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몽골(Mongolia) 공화국
한국과 중국은 몽골을 몽고(蒙古)라고 부르는데, 이 표현은 오랫동안 몽골족에게 시달려왔던 중국사람들이 몽골족을 업신여기는 뜻에서 우매할 몽(蒙)과 옛 고(古)를 합쳐서 만들어 부르는 이름으로 몽골 사람들은 아주 싫어하므로 몽골이라고 해야 한다.
▼역사
한민족은 단군 설화가 있듯이 몽골 민족은 늑대의 후손이라는 설화를 가지고 있다. 몽골의 직계 조상은 몽골 초원 동부에 살던 더더우위와 몽 올실위의 두 부족의 후예들이, "몽골" 민족으로 '용감하다'라는 뜻이다. 고대로부터 몽골 초원에는 흉노, 돌궐 등 여러 유목 민족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다가 12세기에 이르러 나이만, 메르키트, 케레이트, 타타르, 옹구트,라고 불리는 부족들이 자리 잡고 살면서 다투고 있었다.
이런 몽골 초원을 통일할 한 아기가 1162년 11월 14일 울란바토르에서 동북으로 10시간, 소련 국경선 부근 오논 강이 굽이쳐 흐르는 델리운 다달솜 마을에서 아버지 예수게이와 어머니 호엘툰 사이에서 태어난다. 이 아기가 태어났을 때 한쪽 손은 펴지 않은 채 꽉 쥐고 있어서 펴 보니 작은 핏덩어리를 쥐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들의 신이 용사를 주셨다고 하면서 몽골 초원의 영웅이 될 것이라고 기뻐하면서 이름을 [테무진]이라고 짓는다. 그리고 이 아기가 커서 통일 몽골제국을 이룬 난세의 영웅 칭기즈칸이 된다.
▶ 테무진(temüjin)- "최고의 쇠로 만든 인간"
▶ 칭기즈칸(Chingiz Khan)-"우주의 구주"
1204년 시라게이트 전투를 마지막으로 몽골 초원에서 가장 큰 라이만 부족을 굴복시키므로 몽골은 테무친의 깃발 아래 통일이 된다. 1206년 쿠릴타이(부족장 회의)에서 칭기즈칸은 몽골제국의 첫 칸(황제)으로 선출되어 몽골제국의 첫발을 내디디면서 세계 정복에 나선다. 몽골 초원의 영웅 칭기즈칸은 유럽과 아시아를 정복하여 역사상 유례없는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그리고 칭기즈 칸의 손자이자 몽골 제국의 제5대 칸인 쿠빌라이는 중원을 정복하여 원나라(元朝,1271-1368)를 세우고, 서울은 대도(大都), 지금의 베이징(北京市)으로 했다. 원나라는 몽골족이 세운 나라로, 중국 역사상 첫 이민족이 세운 통일제국이다. 이토록 강대하던 몽골제국도 그 힘이 다하여 97년 만에 명나라를 일으킨 주원장에 의해 멸망하면서 몽골 초원으로 물러난다. 1616년 중국 동북 초원의 여진족(만주족)을 통일한 누루하치가 금 나라를 세운다. 그리고 1636년 명나라와 몽골을 정복하여 청 나라를 세운다. 1675년 청나라의 4대 황제인 강희제는 몽골 민족이 다시 단합하여 일어나지 못하게 하려고 몽골 땅을 내몽골과 외몽골로 나누어 통치하게 된다.
1911년 중국에서 신해혁명이 일어나 청나라가 위기에 빠지자, 외몽골은 그해 12월에 혁명(제1차 혁명)을 일으켜 자치국이 되었다. 러시아에서 10월 혁명이 일어나자 1920년에 국민당이 외몽골의 자치를 철폐시켰으나, 그 해에 반중국, 민족해방을 목표로 몽골 인민당이 결성되었다. 1921년에 담딘 수흐바타르가 혁명군을 조직하여 제2차 혁명을 일으켜 중국으로부터 독립하였다. 그리고 정부 형태를 군주제에서 인민 공화제로 고쳐 국호를 몽골 인민 공화국으로 정하여(1924.11. 26), 세계에서 2번째로 사회주의 국가가 되었다. 1991년 초에 민주화 혁명이 일어났으며, 1992년 2월 13일에 복수 정당제를 원칙으로 하는 헌법을 채택하여 민주공화국이 되었다. 불행하게도 몽골이 중국으로부터 독립을 하면서도 끝내 내몽골을 찾아오지 못한 채 중국의 영토로 남게 되었다. 내몽골은 땅이 본토보다 기름지고, 인구 또한 본토보다 조금 더 많다.
