 왔을 때 그랬다. 이번 두 번째 와서는 게르 안에 들어가 보니 놀랍게도 귀족풍의 실내 장식이 되어 있었다. 이 게르 안에서도 지켜야 할 규례와 질서가 있었다. 강선교사가 잘 설명하여 주어서 고마웠다. 가운데 두 큰 의자는 부부가 앉는 자리이다. 왼쪽 그림은 칭기즈칸의 화상이며, 오른쪽은 늑대의 그림이다. 몽골 민족은 늑대의 후손이라고 믿고 있다.
김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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