▲몽골의 자연환경
지리적으로 몽골은 일 년 365일 가운데 250일 맑은 날로 세계에서 가장 맑은 나라로 꼽는다. 몽골은 육지로 둘러 싸여 있는 나라로 중앙아시아에 속하는 내륙국으로 1,564,116㎢의 넓은 면적으로, 한반도의 7배, 캐나다 퀘벡 주보다 조금 적다. 북쪽으로는 러시아 국경이며, 남쪽으로는 중국 국경에 닿으며 서쪽으로는 카자흐스탄과는 국경이 연결되어있지는 않지만 아주 가깝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내륙국이지만, 인구는 겨우 320만 명이 조금 넘는다. 몽골은 해발고도는 평균 1,500m의 높은 위도에 있고, 바다에서 수백 킬로미터 떨어져 있어서 시베리아 고기압의 영향으로 인해 여름은 짧고 겨울은 길고 몹시 춥고 건조하다. 가장 추운 1월의 해뜨기 전의 평균 온도는 영하 36~40°C 정도이다. 5 월평균 기온이 10°C이다. 연간 강수량 267mm로 대부분은 5월에서 9월 사이에 내린다. 몽골은 이렇게 척박한 자연환경으로 사람이 살기에 부적합한 곳이다. 또 고비사막에서 발생하는 황사는 중국과 한국에 큰 해를 끼치고 있다.
정치체제 -- 자유 민주 공화제
서울 -- 울란바토르(Ulaanbaatar)
공용어 -- 몽골어
통화 — 투그릭(MNT, 기호 ₮)
▶몽골의 종교 분포
‡ ‡ ‡ ‡ ‡ ‡ ‡ ‡ ‡ ‡ ‡ ‡ ‡ ‡ ‡ ‡ ‡ ‡ ‡ ‡ ‡ ‡ ‡ ‡
▣ 몽골 선교여행 6.14 금 – 21 금, 2019
몽골 선교지 방문은 나의 오랜 바람이었다. 중국에 있는 동안 방문하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 못하다가 이제야 그 뜻을 이루게 되었다. 그러나 나의 몽골 가는 길은 그리 쉽지 않았다. 우선 몽골에서 일하는 분들과 접촉을 할 수가 없었다. website에서 몽골에서 일하는 분들에게 소식을 보내봤으나 전혀 소식을 들을 수가 없었다. 그저 주님께서 길을 열어주시기를 바라면서 한국으로 나갔다. 한국에 있은 지 며칠째, 미국 시카고에서 한 통의 카톡이 왔다. 몽골에서 오랫동안 일하셨던 분의 소식을 보내온 것이다. 연락을 해보니 몽골 신학교를 세우는데 크게 협력하신 분으로 지금은 은퇴하시고 서울 근교에 살고 계셨다. 그분의 아드님이 그곳에서 선교사로 일하고 있었다. 주님께서 이렇게 우리의 길을 열어주셨으니, 여호와 이레였다.
▶ 울란바토르(Ulan Bator) 6.14 금
이번 여행에는 서울에 사는 매제와 함께 가기로 하였다. 몽골 항공요금이 574,872원으로 다른 항공에 비해 좀 쌌다. 인천공항에서 오후 2:20에 떠나 3시간 40분을 날아 몽골 시각 5:00에 울란바토르(Ulaanbaatar) 칭기즈 칸(Chinggis Khan) 공항에 내렸다. 몽골은 중국 같이 한국보다 한 시간 늦게 가고 있었다.
공항에는 신학교 교수로 있는 Ulji 자매가 기다리고 있어서 반가웠다. 한국에서 공부하여 한국말을 잘하여서 편하였다. 자매의 차로 시내로 들어와서 예약된 Zuchi Hotel에 들었다. 신기한 것은 호텔 Check in 할 때 Credit Card를 걸어 놓거나, 중국같이 예약금도 받지 않는다. 신용사회여서 인가!
◐뭉힝하이르(영원한 사랑) 교회 6월 16일 주일
어저께 연락한 대로 안찬영과 강효숙 선교사 부부가 우리를 데리고 몽골교회로 가려고 왔다. 젊은 선교사 부부가 인상이 좋았다. 자기들이 평소에 다니고 있는 몽골 사람들의 교회로 갔다. 처음 우리는 몽골 사람들의 주일 예배에 함께하면서 또 색다른 문화 경험을 하게 되었다. 찬양과 설교가 있었고, 선교에 열정이 있는 부녀의 간증은 모두를 뜨겁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40대 중반의 어머니는 터키에 다녀온 선교 간증을 나누었고, 고등학생인 딸은 중국 위그루에 가서 선교한 경험을 나누었다. 올여름 방학에도 단기 선교를 간다고 기도 요청을 하여서 나는 그 용감한 어린 자매를 격려하고자 작은 선물을 주었다. 광고 시간에 멀리서 온 우리를 환영하는 노래를 불러 주어서 고마웠다. 예배가 끝난 다음에 우리는 잠시 교제를 나누고, 다른 곳에 있는 교회의 오후 주일학교에 참여하려고 떠났다.
◐알드릭 에젠드(예수 경배) 교회
오후에 주일학교가 열리는 알드릭 에젠드(예수 경배) 교회로 갔다. 교회는 시 외곽에 있었다. 마을은 달동네같이 옹기종기 모여 집단촌을 이루고 있었다.
가는 길에 주일 학생들에게 나누어 줄 사탕을 샀다. 40여 명의 주일 학생들을 데리고 선생들이 잘하고 있었다. 찬양과 율동 그리고 오락을 훌륭하게 하고 있었다. 말씀 시간에 삭개오의 내용을 가지고 가르치는 데 재미있게 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활기찬 주일 학생들의 활동을 보면서 이 교회의 희망적인 장래가 보였다. 수고한 선생들에게 아이스크림이라도 사 먹으라고 조그만 선물을 주었다.
주일학교를 마치자 이 교회의 목회자가 사무실에 차를 준비해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함께 교제하는 가운데 나는 경교를 부족의 종교를 삼은 일을 말하면서 아느냐고 했더니 안다면서 나가더니 부족의 상징물들을 여러 개 가지고 왔다. 그 가운데 경교가 사용하던 십자가 문양이 든 마크들도 있었다. 어느 부족의 마크인지는 모르지만 연구할 필요가 있었다. 이런 부족의 상징들을 흙으로 빚어 불에 구워서 만들어 판다고 한다. 흥미 있는 일이었다. 초원의 부족들 가운데 케레이트, 웅구트, 나이만 족은 경교를 그들의 종교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이 세부족은 서로 통혼하면서 인척 관계를 이루었다. 이 부족들의 기독교 색깔은 장편 드라마 칭기즈칸에서 잘 표현하고 있다.
다음 날 우리는 먹을 것을 좀 사려고 몽골 마트에 갔다. 놀라운 것은 한국상품이 가득하여 반가웠다. 컵라면과 김치 통조림을 처음 사 보았다.
저녁은 일반 식당에 가서 칼로 썬 수제비(보실래슐)를 먹었다. 맛이 괜찮았는데, 채소는 보이지 않고, 소고기가 많이 있는데 질겨서 먹기가 그랬다. 역시 고기를 주로 먹는 몽골 식단의 일면을 볼 수 있었다.
▲학교 방문 6. 17 월 가끔 비
오늘 우리는 선교사가 운영하는 guest house로 옮겼다. 삼일 호텔비는 420,000 투그릭(약 20만 원)이다. 게스트하우스는 하루 $20이다. 운영하는 선교사는 한국에서 프랜차이즈로 운영되는 “본죽”을 세 곳이나 운영하고 있었다. 그리고 3-4층을 게스트하우스를 만들고 있어서 아직 마무리가 되지 않았는데 우리를 머물도록 하여 주었다. 커피와 케이크 등도 있고 한국 음식을 좋아하는 몽골 젊은이들이 즐겨 찾는 곳이 되고 있었다. 이 사업체로 거주 비자를 얻어서 선교를 하고 있었다.
오늘 안 선교사가 버스를 타고 왔다. 5부제로 자기 차가 오늘은 쉬는 날이란다. 몽골 정부는 모든 개인차가 우버 택시 같이 손님을 태울 수 있도록 해서 길에 나가 손만 들면 쉽게 탈 수 있었다. 오후에 두 학교를 방문하였다. 먼저 우리는 한국 선교사들이 세운 Union Theological Seminary를 찾았다. 이 나라의 유일한 신학대학원으로 기독교 목회자들을 길러내고 있었다. 그러나 몽골 정부에서는 이 기독교 신 학교를 교육기관으로 허가해 주지 않고 있었다. 도서실에는 책이 너무 없는데, 몽골에 기독교 사적보다 한국어 영어 서적이 더 많았다. 그도 그럴 것이 몽골에는 기독교 서적 자체가 별로 없고, 번역도 할 형편도 되지 않았다. 그리고 MK School에 들렀다. 유치원부터 고등학교 과정을 운영하고 있었다. 이곳 정부의 허가를 받은 정규학교이다. 교사들은 자격을 가진 한국 교사들이 가르치고 있었다. 이곳 교육위원회에서 학교 건물이 너무 낡았다고 새로운 교사를 짓지 않으면 학교 허가를 취소하겠다는 경고를 여러 해 받고 있다고 어려운 사정을 말한다. 매제와 나는 건축을 위하여 얼마의 헌금을 하였다. 2023년 6월 2차 방문에 다시 찾아가 보니 새 건물을 지어서 보기 좋았다. 학교 신축을 위해서 기부한 개인 이름들이 가득 실려 있었다. 어느 기관이 큰 자금을 지원해서 지은 것이 아니라 개인들이 십시일반으로 조금씩 모아진 것의 열매였다.
▶십시일반(十匙一飯)=밥 열 술이 한 그릇 된다는 뜻, 여러 사람이 조금씩 힘을 합하면 어려운 일을 돕기 쉬워진다는 뜻이다.
▲Partizan 교회 방문 6월 19일 수 맑음
오늘은 안 선교사 부부와 울란바토르를 벗어나 60Km나 떨어진 곳에 있는 Partizan 마을에 있는 교회를 방문하였다. 우리와 며칠을 함께하는 안 선교사의 사모님은 한국인이 세운 대학에서 한국어 선생을 하고 있어서 배우자의 비자로 선교 일을 하고 있었다. 오늘 우리가 찾아가는 교회에 주일학교 학생 7-80여 명이 있다고 해서 선물로 아이들 양말을 사려고 도매 시장에 갔다. 몽골 제품은 없고 모두가 중국산이다. 시장을 돌아보니 옷들과 생필품들이 거의 다 중국산이었다.
사역하는 자매가 마침 시 외곽에 와 있어서 그 자매를 만나 식당에 가서 음식을 주문하는 데 우리는 채소가 있는 것을 주문하는데, 몸이 좀 뚱뚱한 자매는 고기 중심의 음식을 주문하였다. 영어를 좀 하는 자매가 되어서 우리의 교제는 통역이 없이 교제할 수 있었다. 그 자매에게 이름을 물으니, ‘자기’라고 대답한다. 나는 좀 놀라서 한국 이름이냐, 몽골 이름이냐 물으니, 몽골 이름이란다. 그래서 몽골 이름을 써보라고 하자, Javzmaa Molom Jaagii라고 썼다. 이름이 긴데 끝에 이름의 몽골 발음이 조금 긴 발음으로 “자아기이” 지만 우리에게는 그저 ‘자기’라고 들린다. 그때부터 '자기'라고 불렀다. 길 양옆으로 낮은 산야들로 이루어진 구릉 지대에는 가축 떼들이 자주 보이며 울창한 나무숲들도 있었다. 60k를 달려서 Partizan 마을에 도착하였다. 넓은 들판에 옹기종기 마을들이 모여 있고, 농작물을 짓는 밭은 거의 보기 어렵고 오로지 가축 떼들만 많이 보인다.
이 마을에 교회를 개척한 한국 선교사는 수년간 일하다가 조그마한 사고로 떠나고 빈 교회당을 지키려고 이 마을 출신의 ‘자기’ 자매가 주일학교를 중심으로 사역을 하고 있다. 넓은 터에 지은 예배당은 아담하였다. 이 마을은 기독교에 대해서 비호감 적이어서 10여 명의 교인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이 교회를 지키고 있는 자기 자매는, 올해 33세로 사범대학에서 몽골 어문학과 영어를 전공하였다. 그리고 한국 선교사가 세운 Union 신학 대학원에서 석사과정(M. Div.)을 마쳤다. 지금 이 자매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어서, 사범학교를 나왔으니, 교사 일을 하면서 사역을 하면 좋지 않으냐고 물었더니, 자기도 그렇게 생각했다고 한다. 몽골은 사범학교를 나와도 스스로 취직을 해야 한단다. 취업을 하려고 교육위원회에 원서를 냈는데, 결과는 교사로 취직하는 조건으로 뇌물을 요구해서 자기 신앙 양심상 그렇게 할 수 없어서 안 하고 있다고 한다. 딱한 현실이다. 그리고 한국에서 자립하도록 도우려고 빵 기계를 보내 주었는데, 만들어 팔면 생활에 도움이 되는데, 촌 간부가 허가를 받아서 생산 판매하라고 하여서 허가를 받으려고 하자 또 뇌물을 요구해서 신앙 양심상 할 수 없고, 한번 주고 나면 앞으로 어떤 명목으로 또 돈을 요구할지 모르기 때문이란다. 이 사회도 얼마나 부패해 있는가를 볼 수 있는 한 단면이었다. 언니 부부는 이 마을 학교에서 교사로 일을 하고 있는데, 아버지는 기독교 신앙을 반대하면서 너는 배울 만큼 배웠는데, 왜 이리 사느냐고 일절 도와주지 않는다고 한다. 아버지는 가축을 많이 키우는 넉넉한 가정이라고 한다. 한국의 한 교회에서 매월 10만 원을 지원하고 있다는 데, 혼자 겨우 풀칠이나 할 정도여서, 주간 중에는 먼 길을 가서 알바를 하고 있었다. 나는 교회를 개척할 때 10년을 참고 기다리며 산 경험을 나누면서 지금은 어렵더라도 기도하면서 참고 기다리라고 격려하였다. 앞으로 하게 될 주일학교와 전도집회를 위하여 의논했다.
▲어린이 복음 전도단 (Children Evangelism Team) 6월 21 금 맑음
이번 몽골 선교 여행은 아는 이 없는 그리고 아무 계획도 없이 그저 돌아보려고 오는 길에 귀인을 만나서 지난 한 주간 안내를 받으며, 여러 사람을 만나 교제하면서 몽골 선교의 현황을 알게 된 것은 큰 축복이었다. 이번 선교 여행으로 성령은 내 마음에 몽골 어린이들에 대한 관심을 가지도록 해 주셨다. 적은 인구이기는 해도 아이들은 가는 곳마다 많다. 나는 한국에서 주일학교를 시작해서 교회를 두 곳이나 개척한 적이 있다. 1950-70년대 한국에도 가는 곳마다 아이들은 많았다. 그때 우리는 화판을 가지고 나무 그늘 밑에서 아이들을 모아놓고 어린이 찬송을 가르치면서 주일학교를 했다. 그 아이들을 보면서 이들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마음이 일어났다. 몽골에 있는 동안 세 곳의 교회를 방문하였는데 두 곳은 어린이들이 7~80명이고 또 한 곳은 100여 명이 모였다. 특별 집회를 하게 되면 더 많이 온다고 했다. Jagi 자매를 통해서 어린이 주일학교 교사 세 명으로 주일학교 전도팀을 만들었다. 도시보다는 소외된 지역의 개척교회나, 가정교회를 도우려는 마음에서이다. 내년에 오면 5-6곳에 3일 정도씩 어린이 전도 복음 집회를 할 수 있도록 준비하도록 했다. 이런 일은 몽골교회가 마땅히 할 일이지만, 어려운 형편들로 먼 곳까지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 수백 명의 어린이가 사용할 교재와 하루 한 번의 간식과 수고하는 선생들을 위한 모든 비용이 기도의 제목이 되었다.
▲마을의 우물
몽골은 물 사정이 좋지 않은 편이다. 상수도 시설이 없는 도시 외곽은 우물을 파서 지하수를 사용하는데, 이 마을엔 우물 세 개가 있는 데, 놀라운 일은 주민 모두가 사용할 수 있는 공동 수도나 우물이 없다. 개인이나 지방정부가 우물을 파서 물을 팔고 있었다. 하루에 세 번 정해진 시간에만 물을 살 수 있는데, 개인 우물은 1 Lt에 2 투그릭(1¢미만)이며, 지방정부에서 판 우물물은 1투그릭이었다. 그리고 이 물은 생수로는 마실 수 없고, 반드시 끓여서 마셔야만 안전하다고 한다. 가게에서 파는 생수 20 Lt 한 통은 5000 투그릭(₩2500, U$ 1.8)이었다.
김제화/ jewhakim@daum.net
'선교 여행기 > 몽골'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몽골 선교 여행(2) 6. 2023 (0) | 2023.08.24 |
---|---|
울란바토르(Ulaanbaatar) (0) | 2023.08.23 |
몽골의 경교 선교 (0) | 2023.08.23 |
독립투사 이태준 열사 (0) | 2023.08.23 |
테를지 국립 공원 (0) | 2023.08.20 |